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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문협 포천 광릉수목원
일시:2019년 10월 23일 수요일
장소:경기도 포천 광릉수목원 세조릉, 국립수목원, 봉선사, 포천 아트벨리
* 포천 광릉수목원 세조묘소 광릉
서초문협에서 가을행사로 포천 문학기행을 갔다. 먼저 간 곳은 광릉수목원 안에 있는 광릉, 즉 세조릉이다. 그의 부인 정희왕후 묘소도 곁에 있다. 주엽산 자락에 있는 광릉은 사적 197호로 제7대 세조(1417~1468)와 정희왕후(1418~1483)의 능이다. 면적만 무려 249만 4,800제곱미터에 달한다. 풍수가들은 광릉을 쌍룡농주형(雙龍弄珠形, 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노는 형상)이라고 한다. 자리가 좋아서 이후 400여 년간 세조의 후손이 조선을 통치했다는 설명도 있다. 광릉 숲은 2010년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 지역으로 지정되었는데 식물 865종, 곤충 3,925종, 조류 175종 등 모두 5,710종의 생물이 산다. 여기엔 흰진달래 등 특산 식물과 장수하늘소 등이 포함되어 있다. 단위 면적당 식물 종 수는 헥타르당 38.6종으로 설악산 3.2종, 북한산 8.9종을 크게 웃돈다. 곤충도 175.2종으로 설악산 4.2종, 주왕산 12.3종보다 많으며 우리나라에서만 사는 크낙새(천연기념물 제11호)도 이곳에 있다. 이처럼 생물이 풍부한 이유는 인간 활동이 집중되는 온대 중부 지역에서 장기간 숲이 보전되었기 때문이다. 광릉 숲은 왕릉의 부속림이므로 일반인의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했고, 일제 강점기에도 임업 시험림 구실을 해왔으므로 개발과 훼손을 피할 수 있었다. 세조는 태종 17년(1417) 세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세종 27년(1445) 수양대군에 봉해졌다. 세종의 뒤를 이은 병약한 문종은 자신의 단명을 예견하고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남지, 우의정 김종서 등에게 어린 왕세자가 등극했을 때 그를 잘 보필할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권람, 한명회 등 무인 세력을 거느리고 단종 1년(1453) 김종서의 집을 불시에 습격해 그와 그의 아들을 죽였다. 곧이어 단종의 명이라고 속여 중신을 소집한 뒤 사전에 준비한 생살 계획에 따라 황보인, 이조판서 조극관 등을 궐문에서 죽였다. 이를 계유정난이라 한다. 수양대군의 친동생인 안평대군도 강화도에서 사사했다. 이후 실권을 잡은 수양대군은 1455년 단종으로 하여금 양위하게 하고 왕위에 올랐다. 단종은 작은아버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으나, 세조의 처신에 반대해 상왕을 복위하려는 사건이 일어나자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 청령포로 귀향 갔다. 세조가 왕권을 강제로 빼앗았다고 생각한 신하들은 세조에게 충성을 거부했다. 박팽년은 충청감사로 있을 때부터 공문에 신(臣)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음으로써 세조를 왕으로 섬기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고, 성삼문은 하늘에 두 태양이 없고 백성에겐 두 왕이 없다라고 하며 세조의 녹을 먹지 않겠다고 했다. 유응부는 가혹한 고문에도 끝내 굴복하지 않았으며, 이개와 하위지도 불사이군의 정신으로 갖은 고문에도 늠름한 태도를 보였다. 단종을 향한 충성심을 꺾지 않자 세조가 이들을 잔인하게 처형해 역대 왕 중에서 가장 냉혈한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그러나 조카 단종의 왕위를 빼앗고 죽여버린 냉혹한 야심가라고 혹평하는 학자도 있지만, 그의 치적에 괄목할 만한 것이 많다고 인정하는 학자도 있다. 세조가 무술이 뛰어났지만 음악에도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 세조는 후궁을 한 명만 두었으며 술자리에는 조강지처인 정희왕후와 함께하는 경우가 많았다. 말년에 세조는 왕위에 오르기 전 옛집을 찾았는데, 이때도 정희왕후와 술자리를 같이했다. 