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가요사 개설
이 글은 지난 1967년에 성음사(省音社)에서 발매한 '가요 반세기'라는 전집물의 해설문을 발행인의 허락을 얻어 보완한 것입니다. 1920년대 초창기부터 1960년 무렵까지 우리나라 가요사를 정리한 내용 가운데 오류가 있는 대목을 고치고 부족한 대목을 채워 넣었으며, 일부 표현은 알기 쉽게 바꾸었습니다.
한국 가요사 개설 총 4부로 나누어 연재합니다. 연재 순서는 1. 요람기 2. 황금기 3.수난기 4. 재생기 입니다. <가요114> |
1. 요람기
[유랑의 노래들]
|
만주와 간도로 몰려가는 한국의 농부들 |
피 식은 젊은이 눈물에 젖어 낙망과 설움에 병든 몸으로 북국한설 오로라로 끝없이 가는 애달픈 이 내 가슴 누가 알 거나 <
방랑가 : 이규송 작사, 강윤석 편곡, 이애리수 노래(1930)> 노래 - 강석연
지금까지 우리 곁에 맴돌고 있는 이 '방랑가'는 곧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낯설은 만주, 연해주로 기약 없는 유랑의 길을 떠나야 했던, 그야말로 피 식은 젊은이의 비탄을 담았던 것이다. 우리 가요사 초기의 노래 가운데에는 이런 비탄조의 망명가, 유랑의 노래가 많다.
흘러가는 이 신세 물에 뜬 버들잎 흐르고 또 흘러서 어디로 가나 정든 고향 내 집이 차마 그리워 해 다 지고 저문 길 눈물에 아득하네 ('유랑의 노래', 김서정 작사, 작곡, 이애리수 노래, 1931년)
여름 저녁 시원한 바다를 찾아 일엽편주 둥실 띄워라 달맞이 가자 저 달마저 내 가슴의 이 설움 풀까 아 나의 일생 고향이 그립기도 하다
<
유랑인의 노래 : 채규엽 작사, 작곡, 노래, (1930)>
비련과 눈물, 탄식, 향수, 이런 것이 유랑의 노래들이 말하는 것이었다. 무기력한 망명가였지만 이러한 정한의 노래가 그 무렵 우리 젊은이들의 가슴을 쳤고, 그래서 입에서 입으로 옮겨졌다. 말하자면 유행가(대중가요란 말은 태평양전쟁 직전에 사용되기 시작한 말이다)의 효시는 이런 비탄조의 망향가였다. 이때까지의 노래라곤 창가집에 실린 '학도가'나 '권농가' 등의 교훈가와 종교계통의 '불어라 봄바람' 정도가 있었을 뿐이다. '학도가'는 가사 내용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선도자(그 무렵 세칭 개화꾼)들의 기백을 읊은 노래로 소위 동경유학생들이 방학이 끝나고 일본으로 돌아갈 때 남대문역(현재 서울역) 플랫홈에서 젊은 목소리로 곧잘 합창했다고 한다.
최초의 창가들은 우리나라 사람이 작곡한 예는 극히 드물고, 외국 곡조에 가사를 지어 붙인 것이 많았다. 애국가가 '올드 랭 자인'이었고, '모란봉가'가 미국의 민요, '학도가' 역시 일본의 철도개통기념가 곡조라는 설이 있다. 좀 뒤에 나온 것으로 새로운 서구 문물에 대한 경이를 노래한 '비행기'란 창가도 있었다.
따라라 따라라 중천에 높이 떠 따라라 따라라 비행기 난다 날개를 활짝 펴고 천천히 날아 올 때 프로펠라의 소리 멀리서 들린다 용감하구나 용감하구나 넓으나 넓은 하늘을 제 세상처럼 따라라 따라라 따라란따단띄라 따라라 따라라 따라란따단띄라 넓으나 넓은 하늘을 제 세상처럼
비행기에 대한 경이, 그것은 지금 생각하면 아득한 옛 일이지만 그 무렵엔 이렇게 비행기에 관한 노래가 곧잘 불렸다. 1922년 12월 안창남이 고국 방문 비행을 할 떄의 경이와 감격을 노래한 것으로 '떴다 보아라 안창남, 굽어보니 엄복동'이란 노래와 함께 애창되던 노래였다.
1922년 7월 동경유학생들이 조직한 토월회가 여름방학 때 첫 신극 공연을 하면서 막간에 '아리랑고개'를 내놓았다. 아리랑은 본래 전래민요로 현재의 아리랑에 비해 퍽 느린 곡조인데 이것을 개사, 변조한 것이 토월회 공연 때의 '아리랑고개'였다.
|
영화 '아리랑' |
그 후 영화감독 나운규가 영화 '아리랑'을 만들 때 이경손(당시 영화감독)이 민요 노트에서 이 아리랑에 착안하여 주제가를 만든 것이 불멸의 명작 '아리랑'을 만든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 전래민요 '아리랑'은 지방에 따라 가사가 달랐지만 토월회 막간물에 등장한 '아리랑고개' 가사에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문전옥답을 다 어디 두고 쪽박의 신세가 웬말이냐
이렇게 쫓겨가야 하는 겨레의 비탄이 담겨 있었다. 1931년에 발간된 '정선조선가요선집'(조선가요연구사편)에는 총독부의 검열에 걸려 먹칠된 가사 중에 이러한 구절이 보인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싸우다 싸우다 아니 되면 이 세상에다 불을 지르자
<
아리랑 : 심연옥>
방화라도 하고 싶도록 격렬한 적의와 울분을 담은 이런 가사의 '아리랑'이 당시 불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 우리가 부르는 '아리랑'에 이 가사가 없는 것은 일제의 탄압에 의해 금지되었던 탓인 것 같다.
이런 노래들은 흔히 막간가수들에 의해 전국으로 퍼져 갔다. 수십 개의 신파극단이 정극과 희극 사이에 막간물이라는 것을 했고, 그 막간물엔 극단에서 노래 솜씨 있는 배우가 나와 노래를 불렀다. 막간가수는 아마츄어가수였지만 그런 대로의 명성을 가지기도 해서, 강석연, 김연실, 이애리수 등이 유명했다. 김연실은 '아리랑고개', 강석연은 '방랑가', 이애리수는 '라인강'을 곧잘 불렀다.
[레코드시대의 여명, '사의 찬미']
축음기와 레코드가 우리나라에 맨 처음 들어온 것은 19세기 말엽. 유성기와 소리판으로 불렸던 이 축음기와 레코드는 진기하기만 했다. 맨 처음 활동사진이 들어왔을 때 영사가 끝난 후 옥양목 스크린을 두드렸고, 맨 처음 서울 장안에 YMCA 회관이 들어섰을 때 벽돌집이 무너질까봐 행인들이 그 밑을 지나가길 겁냈던 것처럼, 축음기와 레코드는 경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서 약삭빠른 장사치들은 이 축음기와 레코드를 가지고 전국을 순회하며 장터에 천막을 치고 돈을 받고 들려 주는 영업을 하기도 했다. 처음 들어온 레코드는 거의 일본 노래나 서양음악뿐이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노래의 첫 취입으로 남아 있는 레코드는 1907년에 나온 것이며, 이후 연예계를 주름잡던 이기세가 파고다공원 맞은편에 일본 일동레코드의 지점을 차리고 우리 명창들을 일본에 데리고 가서 취입을 하기도 했다.
남도잡가는 김창룡, 이동백, 이화중선, 경기잡가와 서도잡가는 이진봉, 이영산홍 등이 있었다. 남도소리엔 '새타령', '육자백이', '춘향전' 몇 대목, 경기잡가와 서도잡가 중엔 '노래가락', '창부타령', '사설난봉가', '수심가' 등의 여러 곡이 취입됐지만 '이팔청춘가'가 그 중 애창되었다고 한다.
|
윤심덕 |
최초로 가요 취입을 한 사람으로 꼽히는 이 가운데에는 일본 우에노(上野) 음악학교를 졸업한 우리나라 최초의 소프라노 가수 윤심덕이 있다. 그 역시 이기세의 주선으로 일동레코드에서 가곡 취입을 했다. 1926년 8월 3일 취입을 하고 돌아오던 윤심덕은 관부연락선 덕수환(德壽丸)에서 애인 김우진과 함께 검푸른 현해탄에 몸을 던져 정사했다. 이 정사 사건은 큰 화제거리가 되었고, 예정에도 없던 곡을 그가 자진해서 취입했다는 '사의 찬미'는 크게 유행하여 날개 돋힌 듯 팔려 나갔다.
광막한 황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苦海에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설움 <
사의 찬미 : 윤심덕 작사, 이바노비치 작곡, 윤심덕 노래(1926)>
|
'사의 찬미' 축음기 레이블 |
이바노비치 작곡의 '다뉴브강의 잔물결' 곡조에 윤심덕이 가사를 붙인 이 애절한 노래는 정사의 전설과 함께 실의에 찬 민중들의 가슴을 쳤다. 새까만 제비표 레코드에서 흐느끼듯 흘러나오는 단음계의 구슬픈 선율을 그들은 목메인 소리로 따라 불렀던 것이다.
[막간가수들의 성좌]
1928년 빅터레코드와 콜롬비아레코드의 경성지점이 들어오기 이전과 그 이후로도 한 동안은 노래의 유행은 레코드보다 순회극단 막간가수들의 노래로 번져갔다.
|
채규엽 |
당시의 가수 제1인자는 하세가와 이찌로(長谷川一郞)란 이름으로 일본 노래도 곧잘 불렀던 채규엽. 훗날 대머리가 되자 무대에 설 땐 숯을 발랐다는 이 호괘한 가수 채규엽은 '봄노래 부르자'를 곧잘 불렀고, 자신이 지은 노래 '고독한 꿈', '유랑인의 노래' 등으로 청중의 가슴을 슬픔으로 메웠다.
원래 연극배우였고 후에 영화배우로서 이름을 떨쳤던 김연실은 고운 몸매, 단아한 용모, 초롱초롱한 눈매의 미녀로 그의 노래는 청중들을 도취하게 했다. 그는 활동사진 '낙화유수'와 '세동무'의 주제가를 불러 이름을 떨쳤다. '낙화유수'(일명 '강남달')는 짜릿한 민족감정이 연모의 노래로 위장되어 있어 삽시간에 퍼져 갔다.
|
이정숙 |
강남달이 밝아서 님이 놀던 곳 구름 속에 그의 얼굴 가리워졌네 물망초 핀 언덕에 외로이 서서 물에 뜬 이 한 밤을 홀로 새울까 <
낙화유수 : 김서정 작사, 작곡, 이정숙 노래(1929)>
이 노래는 김연실에 앞서 콜롬비아레코드에서 이정숙의 노래로 나와서 신나게 팔려 나간 것이었다.
강석연은 귀여운 얼굴의 단발머리 소녀로 '방랑가', '오동나무' 등을 곧잘 불렀다. 이경설 또한 이 무렵 활약했다. 사실 이 시대엔 몇 곡을 제외하고는 노래에 주인이 따로 있을 리 없었다.
|
이애리수 |
시베리아 찬 바람이 지구상에 떨치니 보기는 죽은 듯하나 실상은 살았도다 버러지는 땅에서 들썩들썩하면서 양춘가절 기다리면서 나오기를 힘쓰네 <
부활 : 이애리수 노래(1931)>
'부활'이란 이 노래는 곧 망국의 슬픔을 묘사하는 양 절실해서 곧잘 불렸고, '카츄샤', '종로행진곡', '실연' 등은 자유연애의 신사조가 얼어붙은 젊은이들의 가슴을 녹이면서 그들의 울렁대는 심정과 맞아떨어져 애창되었다.
이 무렵의 대표적인 작곡가는 김서정이었다. 김서정은 김영환이란 이름으로 활동사진 변사도 했던 사람으로 최초의 가요 작곡가인 셈이다.
|
왕평(극단 대표) |
여기서 특기할 것은 일본인들까지 조선의 세레나데라고 애창했던 '황성의 적'(일명 '황성 옛터')의 탄생이다.
1929년 어느날 황해도 배천의 어느 여인숙엔 비에 갇힌 순회악극단이 묵고 있었다. 창 밖에 후드득후드득 떨어지는 빗발을 보고 있던 바이올린 연주자 전수린은 문득 몇일 전 개성 만월대에서 느낀 감회가 치밀었다. 푸른 달빛 속에 흩어진 옛 기와, 황폐한 성의 애수, 이런 것이 가슴에 젖어 들면서 손길은 바이올린을 더듬었다. 이 선율이 곧 '황성의 적'. 그 악극단의 대표였던 왕평이 작사해서 이애리수에게 연습을 시켰다. '황성의 적'이 서울 취성좌에서 청순한 가희 이애리수의 노래로 불렸을 때 청중은 울면서 합창했다.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 못 이뤄 구슬픈 벌레 소리에 말없이 눈물 지어요 <
황성의 적(跡) : 왕평 작사, 전수린 작곡, 이애리수 노래(1932)>
작곡가 전수린과 작사자 왕평은 이 노래 때문에 일본 경찰에게 시달림을 받았고, 한때 일제는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을 단속하기도 했지만, 아직도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불멸의 민족가요인 것이다.
