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내용만 보더라도 최초의 태극기는 고종이 만들었으며 그 당시 중국으로부터 심한 간섭을 받았으나
이을 물리치고 독자적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게된 것이다
박영효의 일기
고종이 일본 수신사로 떠나는 박영효에게 태극기의 도안, 재질, 도형의 설명, 그리는 방법까지도 직접 언급하고 지시하였고,
박영효는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태극기를 제작하였답니다. 이러한 사실은 박영효의 일기[使和記略]
(新製國旗縣寓樓旗等白質而從方長不及廣五分之二主心畵太極塡而靑紅四隔畵四卦會有受命於上也)에
드디어 정확히 만 천하에 밝혀지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국기인 태극기는 박영효가 창안, 도안한 것이 정설로 돼 있었습니다.
1882년 고종의 허락을 받아 박영효가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하러 가던 중 메이지마루호
선상에서 일행과 숙의해 그렸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같은 태극기의 유래는 잘못 알려진 것으로 드러났습다. 박영효가 주도한 작품이 아니라
고종의 주체적이고 독창적인 작품으로 새삼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1882년 10월 2일자 일본 도쿄에서 발행된 일간신문 '시사신보(1882년 3월 창간,1936년 폐간)'는 당시
일본을 방문한 박영효 수신사 일행과 기자 회견을 갖고, 태극기는 자국의 국기를 모방하라는
청나라의 압력을 뿌리치고 고종이 직접 도안을 하고 색깔까지 지정한 것으로 보도했습니다.
박영효는 고종이 구상한 작품을 고종의 지시에 따라 일본으로 가던 도중 단순히 그림만 그리는 역할을 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시사신보 기사는 생생하게 전하고 있어 태극기의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같은 사실은 최초의 태극기가 게재된 시사신보 축쇄판을 동경도립중앙도서관에서 단독 입수, 지난 광복절날
일간신문(동아, 한국일보)을 통해 태극기 그림을 공개한 서울시청 총무과 송명호씨에 의해 밝혀졌습니다.
송씨는 당시 일간지가 서둘러 보도하면서 최초의 태극기 발견 사실에만 기사의 초점을 맞추고 정작 태극기가
고종의 작품이라는 역사적인 사실을 간과한 점을 중시, 이를 널리 알려야겠다는 생각에서 관련 자료를 작성,
주요 도서관과 학술연구기관에 무료 배포하기에 앞서 뉴스피플에 제공했습니다.
그가 제공한 화제의 시사신보 관련 기사는 '잡보'란을 통해 수신사 박영효 일행의 일본 방문을 조선의 유신이라고까지
장황하게 극찬한 다음 '조선국기'라는 캡션이 붙은 태극기 그림과 함께 국기의 재정 배경을 구체적으로
밝혔는데 그 내용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중략)
이때까지 조선에는 국기로 부를만한 것이 없어 지난번에 탁지부를 방문한 중국
(원문에는 지나로 표기했으며 청나라를 지칭함)의 마건충(청나라 덕종때 사람으로 1882년 군함 수척에
군인 4천5백명을 인솔, 조선에 와 임오군란을 조정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대원군을 천진으로 압송하는 등
조정에 친청파를 구축하며 내정에 깊이 간여한자임)이 조선의 국기는 중국의 국기를 본받아 삼각형의 청색 바탕에
용을 그려야 하며 본국인 중국은 황색을 사용하나 조선은 동방에 위치하는 나라이므로 동쪽은 청색을 귀히 여긴다는
뜻에 따라 청색 바탕을 이용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이에 국왕(고종)은 분하게 여겨 절대로 중국 국기를 흉내내지
않겠다고 해 사각형의 옥색 바탕에 태극원(두개의 소용돌이 모양)을 청색과 적색으로 그리고 국기의 네 귀퉁이에
동서남북을 의미하는 역괘를 그린 것을 조선의 국기로 정한다는 명령을 하교하였다고 한다."
이 신문의 관련 기사 첫 머리는 "지난달 28일(1882년 9월 28일 가리킴) 하나부사공사와 함께 도쿄에 도착한 조선인의
이야기에 의하면..."이라고 돼 있어 박영효 수신사 일행 중 한 명과 인터뷰를 통해 기사를 작성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개혁파 지식인들인 김옥균, 서광범 등도 박영효와 동행했다고 이 신문은 적고 있어 이들 중 한 명과
인터뷰를 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관련 기사에서 고종은 청나라 마건충의 강요에 분노하며 독창성을 발휘, 도안과 도형의 설명, 그리는 방법까지 직접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국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외세를 단호히 배격했음을 의미합니다.
