<바람이 전해준 말>
그 하얗고 뜨거운 몸을 두 손으로 감싸고
사랑은 이렇게 하는 것이라는 듯
사랑은 이렇게 달콤하다는 듯
붉은 립스틱을 찍던 사람이 있었겠지
채웠던 단물이 다 비워진 다음엔
이내 버려졌을,
버려져 쓰레기가 된 종이컵 하나
담장 아래 땅에 반쯤은 묻혀 있다
한때는 저도 나무였던지라
낡은 제 몸 가득 흙을 담고
한 포기 풀을 안고 있다
버려질 때 구겨진 상처가 먼저 헐거워져
그 틈으로 실뿌리들을 내밀어 젖 먹이고 있겠다
풀이 시들 때까지나 종이컵의 이름으로 남아 있을지
빳빳했던 성깔도 물기에 젖은 채
간신히 제 형상을 보듬고 있어도
풀에 맺힌 코딱지만한 꽃 몇 송이 받쳐 들고
소멸이 기꺼운 듯 표정이 부드럽다
어쩌면 저를 버린 사람에 대한
뜨거웠던 입맞춤의 기억이
스스로를 거듭 고쳐 재활용하는지도 모를 일이지
1회용이라 부르는
아주 기나긴 생이 때론 저렇게는 있다
- 복효근, <어떤 종이컵에 대한 관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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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절 연휴가 시작됐습니다. 가뜩이나 고달프고 힘겨운 삶에 더해 전 인류에게 불어닥친 코로나 광풍으로 인해 모두가 지난 2년간 답답하고 힘겨운 삶을 살아온지라 지칠대로 지친 몸과 마음을 이끌고 저마다 고향을 찾아갑니다. 이마저도 수없는 갈등이 있었겠지요. 코로나 확진자 수가 연일 최고치를 찍고 있는데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럼에도 고향을 찾는 이들의 발길을 막을 순 없겠지요. 사람들에게 있어 고향은 근원적인 힘을 얻는 곳이니 말입니다. 김준태 시인은 ‘고향’이란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지요. “고향에선/ 눈 감고 뛰어도/ 자빠지거나 넘어질 땐/ 흙과 풀이 안아준다.” 부디 모두 이번 설명절을 통해 힘과 위로를 얻기를 바랍니다.
명절이 되면 곤혹스러운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다음 세대들이지요. 가족들이 모여 서로의 안부를 묻게 되는데, 대개 학생들에게는 공부에 대해, 청년들에게는 취업과 결혼에 대해 물어보기 때문이지요. 끝없는 경쟁이라는 정글에 내몰린 아이들은 누군가를 밟고 올라가야만 소위 성공의 자리에 앉을 수 있고, 안정된 직장을 원하지만 취업의 문은 좁기만 합니다. 암울하고 불확실한 미래는 축복의 문이 되어야 할 결혼을 아예 생각지도 못하게 합니다. 이런 암울한 현실은 이들이 만들어놓은 것이 아닙니다. 기성세대가 물려준 참으로 고약한 현실입니다. 기성세대가 그간 흘린 구슬땀을 폄하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성세대도 그들 나름대로 척박한 생을 일구어오느라 온갖 고생을 다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개발과 풍요를 쫓느라 뒤틀리고 왜곡된 것들이 참 많습니다. 예전엔 노력하면 그만큼의 결실을 맺었지만, 지금은 아무리 노력해도 꿈을 이루기 어려운 현실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의 자살률을 보이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현실이 어떤지를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미래세대에게 참으로 미안합니다.
이번 주에 복효근 시인의 시를 만났습니다. 누군가 먹고 버려진 1회용 종이컵에 대한 단상입니다. 이 종이컵이 현재를 살아가는 다음 세대들과 오버랩되었습니다. 비인간적인 노동현실에 항거하며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쳤던 전태일의 외침이 이 종이컵을 통해 다시 들려졌습니다.
"우리는 1회용이 아니다!"
인간의 생명이 소모품처럼 여겨지는 현실에서 다음세대는 어떠한 꿈도 꿀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에는 반전이 있습니다. 반쯤 땅 속에 묻혀 누구하나 거들떠보지 않는 쓰레기 종이컵은 본래 나무인지라 그 척박한 현실에서도 작은 풀꽃들을 받쳐들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쓰레기로 여겨지는 것이 작은 생명의 든든한 받침이 되는 이 기막힌 반전.. 생명이 재활용되는 순간입니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 버려진 1회용 종이컵은 스스로 그렇게 희망이 된 것입니다.
이번주 졸업예배를 드리면서 생각이 참 많아졌습니다. 어려운 현실 속에서 새출발하는 아이들을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비록 버려진 1회용 종이컵 같은 현실일지라도 그 안에서 스스로 생명을 받쳐주는 든든한 희망으로 서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응원합니다. 우리가 못 이룬 좋은 세상을 이들이 꼭 이루기를, 기성세대도 그들의 꿈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기를 빕니다. <2022.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