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이미 떠난 어느 대가의 시(詩) 한 편을 놓고 기라성 같은 비평가들이 화려한 논란을 쏟아냈다
문제가 된 것은 시행(詩行)의 중간에 찍힌 하나의 피리어드(종지부(終止符))였다
수식어와 피수식어를 갈라놓음으로 시정(詩情)의 미적 확대를 의도적으로 꾀했다.
의미의 연결에 포즈(pause)를 줌으로 이미지의 자동화를 방지한 낯선 장치다.
복잡다단한 현대 도시 소시민의 순간적인 의식의 단절을 시각화한 것이다.
일상적 구문의 해체로 심리적 갈등 곧 정서의 와해를 표출하려 했다.
알다가도 모를 현학적인 해설들이 작품보다 더 어렵게 지상을 수놓았다
거기에 왜 마침표가 들어가야 하나? 아무리 해도 이해를 못한 한 숙맥 시인이 출판사에 찾아가 대가의 친필 원고를 가까스로 찾아보았다
원고에 분명 마침표가 찍혀 있었다
(그러나 그 마침표의 생산자는 대가가 아니라 한 마리의 불손한 파리였던 것을 세상은 아무도 몰랐다)
나나이모 / 임보
캐나다의 맨 서쪽에 '밴쿠버 섬'이 있는데 길게 벋어내린 그 섬의 동남쪽에 나나이모라는 작은 도시가 있다 나나이모는 원주민 인디언 말인데 '다 여기 모이자'라는 뜻이라고 한다
옛날 광활한 북미대륙에서 말을 달리던 용맹스런 원주민 후예들은 지금은 거리의 빈민가에서 알코올 중독자로 혹은 마약에 병들어 폐인들이 되어가고 있다 수천 년 동안 지배해 왔던 저 풍요로운 대지를 총을 든 날강도들에게 다 빼앗기고 말았으니 이 얼마나 분통이 터질 노릇인가.
볼기짝에 푸른 몽고반점을 지니고 있다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우리들의 사촌 몽골리안 어느 언어학자는 아파치족의 '아파치'의 어원은 우리말의 '아버지'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영국 프랑스 스페인… 서양의 백인놈들이 상륙해서 대포와 총으로 원주민들을 정복하고 그들의 영토를 다투어 확장해 갔다. 선량한 원주민들은 활과 창으로 대적할 수 없어 서쪽으로 서쪽으로 밀려갔으리 그렇게 쫓기다가 더 밀려갈 수 없는 태평양에 떠있는 마지막 섬 이 섬에들 모여 마지막 결전을 다짐했으리 진지를 구축하고 창에 날을 다시 세우면서 흩어진 전사들을 향해 애타게 외쳐댔으리 여기 다 모이자고, 모이자고― "나나이모" "나나이모" 지금도 귀에 은은히 들려오는 것 같은 그 아우성은 어쩌면 우리말의 "너 나 여기 모여!" "너 나 여기 모여!"
나나이모의 동쪽에는 밴쿠버시가 있고 나나이모의 남쪽에는 빅토리아시가 있다 둘 다 거창한 도시인데 하나는 정복자의 이름이고 다른 하나는 정복국 국왕의 이름이다 나나이모는 그 사이에 끼어 있는 작은 도시, 나나이모의 곁에는 '시메이너스'라는 작은 원주민 마을이 있는데 그 의미는 '깨어진 가슴'이라고 한다.
물 / 임보
선운사(禪雲寺)에 가면 추사(秋史)가 쓴 백파비(白坡碑)가 절의 문앞에 서 있는데 그 무게가 천 년 묵은 대웅전 대들보를 들어올리고 있다. 또한 그 절의 선방(禪房) 뒤뜰엔 숨어 있는 현판(懸板)이 하나 있는데 네 귀퉁이가 불에 그슬려 찌그러져 있는 꼴이 여간 청승스럽지 않다.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노자(老子)의 말씀을 음각(陰刻)한 것인데 노과(老果)라는 서명으로 미루어 보아 역시 추사 만년의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이 현판에 얽힌 얘기가 자못 흥미롭다. 정축(丁丑)년이라든가 을미(乙未)년이라든가 세상이 무척 곤궁해서 산중의 절도 끼니 잇기가 쉽지 않았던 어느 추운
엄동설한(嚴冬雪寒) 눈보라가 내려치는 칠흑 같은 밤이었던가 보다. 배는 고프고 몸은 추워 잠에서 짐짓 깨어난 주지 스님이 동자(童子)에게 군불을 지피라고 일렀것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방은 더워 오지 않고 동자 또한 돌아오지 않자 스님이 아궁이에 몸소 내려가 보았다. 보아허니 동자놈 불을 일구려고 아궁이에 고개를 박은 채 열심히 입바람을 불어넣고 있으나 어둠 속에 더운 연기만 가득할 뿐 불길은 보이지 않는다.