당시는 청나라가 내정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고 임오군란을 이용, 제물포조약을 체결한 일본은 자국군의 서울 주둔을
강요하며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는 등 열강의 틈사이에서 국왕이 국정을 제대로 펴기조차 힘든 시기였음을 볼 때
고조의 이같은 자주정신은 높이 평가돼야 한다고 송씨는 설명했습니다.
태극기 연구가이기도 한 그는 "관련 기사가 발견되기 전에는 주역의 태극도를 그렸다는 등 태극기의 유래에 대해 별의별
억측이 많았으나 이젠 이러한 의구심을 말끔히 해소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또 "우리 나라 최초의 태극기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1882년 9월 25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날 박영효 일행이 고베에
도착, 숙소인 니시무라야(西村屋) 옥상에 국기를 게양했다는 기록이 있거든요. 그로부터 사흘 뒤 일행이 도쿄에
도착했고 이를 시사신보 기자가 취재해 10월 2일자에 보도한 겁니다."
그에 따르면 우리나라 태극기는 모두 다섯 번의 변천을 통해 오늘날의 모습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첫 번째는 시사신보의 보도처럼 고종의 지시에 따라 박영효에 의해 완성된 것이며, 두 번째는 1885년 고종이
외무담당 미국인 데니씨에게 선물한 태극기로 현재 독립기념관에 전시돼 있습니다.
세 번째는 1896년 독립신문 제호에, 네 번째는 1900년 파리박람회 때 사용했던 태극기이며,
현재 사용하고 있는 것은 1949년 정부에서 42인 국기제정위원회를 구성, 제정한 것입니다.
그동안 태극기의 유래에 대해 가장 상세하게 언급한 것은 1961년 진단학회가 펴낸 '한국사'로 전문가들
사이에 금과옥조로 여겨져 왔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국기문제가 논의된 것은 1876년 병자수호조약 체결 당시 강화도 회담에서부터 대두됐는데,
이때부터 국기의 필요성을 느끼게 됐고 이를 눈치챈 중국이 황준헌을 통해 중국의 용기를 본받아 그려서
전국적으로 사용하라는 간섭을 했습니다.
그후 우리나라와 중국은 국기 제정에 따른 양국 위원을 임명했는데 우리측 위원은 이응준이었고 중국측 위원은
마건충이었습니다. 그러나 국기 제정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수신사 박영효 일행은 일본을 방문하게 됐고
이때 출발에 앞서 고종황제로부터 내략을 받았습니다.
일본 기선 메이지마루호 선상에서 동승한 수신사 일행, 영국 영사관 아스톤, 선장 제임스 등과 태극 8괘의 도안을 가지고
숙의한 끝에 최종적으로 4괘의 태극기를 국기로 결정, 제작했습니다. 아마 이 결정은 일본으로 출발에 앞서
고종황제가 지시한 대로 따랐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시사신보의 보도 내용에 대해 서울대 국사학과 한영우 교수는 처음 듣는 말이라며 '최초의 태극기 제정 배경 등
국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고 말했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김광남 연구관도 이같은 사실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태극기 변천사를 다시 써야 할 획기적인
발견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최초의 태극기를 발견한 송씨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최초의 태극기 그림과 자료가 국내에서 발견되지 않고 일본서
찾게된 것은 부끄럽기 그지 없지만 태극기의 역사가 제가 만든 자료를 근거 삼아 새로 정리할 수 있게 된 점은 다행'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고종의 지시대로 박영효가 완성시킨 최초의 태극기는 애초 3점이 제작됐으나 왕조의 몰락 등 격변의
세월을 거치는 동안 실물이 자취를 감춰 아쉽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출처 : 뉴스피플 1997년 10월 9일자 제288호에서 발췌했습니다.
최초의 태극기 고종황제와 김홍집이 만들다
박영효가 태극기를 만들었다고 누가 그러던가요?
국사책에는 박영효가 만들었다는것이 아니라
처음으로 사용되어있다고 나와있습니다. 하긴.. 어떤 설로는 박영효가 배를 타고 가던 도중에
급히 만들었다고도 하죠. 하지만 태극기를 만들자고 제의하고 그것을 만든사람은 고종과
김홍집입니다.
아래에 있는 글을 참고하세요
『태극기를 최초로 만든 사람은 박영효가 아니다.
흔히들 태극기는 수신사(修信使) 박영효(朴泳孝)가 일본 가는 배 안에서 급조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박영효는 태극기를 최초로 사용한 사람이었을지는 모르지만, 최초로 만들어낸 사람은 아니다.
