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새 우는 강 언덕>, <서편재>, <부쉬맨>, <개 같은 내 인생> 이들 몇 편의 영화는 평생토록 나에게 큰 영향을 준 영화들이다. 이 중에 가장 큰 영향은 <개 같은 내 인생>이다.
최무룡·김지미 주연의 흑백 영화 <물새 우는 강 언덕>. 이 영화를 나는 국민학교 3학년 때 보았다. 대구행 버스 하루에 4번 있는 시골 반야월 인지라, 우리 안심국민학교 운동장에서 포장을 둘러치고 상영했다.
어린 나는 꼭 보려고 해서가 아니라, 그저 개구장이 장난으로 포장 밑으로 기어 들어가서 보았다. 거의 끝 부분에 이르러 “물새 우는 고요한 강 언덕에 그대와 둘이서 부르던 사랑 노래” 이렇게 노래가 나오는데, 그 어떤 삼삼한 정서가 내 어린 마음에 가득 차 올랐었다. 그 때 그 느낌과 정서가 평생토록 내 마음 한 구석에 어떤 에로스적 사랑의 정서구조로 자리잡아 있는 모양이다. 꿈에 젖어 님과 손잡고 거닐던 물새 우는 고요한 강 언덕, 전쟁이 끝났건만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님, 이젠 김지미 홀로 그 강 언덕을 거닐면서 아름다웠던 옛 사랑의 시절을 추억하는 장면과 그 노래가 오버랩되어 생각에 떠오르면 지금 이 나이에도 뭔가 형언할 수 없는 아려− 언 하고 삼삼하고 애틋한 정서에 사무치곤 한다. 백설희의 ‘물새 우는 강 언덕’ 평생토록 나의 십팔번이다.
이청준의 <서편제>는 내 경우라고 해서 특별히 따로 더 말할 것 없을 것이다. 일체의 공리적 생각을 떠나 <서편제>가 우리 ‘삼천만’에게 준 그 큰 감동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으리라. 결코 어떤 동일한 잣대로 말할 수 없는, 민족마다의, 지역마다의 다양한 인간의 정서와 삶과 문화에 관해 깊이 깊이 생각하게 하는 명작 중의 명작이다.
<부쉬맨>, 이 영화를 본 것은 평생 문화관련학도인 나로서는 뜻밖의 큰 행운이다.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는 소쉬르의 언어학에서 비롯된다. 그 언어학의 핵심적 토대가 많이들 들어보았을 랑그-빠롤 이론이다. 나는 공부 초년 때에 랑그-빠롤 개념을 이해한 것도 아니고 이해 못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마침 영화 <부쉬맨>을 우리 다섯 식구가 함께 보게 되었다. 보고 나니, ‘야아- 그 영화 뭐 있다’는 생각이 대번에 들었다. 얼마 후 나는 무릎을 쳤다. <부쉬맨> 영화를 통해 드디어 그 개념을 깨우친 것이다! 나는 지금도 문화적 의미에 있어서 요해가 어려운 어떤 현상이나 사태에 관해 사유할 때면 그 콜라병소동을 있게 한 그 피그미족에 내재된 랑그-빠롤적인, 문화의 생성-변환 원리를 새삼 생각해 봄으로써 도움을 얻곤 한다.
<개 같은 내 인생>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혹시 기억들 하시는지? 우리 고등학교 때인가 혹은 대학교 저학년 때인가 상영된 외국영화다. 그 영화야말로 평생토록 나로 하여금 나 자신을 끊임없이 반성하게 하고 또 반성하게 해서, 지금 이 나마의 나를 만들어준 영화이다.
그런데, 나는 그 영화를 본 적이 없다. 영화 내용이 무엇인지 들은 적도 전혀 없다. 하지만 그 특이한 제목이 내 뇌리 속 어디엔가 꽂혀 계속 잠복해 있다가 문득문득 의식에 떠오르곤 했었다. 그러다가 그 제목이 언제부터인가 나의 본격적인 ‘화두’가 되었다. 드디어 나는 그 화두를 깨우쳤다. 개 같은 내 인생, 이것은 바로 내 인생이었다!
