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한점 없는 따스한 겨울 오후였다.
뜨겁지 않은 겨울 햇살이 어느 시골 2차선 아스팔트 위에 말라가고 있었다.
도로에는 벌써 몇 시간, 지나가는 차가 없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위에 한 노인이 우뚝 서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주름살들이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깊은 음각으로 얼굴을 단단히 조각하고 있었다. 구멍이 빠끔빠끔 뚫린 잠바에, 까만 고무장화를 신고 있었다. 왼손에는 이가 달아난 낡은 삽이 한자루 들려 있다.
노인의 시선은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아스팔트에 껌처럼 달라붙은 동물의 형체. 그것은 아마도 고양이 인 듯 했다. 덤프트럭 같은 데 깔린 듯, 완전히 찌부라져 있었다.
노인은 그걸 한참 바라보고 있었다.
말라붙은 핏자국이 아스팔트 위에 물들어 있었다.
여전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모든 게 변했다.
태어나
학교를 다니고,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다시 자라나 결혼을 하고,
또 다시 아이를 낳고...
라디오는 흑백 텔레비전으로,
흑백 텔레비전은 컬러 텔레비전으로...
텔레비전 속의 세상은 점점 화려하게 물들어 가면서
이상하게도 마을에는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가기 시작했다.
고장난 텔레비전처럼 지직거리다가, 마침내 뚝 끊어져버렸다.
그것으로 끝이었나보다.
트럭을 모는 술주정뱅이와, 귀가 들리지 않는 그의 어머니.
노인을 제외하고 마을에 남은 사람은 둘 뿐이었다. 주정뱅이가 술에 골아떨어져 있거나 집에 없을 때가 많으므로 이제 노인이 아무리 소릴 질러도 듣는 사람이 없었다. 즉 죽을 때가 오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노인은 타들어 가는 담배를 빨면서 벽지가 떨어진 방에 가만히 엎드려 있곤 했다. 녹슨 그의 양철 재떨이에는 가래침이 한가득 고여 지독한 냄새를 풍겼다.
몇 달이고 계속해서 신은 양말들이 장롱 뒤편에 몇십개 처박혀 있었다. 요강엔 빗물이 섞인 오줌이 한가득 차 있었고. 헌 고무신들이 아무렇게나 마당에 널부러져 있었다.
집에 식료품이 다 떨어져가고 있었다. 김치와 소금, 라면이 동났다. 노인은 주정뱅이를 찾아갔다. 하지만 주정뱅이는 벌써 몇일쩨 집에 들어오지를 않고 있었다. 귀가 먹은 주정뱅이의 노모가 어두운 방에 앉아서 혼자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볼륨이 지나치게 컸다. 글을 모르는 그들 사이에 의사소통의 방법은 전혀 없었다. 노인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반찬 없이 밥만 지어서 그냥 먹었다. 그리고 담배를 태웠다. 담배도 얼마 남지 않았다. 담배를 빠는 노인의 입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그날 밤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튿날 노인은 다시 주정뱅이의 집으로 찾아갔다. 밤 사이 혹시 주정뱅이가 집에 왔을까 해서였다. 그러나 주정뱅이는 오지 않은 것 같았다. 노모가 혼자 방구석에 잠들어 있었다. 노인은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박스 안에 있는 라면 한개를 훔쳐 나왔다. 노인은 그 라면으로 아침 겸 점심을 때우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들었다. 꿈도 꾸지 않고 잠을 자다가 깨어나 보니 오후 4시였다. 노인은 문득 추위를 느끼고는 집에 뗄감이 없다는 것을 깨닭았다. 지게를 짊어지고서 산으로 향했다. 산에는 겨울 나무들이 듬성 듬성 쓰러져 있었다. 그것들을 지게로 옮겨 놓고서 담배를 한 대 피웠다. 하늘에는 구름도 하나 없었다. 저 서편으로 해가 지고 있었다. 담배를 한 대 더 피고서 산을 내려왔다. 그사이 공기가 섬뜻하게 추워졌다. 노인은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연기가 곰실곰실 번져 올랐다. 노인의 얼굴이 불그스레 하게 달아올랐다. 노인은 으레 기분이 좋아져 소주를 한잔 하기로 했다. 텅빈 냉장고에는 소주 대병이 반쯤 그 양을 채운 채로 들어있었다. 노인은 방안에 앉아 물컵에 소주를 따랐다. 서서히 아랫목이 따스하게 달아올랐다. 노인은 소주를 쭈욱 들이켰다. 소금이라도 있으면 좋을텐데, 집에는 소금도 없다. 노인은 소주 두컵을 마시고 취할 때 까지 기다렸다가 그대로 잠들었다.
