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월성(月城)엘 가다 손 진 담
봄비가 내리는 싸늘한 새벽, 국립중앙과학관 경주탐방 버스에 몸을 실었다. 신라 천년 고도인 경주는 불교 문화가 융성한 곳으로 많은 유적이 도처에 있으나, 이번 전통과학대학 1차 탐방지는 남산과 월정교, 불국사로 한정되어 있었다. 빗속에 경부고속도로를 두어 시각 달려 외가 곳인 건천 읍을 지날 무렵, 비가 그치자 도로변의 벚꽃들이 화사한 자태를 드러내었다. 이윽고 경주 서남산 삼릉골 주차장에 다다르니, 오늘의 안내를 맡은 문화해설사가 연분홍 꽃비와 함께 우리를 반겨주었다.
서라벌 남쪽에 우뚝 솟아있는 경주 남산은 높이가 500m에 미치지 못하나, 신라의 역사, 문화예술, 종교, 철학적 측면에서 크고 위대하다. 북쪽의 금오봉(468m)과 남쪽의 고위봉(495m)을 잇는 작은 산과 계곡들로 구성된 남산은 서라벌을 지키는 요새로써, 나아가 사 영지(四 靈地)의 하나로 산 곳곳에 수많은 절터와 불상, 석탑을 품고 있어 신라 천년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특히 신라 박 씨 4 왕의 능과 불상들이 많은 배동 삼릉골과 김시습의 금오신화 집필지였던 용장골의 용장사지는 관광객의 발길이 잦은 곳이다.
삼릉(사적 제 219호, 아달라왕릉, 신덕왕릉, 경명왕릉)과 인접한 경애왕릉의 주인공들은 모두가 박혁거세의 후손으로 진골인 석 씨, 김 씨와 더불어 신라국을 통치해 왔다. 오늘 우리 조의 안내를 맡은 해설사는 “서울에서 살다가 지금은 남편의 고향인 이곳 서라벌에 산다”면서 우리가 잘 몰랐던 뒷이야기도 많이 들려주었다. 삼릉에 묻힌 신덕왕(53대)의 둘째이며 경명왕(54대)의 친동생인 55대 경애왕은 비참한 최후를 마쳐 슬픈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다. 당시 영천에 주둔하던 후백제 군사들이 신라 왕궁인 월성으로 쳐들어올 것에 대비해 추운 날씨(음력 11월)에 포석정에 피신해 있다가 세작들의 농간으로 견훤에게 생포되어 자결을 강요당한 경애왕(景哀王), 그래서 슬플 애(哀)자가 들어갔답니다. 게다가 ‘그 와중에 포석정에서 신하들과 술 퍼마시다가 당했다’는 고려사의 기록을 보고, ‘추운 겨울에, 그 와중에 무슨 술잔을 돌렸겠냐?’며 신라유민들이 억울해했다고 한다. 그래서 역사는 승자의 것이라고 했던가.
이웃한 나정(현재 탑정동)은 신라개국 초대 왕인 박혁거세가 알에서 깨어난 탄생설화로 유명한 곳이다. 혁거세를 키우고 나중에 왕으로 추대한 사로국의 육부 촌장 중에는 무산 대수촌의 구례마도 있었다. 무산 대수촌은 지금의 경주시 서부를 차지하는 건천과 모량, 현곡일대로서 나중에 모량 점령부라 불렸다. 신라 유리왕 때 육부 촌장들이 성을 하사받을 때 구례마의 후손은 손(孫)으로, 나머지는 이, 최, 정, 배, 설이었다. 이들은 육두품의 벼슬을 받았으며 왕이 된 박. 석. 김은 진골로서 화백제도의 근간이 되었다. 나의 성과 본관이 월성 손씨(경주 손씨)고 보니 이곳이 남달라 보였다. 하기야 통일신라 시대부터 강력한 중앙집권과 골품제의 폐단이 천년왕국의 멸망을 초래했다고도 하지만, 8년 모자라는 천년의 역사가 세계사에서 유례가 있었던가.
아름드리 노송들이 하늘을 찌를 듯 우거진 숲길을 따라 고지로 올라가니 석불좌상(보물 제666호)과 마애관음보살상(지방문화재 제19호)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머리가 없는 석불좌상은 계곡에 묻혀 있던 것을 답사 온 대학생들에 의하여 우연히 발견되어 1964년 지금의 장소에 안치되었다고 한다. 조선 시대 숭유억불 정책으로 불상이 많이 훼손된 사례이다. 북쪽에는 마애관음보살의 입상이 있는데, 오른손에는 설법인, 왼손에는 감로병을 들었으며, 머리의 보관에는 화불(化佛)인 아미타불이 조각되어있다. 해설사가 관음보살의 ‘분홍색 입술’을 가리키며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내었다. 이곳 불상의 재료인 화강암은 유백색이 대부분인데 입술 부분만이 분홍색이라고 한다. 그래서 모든 이목구비와 몸체가 입술을 중심으로 설계되고 조각되었다고 한다. 조각 후에 입술에 주칠(朱漆)을 한 것이 아니라 원래가 분홍색이라니 그냥 듣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서서히 직업의식이 발동되기 시작하였다.
