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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30일 [연중 제4주간 월요일]
복음: 마르코 5,1-20
자기 자신과 화해하라고?
중국 어느 곳에서는 가마우지를 이용해 물고기를 잡는다고 합니다.
가마우지의 목에 줄을 매서 강에 풀어놓습니다.
그러면 오리처럼 생긴 이 새들은 물속으로 들어가
손바닥만한 물고기를 입에 한 가득 잡아 가지고 옵니다.
물속에서 1분 이상 빠르게 헤엄쳐 다니면서 물고기를 잡는데 그것을 자신이 먹지 않고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목에 묶여있는 줄 때문입니다.
숨을 쉴 정도만 남겨놓고 줄을 매어놓으니 물고기를 삼키지 못해 주인에게 바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죄도 우리를 이렇게 자신의 종으로 만듭니다.
우리는 죄가 원하는 재물과 쾌락과 명예 등을 잡아
죄의 주인에게 바칩니다.
주인이 배부른 것이지 내가 배부른 것이 아닌데도
나는 주인이 기뻐하는 것처럼 기뻐합니다.
이것이 죄의 종살이입니다.
나는 돈이 있어도 없어도 그냥 같은 나입니다.
이렇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와 죄를 구별하지 못하여 종살이합니다.
그럼 죄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무엇일까요?
목의 줄을 끊고 탈출해야합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스스로 자신의 줄을 끊을 수는 없다는 데 있습니다.
자신을 해방시켜 줄 누군가가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우리 줄을 끊어주러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우리 목줄을 끊어주시면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신부님은 고해성사 중에 “자신과 화해하세요!”란 말을 한다고 합니다.
참으로 친절한 말처럼 들리지만 이는 죄와 화해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죄는 화해할 수도 없고 길들일 수도 없습니다.
가마우지가 자신을 이용하는 주인과 화해해야 무엇 하겠습니까?
여전히 죄의 종살이만 남습니다.
죄는 창세기에서는 뱀이고 탈출기에서는 파라오로 상징됩니다.
그것들의 노예 생활하는 것이 죄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그것들과 화해하라고 우리를 불러주신 것이 아니라 탈출시키려고 불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버리고 당신을 따라야 한다고 하시고 자신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신’이 우리를 종살이시키는 죄의 원인입니다.
예수님은 죄를 길들이신 분이 아니라 죄를 십자가에 못 박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게라사의 마귀 들린 사람을 치유해주십니다.
그 마귀 들린 사람은 무덤에 살았습니다. 영적으로 죽었다는 말입니다.
악에 지배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더 이상 그를 쇠사슬로 묶어 둘 수가 없었다.”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이미 그 마귀 들린 사람을 통제해보려고 시도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쇠사슬도 끊고 족쇄도 부수어 버려 아무도 그를 휘어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성경은 이어서 말합니다.
“그는 밤낮으로 무덤과 산에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치곤하였다.”
그 사람 안에 있는 마귀가 망가뜨리는 것은 그 사람 자신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자아도 우리 자신을 망가뜨립니다.
우리 안에 분명 ‘원죄’가 있다고 가르치는데
원죄는 십자가에 못 박지 않으면 절대 우리를 놓아주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치유해 주셨지만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돼지가 죽는 것을 보고 더 이상
피해보고 싶지 않아 예수님을 마을에 들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이 참으로 죄이고 마귀 들린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면 자신들이 섬기는 마귀의 나라가 무너지기 때문에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욕망과 화해하며 살고 싶은 것입니다.
교회 내에서 이렇게 자아와 화해하라는 식으로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시는 방식은 ‘믿음’을 통해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오시는 믿음이란 우리가 하느님이란 사실입니다.
내가 주님의 힘으로 내 자신을 이기려고 하지만 끝까지 내가 사람이라고 믿어버리면
여전히 자아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내가 사람이라 믿으면 그 믿음의 굴레 때문에 죄를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탈출기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홍해를 건너 탈출합니다.
그런데 그 영역이 여전히 이집트 땅이라면 어떨까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시나이 산은 당시 지리적으로는 여전히 이집트 땅이었습니다.
광석이 많이 나기 때문에 군사들이 몰려 있던 곳이었습니다.
만약 탈출의 목적지가 그곳이라면 여전히 이집트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자신이 인간이라 믿으며 죄를 이겨보려고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믿음은 다릅니다.
모세는 시나이 산이 아닌 가나안 땅으로 백성을 이끌었습니다.
파라오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곳이 우리 목적지가 되어야합니다.
그 목적지는 죄를 이기는 인간이 아닌 죄와 무관한 하느님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라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주시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렇게 믿어야만 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나는 하느님의 자녀다. 나는 하느님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라고 기도해야합니다.
그러면 어느 새 죄의 종살이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월30일 [연중 제4주간 월요일]
복음: 마르코 5,1-20
악령은 다양한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시자 악령 들린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오는데, 마르코 복음 사가는 악령 들린 사람의 참혹한 실상을 세밀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전개되는 스토리 역시 기괴하고 특별합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인간 사회로부터 단절되어 무덤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무덤은 죽은 자들의 거처입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나 지금이나 무덤은 산 사람이 거처하기에는 적당치 않은 곳입니다.
그는 아마도 빈 무덤이나 무덤 사이에 굴을 파서 그 안에서 잠을 잤을 것입니다.
악령 들린 이 사람은 얼마나 힘이 세고 난폭하던지 사람들은 두려워 떨었습니다.