흐름도 정결타 라인강 물 푸른 물결 부딫히는 저 건너편에 여기 저기 방황하는 젊은 두 남녀 그 무엇에 신비를 소근거리나 <
라인강 : 이애리수 노래(1931)>
이 '라인강'을 부르기도 했던 이애리수는 '황성의 적'으로 민족의 애인이 되었던 것이다.
2. 황금기
1928년부터 빅터레코드 경성지점과 콜롬비아레코드 경성지점이 들어와 다투어 각 지방에 특약점을 만들고 축음기를 월부로 판매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가요곡은 빠른 속도로 일반 생활 속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잇따라 일본에 본사를 둔 레코드회사들이 우리나라에 지점을 차렸다. 폴리돌레코드(1932년), 오케레코드(1933년), 태평레코드(1932년), 돔보레코드(1931년), 시에론레코드(1931년) 등이 들어섰다. 이 숱한 레코드사들이 새로운 가수의 발굴, 신곡 제작, 선전과 판매에 경쟁을 하던 1930년대 약 10년간은 그야말로 우리 가요계의 황금시대라 할 수 있다.
망국민의 퇴폐와 애상이라고 할까. 노래에서 억압된 심리의 탈출구를 찾고 노래에 취하고 노래에 병들던 시대이기도 했다. 1927년 서울에 JODK 경성방송국이 서고 몇 개의 지방 방송국이 섰지만 라디오 프로그램이 대중화되지 않았고, 도시에 빈약한 몇 개의 극장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때라 서민의 오락이라곤 이 레코드에 담긴 가요뿐이었던 것이다. 이 가요의 황금기는 별처럼 찬란한 가수들의 명멸, 고도화한 판매 방법에 의한 레코드회사의 성황, 가요계 주변에 떠돌던 무지개 같은 화제와 노래 때문에 죽을 수도 있었던 가요팬의 격증 등으로 요약될 것이다.
[여가수의 선구자 기생들]
새로운 가수의 발굴, 이것이 맨 처음 레코드사들이 겪어야 했던 난제였다. 특히 여자가수의 발굴이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당시의 상식으로 봐서 가수는 광대패라고 봤고, 양가집 딸이 그 노릇을 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
난치는 기생 |
최초의 신극단체 토월회가 맨 처음 여배우를 구하러 기생촌, 심지어 유곽까지 헤맸지만 기생들이 "비록 박복한 팔자를 타고나 이 짓을 하고 있지만 광대패에야 낄 수 있느냐"고 냉소하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는 일화가 있던 그때였다. 그래서 각 레코드사는 기존의 몇 명 막간가수로는 모자라서 새로운 여가수의 발굴에 나섰던 것이다.
당시는 가히 기생의 전성시대. 서울 장안에만도 조선권번, 한성권번 등 숱한 권번에 이천여 명의 기생들이 있어서 밤마다 다방골 기생촌은 파란 아세틸렌등을 단 인력거들이 끊임없이 기생 아씨를 싣고 왕래하고 있었다. 각 레코드사에서는 우선 손쉬운 기생들 가운데에서 가수를 찾았던 것이다. 그래서 초기의 여가수들 가운데에는 기생 출신이 많았다. 선우일선, 왕수복, 이은파, 이화자, 김복희 등이 모두 그렇다.
|
선우일선 |
특히 평양 명기 선우일선은 '꽃을 잡고'와 '능수버들'을 불러 인기를 모았다. 그의 노래 '조선팔경가'는 아름다운 조국에 대한 찬가로 망국민의 슬픔을 구성진 가락 너머 담고 있었다.
에 금강산 일만이천 봉마다 기암이요 한라산 높아 높아 속세를 떠났구나 에헤라 좋구나 좋다 지화자 좋구나 좋다 명승의 이 강산아 자랑이로구나
<
조선팔경가 : 편월 작사, 형석기 작곡, 선우일선 노래(1936)>
선우일선의 다른 노래 '능수버들' 또한 애창되었고 박부용의 '노들강변' 역시 히트했다. 흔히 이 기생 출신 가수들이 곧잘 불렀던 노래를 가리켜 신민요라 했다. 순수한 민요적 선율의 이 노래들이 히트했음은 물론이다.
기생 출신 가수 가운데에서도 특기할 것은 이화자의 등장이다. 이화자는 경기도 부평 태생의 기생으로 1936년에 부평 어느 술집에서 작곡자이자 가수였던 김용환에 의해 발견되어 뉴코리아레코드에서 첫 취입한 것이 '새봄맞이'였다. 이후 폴리돌레코드를 거쳐 오케레코드로 옮겨 가 발표한 것이 유명한 어머님전상백'('어머님전상서')이다.
|
이화자 |
가냘픈 목소리였지만 색정이 넘쳐 흐르는 그의 노래가 레코드로 나오자 신나게 팔려 나갔고 이화자는 하루 아침에 가요계의 여왕이 되었다. 흔히 기생 출신 가수들이 권번의 기적을 버리지 않았듯이 이화자 또한 앞에 놓인 술잔을 치우지 않았다. 은쟁반에 그때 돈으로는 큰 돈인 백 원, 이백 원을 풍류아의 명함과 함께 바쳐야 며칠 후 알현을 허락하는 통지가 올 정도였다고 한다.
'가거라 초립동', '꼴망태 목동', '화류춘몽'등 주로 김용환의 곡을 부르던 그는 색정 넘치는 용모, 몸매도 아울러 갖춰 인기의 초점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술에 젖고 사랑의 실의 끝에 아편에 병들어 1950년 무렵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훗날 황금심에 의해 그의 노래가 리바이벌됐던 것을 생각하면 청춘은 짧고 노래는 긴 것일까.
[은하에 흐르는 별들]
|
강석연 |
한편 막간가수들 또한 이 레코드의 황금기에 찬란한 톱가수로 군림했다. 이애리수는 '고요한 장안'을 불렀고, 강석연은 '남대문타령'을 불러 장안의 레코드상 점원들의 손을 바쁘게 했다. 길일흔 꾀꼬리(강석연)
채규엽은 '술은 눈물일까 한숨이랄까', '희망의 고개로', '순풍에 돛 달고'를 역시 콜롬비아레코드에서 취입해 가요계의 개척자임을 확인했다.
이때 강홍식이 부른 '처녀총각'은 십만 매가 팔렸다고 할 정도로 공전의 레코드 판매 기록을 세웠다. 잔뜩 찌푸린 어느날 서울 국일관 뒤 어느 여관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강홍식이 콧노래로 '흥타령'을 부르자 김준영이 그것을 변조해서 취입해 보자 해서 가지고 있던 오선지에 그린 것이 곧 이 곡으로, 이 노래의 대히트는 레코드 사업의 기업적 성공의 청신호였다.
가수겸 작곡가 김용환은 특이한 하이톤과 다이나믹한 목소리로 '부령청진', '안개 낀 섬'으로 거장의 소리를 들었다. 그는 악극 '아리랑'의 영진 역도 곧잘 하는 명배우이기도 했다. 그의 황금시절에 공연이 끝나고 나면, 인력거들이 줄지어 대기하고 있었다. 물론 기생들이 보낸 인력거였다. 어느 겨울에는 어느 인력거의 신세를 질까 망설이다 못해 눈을 맞으며 명치좌(명동 국립극장 자리)에서 사직골 자기 집까지 걸어갔다고 한다. 여복도 이쯤 되면 고생일까.
최남용의 '버들잎 신세'와 '비오는 선창' 또한 태평레코드에서 나와 각광을 받았다.
|
고복수 |
1933년에 콜롬비아레코드사에선 1등에 당선되면 일본 송죽영화사의 전속가수까지 함께 시켜 준다는 공약을 내걸고 전국 가요콩쿨을 열었던 바, 여기에 1등이 정일경, 2등이 조금자, 3등이 고복수였다.
부산 예선에서 1등을 하고 청운을 뜻을 품고 상경, 검은 두루마기에 흰 무명 장갑을 끼고 무대에 올랐던 고복수는 구수한 목소리로 입상을 했지만, 콜롬비아레코드에서는 노래를 취입하지 않고 오케레코드에서 '타향'(일명 '타향살이')을 불러 크게 히트했다. 오케레코드사의 사운을 결정했던 이 '타향'은 김능인 작사, 손목인 작곡으로 '방랑가' 이후 면면히 흘러온 망명가, 실향가이리라.
타향살이 몇 해 던가 손 꼽아 헤어 보니 고향 떠난 십여 년에 청춘만 늙고
<
타향 : 김능인 작사, 손목인 작곡, 고복수 노래(1934)>
정든 고향을 버리고 떠나 살아야 했던 유랑민의 맺히고 맺힌 설움이 구성진 선율에 흐르고 있었다. 청중들은 울면서 따라 불렀고 가수 또한 울면서 불렀다. 재창, 삼창의 목메인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고, 고복수의 뺨에도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특히 이 노래는 일본, 만주 등지의 순회공연 때 낯설은 이역의 하늘 아래 입술을 깨물려 참았던 울음을 터뜨려 주는 통곡의 뇌관이었다. 심지어 어떤 여인은 이 노래를 듣고 향수가 북받혀 자살했다는 일화가 전하기도 한다. 노래에 울고 노래에 죽을 수도 있었던 시대였다. 고복수는 이어 '사막의 한', '짝사랑' 등을 연달아 불러 히트시켰다.
그 무렵 새로 서울 장안에 들어서기 시작한 카페의 색유리창마다 밤이면 취한 젊은이들이 부르는 이 노래들이 흘러나왔다.
당시 잡지 '삼천리'에서 주최한 인기가수 투표에서는 남자가수가 1위 채규엽, 2위 김용환, 3위 고복수, 4위 강홍식, 5위 최남용 등의 순서였고, 여자가수는 1위 왕수복, 2위 선우일선, 3위 이난영, 4위 전옥, 5위 김복희 등의 순서였다.
|
인기가수 투표 결과 - 잡지 '삼천리' |
|
이난영 |
1933년에는 엘레지의 여왕 이난영이 등장했다. 박승희의 태양극장이 목포에서 공연하고 있을 때, 무대 뒤를 찾아온 열여섯 살 다박머리 소녀가 있었다. 노래를 들어 보니 놀라운 목소리라 당일로 막간에 등장시켰는데, 바로 이난영의 첫 무대였다.
이난영은 극단 태양극장을 따라 일본 오오사까까지 가서 노래를 불렀다. 마침 사무로 오오사까에 와 있던 오케레코드 사장 이철은 이난영의 노래를 듣고 꾀어서 그대로 현대탄을 건넜다. 우연히 주옥을 주은 것 같아 기뻐하던 박승희는 대경실색하여 서울로 장문의 전보를 쳐서 이철에게 항의했으나 이난영 본인의 요청으로 오케레코드에 전속하게 되었다. 1935년에 이난영이 부른 '목포의 눈물'은 잔잔한 설움을 밑바닥에 깐 선율로 우리의 가슴을 치는 순수한 정서가 있었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숨어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
목포의 눈물 : 문일석 작사, 손목인 작곡, 이난영 노래(1935)>
|
김해송 |
이난영은 오케레코드 무대, 광복 이후에는 KPK악극단 무대에서 이런 눈물이 듬뿍 묻은 엘레지를 많이 불렀다. '불사조', '알아달라우요', '다방의 푸른 꿈', '진달래시첩' 등 그의 노래들은 지금도 우리들의 귓전에 그리운 옛날, 슬픈 옛날을 불러 준다. 그는 평생 노래를 부르기 위해선 음악하는 사람과 사랑을 해야 한다고 할 만큼 어린 나이답지 않게 철이 들어 작곡가 김해송과 사랑을 불태웠다.
6.25 전쟁으로 김해송이 납북되자 병고로 빈사에 이른 이난영은 남인수와 새로운 인생의 출발을 꿈꾸었지만, 이제 남인수도 가고 그도 가고 그의 숱한 엘레지들만 남았다. 그는 마지막 피아노까지 전쟁의 불길 속에 타 버리자, 손뼉을 치고 발장단을 치며 어린 자식들에게 노래를 가르쳐 오늘의 김시스터즈와 김보이즈를 만들었다. 이난영, 그는 이제 우리 가요사의 고전 '목포의 눈물'과 함께 불망의 여인이 되었다.
|
남인수 |
1936년에는 우리 가요사상 불멸의 기린아가 등장했으니, 이가 곧 남인수였다. 남인수의 본명은 강문수, 경남 진주 태생으로 그 무렵 흔히 가수 지망생들이 그랬듯이 무작정 상경했다. 그래서 문을 두드린 곳이 작곡가 박시춘이 있던 시에론레코드. 그에게서 목소리 테스트를 받고 소위 쯔메에리(つめえり. 학생복으로 사용된 목을 두르는 옷깃이 있는 양복 상의) 차림의 이 떠꺼머리 총각이 부른 노래가 시에론레코드에서 처음으로 발매되었으니, 그것이 '눈물의 해협이었다. 하지만, 기분을 내어 불렀음에도 반응이 신통치 않아, 나중에 가사만 개작하여 오케레코드에서 다시 취입한 것이 바로 '애수의 소야곡'이다. 달콤한 그의 목소리는 대중의 환호를 받았고 그는 일약 톱가수가 되었다.
