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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한 유대인 바울
사도행전 21:37-40
37 ○바울을 데리고 영내로 들어가려 할 그 때에 바울이 천부장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냐 이르되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
38 ○그러면 네가 이전에 소요를 일으켜 자객 사천 명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
39 ○바울이 이르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하니
40 ○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매우 조용히 한 후에 히브리 말로 말하니라
행 21:37-40 / [바울의 해명] 병영문 앞에 이르렀을 때 바울이 파견대장을 보고 `부탁을 드려도 좋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그 말에 파견대장은 놀라서 `헬라 말을 할 줄 알다니, 그러면 바로 당신이 수년 전에 반란을 일으키고 자객 4천 명과 함께 광야로 도망친 그 애굽 사람이오?' 하고 반문하였다. 39) 바울이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꽤 큰 도시인 저 유명한 길리기아의 다소 태생입니다. 저 사람들에게 말을 좀 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40) 파견대장이 허락하자 바울은 층계 위에 서서 사람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손짓을 하였다. 그들이 곧 잠잠해지자 바울은 히브리 말로 다음과 같이 연설하였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바울은 천부장에게 부탁하여 유대 군중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습니다.
바울의 요청(37-38) 바울이 영내로 진입하려는 순간 그는 천부장에게 할 말이 있으니 들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바울은 자기를 죽이려 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때에 그는 헬라어로 말하였으며, 천부장은 그의 유창한 헬라어 실력에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천부장은 바울을 보고 이전에 소요를 일으켰던 애굽의 무식한 반란주동자가 다시 돌아온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이전에 애굽의 거짓 선지자가 추종자들을 이끌고 와서 예루살렘 성벽을 무너뜨리겠다며 소요를 일으켰다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천부장은 바울이 그 악명 높은 애굽의 반란주동자가 아닌 것을 확인하기 위해 “네가 이전에... 애굽인이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천부장의 허락(39-40) 바울은 천부장의 물음에 대하여 즉각 자신의 신분을 밝혔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혈통으로는 유대인이며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라는 것을 밝혔습니다. 다소는 전성기에 인구가 50만에 이를 정도로 큰 도시였으며, 소아시아 지역에 위치했지만 로마의 행정구역에 속한 도시였습니다. 따라서 다소의 시민권자들은 자유민으로서 특권을 누렸습니다. 바울이 이처럼 자신의 신분을 밝힌 것은 자랑하기 위함도, 천부장의 환심을 사기 위함도 아니었고, 오직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고자 함이었습니다. 바울은 자기 동족이 주님께로 돌아오기만 한다면 자신이 저주를 받아도 좋다고 생각할 정도로 자기 동족을 구원하기를 갈망하였습니다(롬 9:3). 바울은 유대 군중들에게 심하게 맞아서 말할 상태가 아니었지만, 자기 동족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천부장에게 부탁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천부장은 바울에게 연설할 기회를 주었고, 바울은 성난 유대인들을 진정시킨 후 히브리 말로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고 말한 그대로 복음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치려 하였습니다.
적 용 : 바울은 한 때 복음을 훼방했던 자였으나 이제는 복음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복음전도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을 이렇게 극적으로 변화시키신 분은 바로 살아계신 예수님이십니다. 당신은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얼마나 느끼며 살아가십니까?
사도행전 후반에 나오는 바울의 다섯 번의 변호 연설 중 첫 번째입니다. 이 변호는 22장으로 이어집니다. 초기 선동자는 아니겠지만 사방에서 몰려온 많은 사람들은 바울에 대하여 보거나 듣지를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한 곳에 모이게 하셨고 천부장이 질서를 유지하는 가운데서 말씀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아우성치던 군중의 침묵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하나님은 바울과 동행하십니다.