경주 일대 분포되는 화강암은 비교적 굵은 결정의 석영, 장석, 운모로 구성된 심성암체로서 풍화작용 시 괴상(塊狀)으로 노출되어 불상을 조각하기에 적당한 크기이다. 조암괌물 중 흰색의 사장석이 대부분이나 가끔 분홍색을 띤 정장석도 들어있다. 결정의 크기는 0.5mm 정도가 보통인데, 불상 입술의 크기가 적어도 10cm가 되다 보니 원래 큰 결정이거나 작은 것이 여러 개가 몰려 있어야 앞뒤가 맞을 것 같다. 안타까운 것은 절벽이라 가까이서 입술 부분을 확인할 수가 없어, 훗날을 기약하고 다음 코스로 이동하였다. 젊은 시절, 이곳 남산에서 화강암 시료를 채취하다가, 망치에 튕겨 나온 분홍 장석 파편을 왼쪽 눈 밑에 심고, 수십 년을 그냥 지내 왔으니 이건 또 무슨 인연일까. 아마도 경주 남산에서 서방정토를 바라보며 빙그레 미소 짓는 마애관음보살상의 분홍색 입술을 내가 좋아했는가 보다.
식사 후 버스는 교동 남천(일명 문천)에 복원된 월정교(月精橋)에 들러 그 화려함에 매료되었다. 월정교는 남.북편 교대(橋臺)와 4개소의 주형(舟形) 교각(橋脚)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길이가 60.59m에 이르는 누교(樓橋)이다. 통일시대를 대표하는 건축물로 평가받는 월정교는 위치가 신라 궁성인 월성 바로 옆이라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강 건너 벚꽃이 만발한 교촌 마을은 향교와 요석궁, 경주 최 부자 집이 위치하고 있어, 관광객들의 사진 촬영지로 주목을 받고 있었다. 신라 명필 김생의 글씨를 집자한 현판도 자랑거리이다. 상류 700m에 위치한 춘양교(일정교)를 지나며 창밖으로 왕궁터인 월성(月城)이 나타났다. 대릉원 주변의 초기 왕릉 금성(金城)이 평지라면, 서기 487년에 새로이 구축된 월성은 방어력이 높은 요새 성의 기능을 하였으며, 이때부터 신라 왕경의 구체적인 틀이 잡힌 것으로 역사지리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불국사는 오랜만에 들렀다. 첫 방문은 60년 전 초등학교시절, 비포장도로에 트럭을 타고 수학여행온 적이 있다. 백운교 청운교 앞에서 찍은 빛바랜 흑백사진은 사진사의 실수로 반 이상이 시커멓게 나와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새로이 단장된 불국사의 건축학적, 미적 가치를 전문적으로 평하기에는 천학비재이지만, 화강암 석재를 다루던 장인의 과학기술만은 세계적임에 틀림이 없다고 본다.
경주와의 인연은 신라 건국 육부촌으로부터 신라 효자 문효공 중시조, 양동 종갓집 등 월성(경주) 손 가의 뿌리가 있는 곳이다. 돌아오는 길목 서천(형산강 본류)에서 임란 때 경주성 복성 전투에 순절하신 남계공 선조가 떠올랐고, 건천 고속 휴게소를 지나자 건넛마을 돈지에 있는 외가가 눈에 들어 왔다. 어린 시절 연분홍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릴 때 어머님의 손을 잡고 찾아가던 잔치 날의 외갓집, 그 많던 외척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이젠 고령의 형수님만이 덩그런 고택에서 텔레비전과 전화기만 바라보고 계신다. 버스 TV 화면에는 남북 간에 ‘봄이 온다’ 고 들떠있는데, 웬일인지 내 마음은 춘래 불사춘(春來 不思春)이다. 식목일에 비가 왔으니 내일은 농장에서 믿음직한 나무 한그루를 심어야겠다.
2018. 4. 5.
첫댓글 2018 새봄맞이 좋은 여행하셨습니다. 남산 돌은 모두 옥돌이 틀림없습니다.
여행기에서 얻은 것이 많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관련 사진도 몇장 곁들였으면 참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