이로부터 박시춘, 남인수는 확실한 콤비가 되었으니, 오케레코드와 태평레코드가 각축전을 벌이던 그 가요의 황금시대 이래 근 30년 동안 우리 가요계에 솟구쳐 달렸던 커다란 산맥이었다. '꼬집한 풋사랑','감격시대','낙화유수'등 해방 전에 150곡 정도를 불렀고, 해방 후에 '가거라 삼팔선''달도 하나 해도 하나'등 200여 곡을 부른 남인수는 때마다 시대 감각에 맞는 노래를 불러 늘 가요계의 정상에 군림했다.
남인수는 6.25 전쟁 직후에는 '이별의 부산정거장'을 불러 만년가수로서 성가를 높혔고, 작고 석 달 전까지 병든 몸을 이끌고 무대에 섰다. 그는 순회공연 때 여관에서 머리카락이 흐트러질까 봐 목침을 베고 잘 만큼 깔끔한 성미에 야구, 배구 등 스포츠에도 능하고 당구도 500을 치는 멋쟁이였다. 그런 남인수에게 스캔들이 없을 리 없었다. 화려한 스캔들의 파노라마 속에 노래하며 달려간 정열아. 그가 45세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나고 1962년 6월 30일 최초의 연예협회장이 엄수되었을 때, 악단은 장송곡 대신 그의 히트곡 '애수의 소야곡'을 연주했다. 상객들은 귓전에 흐르는 그 선율에 따라 울먹이며 고인의 그 간드러지도록 달콤한 목소리를 되살렸다.
운다고 옛 사랑이 오리오만은 눈물로 달래 보는 구슬픈 이 밤 고요히 창을 열고 달빛을 보면 그 누가 불어 주나 휘파람 소리
<
애수의 소야곡 : 이노홍 작사, 박시춘 작곡, 남인수 노래(1938)>
미련도 아쉬움도 없는 그야말로 가수적인 한 생애였다.
[백화난만 -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
그 옛날 악극단이 이른바 마찌마와리(まちまわり)라던 가두선전을 할 때엔, 맨 앞에 악극단의 이름과 가수의 이름이 쓰여진 깃발과 악대가 가고, 그 뒤로 인력거 행렬이 따라갔다. 인력거마다 그 가수의 이름 석 자가 적힌 깃발이 걸려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 행렬에선 인기 있는 가수일수록 뒤쪽에 섰다. 그 이유는 음악 소리를 듣고 뒤늦게 뛰어나온 사람들에게 인기 가수들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 가두선전의 행진대는 간도 용정이나 목단강 등 만주에선 인력거 대신 마차의 행렬이 되곤 했다. 가요계가 풍성해지고 악극단이 흥청거릴수록 마찌마와리의 인력거나 마차가 늘어 갔다. 인기와 대중의 꿈을 한 몸에 모은 가수들도 그만큼 늘어 갔다. 그러나 시국은 그렇지 않았다.
|
박향림 |
1937년에 중일전쟁의 포성은 압록강을 넘어서 울려 왔고, 소위 대동아전쟁의 검은 그림자가 서서히 밀려오고 있었다. 봄이 와도 봄 같지 아니하고, 한 잔 마시는 술에 취하지도 않았다. 이 무렵 만요 붐이 일어났다. 그것은 그 무거운 시대 속에서 잠시나마 즐겨 보자는 안타까운 심리의 표현이었으리라. 박향림이 부른'찻집 아가씨'는 폴카조의 노래로 당시 인기를 끌었다.
1937년에 김용환은 뉴코리아레코드에서 활동하도 있던 그의 동생 김정구를 오케레코드의 손목인에게 소개해 오케에서 재데뷔하도록 했다.
부어라 마시어라 탄식의 술잔 잔 위에 찰랑찰랑 깨어진 하소
<
항구의 선술집 : 박영호 작사, 박시춘 작곡, 김정구 노래(1937)>
그의 재데뷔곡 '항구의 선술집'은 그 시절 젊은이의 어두운 우수를 표현한 노래였다. 그러나 박력있는 그의 목소리는 만요에 더 적합했다. '앵화폭풍'을 부른 것은 우가끼(宇垣) 총독이 최초로 밤벗꽃놀이를 위해 창경원에 3만 개의 색 등을 달면서 돈화문 앞이며 종로4가 네거리가 인파로 메워지던 무렵의 일이었다.
|
김정구 |
'왕서방 연서','총각 진정서' 등이 그의 대표적 초기 만요다. 그는 광복 이후에도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지만, '뒤져 본 사진첩', 수박행상', '코리안 맘보' 등 만요나 '바다의 교향시' 등 시원스런 노래 외에 이시우 작곡의 '눈물 젖은 두만강' 같은 것은 일제 36년을 통한 국경 애화와 함께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노래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떠나간 그 배는 어디로 갔오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
눈물젖은 두만강 : 김용호 작사, 이시우 작곡, 김정구 노래(1938)>
레코드 취입보다 무대가수로서 명성을 가졌던 가수들도 있었다. 송달협은 그 중성에 가까운 특이한 음성으로 무대를 휩쓸었으며, 그의 취입곡 '야루강 천리', '처녀일기'는 제법 애창되었다.
눈물의 여왕 전옥도 노래를 불렀고, 배우 석금성도 노래를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전문적인 가수라기보다는 배우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
신카나리아 |
한편, 그 당시 표현으로 넌센스라 했던 코메디를 주로 했던 신카나리아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16살에 무대에 선 이후 남편 임생원과 같이 무대에서 넌센스도 했고 막간물에서 노래도 불렀다.
조선예술좌, 신무대 등을 전전하는 그는 1931년부터 레코드 취입도 했다. 시에론, 콜롬비아 등 레코드사에서 취입한 그의 노래 가운데 '뻐꾹이' 등이 히트했다. '강남제비'는 원래 이애리수의 곡이었지만, 신카나리아의 노래로 알려질 만큼 그 인기가 뚜렷했다.
김응선은 가수로서는 화려한 각광을 못 받았지만 신의가 있는 사람으로 가요계에 알려졌고, 남일연, 박향림 등이 활발하게 활동했다.
1936년에 동양극장에서 아흐레나 롱런을 하고 기생이란 기생은 모두 다 그 구경을 가 버려서 요리집이 텅 비었다는 신파연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가 1939년에 영화화되었을 때 그 주제곡으로 취입되었던 '홍도야 울지 마라'는 가요콩쿨 출신의 김해 사람 김영춘이 취입한 것으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영화는 동양극장의 그 스탶으로 그 때 돈 4천 원이나 들여 만든 것이었지만 흥행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그 주제가는 남아 요즘도 선술집의 젓가락 장단과 함께 흘러나와 아련한 옛날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켜 준다.
우리 가요사상 작곡가와 가수의 콤비라면 초기의 전수린, 이애리수가 있고 오케레코드의 매상을 올렸던 박시춘, 남인수 그리고 오케레코드와 맞겨루던 태평레코드의 이재호, 백년설 콤비가 있었다.
|
백년설 |
백년설(본명 이창민)은 경북 성주 출신으로 레코드계 주변을 방황하던 중 전기현 작곡의 '유랑극단'을 취입해서 당장 스타덤에 올라섰다. 그의 노래 '나그네 설움'은 십여만 장이나 팔려 태평레코드 특약점으로 하여금 즐거운 비명을 지르게 했다.
오늘도 걷는다만은 정처없는 이 발길 지나온 자국마다 눈물 고였다 선창가 고동 소리 옛 님이 그리워도 나그네 흐를 길은 한이 없어라
<
나그네 설움 : 조경환 작사, 이재호 작곡, 백년설 노래(1940)>
나그네라는 것은 대중가요의 영원한 테마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 노래 속에 나그네는 망명가와 실향가 속에 엿보이던 그런 슬픔, 그런 한이 맺힌 애상을 지니고 있다. 애절한 노래가 잘 팔리던 시절이었다. 방황과 센티멘탈과 푸념이 대중의 가슴에 공명하던 시절이었다. 그의 노래'복지만리', '두견화 사랑', '고향설', '번지 없는 주막'도 그의 주가를 높였다.
1940년 전후는 가요콩쿨의 전성시대였다. 가요콩쿨은 신인 발굴에도 목적이 있었지만, 각 레코드사의 신곡 선전 방안이기도 했다. 자사 전속가수들의 노래와 막간가수들의 극을 가요콩쿨과 함께 얼버무려 대성황을 이루었다. 읍내 가두에 나붙은 가요콩쿨 광고는 젊은이들의 피를 뜨겁게 했고 규모가 큰 가요콩쿨은 연일연야 밤 하늘을 노래로 채웠다.
특히 북한지방에서 열린 가요 콩쿨에선 숫기 없는 아가씨들이 청중들을 떠밀고 나와 저고리가 뜯어지고 옷고름이 찢어진 줄고 모르고 열창하다가 낙선하면 낙루하기도 했다. 작곡가 김교성은 콩쿨대왕이라고 별명이 붙을 만큼 신인 발굴에 재능을 보였는데, 흔히 심사석에 항의가 들어오면 "그럼 당신들이 심사하시오"하고 뒷짐을 지고 돌아서는 바람에 항의하던 사람들이 도리어 풀이 죽었다는 일화가 있다.
1939년 조선일보사 김천지국이 주최한 가요콩쿨에는 전국에서 무려 1700여 명이 모여들었다. 북으로 길주, 명천에서 남으로 제주 등지에서까지 이 김천을 향해 모여들어 사흘 밤낮이나 성황을 이루었다.
이 콩쿨에서 진방남(본명 박창오)가 1등으로 당선되었다. 여기서 노래 솜씨를 인정받은 진방남은 즉시 '불효자는 웁니다', '하물선 사랑' 등 여덟 곡을 태평레코드에서 취입했다.
|
'불효자는 웁니다' 진방남 |
불러 봐도 울어 봐도 못 오실 어머님을 원통해 불러 보고 땅을 치며 통곡해요 다시 못 올 어머니여 불초한 이 자식은 생전에 지은 죄를 엎드려 빕니다
<
불효자는 웁니다 : 김영일 작사, 이재호 작곡, 진방남 노래(1940)>
진방남은 이 '불효자는 웁니다' 등의 히트에 이어 1942년에는 '꽃마차'를 불러 인기를 한 몸에 모았다. '세세년년', '잘있거라 항구야', '고향만리 사랑만리' 등으로 톱가수가 된 진방남은 이후 반야월이란 이름으로 작사에도 손을 뻗쳤다. 반야월이 누구인지 알리지 않고 김교성에게 가사를 줘서 각광을 받았다는 처녀작 '넋두리 이십년' 이후 '뽕 따러 가세', '울고 넘는 박달재', '단장의 미아리고개' 등 무려 삼천여 곡의 많은 가사를 지었다.
|
황금심 |
1937년 서울 청진동의 어느 여염집에선 소녀의 앳된 노래 소리가 흘러나와 행인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어느날 이 노래에 매혹된 한 청년이 이 집 문을 두드렸다. 이 사람은 바로 빅터레코드의 문예부 직원.
그 이튿날로 레코드사로 와 주십사고 부탁을 받은 목소리의 주인공인 17세 앳된 소녀가 바로 황금심이었다. 이화자풍인 그의 노래는 구성진 콧소리와 함께 가슴을 흔들 만했다. 데뷔곡은 '알뜰한 당신'이었다.
이밖에도 숱한 신인가수들이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 JODK 경성방송국 함창단 출신으로 가요콩쿨에 입상한 계수남, '국경의 부두', '아들의 하소'를 불렀던 고운봉 등이 등장했다.
가수를 천대하는 것은 이제 먼 옛날 얘기가 되었다. 이 무렵 가수가 되는 것은 동화 속 신데렐라처럼 멋진 것이었다.
|
장세정 |
평양 화신상회 점원이었던 장세정은 오케레코드의 이철에게 발탁되어 일약 인기 가수가 되었다. '연락선은 떠난다', '역마차', '잘있거라 단발령', 항구의 무명초' 등 그의 히트송은 노래의 은하수에서도 가장 빛나는 별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연락선은 떠난다'는 관부연락선에 맺힌 민족의 한을 노래해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쳤다.
쌍고동 울어 울어 연락선은 떠난다 잘 가소 잘 있소 눈물 젖은 손수건 진정코 당신만을 진정코 당신만을 사랑하는 까닭에 눈물을 삼키면서 떠나갑니다 울지를 말아요
<
연락선은 떠난다 : 박영호 작사, 김송규 작곡, 장세정 노래(1937)>
밤배에 님을 보내고 손수건에 뜨거운 눈물을 적시며 가만히 읊조려 보던 노래였다. 부산항 바닷물에 슬픈 눈물을 뿌리며 얼마나 많은 여인들이 이런 슬픔, 고통에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삼켰던 것일까.
|
백난아 |
1940년 태평레코드의 전국 콩쿨에서 2등 당선을 한 백난아는 본명이 오금숙. 그는 미모를 자랑하면서 일본, 만주, 남중국 등 각처를 순회하는 공연에서 관중들의 환호를 받았다.'망향초 사랑', '갈매기 쌍쌍', '아리랑 낭낭', '직녀성', '찔레꽃' 등은 태평의 마지막 전성시대의 노래였다.