그날 밤에는 부슬부슬 비 내리는 소리가 꿈결에 들린 것 같았다.
다시 이튿날 노인은 주정뱅이의 집으로 향했다. 주정뱅이는 역시 오늘도 집에 오지 않은 것 같았다. 노인은 부엌에 들어가 라면 3개를 훔쳤다. 박스에는 아직 라면이 8개나 남아있었다. 그리고 소금통에서 소금을 비닐봉지에 담아왔다. 집에 와서 라면을 끓여 놓고 소주를 마셨다. 소주를 다 마셔버리고는 다시 잠들었다. 깨어나니 또 오후 4시였다. 밥을 해서 소금이랑 같이 먹었다. 다 비워버린 소주병이 못내 아쉽다.
아궁이에 불을 지펴놓고 다시 한번 주정뱅이의 집에 가보도록 했다. 역시 주정뱅이는 집에 없는 것 같았다. 노인은 주정뱅이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노모가 없었다. 어딜 간 것일까. 텔레비전만 혼자 나불거리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집에 텔레비전이 고장난 이후 지금까지 통 텔레비전을 못 봤었다. 노인은 신발을 벗고 주정뱅이네 방에 기어 들어갔다. 그리고는 무릎을 꿇은 자세로 텔레비전을 봤다. 코미디 쇼가 한참이었다. 어떤 남자가 무대에 올라서 관중들을 웃기기 위해 쇼를 하는 것이었다. 노인은 자신은 별로 웃기지도 않는데 사람들이 막 웃는 것이 이상했다. 채널을 돌려봤다. 처음보는 드라마가 나오고 있었다. 한 여자를 두고 남자 두명이서 싸우는 내용이었다. 다시 한번 채널을 돌렸다. 애완동물 쇼인가 해서 젊은 여자들이 강아지며 고양이를 꼭 껴안고 방긋이 웃고있었다. 채널을 돌렸다. 다시 코미디 쇼가 나왔다. 더 이상 돌려봐야 같은 것만 나올 것이었다. 채널은 단 3개 뿐이었다. 결국 드라마를 보기로 했다. 여자가 질질 짜고 남자 중 한명이 여자의 어께를 감싸 안았다. 여자가 남자에게 머리를 기대었다. 비가 비실비실 내리고 있었고 그것을 멀리서 또 다른 한 남자가 지켜보고 있었다. 남자의 눈에서는 빗물인 눈물인지 구분을 못할 것이 흘러 내렸다. 노인은 멍청히 앉아서 그 드라마를 꾸역꾸역 다 봤다. 드라마가 끝나자 뉴스가 나왔다. 뉴스에서는 대통령 선거에 대한 내용이 헤드라인으로 다뤄졌다. 누가 누군지 다들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노인은 이제 그만 보기로 했다. 텔레비전을 그냥 켜 둔 채로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 보니 아직 노모가 오지를 않았다. 할망구가 어딜갔나 하고 왝 소리를 지르고는 노인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담배를 몇 개피 더 피우다가 다시 잠을 자기로 했다.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노인은 두어시간 뒤척이다가 겨우 잠이 들었다.
깨어나 보니 새벽이었다. 문을 열어보니 새벽의 서늘한 공기가 방 속으로 스며들어왔다. 문득 귀머거리 노모가 생각났다. 노인은 옷을 주섬주섬 챙겨입고 주정뱅이의 집으로 향했다. 도랑을 건너 도착해 보니 텔레비전 소리는 여전히 큰데 마루 밑에 신발이 없었다. 그럼 어제밤에 들어오지 않았단 소리인가. 이 씨팔 할망구가 정말~ 하고 왝 소릴 질러주고는 침을 타악 뱉었다. 조금씩 먼동이 터 오고 있었다. 노인은 부엌에 들어가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키고는 다시 마루로 나와 걸터 앉았다.
오늘은 무엇을 하나.
노인은 마당에 피어난 풀 나부랭이를 하나 쥐어 뜯었다.
오늘은 무엇을 하나.
어둠이 완전히 물러가면서 아침이 왔다.
오늘은 무엇을 하나.
