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공군 제180사단은 국공내전 당시 꽤 이름있는 정예부대로 정평이 나있었음. 다만 한국전쟁 때는 1951년과 1953년에 궤멸에 가까운 매우 끔찍한 손실을 입었고, 이는 각각 한국군 6사단과 5사단에 의해 발생함. 공교롭게도 이들은 180사단의 궤멸당시 모두 장도영 장군이 지휘했었음.
180사단의 전신은 산서성의 지방무장부대들을 모은 것으로부터 시작하는데, 47년에 24여단으로 재편되었다가 49년 2월 18병단 60군 180사단으로 개편되었음.
내전 시기 이들은 공성전에 강한 부대로 소문나있었고, 사천에서 국민당군을 소탕하는 작전에서도 꽤 활약한 부대였었다고 함. 당연히 한국전쟁에도 이들은 참전하였음. 이들은 51년 3월 17일 압록강을 건너왔는데, 좀 병크가 터져서 얘들이 심각한 타격을 받음.
원래 철수해야할 180사단이 연락도 두절되고, 상급부대인 60군도 얘들 행방을 몰라서 팽덕회가 전전긍긍했음. 그도 그럴 것이, 제3병단의 통신부대가 미 공군의 공습에 노출되어서 통신장비 다수를 잃어버렸고, 그 결과 5월 24일부터 26일 사이에 모든 부대와 연결이 끊겨버렸음.
이 때문에 중공군 전선부대들은 전선의 상황을 파악할 수가 없었고, 그 결과는 끔찍한 손실로 돌아옴. 바로 180사단의 소멸에 가까운 타격이라는 형태로.
당시 180사단의 좌익에는 제15군이, 우익에는 제63군이 있었는데 51년 5월 22일에 이미 전선에서 패배하여 모두 철수해버렸고, 180사단만 화천 일대에 딸랑 남겨져 버렸음. 아예 아군이 없던건 아님.
문제는 그 아군이 미군 제10군단에게 아작이 난 제12군, 15군, 27군 예하 패잔병들 뿐이라서 문제였음. 게다가 63군은 한국군 6사단에게 용문산에서 치명타를 얻어맞고 쓰러진지라 완전히 텅텅 비어있었다고.
일단 상부와 연결된 180사단은 새로운 명령을 받았는데, 63군의 패배로 인하여 제3병단의 우익에 큰 공백이 생긴 것을 막으라는 것이었음. 즉 한곡-정병산에서 미 제9군단을 저지하라는 명령이었는데 문제는 완전히 포위당함.
그래서 180사단의 운명은 51년 5월 25일, 파로호에서 사실상 끝장남. 사단 예하의 연대장 및 대대장, 심지어 정치장교들까지 거의 다 몰살당했다고 함. 한국군 6사단의 강습에 밀려서 병력이 와해당하자, 이걸 수습하려다가 죽었다는 모양.
중국 측 기록을 보면 국공내전 2년 간 사망했던 간부의 숫자보다 파로호에서 한국군의 공세로 목숨을 잃은 간부의 숫자가 더 많다고까지 기록함.
180사단장이 직접 작성한 피해 보고서에 의하면 파로호 전투에서 상실한 병력은 11,000명 중 장교 654명과 사병 7,644명이며, 장교 중 9명은 연대급 지휘관, 49명은 대대급 지휘관, 201명은 중대급 지휘관이라고 보고했음.
즉 연대장 및 연대정치위원, 부연대장 등 다수의 지휘관을 모두 잃어버린 것임.
실제로 180사단 예하의 538연대, 539연대, 540연대는 거의 모든 지휘관을 잃었고, 심지어 정치장교들까지도 쓸려나가면서 완전히 그 기능을 잃어버림.
540연대의 연대장은 독전을 하다가 부하들에게 살해당했고, 일부 장교들은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항복하기까지 하는 등 지리멸렬한 모습을 보임.
그나마 북한강 나루터를 통해 철수하려고 했으나, 이곳마저도 한국군 6사단이 포위하고 있어서 강물을 수영쳐서 넘어가려다가 600명이 사망하는 등 피해를 입음.