채규엽이 건재했고 태평레코드의 최남용도 쉬지 않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낙화삼천'의 노벽화, '절연편지'의 나성려, '바다의 젊은 날'이 히트한 박광욱, 최병호, 김선영 등이 활약했다.
청진 가요콩쿨에서 1등을 한 이인권은 빅터레코드의 중겸 멤버로 활동하여, 그의 노래 '얄궂은 운명'은 침체했던 빅터레코드의 매상고를 올렸다.
|
박단마 |
황금심과 같이 출발했던 박단마는 넌센스를 곧잘 취입하는 코메디언이기도 했지만, 그의 노래 '나는 열일곱 살'은 젊은 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나는 가슴이 울렁거려요 당신만 아세요 열일곱 살이예요 가만 가만히 오세요 요리조리로 노랑새 꿈꾸는 버드나무 아래로 가만히 오세요
<
나는 열일곱 살 : 이부풍 작사, 전수린 작곡, 박단마 노래(1938)>
유혹적인 제스쳐, 발랄한 그의 몸매는 노래하는 박단마를 더욱 화려하게 했고 순회공연 때엔 무대 뒤 분장실에 꽃다발이 쌓여 갔다.
은하에 흐르는 별들
1940년말 무렵 가수들의 레코드회사별 분포는 이렇다.
빅터레코드 - 황금심, 박단마, 이규남, 송달협 콜롬비아레코드 - 김영춘, 강남주, 남일연, 계수남 오케레코드 - 남인수, 김정구, 이화자, 이난영, 장세정, 이인권, 고운봉, 박향림 태평레코드 - 백년설, 진방남, 백난아, 미스코리아 폴리돌레코드 - 채규엽, 현정남
이 무렵에 활동한 작곡가는 전수린, 박시춘, 이재호, 손목인, 김교성, 이시우, 김준영, 전기현, 이봉룡, 문호월, 김용환, 남지춘 등이었고, 작사가로는 이서구, 이하윤, 박영호, 조명암, 김운하, 천아토, 이부풍, 김영일, 강사랑, 고려성, 유도순 등이었다.
[레코드의 신화]
레코드사들의 기업적인 성공과 함께 레코드 판매에는 대규모적이고 고도로 발달된 광고 방식이 난무했다. 레코드를 시계점이나 모자점에 위탁판매하던 것은 아련한 옛날의 얘기다. 레코드 상점엔 아치가 서고 수천 장의 가사지가 가게 앞에 쌓이고 행인들은 그 가사지를 받아서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불렀다. 이것이 이른바 가두합창인데, 때로는 수백 명이 모여 순사가 출동하곤 했다. 매달 각 회사마다 신보를 발간하고 신문이나 잡지에 선전광고가 실리고 가수들의 브로마이드가 한 사람당 수 종씩 찍혀 나돌았다.
|
축음기 레이블 |
하늘에 광고풍선을 올렸고 백화점 진열장은 신보 광고로 천연색이었다. 광고지를 비행기로 뿌린 일도 있었고, 창경원의 봄벚꽃놀이 때면 야외무대 공연과 함꼐 광고지와 신곡의 가사지가 낙화처럼 휘날렸다. 포스터도 대, 중, 소 세 종류였고, 심지어는 등불놀이까지 등장했다.
그 무렵 레코드가게에 들렀다고 하자. 미소녀의 안내로 시청실에 들어가 노래를 듣고 있는 동안 그 미소녀는 섬섬옥수로 찻잔을 들고 들어오리라. 향긋한 차를 맛보며 노래를 듣고 간신히 "내일 사러 오죠."하고 툭툭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 미소녀가 결코 얼굴을 찡그리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의 개런티를 보면, 물론 회사에 따라 다르고 가수에 따라 달랐겠지만 작사료 10원, 작곡료 10원에 중견가수의 전속료가 월 8, 90원이었고, 재계약을 할 때마다 전속료와 계약금이 증가되었다. 이난영이 다박머리 소녀로 오케에 입사할 때 전속료가 150원이었던가. 일본에 가서 레코드를 취입할 때마다 출장비에 한 곡당 40원(한 회 취입 7, 8곡)의 수당이 나왔다니 가히 짐작할 만하다. 그리고, 레코드 한 장당 5전씩의 인세를 받는 가수도 수두룩했다.
각 레코드사의 가수 스카웃전도 미상불 대단해서 자기 회사의 가수를 다른 회사에 빼앗기지 않으려고 계약만료기일 서너 달 전에 재계약을 서두르기도 하는가 하면, 인기가수의 경우 이성관계까지 내사할 정도였다.
채규엽의 경우 1936년에 콜롬비아레코드와 오케레코드 두 회사와 이중계약을 맺어 소송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렇게도 막대한 수입이 있으면서도 호화를 다한 생활 끝에 돈이 궁해진 풍류아가 저지른 실수라고나 할까.
백년설이 태평레코드에서 오케레코드로 옮겨 올 때 입사축하금이 3천 원, 전속료 2천 원, 월급이 350원이었다. 당시 가장 비싼 축이었던 양복류 최고급 홈스팡 주문복이 40원 남짓이고 보면 그들의 호화로운 생활을 짐작할 것이다.
[악극단의 시대]
막간물은 원래 간단한 버라이어티쇼였다. 그러나 각 레코드사가 자사의 선전을 위해 전속악단과 전속가수를 실연무대에 내세우는 일이 잦아졌다. '오케레코드 7인의 밤' 이런 행사가 흥행적으로도 성공하자 유사한 흥행단체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세칭 무대가수가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다. 이 무대가수들은 인기가 높아지면서 취입을 하기도 했는데, 박옥초, 심연옥, 황정자, 황순덕, 김백희, 왕숙랑, 유정희, 태성호, 박혜옥, 김용대, 현인 등이 있었다.
한편 각 레코드사마다 경쟁적으로 무대공연을 지속해 가면서 쇼의 양식도 다채로워졌다. 노래의 나열만으론 먹히지 않자 가요극이라는 것이 생겼다. 극적 스토리에 가요를 삽입하고 거기에 무희를 등장시키는 입체적인 진행이었다. 그러자니 자연히 각 악극단마다 개성이 생겼고, 전문적인 극작가, 작곡가, 연출가들이 잇달아 각 단체에 들어갔다. 빅터레코드 연주단은 나중에 반도가극단이란 이름으로 주로 오페레타적인 것을 상연했고 콜롬비아레코드는 라미라가극단이란 이름으로 오리지널 가극을 상연해서 자웅을 겨루었다.
오케레코드의 이철은 이 두 단체를 제압할 목적으로 오케연주단을 혁신, 발전시켰다. 최초에는 오케그랜드쇼 한 팀뿐이었지만, 흥행이 순조롭고 수요가 증대하자 오케그랜드쇼와 오케싱잉팀으로 나누어 각각 남북한으로 순회공연을 떠났다.
다양한 공연물, 화려한 무대로 흥행계를 뒤흔든 이 일행에는 아리랑보이즈와 저고리시스터즈란 보컬그룹의 시조들도 있었다. 아리랑보이즈는 악기도 다루고 노래와 대사를 뒤범벅해서 지금 비틀즈의 선조였고, 저고리시스터즈는 이난영, 장세정 등이 색동저고리를 입고 나와 환호를 받았다. 아리랑보이즈 중에 샹송을 부르던 보드빌리언 이복본은 모리스 슈발리에를 닮아서 인기가 있었다.
이들 일행이 일본에 가서 영왕 이은의 궁을 찾은 것은 특기할 만하다. 김정구가 '낙화삼천'을 불렀을 때 영왕은 망국한의 설움이 북받혔던지 얼굴을 손에 파묻고 흐느꼈고, 가수 김정구마저 격앙해서 뺨에 눈물을 흘리며 노래를 불렀다. 좌중이 모두 눈시울을 적셧다. 나라 잃은 황태자와 그 백성들의 눈물 젖은 대화. 비록 오고가는 말은 없어도 부르는 노래 속에 한이 맺혀, 듣다 못해 부르다 못해 통곡했던 것이다.
악극단 시대 얘기가 나왔으니 여기 오케레코드의 사장이었고 조선악극단의 지휘자였던 이철에 대해 기술해 보자.
이철은 연희전문학교를 중퇴, 영화관에서 악사를 하다가 오케레코드를 창설했다. 1936년에 경영난으로 오케레코드가 일본인 손에 넘어가자 오케레코드 문예부장을 역임하면서 악극단을 창설하여 일본, 만주 등의 순회공연을 했다. 그는 가요를 듣는 귀가 밝아 히트 여부를 귀신처럼 알아맞춰 오케레코드가 그 많은 히트곡을 내놓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한편 그는 일본 경찰의 간섭도 시원스레 해결했다. 공연 금지가 나면 곧 현지로 가서 배짱과 능란한 일본어로 당장 공연 금지를 해제시키곤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는 상해 공연계약 중에 발병하여 귀국한 후 미진한 꿈을 안은 채 저 세상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 외 규모가 큰 단체로는 성보가극단과 약초가극단이 있었다. 성보가극단은 요시모도(吉本)흥업이란 일본 흥행단체의 뒷받침으로 활동했고, 약초가극단 역시 일본 재벌의 자본으로 한 동안 흥청거렸다. 태평레코드 연주단 또한 순회공연을 했지만 악극단으로서는 활발한 활약을 하지 못했다
3. 수난기
일제 36년은 한반도 전체를 하나의 감방으로 만들고 있었다. 일본 경찰의 눈초리가 번득이지 않는 곳이 없었고 그들이 찬 칼의 절걱거리는 소리가 안 들리는 곳이라곤 없었다.
'황성의 적'이 맨 처음 불렸을 때 작곡가 전수린과 작사가 왕평은 종로경찰서 유치장의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새우잠을 자야 했고, 조선악극단의 동경 공연 때 가수 강남향의 특이한 승무에서 북 가운데 그려진 태극이 말썽이 되어 공연 중지와 함게 인솔 책임자인 김상진 등이 동경 경시청에 검속된 일도 있었다.
이 조선악극단이 귀국해서 부민관 공연을 하던 중, 막간에 일본 공연의 성과를 자랑하느라고 "게다짝 정도는 우리 조선악극단을 따를 수 없다"는 말이 말썽이 되어 주재자 이철이 10여 일 동안 종로경찰서에 구금된 일도 있었다. 그들이 금지한 노래를 부르면 임석한 순사가 무대에 올라와 노래 부르는 여가수에게 발길질을 하기도 했다. 악극단의 대본은 꼭 검열을 받아야 했고 조금만 심상치 않은 내용이 있어도 그 단체는 막을 올릴 수 없었다.
|
40년대의 공연 모습 |
1941년 12월 8일 이른바 대동아전쟁이 시작되자 한국 가요인들은 일제의 채찍을 더욱 받아야 했고 전의 앙양을 위한 군가를 불러야 했다. 이 무렵 모든 공연물은 국어(일본어) 상용이라는 원칙하에 우리말 대본은 검열에 걸려 햇빛을 보지 못했다.
고복수가 일본 순회 공연 때 '풍년가'가 우리말이라고 해서 공연 금지를 당하자 할 수 없이 가사의 한자만 일본어로 고쳐 불러야 했던 웃지 못할 넌센스도 있었다. '풍년이 왔네 풍년이 왔네' 이 노래를 '호넨가 왔네 호넨가 왔네'로 불렀다. 그것은 노래가 아니라 희극이었다. 아니 처절함이 극도에 달한 비극이었다.
라미라가극단이 일본 공연을 갔을 때 준비한 공연물이 가극 '콩쥐팥쥐'였는데, 이 '콩쥐팥쥐'는 우리말로 되어 있어 대본 사용 허가가 나지 않았다. 밤을 새워 대본을 일어로 뜯어고치고 의상은 중국 것, 몽고 것으로 지어야 했다. 중국옷을 입고 일본말로 노래하는 가극 '콩쥐팥쥐'야 말로 절통한 비극, 웃다 울고 울다 웃어야 할 희극이었다.
레코드에 취입된 노래의 가사도 1절은 우리말 2절은 일본말이었고, 끝내는 우리말은 냄새도 풍기지 못하게 했다. 그런가 하면 '백제의 칼'이란 우리 고담극을 일본의 나니와부시를 써서 우리말로 부르기도 했다.
내선일체란 미명 아래 숱한 죄악들이 강요되었던 것이다. 오케레코드에서는 미나미총독이 내선일체를 강요하는 연설을 취입, 레코드 상가에 돌리기도 했다. 그런 레코드가 팔릴 것이라고 찍어 낸 것일까? 아니다. 이것 역시 총독부의 조선인융화정책의 일환이었다. 강요된 연극의 막은 오른지 오래였다.