노인의 작은 몸뚱이 옆으로 기일게 그림자가 생겼다.
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논에 가기로 했다. 추수가 끝난 논바닥에는 잘려진 볏단이 비죽하게 늘어 서 있었다. 나무를 해와서 모닥불을 피웠다. 오늘은 날씨가 제법 추운 것 같았다. 모닥불이 타닥타닥 타들어가는 모습을 들여다보며 손을 쬐었다. 입술 사이로 입김이 흐멀흐멀 새어나왔다. 갑자기 주정뱅이의 집에 있던 고구마 몇개가 생각났다. 다시 주정뱅이의 집으로 가서 고구마를 가져왔다. 그 사이 불은 다 꺼져있었다. 다시 불을 피웠다. 타들어간 재 속에다 고구마를 뭍고 그 위로 계속 불을 지폈다. 한참 지나서 재를 훝어보니 고구마가 모락모락 김이 나도록 잘 익어 있었다. 그걸로 아침을 때웠다. 그러고 나니 다시 할 게 없었다. 일단 좀 돌아다니기로 했다. 신발 끝으로 돌맹이를 탁탁 걷어 차면서 산길을 걸었다. 산을 한바퀴 빙 돌았다. 신작로에서 마을까지 연결된 비포장 도로를 걸어보기로 했다. 노인은 한참을 걷다가 어느 순간 멈칫 섰다. 타이어 바퀴 자국이 비포장 도로 위로 기일게 나 있었고, 그 위로 하얗게 서리가 내려앉아 있었다. 주정뱅이의 1톤 트럭이 분명했다. 노인은 뛰다시피 해서 주정뱅이의 집으로 향했다. 도착해 보니 여전히 텔레비전 소리만 크게 들릴 뿐, 아무도 없었다. 노인은 주정뱅이네 집 마당에 혼자 서서 헉헉 숨을 들이켰다. 타이어 자국은 그 마당에 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 막 생긴 자국은 아닌 거 같았다. 오늘 아침에도, 어제 밤에도 있었던 것 같다.
노인은 갑자기 텅 비어버린 듯 지독하게 외로워졌다.
담배를 피워 물고는 하염없이 허공을 바라봤다. 안 그래도 조용하던 마을이 더욱 더 조용해진 것 같았다. 정적 속에 파뭍혀 죽을 것만 같았다. 담배연기가 소리 없이 허공을 매울 듯 사그라 들었다.
노인은 울었다.
3일이 지났다.
여전히 주정뱅이네 집에는 지나치게 시끄럽게 텔레비전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박스 속에 라면은 이제 단 2개가 남아있었다. 먹다 남은 라면 국물이 그대로 방바닥의 냄비 속에 담겨 있었다. 담배는 이제 더 이상 없었다. 노인은 주정뱅이의 방 구석에 앉아 멍하니 텔레비전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바닥이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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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코리아. 파이팅. 이제 우리 국민 모두가 나설 차례입니다.]
주름살들이 더욱 깊게 노인의 얼굴을 파고들었다. 그의 눈에는 이미 아무것도 담겨져 있지 않았다. 끊겨버린 자식과의 인연이 너무나 야속했다. 일찍 떠나버린 할멈의 모습도 이제는 조금씩 잊혀져갔다. 노인은 거칠게 두 번 세 번 기침을 했다. 잠시 있다가 또 기침을 했다.
바람 한점 없는 따스한 겨울 오후였다.
뜨겁지 않은 겨울 햇살이 어느 시골 2차선 아스팔트 위에 말라가고 있었다.
도로에는 벌써 몇 시간, 지나가는 차가 없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노인은 주정뱅이의 집에서 나와 계속 걸었다.
계속해서 걸었다.
비포장도로를 지나 아스팔트 도로로 접어 들었다.
...
한 노인이 우뚝 서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주름살들이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깊은 음각으로 얼굴을 단단히 조각하고 있었다. 구멍이 빠끔빠끔 뚫린 잠바에, 까만 고무장화를 신고 있었다. 왼손에는 이가 달아난 낡은 삽이 한자루 들려 있다.
노인의 시선은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아스팔트에 껌처럼 달라붙은 동물의 형체. 그것은 아마도 고양이 인 듯 했다. 덤프트럭 같은 데 깔린 듯, 완전히 찌부라져 있었다.
노인은 그걸 한참 바라보고 있었다.
말라붙은 핏자국이 아스팔트 위에 물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