틈만 나면 손에 잡히는 데로 부숴버리기 일쑤였고 여러 사람을 다치게 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힘센 장정들이 여럿 달려들어 그의 몸을 쇠사슬로 칭칭 감았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힘이 장사였던지 쇠사슬과 족쇄도 끊어버렸습니다.
그는 괴물 같은 존재로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보면 멀찍이 피해 다녔습니다.
악령 들린 그 사람은 세상과 사람들로부터 철저하게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그 역시 가급적 사람들을 만나지 않기 위해 민가와는 멀리 떨어진 산이나 광야, 무덤가를 떠돌아다녔습니다.
악령 들린 사람들이 가끔 현실로 돌아올 때도 있다지요.
그럴 때마다 참혹한 자신의 현실을 바라보며 할 수 있는 일이란 그 억울함과 비참함을 달래기 위해
있는 대로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울며불며 하느님을 원망하는 것이었습니다.
물에 비친 기괴한 자신의 몰골을 바라보며 이게 과연 사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죽은 게 더 낫다며 자해행위도 했을 것입니다.
머리를 바위에 부딪치기도 했고 큰 돌로 자신의 몸을 치기도 했습니다.
악령으로 인해 그의 미래는 불을 보듯이 뻔했습니다.
객사, 아니면 동사, 아니면 자살...
이렇게 죽기 일보 직전이었던 악령 들린 사람이 마지막 순간에 권능의 예수님과 마주칩니다.
악령은 예수님께서 가까이 오신 것을 보고 벗어날 길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런 이유로 완전히 자신을 낮춥니다.
예수님 앞에 엎드려 절하며 큰소리로 외칩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주십시오.”
예수님의 기에 완전히 눌린 악령들은 완전한 무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특별한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악령이 하느님의 능력과 위엄에 호소하며 자신의 거처인 악령 들린 사람에게서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예수님께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서 쫓겨난다는 것은 곧 지옥의 괴로움 속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하고 외치시며 악령에게 이름을 묻습니다.
그러자 악령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제 이름은 군대입니다. 저희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악령의 이름은 독특하게도 ‘군대’입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 로마 군대는 6826명의 군사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 말은 그 사람 안에 6826마리의 악령이 붙어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 마리 두 마리, 열 마리 스무 마리가 아니라 수많은 악령들의 무리가 그 사람에게 들어가 있었습니다.
악령들은 수가 엄청나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똘똘 뭉쳐 그 사람 안에 들어가 괴롭히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 안에 들어있는 수많은 악령들을 쫓아내시어 근처에 있는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천 마리나 되는 악령 들린 돼지 떼들은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려 달려 빠져죽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악령들과 당당히 맞서시며, 악령 들린 사람에게 다시 한번 생명을 부여하시는 모습을 바라보며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안에 존재하는 무수한 악령들을 바라봅니다.
악령은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비약적인 경제성장 그 이면에 깃들어진 죽음의 문화가 곧 악령들입니다.
부익부빈익빈의 현실, 집단이기주의, 물질만능주의, 경제지상주의, 학벌주의, 외모지상주의, 왕따 현상, 성매매, 마약, 자살에의 유혹...
이 모든 악령들이 우리 주님의 권능과 자비에 힘입어 하루 빨리 사라지기 바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선이 악의 세력을 물리치기 바랍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더러운 영아, 사람에게서 나가라>
2023. 01. 30 연중 제4주간 월요일
마르코 5,1-20 (마귀들과 돼지 떼)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호수 건너편 게라사인들의 지방으로 갔다.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시자마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마주 왔다. 그는 무덤에서 살았는데, 어느 누구도 더 이상 그를 쇠사슬로 묶어 둘 수가 없었다. 이미 여러 번 족쇄와 쇠사슬로 묶어 두었으나, 그는 쇠사슬도 끊고 족쇄도 부수어 버려 아무도 그를 휘어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밤낮으로 무덤과 산에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치곤 하였다.
그는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큰 소리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자, 그가 “제 이름은 군대입니다. 저희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 자기들을 그 지방 밖으로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청하였다.
마침 그곳 산 쪽에는 놓아기르는 많은 돼지 떼가 있었다. 그래서 더러운 영들이 예수님께, “저희를 돼지들에게 보내시어 그 속으로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허락하시니 더러운 영들이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이천 마리쯤 되는 돼지 떼가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
돼지를 치던 이들이 달아나 그 고을과 여러 촌락에 알렸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려고 왔다.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마귀 들렸던 사람, 곧 군대라는 마귀가 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그만 겁이 났다. 그 일을 본 사람들이 마귀 들렸던 이와 돼지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께 저희 고장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마귀 들렸던 이가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 그래서 그는 물러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해 주신 모든 일을 데카폴리스 지방에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더러운 영아, 사람에게서 나가라>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는 당신께 전혀 관심이 없으니
저와 제가 하는 일에
아무 관심도 갖지 마시고
보아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그저 당신의 길을 가십시오.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더러운 영아,
사람을 사람답지 못하게
괴롭히는 더러운 영아,
나는 참으로
사람을 사람답게 살리는 참 사람이라
내 마음은 늘 사람을 품고
내 삶은 늘 사람과 함께 하거늘
어찌 사람과 상관이 없느냐.
사람을 더럽히는 것도 모자라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빚으신
하느님의 이름마저 더럽히는
더러운 영아, 사람에게서 나가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