"스님, 이상하게도 아궁이에 불이 붙지 않습니다." 그렇게 동자놈 실랑이질을 하다가 드디어 날이 밝아 왔던가 보더라. 무슨 연고인가 스님이 아궁이에 내려가 보자, 장작더미 속에 추사의 현판이 들어가 있는 게 아닌가. 걸어 놓았던 현판이 바람에 날려 떨어진 것을 물정도 모르는 동자놈이 어둠 속에서 장작과 함께 아궁이에 밀어넣었던 모양이다. <上善若水> "이놈아, 물을 태우려 하니 물이 어디 말을 듣겠느냐" 연기에 그슬린 현판을 꺼내며 스님이 투덜거린 말씀이다. 현판의 <水>자가 그렇게 밤새도록 불을 지켰던가 보더라.
솔 / 임보
천 년 묵은 노송(老松)을 베어내면 그 뿌리의 한 서린 송진이 땅 속에 몇 백 년 묻혀 지내는 동안 허연 혹을 만들어 내는데 이것이 곧 사람들이 복령(茯令)이라 일컫는 것으로 종양(腫瘍)의 선약(善藥)으로 널리 쓰인다.
이 복령이 또한 몇 천 년 땅 속에 묻혀 견디다 보면 통랑한 노란 보석으로 둔갑을 하는데 이것이 곧 호박(琥珀)이라는
것이다. 예로부터 선비들이 이 호박을 머리의 망건 줄에 관자(貫子)로 달아
밝히기도 하고, 즐겨 마고자의 고름으로 대신했던 일들이 다
까닭이 없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 세상에서 원통히 살다 떠나간 무리들아, 그대들도 지하에 묻혀 몇 백 년 기다리다 보면 더러는 반딧불로 어둠을 깨고 솟아오르기도 하고, 또 몇 천 년 더 버티다 보면 문득 하늘의 별들로 떠올라 온 세상을 만세무궁토록 반짝이게도 되는 지 누가 알겠느냐?
성삼문전(成三問傳) / 임보
1 삼문(三問)이 세상에 처음 태어나려 할 때의 일이다. 그의 조부가 역(易)에 밝았든지 태어날 아이의 시(時)를 미리 보았다. 했더니 때가 아직 이른지라 산고(産苦)를 앓고 있는 며느리에게 좀 참았다 낳으라고 일렀다. 그리하여 산모는 머리를 디밀고 밖으로 나오려는 아이를 발뒤꿈치로
괴고 앉아서 안간힘을 쓰며 버티었다. 한참을 그렇게 버티다 힘이 겨운 며느리가 “이제 때가 되었나이까?”하고 묻는다. 그러면 “아직 더 참아라”하고 시아비가 이른다 그렇게 묻기를 세 번씩이나 하고 드디어 때를 맞추어 출산을 시켰다고
해서 아이의 이름을 삼문(三問)이라고 지었다는 얘기다
2 집현전 학사로 있던 삼문이 세종의 명을 받아 훈민정음을 만들면서 명(明)의 운학자(韻學者) 황찬(黃瓚)의 자문을 구하러 요동 땅을
맨 처음 밟을 때의 일이다. 삼문은 오척단구(五尺短軀)여서 그것이 마음에 걸렸든지 버선 밑에 솜을 괴어 한 치쯤 높여 신고 들어갔다. 그런데 어느 동구 앞 정자나무 밑에 이르렀는데 그 늘 아래서 쉬고 있던 한 노옹(老翁)이 삼문을 보더니 혀를 끌끌 찼다. 괴이히 여긴 삼문이 그 까닭을 물은 즉 “그대의 상을 보니 참 아깝기도 하다. 키가 한 치만 낮았더라면 천하문장(天下文章)이 되었을 터인데” 하더라는 것이다.