전쟁이 막바지에 들면서 청승맞은 그들의 국민가요가 학교 운동장에서 울려퍼지고 군가들이 조석으로 라디오를 울렸다. 적성국가에 본사가 있다는 빅터와 콜롬비아는 쫓겨나 이름을 바꾸어야 했고 다른 레코드사 문전에도 거미줄이 쳐졌다.
화려하던 가요계의 신화들은 늦가을 펄럭이는 낙엽들처럼 서글펐다. 가요인들도 주린 배를 움켜잡고 쌀 한 톨을 얻기 위해 배급 행렬에 끼어 섰다. 은쟁반에 사례 10원 바쳐 주는 맛에 방송국에 나가 군가를 불렀다. '아들의 혈서', '우리는 제국군인', 국책영화 주제가 '너와 나' 같은 것이 나돌았다.
외국 영화 상영 금지로 인해 전국의 영화관은 연예물로 채워져야 했고 소위 산업전사(징용당한 노동자)들을 공장, 광산으로 찾아 다니며 위문한다 하여 숱한 위문단이 조직되었다. 노래 한 곡 부르고 사양길에 있던 가수, 두세 명의 무용수와 얼치기 코메디언이 모이면 위문단이 되었다.
조선총독부 학무국 정보과 아래에 조선연극문화협회라는 것이 있어서, 거기서 내 주는 기예증이 없으면 그나마 공연단체에 끼지도 못하고 밥을 굶어야 했다.
아름다운 노래는 사라졌다. 가수도 악극단도 없었다. 거기에는 슬픈 앵무새와 허수아비와 광란의 전쟁 앞에 바쳐지는 굴욕만이 있었을 뿐이다. 그야말로 우리 가요의 수난기, 아니 암흑기였다.
4. 재생기(1)
[아, 감격의 해방]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왕(日王) 히로히토의 떨리는 목소리가 라디오에서 울려 나오고 있었다. 잡음 투성이의 그 중대 방송은 맨 처음엔 그 누구도 무슨 내용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누군가 ‘무조건 항복’, ‘해방’이란 말을 되뇌었다. 모두 꿈만 같았다. “대한독립 만세!” 누군가의 외침. 목멘 소리였다. 여기 저기 통곡이 번져갔다. 너무 기뻐서, 너무 감격해서 터져 나오는 울음이었다. 그 울음과 만세 소리는 삼천리 강산의 눈부시게 푸른 8월 하늘로 번져갔다.
|
김교성(작곡가) |
해방의 그 날까지 가요인들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던가. 작곡가 김교성은 공연단체를 이끌고 일본 북해도 탄광에서 위문공연을 하고 있었고, 라미라가극단 같은 큰 단체는 등화관제와 B29 공습 때문에 문을 닫고 있었다. 평양에는 평양 매일신문사에서 주재하는 평매이동가극단이란 단체가 활동하고 있었으며, 서울에서는 성보악극단이 명치좌(예전 명동 국립극장 자리)에서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고 금강악극단이 개성 공연에서 돌아와 종로 어느 여관에서 서울 공연 준비를 하고 있었다.
금강악극단의 공연물은 ‘농부의 합창’. 쌀 증산만이 성전을 완수하는 길이라는 요지의 악극이었다. 단원들은 공연 준비 때문에 밤 늦게 잠자리에 들어 늦잠을 자다가 꿈 같은 소식에 후닥닥 일어나 거리로 뛰쳐나갔다.
약초악극단 역시 공연 준비를 하고 있던 중 이 날을 맞았다. 그들은 바로 조선연극문화협회의 요청으로 휘문고보로 갔다. 여운형의 연설이 있으니 그 전에 해방의 감격을 연주해 달라는 것이었다. 어제까지 총독부의 수족이었던 협회가 이젠 달라졌던 것이다. 단원들은 휘문고보 넓은 운동장을 어깨춤을 추며 돌았다.
감격의 순간이었다. 거리에는 감격의 물결이 흐르고 있었다. 청년들이 극장으로 들어가 악기를 꺼내 마구 불고 두드렸다. 이런 축제가 언제 또 있었던가. 아마 통일의 그 날이 오면 다시 한번 이런 축제가 있을까.
여기서 8.15의 감격이 낳은 우스개 이야기 한 토막을 보자. 광복 직후 9월 2일에는 미군이 진주했고, 앞서 8월말에는 미국 항공단이 먼저 들어왔다. 일본군 조선군사령부가 무장해제를 당하기 전이다.
김희봉, 이동춘, 김준덕, 김희조, 전봉열, 김호길 등 청년들이 서울음악단이란 것을 조직해서 반도호텔에 투숙중인 미국 항공단의 환영연을 하러 갔다. 그런데, 주문해 놓은 옷을 받고 보니 턱시도가 아니라 모닝코트였고, 거기다 나비넥타이를 매고 보니 흡사 새신랑들 같았다. 그들이 신은 신이란 것도 이른바 지까다비(じかたび, 노동자들이 작업할 때에 신는 신)가 아니면 헌 운동화였다. 전쟁통에 구두가 있을 리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희극적인 옷차림으로나마 그들은 반도호텔로 가서 미군을 환영하는 뜨거운 감격을 연주했다. ‘카르멘 실버스’, ‘다뉴브강의 잔물결’ 등을 연주했는데, 이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고 미군들이 얼마나 웃었겠는가. 단원들이 연주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통행금지 시간인 8시가 넘었다. 그래서 응급대책으로 일본군의 조선군사령부 표시가 있는 완장을 얻어 차고 귀가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해방이 된 지 열흘이 넘었는데도...
[가거라 삼팔선아]
아 산이 막혀 못 오시나요 아 물이 막혀 못 오시나요 다 같은 고향 땅을 가고 오건만 남북이 가로막혀 원한 천리길 꿈마다 너를 찾아 꿈마다 너를 찾아 삼팔선을 헤맨다
<
가거라 삼팔선 : 이부풍 작사, 박시춘 작곡, 남인수 노래(1948)>
감격의 그 날에는 삼팔선이란 원한 맺힌 말을 알 리 없었다. 그러나, 삼팔선은 가혹한 현실로 눈 앞에 펼쳐졌다. 고려레코드가 내놓은 이 ‘가거라 삼팔선’이 유례 없이 히트한 것은 이 노래 속에 담긴 그 처절한 감상이 모든 사람의 가슴에 공명했기 때문이리라. 이어 남인수는 1949년에 ‘달도 하나 해도 하나’를 불러 또 한번 설움에 우는 겨레의 가슴을 쳤다. 물론 해방의 감격을 노래한 것도 있었다.
해방된 역마차에 태극기를 날리며 사랑을 싣고 가는 서울 거리냐 울어라 은방울아 세종로가 여기다 인왕산 바라보니 달빛도 곱네
<
울어라 은방울 : 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곡, 장세정 노래(1948)> 노래 : 은방울 자매
장세정이 불렀던 ‘울어라 은방울’은 해방의 희열 바로 그것을 표현한 것이었다. 또한, 돌아오는 해외동포들을 맞는 축가도 있었다.
돌아오네 돌아오네 고향산천 찾아서 얼마나 그렸던가 무궁화꽃을 얼마나 외쳤던가 태극깃발을 갈매기야 울어라 파도야 춤춰라 귀국선 뱃머리에 희망도 크다
<
귀국선 : 손로현 작사, 이재호 작곡, 이인권 노래>
이인권이 불렀던 이 노래는 건국에 대한 꿈이 부풀던 시절의 노래다. 한편, 고운봉이 불렀던 ‘선창’이 이 무렵 새삼 유행하기도 했다.
‘가거라 삼팔선’을 낸 고려레코드보다 조금 뒤에 간판을 내건 럭키레코드사는 상해에서 돌아온 현인에게 ‘신라의 달밤’을 취입시켰다. 이 노래는 선풍적인 인기를 모아 6.25 전쟁 전까지는 어린아이들도 따라 불렀다.
아 신라의 밤이여 불국사의 종소리 들려 온다 지나가는 나그네야 걸음을 멈추어라 고요한 달빛 어린 금오산 기슭에서 노래를 불러 보자 신라의 밤 노래를
<
신라의 달밤 : 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현인 노래(1949)>
격동기에 이런 회고조의 노래가 불린 것은 무슨 까닭일까. 대중들의 가슴 속엔 옛날 신라시대의 태평성대를 꿈꾸는 마음이 있지는 않았을까.
‘신라의 달밤’이 히트한 뒤를 이어 현인은 또 ‘고향만리’를 내놓았다. ‘고향만리’는 남태평양에 징용으로 끌려갔던 우리 젊은이의 향수를 읊어 애달픈 추억을 불러일으킨 노래로 이 역시 히트했다. 이밖에도 현인은‘럭키서울’,‘서울야곡’ 등을 연달아 발표했다.
이 무렵 가요팬들의 갈증이란 대단했다. 엿장수들이 모아 오는 고물 레코드를 재생하는 것이 그 무렵 레코드 제작이었는데, 그나마 전기 보일러로 프레스 작업을 하는 것이 아니고 숯불에 구워 내는 것이라 히트곡이라면 한 달 전에 예약을 하고서야 겨우 살 수 있었다.
|
백설희 |
광복 이전 가요의 황금기에 레코드가게에서 미녀가 미소를 던지고 고급 차를 대접하며 레코드를 팔 때와는 엄청나게 다른 풍경이었다. 팔고 싶어도 레코드가 없어 못 팔 때였다. 그러나, 소자본으로 설립한 레코드사들은 쉽게 생겼다가 쉽게 사라졌다. 남인수가 손수 차렸던 아세아레코드며, 오케, 서울 등이 명멸했다.
이 무렵 백설희, 김백희, 이예성, 심연옥, 한복남 등이 무대에서 주가를 인정받고 있었다.
서울 중앙방송국이 가요를 전파에 실었고, 신인 가수를 모집하기도 했다.
1947년에 뽑힌 금사향, 송민도는 그 중에서도 뛰어나 밝은 앞날을 예고하고 있었다. 박재홍은 ‘마음의 사랑’, ‘울고 넘는 박달재’ 등을 불러 인기를 끌기도 했다. 좌우익의 싸움이 있었고 피비린내 나는 대결도 있었다. 찬탁, 반탁의 소용돌이 속에 삼팔선을 넘어 월북하는 사람도 있었고, 자유를 찾아 월남하는 사람도 있었다.
[째즈와 악극단]
해방이 되고 미군이 진주하자 씨레이션, 츄잉껌, 째즈 등 새로운 문물이 직수입되었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째즈 레코드가 단음계의 일본풍 노래에 식상했던 사람들에 의해 낡은 축음기 위에서 돌았다. 현인이 부른 ‘베사메무쵸’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거리를 휩쓸었는데, 많은 사람들은 키스를 더 해 달라는 제목의 의미를 모르고 ‘베사메무쵸’를 여자 이름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 미국 대사가 하필 무쵸라서 그런 성을 가진 여자가 있는 것으로 알았던 것이다. 모든 것이 과도기의 일이었다.
|
손목인(작곡가) |
이 무렵 미군부대 주변을 서성거리는 악극단도 많았지만, 새로운 음악과 악극 재건을 위한 노력도 활발했다. 그러나, 이러한 경음악단과 악극단은 자금난과 흥행 부진으로 금방 사라져 버리는 비운을 맞기 일수였다.
해방 이후 최초로 풀멤버를 구성해 조직되었던 이안드레아 탱고오케스트라는 개인 재산 2백만 원을 몽땅 털어 국립극장에서 막을 올렸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이러한 예는 허다했으나 그래도 오래 명맥을 유지했던 것으로는 김해송의 KPK악극단과 손목인의 CMC악극단, 조춘영과 이재춘 등이 이끈 OMC악극단 등이었다.
김해송의 KPK악극단은 주로 미군 대상 무대를 경음악과 째즈로 휩쓸었다. 이 무렵은 가히 KPK악극단의 전성시대로 그 째즈리듬은 미군들을 즐겁게 했고, 일반 무대에서도 환호를 받았다.
반야월은 남대문악극단을 이끌었고, 김호길 등의 뉴코리아악단도 전국을 순회했다. 이 때 악극단과 경음악단들은 미군부대 공연이나 캬바레가 주활동무대였고, 김생려가 이끌던 서울관현악단조차 이러한 방면에서 일하기도 했다.
|
영화 '푸른 언덕' 신문광고 |
황문평, 김형래 등의 장미악단은 뮤지컬과 세미클래식의 융성을 위해 분발했지만, 1년이 못 가 문을 닫았다.
흥행계가 안정되어 있지 않아 생활비를 벌기 위해 몇 명의 가요인들이 단체를 만들었다가 한번 공연으로 해산되는 일이 잦았다. 이러한 이합집산 속에서 뚜렷한 경향은 째즈가 주요 분야로 되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신민요를 부르던 박단마, 박혜옥, 유정희 등이 째즈가수로 변신하기도 했다.
현인이 주연한 음악영화 ‘푸른 언덕’은 해방 전 오케레코드 가수들이 총출연했던 영화 ‘노래 조선’에 이어 해방 이후 최초의 음악영화이기도 했다.
