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신다.
생명의 빵인 예수님의 몸을 먹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린다.
예수님의 몸 안에는 사람을 살리는 무한한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요한 6,41-51)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사막을 유랑하던 시절
굶주림에 지쳐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 불평하며 떠나온 이집트 생활을 그리워하였습니다.
그때 하느님께서는 만나를 내려 주시어 그들의 배를 채워 주셨습니다.
유다인들은 사막을 헤매면서 만나로 배고픔을 달랜 옛 시절을 잊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사막에서 먹었던 만나와 당신 자신을 비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배고픔을 달래 주는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만나를 먹은 이스라엘 백성은 죽었지만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인 당신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주장은 유다인들을 무척 자극하게 됩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빵의 기적으로
많은 군중을 먹이신 것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빵의 기적을 표징으로 보지 않고
육신의 굶주린 배를 채운 것에만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들은 구원을 순전히 물질적인 차원으로만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육신의 배고픔이 채워지면 그것을 구원받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의 이러한 생각을
바로잡아 주시려고 하셨지만 그들은 귀를 막았습니다.
지상의 양식에만 관심을 두면 하느님의 생명과 단절됩니다.
유한한 것의 노예로 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천상의 양식을 바라고 그것을 먹고 살면
비록 유한한 시간 속에서 살더라도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생명을 먹고 살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허무하게 살아갈 수도 있고, 영원히 살 수도 있습니다.
허무와 영원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는 수없이 성체를 모셨습니다.
아직도 ‘영적인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돌아봐야 합니다.
어떻게 성체를 모셨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성체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성체 앞에 선다는 것은 살아 계신 주님께로 ‘나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정성’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생략되었기에, 당연한 듯 모시는 성체가 되었습니다.
구경하는 미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늘의 힘은 거저 오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예부터 성체 신심에는 정성이 실렸습니다.
교회가 ‘공복재’를 규정한 것도 지성으로 모시라는 의도입니다.
지금의 공복재는 성체 모시기 전 ‘한 시간’입니다.
그 시간에는 음식을 먹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70년 전만 해도 성체를 모시려면
전날 밤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하게 했습니다.
선교사들의 지나친 신심 행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성체께 정성을 드리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성체를 자주 모시면 ‘그분의 힘’은 강하게 활동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불안과 허무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생명의 빵이 주는 ‘천상의 힘’입니다.
누구라도 온몸으로 성체를 모시며 이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나는 생명의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지성으로 성체를 모시는 사람은 ‘이승과 저승’에서도 결코 헤매지 않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