3 삼문은 문장뿐만 아니라 필력(筆力)도 출중(出衆)했다. 한번은 사신으로 연경(燕京)엘 간 적이 있는데, 마침 궁중(宮中)의 한 누각(樓閣)을 중수(重修)하고 나서 천정의 상량에 새로 상량문을 쓰고자 하는 참이었다. 임금이 사신인 삼문을 우대해서 그랬든지 아니면 삼문의 글솜씨를 보고자 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에게 상량문을 써 주도록 청했다. 키가 작은 삼문이 몇 개의 탁자를 괴어 놓고 그 위에 올라섰다. 큰 붓을 들어 상량에 글씨를 심어 가는데 그 웅혼한 필체에 감탄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왔다. 그러자 밑에서 탁자를 붙들고 있던 한 신하가 투기(妬忌)가 일어 그만 실수한 척하며 괸 탁자를 무너뜨리니 이 무슨 낭패였겠는가. 헌데 삼문은 땅 바닥에 떨어지질 않고 붓이 상량에 달라붙어 그 붓대를 붙든 채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는 게 아닌가.
4 단종의 복위를 꾀하던 의로운 신하들이 수양의 무리들에게 국문을
받게 된다. 사륙신(死六臣) 중의 한 사람이었던 삼문은 그의 부친
성승(成勝)과 함께 삼족(三族)이 멸하는 참형(慘刑)을 당한다.
檄鼓催人命 西風日欲斜 黃泉無客店 今夜宿誰家 (북은 어서 목을 베라고 조급히 울리고 저녁해는 하늬바람 속에 기울어 가는데 저승길엔 나그네 머물 집도 없으리니 오늘밤은 뉘 집에 들러 자고 간단 말인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 그가 읊은 이 절명시(絶命詩)도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거니와, 인두를 불에 달구어 등가죽을 지지던 형리(刑吏)들에게 “이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라”고 호통을 치던 그 무서운
세상을 이미 떠난 어느 대가의 시(詩) 한 편을 놓고 기라성 같은 비평가들이 화려한 논란을 쏟아냈다
문제가 된 것은 시행(詩行)의 중간에 찍힌 하나의 피리어드(종지부(終止符))였다
수식어와 피수식어를 갈라놓음으로 시정(詩情)의 미적 확대를 의도적으로 꾀했다.
의미의 연결에 포즈(pause)를 줌으로 이미지의 자동화를 방지한 낯선 장치다.
복잡다단한 현대 도시 소시민의 순간적인 의식의 단절을 시각화한 것이다.
일상적 구문의 해체로 심리적 갈등 곧 정서의 와해를 표출하려 했다.
알다가도 모를 현학적인 해설들이 작품보다 더 어렵게 지상을 수놓았다
거기에 왜 마침표가 들어가야 하나? 아무리 해도 이해를 못한 한 숙맥 시인이 출판사에 찾아가 대가의 친필 원고를 가까스로 찾아보았다
원고에 분명 마침표가 찍혀 있었다
(그러나 그 마침표의 생산자는 대가가 아니라 한 마리의 불손한 파리였던 것을 세상은 아무도 몰랐다)
나나이모 / 임보
캐나다의 맨 서쪽에 '밴쿠버 섬'이 있는데 길게 벋어내린 그 섬의 동남쪽에 나나이모라는 작은 도시가 있다 나나이모는 원주민 인디언 말인데 '다 여기 모이자'라는 뜻이라고 한다
옛날 광활한 북미대륙에서 말을 달리던 용맹스런 원주민 후예들은 지금은 거리의 빈민가에서 알코올 중독자로 혹은 마약에 병들어 폐인들이 되어가고 있다 수천 년 동안 지배해 왔던 저 풍요로운 대지를 총을 든 날강도들에게 다 빼앗기고 말았으니 이 얼마나 분통이 터질 노릇인가.