세조는 어린 조카의 왕권을 찬탈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단종의 어머니이자 형수인 현덕왕후의 혼백이 꿈에 자주 나타났고 어느 날은 세조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세조는 침을 피하려고 몸을 돌렸지만 등에 맞고 말았다. 그 뒤로 세조는 침을 맞은 부위에 등창이 나 평생 고생했다. 어느 날 세조가 오대산 월정사를 참배하고 상원사로 올라가다가, 계곡에서 잠시 쉬면서 몸에 난 종기를 보이지 않으려고 신하들을 물리치고 혼자 목욕을 하고 있었다. 그때 동자 한 명이 노는 걸 본 세조는 등을 좀 씻어 달라고 했다. 그리고 목욕을 마친 뒤 어디 가서 임금의 몸을 씻어 주었다는 말을 하지 마라고 했다. 당시의 법도로는 왕의 몸에 아무도 함부로 손댈 수 없으므로 동자는 이를 어긴 셈이 된 것이다. 그러자 동자도 대왕도 어디 가서 문수보살을 직접 보았다고 말하지 마십시오라고 한 뒤 어디론가 사라졌다. 세조는 깜짝 놀라서 두리번거렸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그제야 종기가 씻은 듯 나았음을 알았다. 세조는 기억을 더듬어 화공에게 동자로 나타난 문수보살의 모습을 그리게 했고, 이것을 동상으로 조성한 것이 현재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 청량선원에 보관된 문수동자상(국보 제221호)이라고 한다. 상원사에서 병을 고친 세조는 다음 해에도 상원사를 찾아 법당으로 올라갔는데, 갑자기 고양이가 나타나 세조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이상하게 생각한 세조가 밖으로 나와 법당 안을 샅샅이 뒤지도록 하니 불상 밑에 자객이 숨어 있었다. 고양이 때문에 목숨을 건진 세조는 상원사에 고양이 밭이라는 뜻의 묘전을 내렸으며, 서울 인근 여러 군데에 묘전을 마련해 고양이를 키웠다. 서울 강남구 봉은사의 밭을 얼마 전까지 묘전이라 부른 까닭도 여기 있다.
상원사에 있는 통일 신라 시대 동종(국보 제36호)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에밀레종보다 45년 앞선다. 이 종이 상원사에 오게 된 이유도 세조와 관련이 있다. 세조가 상원사에 바치려고 전국을 수소문해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종을 선정했는데, 바로 안동 누문에 있던 종이었다. 이것을 1469년 현재의 상원사로 옮겼는데, 안동 누문에 걸려 있던 종이 꼼짝하지 않아 종유 하나를 떼어내니 비로소 움직였다고 한다. 전설을 입증하듯 지금도 유곽 안에 종유 하나가 없다.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한 세조는 1468년에 원상제를 설치했는데, 왕명의 출납 기관인 승정원에 세조 자신이 지명한 삼중신(신숙주, 한명회, 구치관)을 상시 출근시켜 왕세자와 함께 모든 국정을 상의·결정하도록 한 것이었다. 이는 세조가 말년에 정무 처리에 체력의 한계를 느꼈으며, 후사의 장래를 부탁하려는 의도에서였다고 볼 수 있다. 세조는 1468년 9월에 병이 위급해지자, 여러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9월 7일 왕세자에게 전위한 뒤 이튿날 사망했다. 그런데 실록에는 매우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세조가 사망하기 직전 천문이 이상하게 돌아간 것이다. 9월 2일에서 4일까지 사흘 동안 혜성이 연속해서 나타났고 9월 6일에도 나타났다. 당대에 혜성은 큰 변괴를 의미했으므로 한 시대의 주인공이었던 세조가 혜성의 등장으로 자신의 죽음을 예측했는지도 모른다는 설명이다. 정희왕후는 파평 윤씨 윤번의 딸로 1428년 수양대군과 가례를 올려 낙랑부대부인에 봉해졌고,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정희왕후는 세조가 왕이 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세조가 정권을 잡기 위해 계유정난을 일으킬 때 거사를 위한 용병이 누설되었다며 신하들이 만류하자, 중문에 이른 수양대군에게 손수 갑옷을 들어 입혀서 용병을 결행하게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468년 예종이 19세로 즉위하자 정희왕후는 수렴청정을 했고 이는 조선 시대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예종이 재위 1년 2개월 만에 사망하자, 정희왕후는 맏아들인 덕종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성종)을 당일 즉위하게 했다. 하지만 성종 역시 13세의 어린 나이였으므로 정희왕후는 그 뒤로도 7년 동안 섭정을 계속했다.