[6.25, 그 수난의 날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남침은 그 헤아릴 수 없는 비극의 서막이었다. 피로 물든 강산에 가요인들의 수난도 뼈저린 것이었다. 미처 피난하지 못한 가수 이인근, 이몽녀 부부와 김홍렬, 강남춘, 이복본이 끌려갔고, 작곡가 김형래, 김해송도 납북되었다.
김해송이 끌려간 후 아내 이난영은 얼굴에 검정칠을 하고 마포 형무소의 담벽을 돌았다. 어느 비내리는 밤 김해송은 어둠 속에서 이난영이 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쇠고랑을 찬 채 끌려갔다. 그것이 그들 부부의 마지막 작별이었다.
|
심연옥 |
신카나리아는 고구마장수를 하며 수난의 날을 견디려고 했지만, 누군가의 밀고로 붙잡혀 갔다. 죽음의 행렬이 미아리고개를 넘고 총부리 앞에서 반죽음 상태로 북으로 끌려갈 때 구사일생으로 탈주할 수 있었다.
동란의 시절, 부산항은 피난민들로 꽉 들어차 있었다. 좁은 네거리에서 서로 발을 밟으며 삶을 찾아 헤매야 했다. 무대도 없었다. 노래할 힘도 없었다. 이름난 가요인들이 국제시장 바닥에서 서성거리고 40계단 싸늘한 길바닥에서 울었다.
젊은 가수들은 전선으로 가기도 했고, 작곡가 박시춘, 김호길, 작가 유호, 김영수, 가수 심연옥, 신카나리아, 송민도, 금사향 등은 정훈국 문예중대에 배속되어 모여 있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9월 28일에는 서울이 수복되었다. 이 때 승리일보에 ‘승리의 노래’가 가사 현상모집에 1등으로 당선되어 실리기도 했다.
4. 재생기(2)
또한, 이 무렵에는 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의 ‘전우야 잘 자라’가 전국을 휩쓸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 꽃잎처럼 사라져 간 전우야 잘 자라 너무나 애절한, 애상적인 노래였지만, 적의와 통분이 뒤범벅되어 전선과 후방 모두에서 이 노래의 합창은 더욱 높았다.
전쟁 동안 숱한 우리 가요인들이 납북되기도 했지만, 자유를 찾아 남하하는 피난민의 대열 가운데에는 가수들도 섞여 있었다.광복 이전 빅터레코드에서 활동하던 한정무가 대표적인 경우라 할 것이다.
한복남은 피난지 부산에서 레코드 바늘 장수로부터 출발해 도미도레코드사를 차렸다. 집안 식구가 모두 달려들어 레코드를 찍어 내다가 삼삼오오 흩어져 팔러 나가야 했다. 손영준, 김흥산의 스타레코드와 이병주가 대구에서 차린 오리엔트레코드, 유니온레코드 등이 기를 쓰고 있었다.
1954년에 스타레코드에서 박단마가 취입한 ‘슈샤인보이’는 그 무렵의 풍경을 되살려 주는 노래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황금심의 ‘삼다도 소식’, 신카나리아의 ‘승리부기’, 조금 앞서 나온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 등이 이 당시 히트한 노래들이다.
‘굳세어라 금순아’는 월남 피난민들의 애절한 기원과 푸념이 절실히 그려져 있어, 밤이면 부산 남포동 선술집에서 쉰 목소리에 실려 들리던 노래다. 한복남의 도미도레코드사에서는 신인 허민을 얻어 ‘페르샤 왕자’를 내놓았다. 대구의 오리엔트레코드사에선 주로 박시춘을 중심으로 남성봉이 부른 ‘쌍가락지 논개’, 이인권의 자작곡‘미사의 노래’, 심연옥의 ‘아내의 노래’(노래:은방울자매), 신세영의‘전선야곡’ 등 히트곡을 내놓았다.
가랑잎이 휘날리는 전선의 달밤 소리 없이 내리는 이슬도 차가운데 단잠을 못 이루고 돌아눕는 귓가에 장부의 길 일러 주신 어머님의 목소리 아 그 목소리 그리워
<
전선야곡 : 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신세영 노래(1952)>
그 무렵 부산항은 6.25 전쟁의 비극을 좁은 시가지에 담고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피난민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전선 소식에 눈물을 뿌리기도 했고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인간이 가는 곳엔 로맨스가 생기는 법이라, 토박이 아가씨와 외로운 피난 청년의 로맨스가 싹트기도 했다. 먼 훗날 그토록 못 견디게 슬프던 부산항의 석양도 추억이 됐으리라. 부산항에 아롱진 노래로는 박재홍의 ‘경상도아가씨’가 대표적이다.
40계단 층층대에 앉아 우는 나그네 울지 말고 속 시원히 말 좀 하세요 피난살이 처량스레 동정하는 판자집에 경상도 아가씨가 애처로워 묻는구나 그래도 대답 없이 슬피 우는 이북 고향 언제 가려나
<
경상도 아가씨 : 손로원 작사, 이재호 작곡, 박재홍 노래>
이 노래는 그 때 그 누구나 가슴에 담아 두고 있던 한을 읊은 것이다. 한정무의‘꿈에 본 내 고향’ 또한 그런 노래였다. 어쩌면 그것은 스스로 실향민이기도 했던 한정무 자신의 넋두리였으리라.
이 무렵의 레코드 제작은 엿장수가 모아 오는 고물판을 재생하는 수공업 수준의 것이었다. 무딘 바늘에 그 SP 음반이 여러 차례 닳고 나면 원래 취입되어 있던 노래가 나와 합창을 이루기도 했다.
부산방송국은 이재호를 중심으로, 대구방송국은 이병주, 그리고 마산방송국은 반야월을 중심으로 가요인들이 후방을 지키고 있었다. 진방남, 즉 반야월이 부른 ‘비내리는 삼랑진’은 자기가 쓴 가사를 노래한 것이라 감정 표현이 한결 뚜렷했다. 반야월은 마산방송국에서 신인가수를 육성하면서 ‘마산엘레지’, ‘눈 내리는 마산항’ 등의 노래를 작사하여 진방남이란 이름으로 불러 인기를 모았다. 이 무렵 발표된‘물방아 도는 내력’은 박재홍으로 하여금 톱가수가 되게 했다.
벼슬도 싫다마는 명예도 싫어 정든 땅 언덕 위에 초가집 짓고 낮이면 밭에 나가 기심을 매고 밤이면 사랑방에 새끼 꼬면서 새들이 우는 속을 알아 보련다
<
물방아 도는 내력 : 손로현 작사, 이재호 작곡, 박재홍 노래>
국회의원들을 태운 버스가 기중기에 매달려 끌려가고 땃벌떼, 해골단이 난무하는 정치파동 속에 귀거래를 노래한 이 곡은 자유당 정권에 대한 반발을 부채질한 것이었다. 한 마리 고기짝을 들고 피난살이 판자집으로 돌아가던 취객들도 불렀고, 불 밝힌 창가에서 소녀들도 불렀다.
동란의 시절, 진해 앞바다 푸른 물에 낚시를 던지고 한가롭게 노닐기도 했던 늙은 대통령이야 이 노래를 몰랐겠지만.
이 무렵 악단들은 미8군 무대를 누볐다. 얘기가 되돌아가지만, 북진행렬에 동승했던 악단도 있었다. OMC악단은 북진행렬에 동승해 평양까지 갔다가 중공군의 침략에 되쫓겨 되돌아왔다.
미8군 무대가 흥청거리기 시작하면서 유능한 악사들을 모두 미8군 무대에 빼앗겨 일반 공연이 부진하기도 했다. 이후 더욱 거창해진 미8군 쇼의 출발이었다. 휴전회담 이후 북진통일의 소리가 높을 때 ‘판문점의 달밤’이 나와서 사람들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뜸북새 울고 가는 판문점의 달밤아 내 고향 잃어버린지 십 년은 못 되더냐 푸른 가슴 피 끓는 장부의 가는 길에 정안수 떠 놓고 빌어 주신 어머님은 안녕하신가
<
판문점의 달밤 : 유노완 작사, 이봉룡 작곡, 고대원 노래>
비슷한 시기에 유춘산은‘안개 낀 목포항’, ‘향기 품은 군사우편’으로 주목을 받았다. 남인수의 목소리와 비슷한 면이 있으면서도 새로운 목소리였다. 특히 ‘향기 품은 군사우편’은 동란 속에 맺힌 가지가지 한 중에, 사랑하는 애인을 전선으로 보내고 뒤에 남은 여인이 지금은 그 님이 어디에서 총을 들고 날 생각할까 하는 이별의 슬픔을 그려 가슴을 두드렸다.
행주치마 씻은 손에 받은 님 소식은 능선의 향기 품고 그대의 향기 품어 군사우편 적혀 있는 전선 편지에 전해 주던 배달부가 싸리문도 못 가서 복받치는 기쁨에 나는 울었소
<
향기 품은 군사우편 : 박금호 작사, 나화랑 작곡, 유춘산 노래>
1954년에는 유니버살레코드가 새로 등장하고 백설희가 스타덤에 올랐다. 백설희는 은쟁반에 방울을 굴리는 듯한 특이한 목소리로 주로 박시춘의 곡을 불렀다. ‘아메리카 차이나타운’, ‘봄날은 간다’, ‘물새 우는 강언덕’, ‘첫사랑의 문’ 등이 히트했다. 백설희의 전성기라고나 할까. 한 동안 백설희의 노래를 찾는 손님으로 레코드가게가 붐볐다.
북진통일의 절규는 빈 메아리가 되고, 환도 열차가 부산을 떠나기 시작했다. 너도 나도 쓰린 피난지에서의 추억을 안은 채 열차에 올랐다. 피난 올 땐 없던 어린애를 들쳐업고 차에 오르는 아낙네도 있었다. 홀로 피난을 와서 피난지에서 결혼해 부부가 되어 떠나는 사람도 있었다. 인간의 삶이란 그 어떤 수난 속에서도 더욱 가혹하게 싱싱한 것일까. 영도다리에서, 사십계단에서 맺은 로맨스 때문에 열차 난간에서 눈물을 닦는 사람도 있었다. 바로 이 감정을 묘사한 노래로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던 노래가 남인수의 ‘이별의 부산정거장’이다.
보슬비가 소리도 없이 이별 슬픈 부산정거장 잘 가세요 잘 있어요 눈물의 기적이 운다 한 많은 피난살이 설움도 많아 그래도 잊지 못할 판자집이여 경상도 사투리의 아가씨가 슬피 우네 이별의 부산정거장.
<
이별의 부산정거장 : 호동아 작사, 박시춘 작곡, 남인수 노래(1954)>
이 노래로 남인수는 또 한번 만년가수로서의 관록을 과시했다.
<다시 황금기로 가는 오르막길에서>
서울 환도 이후 명국환이 부른 ‘방랑시인 김삿갓’은 노래 가사처럼 열두 대문 문간마다 불리던 노래다.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 흰 구름 뜬 고개 넘어 가는 객이 누구냐 열두 대문 문간방에 걸식을 하며 술 한 잔에 시 한 수로 떠나가는 김삿갓
<
방랑시인 김삿갓 : 김문응 작사, 전오승 작곡, 명국환 노래>
선풍적으로 유행한 이 노래는 시대 감각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지만 대중들은 한사코 이 노래를 불렀다.
어수선한 환도의 한 철이 가고 가요계는 서울, 부산, 대구 등 지방별로 권역을 형성했다. 지방에는 주로 환도하지 않고 남은 가요인들과 현지에서 발굴한 신인들이 모여 있었다. 부산에는 코로나레코드사와 미도파레코드사를 중심으로 백영호, 김호길, 허영철 등의 작곡가와 현인, 송민도, 이숙희, 박재홍 등의 가수가 있었다.
이숙희의 ‘부산블루스’, 한종명(작사가 한산도가 가수로 활동할 때 사용한 본명)의 ‘고향 아닌 고향’이 히트했고, 송민도의‘애수’역시 크게 인기를 끌었다.
울어 보아도 웃어 보아도 시원치 않더라 내 가슴 속 미련이 남아 시냇물 여전히 흐르건만 잔디 핀 언덕에 나만 홀로 아 추억에 운다
( ‘애수’, 한산도 작사, 백영호 작곡, 송민도 노래)
작사가 한산도 자신의 실연을 읊었다는 이 노래는 송민도를 크게 부각시켰고 그를 중앙무대로 진출시켰다.
6.25 전쟁 때에 부산에서 이름을 떨치던 매력적인 엘토가수 송민도는 ‘서귀포 사랑’을 불러 인기 절정을 이루었다. 손석우 작곡의 ‘나 하나의 사랑’ 또한 크게 히트해서 같은 제목의 영화가 나오기까지 했다.