< 설 교 >
바울의 변론, 믿기 전의 행적
사도행전 21:37-22:5
1. 바울의 변론 요청
본문은 바울이 로마 군인들에게 체포당한 직후에 행한 첫 번째 변론입니다. 바울은 우선 천부장에게 발언의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바울을 데리고 영내로 들어가려 할 그 때에 바울이 천부장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냐?”(21:37)
그런데 바울의 말을 들은 천부장은 짐짓 놀랬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유창한 헬라어를 썼기 때문입니다. “이르되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37) 헬라어는 당시 지중해 세계의 공용어요 문화어였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영어쯤 되는 말입니다. 천부장이 놀란 것은 바울을 무식한 범죄자로 알았다가 헬라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천부장은 계속 질문합니다. “그러면 네가 이전에 소요를 일으켜 자객 사천 명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38) 천부장의 질문은 약간 엉뚱해 보입니다. 소요는 무슨 소요이고, 자객, 애굽인은 또 무슨 소리입니까? 천부장은 지금 당시로부터 약 3년 전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가 요세프스의 기록에 보면 예루살렘에서 이런 사건이 있었습니다. 주후 54년 경 자칭 선지자였던 한 애굽인 사이비 교주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감람산에 약 3만 명에 이르는 유대인을 모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명령만 하면 예루살렘 성벽은 무너질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렇게 되면 성안으로 쳐들어가서 로마군을 몰아내라고 선동했습니다. 그러나 그를 따르던 무리는 오히려 총독 벨릭스의 군대에 의해 4백 명이 죽고 2백 명이 포로가 되자 흩어져 도망쳤습니다. 천부장은 바울이 바로 그 애굽인 교주가 아니냐고 묻고 있는 겁니다.
바울이 답변합니다. “바울이 이르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하니,”(39) 애굽인이라니, 광야로 가다니, 무슨 소리요? 나는 길리기아 지역의 다소 출신이오. 다소는 당시 소아시아의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바울은 무식한 자가 아닙니다. 교양 있고 양식 있는 문화도시 출신의 시민입니다. 바울은 이제 당당하게 요청합니다. 내가 이 백성들에게 말할 기회를 좀 주시오! 천부장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바울에게 변명을 허락했습니다.
“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매우 조용히 한 후에 히브리 말로 말하니라.(21:40) 부형들아 내가 지금 여러분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하더라.”(22:1) 바울은 층대 위에서 군중들을 향해 발언합니다. 층대에서 말하게 된 것은, 바울이 성전 이방인의 뜰에서 안토니아 요새의 병영으로 올라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안토니아 요새는 성전 서북쪽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계단이 높기 때문에 군중들을 바라보는 강단 역할을 했습니다. 바울은 군중들에게 ‘부형들’이란 호칭을 사용합니다. 유대 사회의 원로들도 있었기 때문에 최대한 예의를 갖췄습니다.
바울은 히브리 말로 변론을 했습니다. 바울이 굳이 히브리말을 사용한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청중들은 자신들이 유대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 상당 수는 히브리말을 모르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세계 각처에 흩어져 살면서 고유 언어를 알지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조차도 히브리어 성경을 알지 못하는 유대인도 많았습니다. 그런 유대인들이 잘난 척하고 바울을 반유대적이라고 몰아세우니까, 바울은 오히려 히브리어로 받아쳤습니다. ‘너희가 유대인이냐? 나는 유대인 중에 유대인이다!’ 바로 그런 감정의 표현입니다. 이런 논조는 바울 서신에도 가끔 나타납니다.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고후 11:22)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빌 3:4-6) 예수 믿는 사람들은 무식쟁이들이 아닙니다. 상식이 없고, 배운 것이 없어서 예수 믿는 게 아닙니다. 세상에서 조금 배웠다고, 기독교를 무식쟁이 종교로 예단하지 마십시오. 천부장은 바울이 헬라어를 사용한다고 놀랐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이 히브리어를 사용하니까 놀랬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남보다 못나서, 혹은 뭔가 모자라서 하나님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의 첫걸음입니다.
2. 바울의 개종 이전 신앙
바울은 자신이 중죄인이 아님을 얘기하려고 변론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발언 내용을 보면 변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간증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을 믿게 된 과정을 차분히 설명합니다. 바울은 우선 자신이 과거에 유대교도 였음을 얘기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종교성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테네 시민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행 17:22) 당신들은 참으로 종교성이 많습니다! 종교성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인간은 영혼을 가진 존재입니다. 영원을 사모하고, 절대자를 믿고, 의지하고, 경배합니다. 원숭이나 침팬지가 아무리 머리가 좋다고 신앙 가진 것을 보셨습니까? 오랑우탄이 뭔가 향해 빌고 절하는 것 봤어요? 오직 인간만이 영적 존재이고 종교성이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 종교, 유대교에 대한 열심이 각별했습니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행 22:2-3)
바울은 누가 보든지 자랑할 만한 것이 꽤 많았습니다.
❶ 그의 출생과 성장 배경입니다. 그는 문화 도시 다소 출신입니다. 요즘으로 말한다면 뉴욕이나, 파리, 런던 쯤 되는 도시입니다. 도시 출신답게 바울은 문학, 철학, 예술, 스포츠 등의 각 분야에 출중하고 교양이 많았습니다.