광릉은 조선 왕릉 중 남다른 것이 많기로 유명하다. 우선 입구로 들어가면 다소 이색적인 하마비가 보인다. 선왕, 선비를 모시는 제사를 주관하기 위해 친행한 왕조차도 이곳에서부터는 말이나 가마에서 내려야 했다. 중앙에 정자각이 있고 그 뒤 좌우 언덕에 능이 있는데 이와 같은 동원이강 형식은 광릉이 최초다. 문종의 현릉도 동원이강 형식이지만 광릉의 조영 시기가 앞선다. 그런데 능은 두 개이지만 정자각이 하나라는 데서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긴다. 각 능마다 정자각을 하나씩 세우면 문제가 없는데 정자각 하나로 양 능을 담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세조와 정순왕후의 사망 연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세조는 1468년에 사망해 정통 범례에 따라 왕릉을 축성했다. 그때 정자각도 조성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1483년에 정순왕후가 사망해 동원 이강으로 별도의 능을 만들자 기존에 설치된 정자각이 예상치 않은 문제를 일으켰다. 전통적인 개념에 의하면 장례는 흉례이고 제사는 길례다. 세조의 능이 완성된 후 정순왕후가 사망했지만 정순왕후의 시신을 세조의 정자각에 모실 수 없었다. 정순왕후의 시신은 흉례에 준하므로 길례를 기본으로 하는 세조의 정자각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묘수가 도출되었다. 가정자각(흉례 건물)을 지어 왕비의 시신을 모신 후 3년 후 두 왕릉의 중앙에 새 정자각(길례 건물)을 지어 둘을 함께 모시는 것이었다.
광릉의 홍살문을 지나면 곧바로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있다. 왕릉에서 당연히 보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참도와 배위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는 광릉이 유일하다. 예감은 세조의 능 사초지에 있지만 산신석은 발견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왕릉에는 소나무가 주류를 이루는데 이곳은 소나무가 능침 배면에만 일부 있고 넓은 산역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대부분 전나무이며 광릉 입구에 근래 심은 소나무 몇 그루가 있을 뿐이다. 이들은 유명한 정이품송(천연기념물 제103호)의 후계목이다. 이들 소나무가 광릉에 심어진 것은 세조와 정이품송의 인연 때문이다. 속리산 법주사 입구에 있는 정이품송은 높이 15미터, 가슴 높이의 둘레 4.5미터의 거수로 수령은 600년 정도다. 1464년 세조가 속리산 법주사로 행차할 때 타고 있던 가마가 이 소나무 아래 가지에 걸릴까 염려해 연 걸린다라고 하자 소나무가 스스로 가지를 번쩍 들어 올려 어가를 무사히 통과하게 했다고 한다. 또한 일행은 서울로 돌아갈 때 쏟아지는 소나기를 이 나무 아래서 피했다고 한다. 신기하고 기특한 마음에 세조가 소나무 가지에 친히 옥관자를 걸어주고 후일 정이품 벼슬(장관급)을 내렸다. 이 고사로 이 나무를 '연걸이 나무' 또는 '정이품송'이라고 부른다. 나무에 벼슬을 내린 것은 세조가 처음은 아니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진시황이 소나무에 벼슬을 내린 기록이 있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에는 정이품송에 관한 기록이 없다. 정부에서 관직을 수여하는 경우 철저하게 기록하는 것을 감안한다면 '정이품 벼슬'은 공식적인 사안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정이품송에서 남서쪽으로 약 7킬로미터 떨어진 속리산 서원계곡 입구에는 길가에 자라는 정이품송 부인 소나무가 있다. 수령은 약 600여 년이며 줄기가 두 개로 갈라져 있다. 정이품송과 부부 간이라 해서 '정부인 소나무'라고 부르는데, 정이품송이 곧추 자란 데 비해 이 나무는 밑에서 두 갈래로 갈라졌고 가지가 서로 얽혀 아름답다.
광릉은 이전의 왕릉과는 건축 방법이 다른 것으로도 유명하다. 세조는 "내가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사용하지 말고 병풍석을 쓰지 마라"라고 유명을 내렸다. 그러므로 광릉은 병풍석이 없으며 석실은 회격으로 바꾸었고, 병풍석에 새겼던 십이지 신상은 난간 동자석주에 옮겨 새겼다. 이후에 이와 같이 석실이 아닌 회격으로 조성하고 병풍석을 상설하지 않은 능이 많이 등장한다.