일부 부대들이 저항을 시도하긴 했는데, 탄약이 이미 다 떨어져서 돌멩이랑 총검으로 대응하다가 몰살당하기도 했고, 보급도 완전히 끊겨서 굶주림 끝에 독초 줏어먹고 사망하던 사례까지 보고되었음.
다음 날이되자 상황은 더 심각해졌고, 6사단은 물론 미 제24사단과 미 제7사단까지 측방과 후방에서 등장하면서 180사단은 소멸 직전까지 몰렸음.
게다가 그나마 갖고온 포병대도 탄약을 모두 소진해서 포기하는 형편이었음. 180사단 사단장은 분산돌파를 시도했으나 이마저도 매우 심각한 타격을 받아 사단장과 일부 참모들을 제외하고 거의 다 포로로 잡히거나 전사해버리는 참사를 겪음.
사단 정치부주임인 오성덕도 한국군에 포로로 잡혀갔으니 말 다했지. 전위대 아조씨 말로는 사단장이랑 비슷한 급이고, 사단 내의 당적 통제를 상징하는 양반인지라 꽤나 거물이었다고 함.
전시 상태에서는 사단장에게 우선권이 주어지나, 정치위원은 사단의 정치적 결정을 담당하고 당위원회를 통해서 사단장과 함께 사단 업무를 공동 주관하는 굉장히 중요한 직급이었고, 이 때문에 한국군이 잡은 중공군 포로 중에서도 꽤 직급이 높았다고 함.
이렇게 180사단은 1천명도 안되는 병력만이 가까스로 탈출하는데 성공함. 당장 180사단의 사단장이 직접 인솔해서 데려온 참모 및 직속병력이 200명이 좀 안됬으니. 그나마 6월 중순까진 와해된 부대들이 간신히 모여서 4천명 선까진 맞췄다고 함.
한 편 180사단은 53년 7월 금성전투에서도 거의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았음. 53년 5월 화천 방면에 등장한 제60군과 함께, 180사단은 사천에서 온 신병들로 사단 정원 1만을 모두 충원한 상태였음.
그러나 53년 6월에 한국군 5사단과 3사단의 방어에 말려서 4천에 달하는 전력을 이미 잃어버린 상태. 7월에 60군이 다시 5사단 방면에 공세를 넣기 시작했을 때 180사단은 공세 첨병에 서있던 상태였음.
17일까지는 나름 전력을 유지하긴 했는데, 문제는 18일이 되자 보급이 완전히 끊겼고, 이 때문에 철수를 급히 시작하면서 다시 한 번 참사가 벌어졌음.
중공군 180사단이 1개 대대만을 남기고 철수하는 와중에 한국군 5사단이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시점에서 반격을 해버림. 중공군은 전면의 한국군이 반격을 하려면 못해도 3~5일은 걸릴 것이라고 예측했지만, 이러한 예상을 깨고 바로 다음 날부터 맹공을 퍼부음.
부사단장 한신이 직접 전차에 탑승해서 반격을 진두지휘했고, 이에 말려버린 180사단은 거의 학살에 가까운 피해를 입으며 간신히 소수 병력만이 금성천 북안으로 탈출함.
전투 결과는 180사단에 남은 잔존 병력을 666명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으로 나타남. 180사단은 51년과 53년에 걸쳐서 거의 소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전쟁의 끝을 맞이하였음.
그리고 180사단의 궤멸에는 꼭 이 사람이 등장하는데, 바로 장도영 장군임. 장도영 장군은 용문산-파로호 때는 제6사단의 사단장이었고, 금성지구 전투 때는 53년 7월 16일부터 5사단장으로 부임해서 180사단의 전열을 박살내버렸으니, 이정도면 對180사단 스페셜리스트가 아니신지...
출처
한국전쟁사
중공군의 한국전쟁사
한국전쟁시 군수지원, 미 극동사령부
한국전쟁사료, 정기정보보고 20권
한국전쟁사료 41, 육군본부
China’s Battle for Korea: The 1951 Spring Offensive HQ IX Corps, Annex 2 to Periodic Intelligence Report Nr.248(June 1, 1951), Supporting Documents to Command Report June 1951, Book II Vol 2, RG407 Entry NM3-429 Box18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