❷ 종교적인 특별 교육입니다. 바울은 가말리엘의 제자입니다. 가말리엘은 랍비의 계보에서 탁월한 인물입니다. 그는 역사상 7인의 라반(요20:16) 중에 한 사람입니다. 라반은 랍비 중에서도 가장 존경받는 랍비의 호칭입니다. 가말리엘의 부친은 라반 시므온이고, 조부는 유명한 라반 힐렐입니다. 힐렐은 샴마이와 더불어 바리새 종파의 양대 산맥입니다. 샴마이는 강경 보수파이고 힐렐은 온건파입니다. 바울이 가말리엘의 제자라는 사실은 그가 율법에 있어서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오늘 교회 안에는 개종한 분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 중에는 과거 다른 종교에 탁월한 지식이 있었던 분들도 많습니다. 우리가 어떤 종교를 가졌다는 것 자체를 나쁘게 볼 필요는 없습니다. 종교를 가졌거나, 종교에 열심 내는 사람은 그만큼 종교성이 강하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믿으려면 화끈하게 믿어야 합니다. 다만 내가 가진 신앙이 정말 진리인가 하는 데 대해서는 겸손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산신령, 무당, 일월성신, 고목나무 귀신, 부뚜막 귀신, 온갖 귀신들을 믿는 사람조차도 자신이 믿는 것이 가장 옳다는 생각을 합니다.
오늘 여기 계신 분들은 다 과거에 어떤 종류든지 신앙이 있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기 전에 무신론자였습니다. 대충 아무 것이나 믿어도 좋고 안 믿어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현재 내가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과거에 어떤 신앙, 어떤 종교를 가졌었든지 상관없습니다. 과거를 묻지 마세요! 중요한 것은 현재입니다. 베뢰아 교인들처럼 이것이 진리인가 깊이 생각하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유대인으로서 가졌던 우월감
바울이 유대교에 열성이 있었던 것은 자타가 공인합니다. 유대인들은 종교적 우월감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기독교를 박해했던 동기도 바로 유대교에 대한 자부심과 우월감 때문입니다. 바울은 과거에 자신이 기독교에 대한 박해자였음을 고백합니다.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그들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행 22:4-5) 바울이 기독교를 박해한 것은 기독교를 유대교에 대한 도전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유대교인들은 지구상의 어떤 종교보다 우월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생활 방식은 모든 것이 儀典的이고 종교적입니다. 의전적이라는 말은 종교 의식을 담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루 세 끼 먹는 식생활이 儀典的입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음식은, 채소, 육류, 우유, 계란, 양념이나 향료 하나까지 다, 먹어도 되는 것과, 먹어서는 안 되는 음식으로 구별합니다.
이렇게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가리는 작업을 새로운 음식이 생겨날 때마다 랍비가 다 합니다. 조리 방식이나 그릇을 사용하는 것도 정한 규칙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유를 담았던 그릇에 고기나 계란을 요리할 수 없습니다. 주거 생활도 儀典的입니다. 대문과 집안의 모든 문에 메주사란 성구 상자를 매달아 놓고 출입할 때마다 입을 맞춥니다. 의복과 차림새도 의전적입니다. 모든 남자는 바지를 입고, 모든 여자는 치마를 입어야 합니다. 남자들의 허리춤에는 반드시 율법에 명시한 옷단의 술을 달고 다닙니다. 머리털이나 수염을 밀지 않고 기릅니다. 초막절, 유월절 절기를 지키면서 과거 출애굽의 역사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613개 조항의 율법 조문들 중에 상당 수는 농사나 추수와 관련된 계명입니다. 안식일과 같은 휴식의 방법도 儀典的입니다. 안식일에 따르는 계명이 30가지가 넘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생활방식은 너무나 철저합니다. 그들의 생활방식이 얼마나 철저한가 하는 것은 이런 예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 여러 해 전입니다. 이스라엘 정부는 아프리카 이디오피아 어느 지역에 살던 사람들을 이스라엘로 데려오기 위해 군수송기를 여러 차례 보냈습니다. 이들을 본국으로 이주시킨 것은 이들을 유대인으로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피부는 검은 색입니다. 언어도 다릅니다. 그런데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들이 안식일을 지키고, 토라를 외웁니다.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가려 먹는 전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 아프리카로 건너갔는지 알 수 없습니다. 거기서 동떨어진 채로 살았습니다. 10년 20년이 아닙니다. 100년 200년이 아닙니다. 무려 수 천 년이나 떨어져 살았습니다. 우리 같으면 삼국시대 초기에 헤어진 사람들을 동족이라고 데려 오겠습니까? 생활은 얼마나 변했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이들의 생활 방식은 별로 변한 게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정부는 과거 소련과 동구권이 몰락할 때에도 많은 유대인들을 본국에 이주시켰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들이 언어가 다르고 피부가 다른 데도 불구하고 동일한 생활 방식, 儀典的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의 종교적 생활방식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렇게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 자녀로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들이 하나님 자녀라고 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혈통적 자녀를 의미합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태어난 것 자체가 선민이 된 것이요, 하나님 자녀가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에게는 구원 개념이 없습니다. 