세조가 능을 간략하게 조성해 인력과 비용을 절감하고 민폐를 덜라고 했지만 능이 갖고 있는 기본 시설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광릉은 왕릉과 왕후 능 각각 곡장 3면, 난간석 12간, 석상 1개, 장명등 1개, 망주석 1쌍, 문인석 1쌍, 무인석 1쌍, 석마 2쌍, 석호 2쌍, 석양 2쌍을 두었으며 그 외에도 정자각, 수라청, 능표, 홍살문, 재실이 있다. 광릉은 6·25전쟁의 흔적을 많이 갖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정자각을 올린 정면 석대를 보면 수많은 총탄 자국이 보인다. 배위청 원형 기둥의 총탄 흔적은 고리를 박아 엄폐했다. 영조가 세조 등극 200주년을 기념해 만든 비각 내의 능표에도 흔적이 보인다. 세조와 정희왕후 능침의 석물에도 총탄 자국이 많이 있는데, 정희왕후의 능침에 있는 좌측 석마 한 개는 원형을 볼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다. 우측 무인석은 두 동강 난 것을 보수한 흔적이 보인다. 왕릉을 답사할 때 많은 사람이 불평하는 것 중의 하나는 능침을 공개하지 않아 왕릉 주위를 먼 곳에서 보거나 능침 인근에서 헛돌다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문화재청에서도 이런 문제점을 감안해 일부 왕릉은 능침까지 올라갈 수 있도록 공개하고 있다. 선조의 목릉, 숙종의 명릉, 세조의 광릉 등이다. 두 아들을 기를 때에도 왔었고, 오늘 다시 온 광릉수목원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잘 몰랐건 세조릉도 보고 그에 얽힌 역사도 세세히 알았다. 해설사가 나와서 설명해주었다. 뜻깊은 가을 문학탐방이다.
* 포천 국립수목원(광릉수목원)
광릉에서 나와 국립수목원으로 이동하여 산책했다. 광릉수목원 입구에 국립수목원이라는 안내판이 있다. 포천 국립 수목원이 자리한 광릉(光陵) 숲은 조선 제7대 왕인 세조가 묻힌 광릉의 부속림 중 일부로 500여 년 이상 황실림으로 엄격하게 관리를 해오다 일제 강점기인 1911년 국유림 구분 조사 시에 능묘 부속지를 제외한 지역을 ‘갑종 요존 예정 임야’에 편입시켰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광릉 숲이 되었다. 1913년에는 광릉 숲을 임업 시험림으로 지정하여 묘포가 설치되었고, 1929년에는 임업시험장 광릉출장소가 설치되어 숲을 관리하였으며, 1967년 1월에는 출장소가 임업시험장 중부지장으로 승격되었다. 포천 국립 수목원은 1920년대부터 시작된 우리나라 산림 생물종 연구의 전통을 계승하고, 특히 우리나라 산림 생물 주권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또한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 지역으로 지정된 광릉 숲을 보호·관리하고 있는 산림청 소속의 국립 연구 기관이다. 단풍이 절정으로 매우 아름다운 숲길이다. 곳곳을 둘러보며 걸었다. 황장목 소나무도 있다. 일정상 한 부분만 둘러본 것이 아쉽지만 힐링에 큰 도움이 되는 뺴어난 장관의 국립수목원 숲길 산책이다.
* 남양주 봉선사
다음으로 간 곳은 봉선사다. 광릉에서 조금 떨어진 남양주에 소재해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탄문이 창거하여 운악사라 하였다. 그 후 1469년(예종 1) 정희왕후 윤씨가 광릉의 세조를 추모하여 추모하여 89칸으로 중창하고 봉선사라고 하였다. 1551년(명종 6)에는, 교종의 수사찰로 지정되어 여기서 승과시를 치르기도 하고, 전국 승려와 신도에 대한 교학진흥의 중추적 기관 역할을 하였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여러 번 수축했으나, 1950년 6 ·25전쟁 때 다시 법당과 함께 14동의 건물이 소실되었다. 화엄이 1956년 범종각을, 1963년에 운하당을 세우고, 1969년에는 주지 운허가 법당을 중건하고, 1977년에는 월운이 영각을 세웠다. 절 종각에 보존되어 있는 동종은 조선 전기의 것으로 보물 제397호로 지정되어 있다. 봉선사는 광릉의 원찰은 광릉에서 약 2킬로미터 떨어진 인근 농안 마을에 있는 광릉의 원찰이다. 