1950년대 중반에는 맘보붐이 있었다. 미스코리아로 세계 미인대회에 나간 아가씨가 “맘보춤을 춰서 날씬해졌다”고 호언할 만큼 맘보붐은 대단했다. 물론 가요가 이를 외면할 리 없었다. 김정구의 ‘코리안 맘보’, 한복남의 ‘맘보타령’, 송민도의 ‘서울의 안나’ 등이 계속 나왔고, ‘맘보타령’은 레코드가 5만 장이나 팔렸다고 한다. 이른바 자유부인이 속출하고 댄스를 배우는 주부들이 손가락질을 받던 시절이다. 많은 가요도 춤곡으로 편곡되고 차차차, 블루스가 판을 쳤다. 세태를 반영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가요의 본질을 조금씩 변화시키고 있었다.
이 무렵 중앙방송국에서는 최초로 라디오 연속극을 시도했다. 특히 인기를 끈 ‘청실홍실’은 그 주제가를 신인 안다성이 불렀는데, 중앙방송국의 출력이 증강되자 방송은 이제 가수들의 활동무대로 크게 한 몫을 하기 시작했다. 방송은 새로운 가수들을 포용하고 새로운 가요를 새로운 가요를 홍수처럼 번지게 했다.
|
영화 '나그네 서름(1957)' 포스터 |
사회가 점차 안정을 찾으면서 일본의 원판을 밀수해다가 그대로 찍어 돌리는 왜색가요 사태가 발생했다. 이에 대해 건전한 가요를 국민 모두가 부르자는 운동이 시작되고 정부에서는 작곡가들에게 창작을 의뢰했다. 이렇게 지어진 ‘고향역’,‘고향에 찾아와도’, ‘금수강산에 백화가 만발하구나’, ‘소녀의 꿈’, ‘청춘목장’, ‘꽃중의 꽃’, ‘산골처녀’ 등이 매일 아침 ‘오늘도 명랑하게’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흘러나왔다.
이 무렵 전파를 많이 탄 가수로는 금사향, 원방현, 권혜경, 주리애, 명국환, 김선영 등이 있었다. 영화계도 활발해져서 영화 ‘나그네 설움’에서 방운아가 ‘인생은 나그네’를 불렀고, 도미는 희극영화‘오부자’에서 주제가를 불렀다.
도미는 잇달아 ‘청포도 사랑’,‘비의 탱고’ 등이 히트해 인기를 누렸다. 한 가지 특기할 것은 영화 ‘유정천리’의 주제가로 박재홍이 부른 ‘유정천리’이다. ‘유정천리’는 1960년 2월에 민주당 대통령후보 조병옥이 미국에서 지병으로 타계하자 ‘유정천리 꽃이 피네 무정천리 눈이 오네’라는 2절 가사의 일부가 ‘자유당에 꽃이 피네 민주당에 비가 오네’로 바뀌어 불리기도 했다.
또한 이에 앞서 손인호가 부른 ‘비내리는 호남선’선은 1956년 5월에 역시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유세 도중 호남선 열차 안에서 갑자기 타계한 신익희를 애도하는 노래라고 금지된다는 설이 있었지만, 그만큼 더 널리 불려졌다.
국산 영화가 더욱 활발하게 제작되자 애수 어린 주제가가 강한 전파력을 가지고 퍼져 갔다. 최무룡의 ‘꿈은 사라지고’, 문정숙의 ‘나는 가야지’, 나애심의‘과거를 묻지 마세요’ 등이 크게 히트했다.
이때 특히 각광을 받은 가수가 권혜경이었다. 1956년에 내놓은 ‘산장의 여인’ 이래 ‘청춘 일요일’, ‘첫사랑의 화원’, ‘사랑이 가기 전’ 등이 연달아 히트했는데 모두 세미클래식한 분위기의 곡이었다.
이밖에 안다성의 ‘비극은 없다’, 도미의 ‘청춘맘보’, 김용만의 ‘여반장’, 명국환의 ‘아리조나 카우보이’, 안정애의 ‘대전블루스’, 윤일로의 ‘기타부기’가 인기를 끌었다. 이금희는 다이내믹한 팝송을 불러 미래가 약속되고 있었고, 박재란은‘럭키 모닝’, ‘해피 세레나데’ 등을 불러 가요계의 공주가 되었다.
미8군 무대에서는 최희준이 쉰 듯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가요계의 폭은 더욱 넓어졌고, 새로운 황금기로 가는 오르막길을 오르고 있었다. 역사는 굽이치며 노래를 낳는다.
|
영화 '꿈은 사라지고(1959)'의 포스터 |
4.19 혁명은 손인호의 ‘남원 땅에 잠들었네’ 같은 격한 노래를 낳기도 했다. 그리고, 5.16 쿠데타가 4.19 혁명의 물결을 이어 큰 격랑을 휘몰아 왔다. 가요계도 새로운 전환점을 맞아야 했다. 이러한 분위기에 호응하듯 한명숙이 부른 ‘노란 샤쓰의 사나이’는 서구적인 분위기의 가요로서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 갔고, 해방 이래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동남아까지 퍼져 갔다.
1920년대에는 하나씩 떨어지는 물방울 같았던 노래가 이제는 큰 강이 되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큰 바다로 나아가고 있었다.
* 광복 이전과는 달리 광복 이후에는 가요사 관계 자료가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작품 가운데 발표 연도가 정확하지 않은 것은 연도를 표기하지 않았습니다. 자료를 좀 더 충실하게 모아 정리한 뒤 보완하도록 하겠습니다.
글 수정 및 보완 : 이 준 희(songcing@chollian.net)
해방이전 한국 가요사 개관
일제 시대의 대중 가요
광복의 해인 1945년까지의 대중가요는 당시 신문화의 유입 과정에 따라 급속한 변천을 겪으면서 남북분단이라는 역사의 비극으로 단절되거나 사장되어 버려 맥이 끊긴 불구의 형태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남북 분단에 의하여 작곡가 이면상, 김해송, 작사가 박영호, 조명암 등의 작품들은 금지되어 왔으며, 대중 가요계의 원조라 볼 수 있는 당시의 화려한 별들인 가수 김용환, 채규엽, 선우일선, 왕수복, 이은파, 박향림 등의 음성과 노래들은 사장되어 왔었다. 오늘날 들려지고 있는 일제 시대의 노래들은 1936년 이후의 노래들이 대부분이다.
1923년, 강원도 지방에서 26세된 여자를 잡아먹은 호랑이 사건이 신문에 커다랗게 게재되어 있다.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처럼 느껴지는 75년 전인 1925년경에 양약에 의한 대중 가요가 상륙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재 대중들의 귓전에는 1936년경 이후의 노래가 대부분 들려지고 있을 뿐이다. 그 원인은 작가의 월북으로 인하여 금지곡으로 정해진곡들이 많이 생겨 대중 음악의 단절 현상이 나타난데다가, 가수들의 조기 사망, 6.25 전쟁에 의한 수많은 자료의 소실로 주옥같은 대중 음악이 사장되어 버린 데에 있다.
유성기의 등장과 가요
|
축음기 광고 |
대중 가요의 시작은 에디슨이 발명한 축음기가 이 땅에 상륙하여 대중화되는 현상으로 연결된다고 볼수있다.
1905년, <황성신문>에 유성기 (축음기)를 선전하는 첫 광고에 이어 1913년에는 <매일신보>에 대대적인 선전이 시작된다. `새 소리판 나왓소 한장에 금 2원, 유성기(축음기)는 20원`이었다.
축음기판(SP)에는 송만갑, 박춘재 등의 명창과 권번 기생들의 민요 가기를 담고 있다.
1925년, 기생 김산월과 도월색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취입한 축음기판이 등장한다. 양악으로서 처음 대면하는 유행가이다. <시들은 방초>와 <장한몽가>인데 두 곡 모두 일본의 연극 주제가들이다. 가야금과 장고 장단에 맞춰 부른 <장한몽가>는 일명<이수일과 심순애>라고 불려졌으며 신파극이나 무성영화에 의하여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
가야금 장고 반주에 기생 김산월과 도월색이 1925년 처음 음반으로 취입한 일본 노래의 가사를 보면
대동강변 부벽루하야 산보하는 리수일과 심순애 양인이로다 악수론정 하는 것도 오날뿐이요 보보행진 산보하난것도 오날뿐이라 심순애야 심순애야 내년에는 금일금야 이갓치 밝은 달빛을 어대서 저 달빛을 보드라도 흘이거던 심순애야 심순애야
|
1938년 동경 / 콜럼비아레코드 녹음실 |
가수 부재 시대
1921년 <조선일보> 광고에는 연극 연구 여자를 모집하는 내용이 실려 있는데, 3개월 양성 기간으로 생활비를 지급한다는 조건이었다. 서양 문물에 의한 신문화가 스며들기 시작하는 시대에 우리네의 생활양식에서는 여염집 여인이 무대에 등장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상황이었다. 기생들도 무대를 경원시하는 시절이었으니까.
1920년경부터 복혜숙이 신극 단체 `토월회`에 등장하였으며, 신파극단에서는 여배우 이애리수, 이경설, 김연실, 윤백단, 김선초 전옥이 인기를 끌었다.
`일본 축음기 조선 소리판` 이란 라벨로 축음기판이 선전되면서 1927년에는 빅터 레코드사와 콜럼비아사가 서울에 대리점을 개설하고 개업준비를 했다.
1929년 4월 콜럼비아사에서 한국 최초의 창작대중가요가 나왔다. <낙화유수>라는 노래로서 오늘날 <강남달>로 불려지고 있다. 이정숙이 이 노래를 불렀는데 가수 부재의 시절인지라 중앙보육학교(중앙대학교 전신)를 졸업하고 <오빠 생각>, <뜸북새>등 동요를 취입한 최초의 동요 가수가 가요를 취입한 것이다. 그 때까지도 일반인에게는 유행가와 동요를 구분하는 의식이 없었고, 양악류의 음악은 통칭 창가로 인식하였었다.
|
이정숙 |
<락화류슈>(낙화유수)
강남달이 밝어서 님이 노든 곳 구름 속에 그의 얼굴 가리워젓네 물망초 핀 언덕에 외로이 서서 물에 뜬뜬 이 한밤을 홀노 세울까
멀고 먼 님의 나라 참아 그리워 적막한 가라가에 물새가 우네 오늘밤도 쓸쓸히 달은 지노니 사랑의 그늘 속에 재워나 주오 (조선가요집 1931년)
<낙화유수>는 1927년에 단성사에서 개봉되어 인기를 끈 무성 영화(낙화유수)의 주제가이다. 초창기 여배우인 복혜숙이 주연으로 출연하였다. 이 노래는 무성 영화 변사로 인기를 누리던 김영환이 작곡하였다. 김영환은 이 영화 감독까지 하였었다.
<황성 옛터>가 먼저 나온 노래라고 전해지고도 있지만 음반으로는 1932년 3월에 첫 발표되었다.
무대 배우의 가수
|
이애리수 |
1930년에 접어들자 음반계의 시선은 연극무대로 눈을 돌리게 된다. 당시 미모의 이애리수와 김연실, 강석연, 이경설, 윤백단, 전옥등 여배우가 노래를 불러 인기를 끌었다. 여배우 복혜숙은 콜럼비아레코드에 종로행진곡등 몇곡을 불렀으나 노래솜씨가 신통치 않아 그것으로 그치고 말았다.
취성좌의 배우에서 토월회에서 활동을 한 강석연은 1931년 콜럼비아 레코드에서 `세동무` 방랑가` `오동나무`를 불러 좋은 반응을 얻었고 이애리수는 빅터 레코드에서 1930년에 `방랑가` `오동나무`를 부르면서 1932년 빅터 레코드에서 `황성옛터`를 불러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취성좌 배우인 전옥은 1933년 포리돌 레코드에서 째즈 멜로디를 시작으로 1934년 콜럼비아 레코드에서 `물길천리` `수부의 아내`등으로 배우로서 인기를 굳히는데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33년 연극 `항구의 일야(주제가 : 노래 김용환)는 1950년대 극장에서 연극으로 흥행을 많이 하였다.
윤백단은 1933년 OK 레코드에서 `횃불을 높혀라` 등을 불렀었는데 배우가수중 연장자로서 선배 배우인셈이다. 이외에 1930년에 빅터 레코드에서 `세동무`를 부른 김연실 1933년 콜럼비아 레코드에서 `강남을 가자`를 부른 김선초도 초기의 유명한 배우 가수였다. 당시에 제일 많이 부른 노래는 `방랑가` `오동나무` `세동무` `강남달` `황성옛터`가 대표적인 노래들이다.
배우가수중 남자로는 강홍식이 유일하게 유명한 가수이다. 1934년 강홍식의 노래처녀총각이 거리의 축음기가게를 한창 바쁘게 만들었었다.
봄이왔네 봄이와 숫처녀의 가슴에도 나물캐러 간다고 아장아장 들로가네
지금도 간혹 들리고 있는 이 노래는 북한방송에서도 불려지고 있다.