개는 스스로의 자각적 의식에 의해 남에게 닦아가지 않는다. 전적으로 수동적이다. 지가 좋아하는 음식이나 냄새가 있어야만 본능적으로 거기 닦아간다. 상대가 좋게 나오면 지도 좋게 나오고, 나쁘게 나오면 지도 나쁘게 나온다. 하지만 지보다 쎈놈이면 꼬리를 내린다. 그러나 지보다 약한 놈이다 싶으면, 굵게 묵을라 칸다. 주인을 면밀히 관찰한다. 주인의 표정까지 읽고, 손가락 움직임까지도 관심을 가진다. 주인이 자기에게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희비쌍곡선적으로 놀아난다.
아하- 지금까지 내 인생이 바로 그러한 개 같은 인생이었다! 나는 남이 나에게 어떻게 하는지를 먼저 관찰하고 먼저 겪어보고 거기에 맞게 남을 대하는 것을 당연한 것, 이성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상대가 먼저 마음을 연다는 생각이 들어야만 나도 마음을 여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먼저 닦아가기도 했지만, 그것은 상대의 속생각이 어떤지를 먼저 떠보기 위한 것에 불과한 경우도 많았다. 그런 떠보는 일을 표 안 나게 자연스럽게 잘하는 사람을 가까이서 보고는 아주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내심 배우려고 했다. 어느 날 화두방망이로 등 짝을 후려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고 보니, 내가 바로 개 같은 인간인 것이다!
반성이 더욱 깊은 내관內觀적 반성으로 이어진다. 나는 나와 다른 가치관이 불편했다. 나는 나에게 어떤 형태던 희생이 요구되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이 나이에 뭣 하러 불편하고 희생이 요구되는 일에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느냐는 생각에서 나의 몸과 마음이 되도록이면 편안한 쪽으로 향했다. 나는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으면서 남이 섭섭해하지 않을 만큼만 닦아갔다. 그들에게서도 나와 비슷한 모습을 발견하게 되면, 내심 쓴웃음을 지으며 최희준의 <하숙생>을 흥얼거렸다. 이러면서도 나는 누구 못지 않게 사람냄새 나는 사람다운 인간이라고 내심 자부했다. 부끄럽고 부끄럽다.
부끄러운 개 같은 내 인생,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이 물음 때문에 나는 한동안 일이 손에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그런데 문득 내 이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바로 수오지심(羞惡之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맹자에 의하면, 자신의 옳지 못함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수오지심이 바로 인仁의 한 발단發端이다. 기독교 성경의 가르침도 이와 다르지 않다. ‘천국은 애통하는 자의 것’이라고 예수는 설파했다. 자신의 생각과 행위가 잘 못된 것임을 깨달아 수치심을 느끼고 그래서 애통해하는 사람, 바로 이런 사람이 천국에 간다는 것이다.
아! 어떻게 이런 복된 반전이...
나는 잘하면 천국에 갈 수도 있다!!!
이제 나에게 실천화두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이다. 나는 누구든지 만나고 대할 때면 그 화두를 언제나 단단히 붙든다. 그리고 나서도 언제나 그 화두로써 나 자신을 반성한다.
반성의 결과는, 언제나 지행합일이 잘 되고 있지 않다는 또 반성.
나에게는 돈오돈수(頓悟頓修)가 정답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돈오점수(頓悟漸修)인가?
아니면 점오점수(漸悟漸修)인가?
여하튼 점수(漸修)임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언제까지 점수인가?
여기에 답 또한 분명하다. 평생토록이다.
돌이켜 보면 보통 우스운 일이 아니다. 내용은 전혀 모르고, 제목으로만 아는 영화 한 편이 나로 하여금 평생토록 반성하고 또 반성하며 살도록 해서 지금 이 나마의 나를 만들어주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또 있을까?!
고마워라 <개 같은 내 인생>!
<kang40lava@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