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문은 이제 행복의 문으로...>> -가자 저 개척의 땅으로 계속- 이민 오던 날 공항에서 친지들의 환송을 받으며 기막히게 서러운 이별을 해야만했었다 영문 모르고 따라나서던 초등학교 6학년인 막내가 출입국문을 통과할 때 아빠가 따라들어오지않자 아빠~를 부르며 몸부림치며 울어댔다 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딸아이를 낚아채듯 끌어안고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그 \'비극의 문\'을 들어섰다. 내가 태어난 조국은 한동안 우리가 갖다바친 세금만 해도 어마 어마 할텐데 세금에 묶이어 가족들을 갈라 놓았다 전시도 아니 것만 언제 다시 만나리란 기약도 없이 우린 이산가족이 되어 한을 품고 살아야만 했다. 미국 이민 개척 사를 보면 포장마차를 타고 다니다가 급류에 휘말리기도 하고 인디언의 습격을 당하며 온갖 수난 다 겪는 그 얘기는 결코 남의 일만은 아니었다. 어떤 방법으로든 내가 짊어져야 할 고통의 몫은 있기 마련인 것 그래도 난 이년 반동안 남편과 생이별하고 나혼자 애들을 키우면서 그 어떤 상황에도 눈물 보인 적이 없었다. 이민오기 전 날밤 남편 등에 기대어 철철 흘러내리던 눈물은 어느새 말라버렸고 가슴도 생각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의 마지막 장면 처럼 황량한 석양에 우뚝선 스칼렛을 닮아갔다. 내가 다시 눈물을 찾은 건 남편과 재회하던 첫밤이었다. 노래가사 처럼 그 사람 가슴에 얼굴을 묻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또 다시 남편을 이민 개척 사에 편승시켜 그 고통분담을 갖게 됐지만(한마디로 야생 망아지 길들이는 거나 다름없는 눈물의 나날이었다) 미국은 생면부지의 나를 몰라라 하지 않았다 딸들이 한국으로 치면 고3 고1 초6 이었는데 학비는 의무교육이니 그렇다지만 점심도 제공해주었다 처음엔 멋모르고 스쿨버스타면 돈내는줄 알고 학교 바로 옆에 비싼 아파트에서 살았었다 나중에서야 무료인줄 알고는 싼 아파트로 옮겼지만 이처럼 미국은 한국이 이해하기 어려운 선심을 우리가족에게 베풀어주었고 한국은 미국상식으로는 도저히 용납이 안가는 일을 우리가족에게 자행했다 지금은 큰딸은 졸업하여 아트디자이너로 건설회사에 취직하였고 둘째 와 막내는 대학에 다닌다 모두 장학금을 받기에 학비걱정을 모르고산다 대학들어가면 처음 1-2년은 많은장학금이 나와 용돈까지도 나온다 고학년 되면 차츰 학비제공해주는 액수가 줄어들지만 아르바이트로 아이들이 총당하기에 난 그저 먹여주고 재워만 주면 절로 학교를 마치게 되었었다 (큰애) 아픔은 모두 지나갔다 아니 이겨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게다 남들이 말하는 성공은 못했다 치더라도 난 이만으로 족하다 미국은 결코 만만한 곳은 아니지만 살아볼 가치가 넘쳐나는 곳이다 내가 미국을 향해 첫발을 딛던 그 \'비극의 문\'은 이제 \'행복의 문\'이 되여 한국을 나갈 땐 친구 형제들을 볼 수 있다는 부푼 맘으로 돌아올 땐 내보금자리로 돌아오는 편안함으로 열리고 닫히리라. -나의 이민 역사 끝- 콜로라도 젊은태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