우리 조정에서 국기에 대해 처음으로 눈뜨게 된 것은 청나라 외교관 황준헌(黃遵憲)이 지은 `조선책략(朝鮮策略)'에
비롯되고 있다. 우리 나라의 개화와 외교에 막중한 영향을 끼쳤던 이 소책자에 조선이 독립국이려면 국기를 가져야 한다고
역설한 것까지는 좋은데 그 국기 도형을 중국의 용기(龍旗)를 본떠서 만들되 사각(四角)으로 하지 말고 삼각기(三角旗)로
해서 청나라의 허락을 받도록 할 것을 권하고 있는 점이 고약하다. 이 `조선책략'에 좇기로 한 조정에서는 1880년
동지사(冬至使) 가는 편에 중국의 국기가 어떻게 생겼으며, 조선 국기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묻고 있다.
이에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은 용 모양을 그려 속국임을 표시하고 그 이름을
용방기(龍方旗)라 함이 좋겠다고 말하고 있다.
태극기를 최초로 만든 사람은 고종과 김홍집이다.
이 같은 속국 표시에 불만을 품었던 고종과 개화 내각에서는 이를 묵살하고 없었던 일로 덮어 두고 있다.
그 후 국기 문제가 재론된 것은 1882년 한미수교조약을 맺을 때였다. 수교의 실무를 돕기 위해 보낸 청나라 외교관
마건충(馬建忠)이 조선측 대표인 김홍집(金弘集)에게 먼나라와의 수교에 있어 국기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조선 조정에서 생각하고 있는 기식(旗式)이 일본 국기를 닮았다 하여 맹렬히 비난하고 있다.
아마도 당시의 조정에서 청나라 속국을 탈피한 나름대로의 국가 도안을 마련하고 있었는데 임금을 뜻하는 붉은 바탕에
조야의 관원을 뜻하는 푸른 색과 백성을 뜻하는 흰색을 화합시킨 동그라미를 그려 넣었던 것 같다.
`임금님은 붉은 옷을, 관원들은 푸른 옷을, 백성은 흰 옷을 입기에 발상된 도식' 이라고 김홍집이 설명하자, 교활한 마건충은
다음과 같은 수정안을 내놓고 있다.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니 국기의 바탕을 흰색으로 하고 임금을 붉은 용 그림으로, 관원을
파란 구름 무늬로 타나내되 용발톱을 네 개로 함으로써 중국 국기의 다섯 용발톱과 구분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김홍집은 마건충 안에 다시 수정을 가한다.
`홍룡청운(紅龍 靑雲)은 그리기에 번잡하니 흰 바탕에 반홍반청(半紅半靑)의 태극 무늬로 하고 그 둘레에
조선 8자도를 뜻하는 팔괘(八卦)를 그리면 일본 국기와 비슷함을 면할 게 아니요' 했다.
이런 일이 있는지 넉 달 후에 태극기가 국기로서 공식 채택되고 있다.』
즉 태극기를 만든것은 고종과 김홍집이라 할수있겠네요.
박영효는 처음으로 그 태극기를 사용한거구요.
도움이 되셨으면좋겠네요.
박영효는 고종의 어명을 받들어 태극기를 사용한 것 뿐
지금까지 박영효가 제작했던 것으로 알려진 태극기는 중국의 국기를 본받아 조선의 국기를 만들 것을
요구한 것에 반발한 ★고종황제가 직접 독자적으로 구상★하여 만들 것으로 밝혀졌다.
이같은 사실은 97년 발견한 1882년 10월2일자 도쿄 일간신문 '시사신보'(時事新報)에 실린 태극기
제작배경기사로 알게 된 것이다.
"지난달 28일(1882년 9월28일) 하나부사 공사와 함께 도쿄에 도착한 한 조선인의 이야기에 의하면"으로 시
작하는 이 기사는 "지금까지 조선에는 국기가 없었는데 이번에 청국에서 온 馬建忠(마건충)이 조선의 국기
는 청국을 모방해 삼각형 청색 바탕에 용을 그려 쓰도록 했다. 본국은 황색을 사용하지만 조선은 동방에
해당하는 속방이요 청색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청색바탕을 사용할 것을 지도했으나 국왕(고종)은 이를 크
게 분개하여 결단코 청국 용기(龍旗)를 모방할 수 없다고 거절하면서 사각형 옥색 바탕에 태극의 도를 적
청색으로 그리고 기의 네 귀퉁이에 동서남북의 역괘를 붙여서 이제부터
조선의 국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라고 작성되어 있다.
따라서 박영효는 1882년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하러 가던중에 메이지마루호 선상에서
고종의 지시내용에 따라 태극기를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sonianikiel)))
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잘못된 역사를 똑바르게 알려주어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