볼기짝에 푸른 몽고반점을 지니고 있다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우리들의 사촌 몽골리안 어느 언어학자는 아파치족의 '아파치'의 어원은 우리말의 '아버지'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영국 프랑스 스페인… 서양의 백인놈들이 상륙해서 대포와 총으로 원주민들을 정복하고 그들의 영토를 다투어 확장해 갔다. 선량한 원주민들은 활과 창으로 대적할 수 없어 서쪽으로 서쪽으로 밀려갔으리 그렇게 쫓기다가 더 밀려갈 수 없는 태평양에 떠있는 마지막 섬 이 섬에들 모여 마지막 결전을 다짐했으리 진지를 구축하고 창에 날을 다시 세우면서 흩어진 전사들을 향해 애타게 외쳐댔으리 여기 다 모이자고, 모이자고― "나나이모" "나나이모" 지금도 귀에 은은히 들려오는 것 같은 그 아우성은 어쩌면 우리말의 "너 나 여기 모여!" "너 나 여기 모여!"
나나이모의 동쪽에는 밴쿠버시가 있고 나나이모의 남쪽에는 빅토리아시가 있다 둘 다 거창한 도시인데 하나는 정복자의 이름이고 다른 하나는 정복국 국왕의 이름이다 나나이모는 그 사이에 끼어 있는 작은 도시, 나나이모의 곁에는 '시메이너스'라는 작은 원주민 마을이 있는데 그 의미는 '깨어진 가슴'이라고 한다.
물 / 임보
선운사(禪雲寺)에 가면 추사(秋史)가 쓴 백파비(白坡碑)가 절의 문앞에 서 있는데 그 무게가 천 년 묵은 대웅전 대들보를 들어올리고 있다. 또한 그 절의 선방(禪房) 뒤뜰엔 숨어 있는 현판(懸板)이 하나 있는데 네 귀퉁이가 불에 그슬려 찌그러져 있는 꼴이 여간 청승스럽지 않다.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노자(老子)의 말씀을 음각(陰刻)한 것인데 노과(老果)라는 서명으로 미루어 보아 역시 추사 만년의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이 현판에 얽힌 얘기가 자못 흥미롭다. 정축(丁丑)년이라든가 을미(乙未)년이라든가 세상이 무척 곤궁해서 산중의 절도 끼니 잇기가 쉽지 않았던 어느 추운
엄동설한(嚴冬雪寒) 눈보라가 내려치는 칠흑 같은 밤이었던가 보다. 배는 고프고 몸은 추워 잠에서 짐짓 깨어난 주지 스님이 동자(童子)에게 군불을 지피라고 일렀것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방은 더워 오지 않고 동자 또한 돌아오지 않자 스님이 아궁이에 몸소 내려가 보았다. 보아허니 동자놈 불을 일구려고 아궁이에 고개를 박은 채 열심히 입바람을 불어넣고 있으나 어둠 속에 더운 연기만 가득할 뿐 불길은 보이지 않는다.
"스님, 이상하게도 아궁이에 불이 붙지 않습니다." 그렇게 동자놈 실랑이질을 하다가 드디어 날이 밝아 왔던가 보더라. 무슨 연고인가 스님이 아궁이에 내려가 보자, 장작더미 속에 추사의 현판이 들어가 있는 게 아닌가. 걸어 놓았던 현판이 바람에 날려 떨어진 것을 물정도 모르는 동자놈이 어둠 속에서 장작과 함께 아궁이에 밀어넣었던 모양이다. <上善若水> "이놈아, 물을 태우려 하니 물이 어디 말을 듣겠느냐" 연기에 그슬린 현판을 꺼내며 스님이 투덜거린 말씀이다. 현판의 <水>자가 그렇게 밤새도록 불을 지켰던가 보더라.
솔 / 임보
천 년 묵은 노송(老松)을 베어내면 그 뿌리의 한 서린 송진이 땅 속에 몇 백 년 묻혀 지내는 동안 허연 혹을 만들어 내는데 이것이 곧 사람들이 복령(茯令)이라 일컫는 것으로 종양(腫瘍)의 선약(善藥)으로 널리 쓰인다.