유대인으로 태어나는 것이 곧 구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구원받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 받은 하나님 자녀이기 때문에 율법을 지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 자체를 통해서도 상당한 우월감을 갖고 있습니다. 율법 지키는 것 자체를 세상 다른 종족들과 다른 선민의 표식으로 생각합니다. 요즘 가진 사람들의 우월감이 뭡니까? 남보다 돈 많은 사람, 남보다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 남보다 유명한 사람. 이런 사람들일수록 내가 남보다 다르다는 표식을 보여주고 싶어 합니다. “나는 너희와 달라!” 그 표식이 뭡니까? 비싼 집, 고급 승용차, 명품 사용, 뭐 이런 것들입니다. 이들은 또한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어가려고 애씁니다. 유대 사회는 양상만 다를 뿐 똑 같습니다. 유대인의 모든 삶의 주제어는 세상 모든 종족들과 자신들은 “다르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너희와 달라! 유대인의 생활방식은 곧 선민의식의 표현입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종교생활은 긍정적인 면도 있고 부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긍정적인 면은 신앙이 항상 삶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삶 자체가 종교 의식입니다. 먹고, 입고, 일하고, 거주하고, 즐기고, 휴식하는 모든 삶의 순간마다 신앙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자녀 교육도, 비즈니스도, 농사일도, 다 종교적입니다. 자녀의 신앙 교육도 삶을 통해서 자동적으로 전수됩니다. 특별히 신앙교육 시간이 없어도 매 순간이 종교 교육입니다. 반면에 부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신앙이 의식이나 형식주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의식을 행하는 것을 신앙으로 착각합니다. 마음에는 없으면서 의식만 거행하는 껍데기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잘못 변질된 의식을 사수하기 위해 더 중요한 신앙의 내용을 배척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약대는 삼키고 하루살이는 걸러냅니다.(마23:24) 가장 대표적인 것이 성전의 본체인 예수님은 배척하여 죽이고 무너질 예루살렘 성전은 사수하려고 열심을 낸 것입니다.
이들이 기독교를 거부한 것은 당연합니다. 자기들은 이미 하나님 자녀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구원받으라고 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3:2, 4:17) 도대체 뭘 회개하란 말인가? 도대체 선민 이스라엘,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무슨 구원을 받으란 말인가? 다른 종교라면 몰라도 유대교인들에게 이런 말은 모욕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예수님과 유대인 사이에 이런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눅3:8)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8:33-36)
여러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혈통이 선민을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의 자손으로 태어났다고 저절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부잣집에 태어났다고 천국 자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높은 사람 자녀로 태어났다고, 혹은 유명한 집안의 사람이라고 하나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님이나 장로님의 자녀라고 저절로 하나님 자녀가 되지는 않습니다. 세상에서 우월하다고, 하나님 앞에서도 우월한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더군다나 명품 종교의 탈을 썼다고 하나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큰 교회, 유명한 교회에 속했다고 저절로 구원 받는 것 아닙니다. 내면의 회개도 없이, 종교 의식이나 모양새를 갖췄다고 하나님 자녀가 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자신을 바라보는 자,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 깨닫는자,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 깨닫는 자만이, 참다운 회개를 할 수 있습니다. 잘못된 종교적 우월감을 버리세요. 아집을 버리세요. 제대로 회개하고 하나님 자녀 된 사람들을 괜히 박해하지 마세요. 겸손하세요. 그래야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참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자각하는 자, 내가 얼마나 하나님의 진노 앞에 놓여 있는지를 깨닫는자, 내가 멸망의 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자임을 깨닫는 자, 내게 구원이 얼마나 절실한 가를 인정하는 자만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하나님이 베푸시는 용서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9)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17) 하나님은 예수님을 구주로 보내셨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예수님을 영접하여 하나님 자녀가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