직업 가수의 등장
|
채규엽 |
1930년 3월 콜럼비아 레코드사에서 나온 축음기판에 채규엽이란 이름이 처음으로 눈에 띈다. 노래 제목은 <봄노래 부르자>로
오너라 동무야 강산에 다시 돌아 꽃피여지고 새우난 이 봄을 노래하자 강산에 동무들아 모두다 몰려라 춤을 추며 봄노래 부르자
<봄노래 부르자>를 시작으로 한국 최초의 직업 가수 채규엽이 탄생하게 된다. 채규엽은 1933년 일본 중앙음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서도 일본 노래를 취입했으며, 1930년대 말에는 태평 레코드사에서도 활동을 계속하였으나, 1948년경 고향인 함경도로 간 이후 행적이 묘연하다. 탄광에서 일하고 있었다는 말이 전해지기도 한다.
채규엽과 같이 일본 중앙음악학교를 졸업한 가요 관계 인물로서는 북한 음악가 동맹 위원장을 역임하다 1990년에 사망한 이면상이 있었으며, 빅터 레코드사와 콜럼비아 레코드사 전속 가수였던 <진주라 천리길>을 부른 월북 가수 이규남이 있다.
권번 기생 가수
|
난 치는 기생 |
1930년 초반, 여배우들의 가수 활동과 함께 권번 기생들의 활약도 가요의 흐름에 한줄기 영향을 주었다. 권번에 소속된 기생은 예의 범절, 서화, 시조, 창, 가야금, 유행가, 일본 노래까지 공부를 해야만 했다.
1941년까지도 평양에는 기생 학교가 있었다. 기생에 적을 두고 노래를 불러 인기를 끈 인물로는 선우일선, 왕수복이 특히 유명하였다. 그들이 노래를 취입하기 위해 평양에서 서울에 올 때는 레코드 회사 간부들은 인력거를 서울역에 대기시켜 놓고 칙사 대접을 하였다. 일본에 있는 녹음실에서 취입하고 돌아올 때까지는 환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선우일선과 왕수복은 6.25 전쟁 이후에도 평양에 살고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들의 노래는 거의 신민요 노래들이고 1934년에 나온 이면상 작곡인 <꽃을 잡고>는 선우일선을 스타덤에 올려놓는 계기가 된다. 왕수복의 인기곡은 전기현 곡으로 1933년에 나온 <고도의 정한>이다.
|
이화자 |
1940년대 대중 가요계를 주름잡은 이화자는 권번 소속 기생이 아니고 일반 유흥가 술집 출신으로 천부적인 자질과 풍부한 호소력을 가진 1936년에 등장한 가수이다. 1940년 초에 널리 퍼진 이화자의 <목단강 편지>는 1950년 후반에 엉뚱하게 <처녀 뱃사공>이라는 노래에서 가사는 바뀌었으나 멜로디의 많은 부분이 표절되어졌다.
봄철을 맞은 가요계
1933년은 음반 회사가 이 땅에 기업적인 토대를 작은 시기이다. 음반 회사로는 콜럼비아사, 빅터 레코드사, 포리돌 레코드사, 시에튼 레코드사가 음반 생산 활동을 적극적으로 한 회사들이다. 빅터, 포리돌, OK 레코드사에서 대중 가요가 많이 나왔지만, 빅터와 포리돌 레코드사의 노래들은 대부분 자료가 사장되고 작가나 가수들 또한 일찍 사망하여 OK 레코드사에서 나온 노래들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근래에 레코드사에서 당시의 자료들을 발굴하여 복각함으로써 일반인에게 소멸된 노래들을 들려줄 수 있게 되었다.
|
박향림, 이난영 |
1933년 OK 레코드사의 사장인 이철은 이난영이란 소녀 가수를 발굴하게 된다. 여배우도 아니고 권번 기생도 아닌 순수한 가수의 등장인 셈이다. 일본을 순회 공연중인 `태양 극단`에서 노래하는 16세 소녀를 빼내 왔는데, 그 소녀가 바로 이난영이다.
1933년 가을 <불사조>, <밤고개를 넘어서>의 두 곡을 부르면서부터 꾸준히 인기를 얻어 온 이난영은 1935년 여름, <목포의 눈물>이란 노래로 일약 유명한 가수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목포의 눈물>이란 노래는 OK레코드사에서 향토 찬가 가사 모집을 하였는데 목포의 문일석이라는 청년이 투고하여 당선된 작품으로 손목인의 곡이다.
한편 포리돌 레코드사에는 극작가 왕평과 가수 겸 작곡가 김용환이 토속적인 신민요 노래를 많이 만들었다. 김용환은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부른 김정구의 형인데, 작사, 작곡 등 만능 재주꾼으로 매우 다재 다능한 인물이었다. 1935년 김용환 자신이 직접 작곡하고 부른 <젊은이의 봄>, 1937년에 나온<구십리 고개>등은 우리의 토속성을 너무나 잘 표현한 노래들로 축음기로나 들어볼 뿐 일반 시중에서는 들어볼 수가 없다. 김용환은 광복 후 3년만에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였다.
가요의 대중화 시대 축음기의 전국적인 보급과 창가에서 한걸음 발전된 노래들이 SP판에 의하여 대중의 귀에 익어지면서 이난영, 고복수 등의 신진 가수들이 등장하자 1936년 이후에는 외면당하던 가요계에도 가수 지망생들이 서서히 나오기 시작한다.
1936년 당시 인기 판도는 채규엽, 강홍식, 선우일선, 김용환, 최남용, 노벽화, 이은파,고복수,이난영 등의 가수가 스타 선상에 군림하였다("조광" 1935년 2권 1호, "사해공론" 1936년 3월호)
1936년 OK레코드사 전속 가수가 된 경남 진주 출생의 청년 남인수는 1937년 12월에 이노홍 작사, 박시춘 작곡인 <애수의 소야곡>을 불러서 일약 대스타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
남인수 |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마는 눈물로 달래보는 구슬픈 이 밤 고요히 창을 열고 별빛을 보면 그 누가 불어주나 휘파람 소리
천성적으로 타고난 미성의 가수 남인수는 <애수의 소야곡>이후 전국을 휩쓰는 가요계의 황제로 군림하였다. 1950년대에 <이별의 부산 정거장>으로 한 시대를 장식한 남인수는 1962년에 인생의 막을 내리는데, 그의 장례는 연예인 협회장으로 치러졌다.
당시 신문 사화면에는 조계사에서 홍제동 고개까지 장관을 이룬 인파 행렬을 일제히 보도하였다. 가수 남인수의 등장에서부터 가수를 열망하는 붐이 일어나고 축음기판의 목록도 완전히 탈바꿈하게 되었다. 판소리 잡가 등은 거의 밀려나고 유행가 음반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1936년 이후부터 1940년 초까지 계속된다.
1937년부터 1940년은 소질과 재능을 가진 남녀 가수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하고 새로운 노래, 다양한 성격의 노래들이 쏟아져 나오는 가요의 황금 시대에 속한다. 대표적인 가수와 노래를 살펴본다.
|
당시의 대표적인 음반레이블 |
일제시대 대표곡
<오케(OKEH)레코드사> <타향>(고복수), <눈물젖은두만강>(김정구), <해조곡>(이난영), <꼴망태 목동>(이화자>, <애수의 소야곡>(남인수), <꿈꾸는 백마강>(이인권), <연락선은 떠난다>(장세정>, <선창>고운몽.
<빅터 레코드사> <황성의 적>(이애리수), <알뜰한 당신>(황금심), <아이고나 요맹꽁(맹꽁이타령)>(박단마), <눈물의 손수건>(조영은), <아리랑 술집>(김봉명)
<콜럼비아 레코드사> <봄노래부르자>(채규엽), <찻집 아가씨>(박향림),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남일연), <홍도야 울지 마라>(김영춘), <울리는 백일홍>(계수남).
<포리돌 레코드사> <구십리 고개>(김용환), <꽃을 잡고>(선우일선), <항구의 일야>(김용환). <고도의 정한>(왕수복).
<태평 레코드사> <청춘 극장>(빅정림), <눈물의 경부선>(울금향). <나그네 설움>(백년설), <불효자는 웁니다.>(진방남), <찔레꽃>(백난아) 등이다.
|
<오케악극단의 모습>1.남인수 2.고복수 3.이화자 4.이난영 5.김해송 6.김정구 7.이철 8.손목인 9.이은파 10.장세정 11.김용호 |
암흑기의 가요
|
백년설 |
1941년 12월 8일, 미국 하와이 진주만을 폭격하여 태평양 전쟁을 시작한 일본은 한반도에도 전시 비상 체제를 조성하기 시작한다. 대중 가요에도 정책적인 전쟁의 입김이 스며들기 시작하였는데, 백년설이 노래한 <복지 만리>가 그 예이다.
달실은 마차다 해실은 마차다 청태콩 벌판 우에 휘파람을 불며불며 저 언덕을 넘어 가면 새 세상의 문이 있다. 황색기층 대륙길에 빨리 가자 방울 소리 울리며
김영수 작사, 이재호 작곡인 이 노래는 1941년 3월에 상연된 전창근 감독의 영화<복지 만리>의 주제가이다. 일본의 대륙 침략의 일환으로서 만주 지역으로 이민을 장려하는 정책적인 영화였다.
1942년 인기 절정의 백년설은 경성 방송국에 나가서 <아들의 혈서>라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 땅의 젊은이들을 일본의 침략 전쟁에 몰아넣기 위해 가요의 교묘한 이용 방법인 것이다.
어머님 전에 이 글월을 쓰옵나니 병정이 되온 것도 어머님 은혜 나라에 밧친 목숨 환고향 하올 적엔 쏘다지는 적탄 아래 죽어서 가오리다 <아들의 혈서>(조명암 작사/박시춘 작곡)
식량 배급이라는 통제된 생활 속에서도 부분적이나마 1942년까지는 대중 가요의 맥은 이어져 나왔다.
|
박향림 |
1943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학교와 거리에는 일본 군가가 흘러 넘치고, OK레코드사에서 가수 백년설과 남인수, 박향림이 <혈서 지원>이란 노래를 합창하는 단원에서 대중 가요는 어둠 속으로 묻혀져 버리고 그 막을 내리고 만다.
무명지 깨물어서 붉은 피를 흘려서 일장기 그려 놓고 성수 만세 부르고 한 글자 쓰는 사연 두 글자 쓰는 사연 나라님의 병정되기 소원입니다. <혈서 지원>(조명암 작사/ 박시춘 작곡)
광복 이후 새출발의 우리 가요계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라디오에서 울려 나오는 일본 천황의 목소리는 무조건 항복이었다. 작가, 가수 등 가요계 인물들은 뿔뿔이 흩어져 전국 각지, 광산 등에 위문대로 끌려 다니다가 하나 둘씩 모이게 되었다.
1947년, 고려 레코드사가 광복이후 음반 생산의 첫 선을 보였다. 지금까지 음반 생산은 모두 일본에서 하였기 때문에, 처음 해 보는 작업이라서 사실 내용은 보잘 것 없는 상태였다고 한다. 수공업적인 방법으로 숯불에 구운 축음기판은 고작 하루에 열장 정도였다. 그것도 낡은 축음기판을 재생한 것이었다.
그 이듬해에 럭키 레코드사, 서울 레코드사(1949년 첫 음반발매) 등이 탄생하지만 모두가 원시적인 수공업 형태로 축음기판을 생산하는 실정이었다.
감격과 희열의 시대에 나온 노래를 보면, 남인수 <가거라 삼팔선>(이부풍 작사/박시춘 작곡) 현 인 <신라의 달밤>(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비노래는 고모령>, 이인권 <귀국선> 박재홍 <울고 넘는 박달재> 장세정 <울어라 은방울> 등이다.
해방된 역마차에 태극기를 날리며 사랑을 싣고 가는 서울 거리냐 울어라 은방울아 세종로가 여기다 인왕산 바라보니 달빛도 곱네
1949년 6월, 김구 선생이 피격되던 서재에서는 라디오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해방의 기쁨을 실은 이 노래는 6.25 전쟁직전까지 민족의 환희를 가장 잘 표현한 노래일 것이다.
1948년에는 한국 최초의 음악 영화가 탄생하였다. <푸른 언덕>이란 영화로 현인과 김백희가 주제가를 불렀다. 그러나 당시의 음반 제작 시절의 영세성으로 가요계의 활동은 극장 무대가 주류를 이루었다.
대체적인 악극단의 인물을 살펴보면, `태평양 가극단`의 김용환, 김정구, `구봉서 백조 가극단`의 전옥, 고복수, 황금심, `대도 악극단`의 장동휘, 왕숙람, 황정자, `남대문 악극단`의 반야월, `다이아몬드 악극단`의 백년설, `MC 악극단`의 손목인, `은방울 쇼`의 박시춘 등이다.
악극단, 가극단의 단체가 수십개나 되어 전국 극장 무대에서 연극 쇼와 함께 가요 활동이 왕성하였다.
광복 이후 새로 등장한 가수로는 <임 계신 전선>을 부른 금사향, <나 하나의 사랑>을 부른 송민도, <한강>의 심연옥, <빈대떡 신사>의 한복남, 그 외 백설희, 박재홍, 현인 원방현, 황정자 등이며 1950년 직전까지의 3년의 가요 상황은 극장 무대가 가요의 전달 주무대였었다.
이 근 태 (가요114 기획위원, 가요사 연구가) | |
추억의 음악감상실 가요114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