이 복령이 또한 몇 천 년 땅 속에 묻혀 견디다 보면 통랑한 노란 보석으로 둔갑을 하는데 이것이 곧 호박(琥珀)이라는
것이다. 예로부터 선비들이 이 호박을 머리의 망건 줄에 관자(貫子)로 달아
밝히기도 하고, 즐겨 마고자의 고름으로 대신했던 일들이 다
까닭이 없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 세상에서 원통히 살다 떠나간 무리들아, 그대들도 지하에 묻혀 몇 백 년 기다리다 보면 더러는 반딧불로 어둠을 깨고 솟아오르기도 하고, 또 몇 천 년 더 버티다 보면 문득 하늘의 별들로 떠올라 온 세상을 만세무궁토록 반짝이게도 되는 지 누가 알겠느냐?
성삼문전(成三問傳) / 임보
1 삼문(三問)이 세상에 처음 태어나려 할 때의 일이다. 그의 조부가 역(易)에 밝았든지 태어날 아이의 시(時)를 미리 보았다. 했더니 때가 아직 이른지라 산고(産苦)를 앓고 있는 며느리에게 좀 참았다 낳으라고 일렀다. 그리하여 산모는 머리를 디밀고 밖으로 나오려는 아이를 발뒤꿈치로
괴고 앉아서 안간힘을 쓰며 버티었다. 한참을 그렇게 버티다 힘이 겨운 며느리가 “이제 때가 되었나이까?”하고 묻는다. 그러면 “아직 더 참아라”하고 시아비가 이른다 그렇게 묻기를 세 번씩이나 하고 드디어 때를 맞추어 출산을 시켰다고
해서 아이의 이름을 삼문(三問)이라고 지었다는 얘기다
2 집현전 학사로 있던 삼문이 세종의 명을 받아 훈민정음을 만들면서 명(明)의 운학자(韻學者) 황찬(黃瓚)의 자문을 구하러 요동 땅을
맨 처음 밟을 때의 일이다. 삼문은 오척단구(五尺短軀)여서 그것이 마음에 걸렸든지 버선 밑에 솜을 괴어 한 치쯤 높여 신고 들어갔다. 그런데 어느 동구 앞 정자나무 밑에 이르렀는데 그 늘 아래서 쉬고 있던 한 노옹(老翁)이 삼문을 보더니 혀를 끌끌 찼다. 괴이히 여긴 삼문이 그 까닭을 물은 즉 “그대의 상을 보니 참 아깝기도 하다. 키가 한 치만 낮았더라면 천하문장(天下文章)이 되었을 터인데” 하더라는 것이다.
3 삼문은 문장뿐만 아니라 필력(筆力)도 출중(出衆)했다. 한번은 사신으로 연경(燕京)엘 간 적이 있는데, 마침 궁중(宮中)의 한 누각(樓閣)을 중수(重修)하고 나서 천정의 상량에 새로 상량문을 쓰고자 하는 참이었다. 임금이 사신인 삼문을 우대해서 그랬든지 아니면 삼문의 글솜씨를 보고자 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에게 상량문을 써 주도록 청했다. 키가 작은 삼문이 몇 개의 탁자를 괴어 놓고 그 위에 올라섰다. 큰 붓을 들어 상량에 글씨를 심어 가는데 그 웅혼한 필체에 감탄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왔다. 그러자 밑에서 탁자를 붙들고 있던 한 신하가 투기(妬忌)가 일어 그만 실수한 척하며 괸 탁자를 무너뜨리니 이 무슨 낭패였겠는가. 헌데 삼문은 땅 바닥에 떨어지질 않고 붓이 상량에 달라붙어 그 붓대를 붙든 채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는 게 아닌가.
4 단종의 복위를 꾀하던 의로운 신하들이 수양의 무리들에게 국문을
받게 된다. 사륙신(死六臣) 중의 한 사람이었던 삼문은 그의 부친
성승(成勝)과 함께 삼족(三族)이 멸하는 참형(慘刑)을 당한다.
檄鼓催人命 西風日欲斜 黃泉無客店 今夜宿誰家 (북은 어서 목을 베라고 조급히 울리고 저녁해는 하늬바람 속에 기울어 가는데 저승길엔 나그네 머물 집도 없으리니 오늘밤은 뉘 집에 들러 자고 간단 말인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 그가 읊은 이 절명시(絶命詩)도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거니와, 인두를 불에 달구어 등가죽을 지지던 형리(刑吏)들에게 “이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라”고 호통을 치던 그 무서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