고려 광종 20년(969) 법인국사가 창건했고 정희왕후의 명으로 중창되었다. 이름도 '선왕의 능침을 수호하는 원찰'이라는 의미를 담아 지었으므로 광릉과는 한 짝 같은 존재다. 한명회, 구치관 등이 책임을 맡아 건설한 사찰로 왕실 원찰 중에서 으뜸으로 대접받았다. 봉선사는 흥미 있는 용어 '야단법석(野壇法席)'을 만든 것으로도 유명하다. 법석은 원래 불교 용어로 '법회석중(法會席中)'이 줄어든 말이다. 이는 설법을 듣는 법회에 회중이 둘러앉아 불경을 읽는 법연을 일컫는 말로서, 매우 엄숙한 자리를 뜻했다. 그런데 봉선사는 신자가 많아 법당에서 이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법당 밖에서 법회를 여니 주위가 산만해져 야단법석이라는 말이 나왔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야단법석이라는 말이 봉선사에서 유래되었든 아니든 시끌벅적하게 떠든다고 할 때는 '야단법석(惹端法席)'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는 설명도 있다. 봉선사는 세조의 원찰로 유명하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비롯해 6·25전쟁 등 여러 전란 때마다 화를 입어 현재 옛 모습을 찾을 수 있는 건물은 없다. 하지만 봉선사에 있는 대종(보물 제397호)은 아직도 현장에서 역사를 지켜보고 있다. 이는 예종 1년(1469)에 제작된 것으로 높이 238센티미터, 입 지름 168센티미터, 두께 23센티미터, 무게 1,500킬로그램에 달한다. 종 입구가 넓어진 형태나 몸통에 있는 가로 띠와 조각 수법 등은 조선 시대 나타난 새로운 양상으로 가치를 높이 평가받았다. 봉선사는 한자가 아닌 한글로 주요문구를 썼다는 것도 신기한 풍경이다. 대웅전을 큰법당으로 쓴 것을 비롯해 절의 기둥마다 불교에 대한 좋은 글이 한글로 적혀 있다. 절 입구에는 석탑도 있고, 곁에는 동종도 있다. 절의 뒤켠 산에는 영각도 있다. 모두 의미 있는 유적들이다. 아주 뜻깊은 불교 유적을 보며 많은 것을 배우고 간다.
* 포천 아트벨리
봉선사에서 북쪽으로 달려가서 만난 곳이다. 경기도 포천의 폐채석장을 활용하여 복합문화예술공간으로 조성한 곳이다. 입구에서 모노레일을 타고 올라갔다. 포천아트밸리는 1960년대 한국에서 건설산업이 확장되면서 석재를 채굴하였던 채석장이었던 곳을 그 가치를 새롭게 변경하여 복합문화공간으로 꾸며진 곳이다. 2005년 석재 채굴로 황폐화된 곳을 문화공간으로 복원하는 계획이 추진되었으며 2009년 10월에 복합문화공간으로 개장하였다. 포천아트밸리는 예술인들의 창작활동을 지원하는 문화공연장의 설비를 갖추고 있으며 조각공원, 특설무대를 갖추고 있어 다양한 문화예술공연이 펼쳐진다. 그리고 2차 발전기간(2010~2013)에 들어서 교육전시센터가 건립되고 문화예술체험공간으로 발전되었다. 포천아트밸리가 소재하는 경기도 포천시 일대는 봉화산과 천주산 석산이 있는데 이곳에서 채굴되는 석재는 양질의 석재로 판정되어 포천 화강암으로 불렸으며 석재로 인기가 높았다. 이곳에서 채굴된 석재는 각종 주요한 국가 시설물에 사용되었는데 국회의사당, 세종문화회관, 인천국제공항 등 중요시설물과 건축물에 많이 사용되었다. 현재도 이 일대는 채석장 2곳이 운영되고 있다. 채석장이 문화예술공간으로 재탄생됨으로 인해 이 일대는 지역발전과 환경을 복원하고 도시 재생사업의 성공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연간 약 20만 명이 방문하고 전체면적은 5만 평에 이른다. 채석장으로 움푹 패였던 곳에 기암절벽으로 둘러싸인 인공 호수는 비경을 이룬다.물빛도 장관이고 풍광도 어느 외국을 능가하는 절경이다. 영화, 드라마 등 촬영장소라는 문구도 큰 몫을 한다. 조각공원 등 많은 예술 공간을 둘러보고 다시 모노레일로 하산하여 내려왔다. 자녀들과 다시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으로 행사는 모두 마쳤다. 수도권이서 다른 행사 때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귀가하였다. 매우 보람되고 유익하고 의미 있는 가을 문학행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