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락호(破落戶)'
일본 경찰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도박판을 전전하면서 독립운동 자금 조달을 위해 파락호를 자처한 사람이 학봉 김성일 종가의 종손 김용환(金龍煥, 1887~1646) 선생이다.
그는 명문가 후손으로서 생전에는 망나니 행세로 문중에 먹칠을 했다고 욕을 많이 먹었지만,
오로지 나라의 독립만을 위한
그의 집념,
그리고 거짓 파락호 행적이 오롯이 그의 사후(死後)에야 모두 밝혀졌다.
김용환은 경북 안동에서 파락호의 대명사로 불리면서 안동지역의 노름판을 쥐고 흔드는 사람이었다.
김용환은 조선 3대 파락호 중 한 명으로 비밀리에 수행한 독립운동 자금 조달을 위해 일본 경찰의 감시망을 피하려고 도박판을 전전하며 거짓 파락호 행세를 했다.
그러한 사실은 그의 사후(死後)에야 모든 것이 밝혀졌다.
김용환은 할아버지 김흥락의 영향을 받아 영남, 충청지역 의병활동의 중심에 함께 했다.
3·1운동 이후에는 만주 망명길에 올랐으나 신의주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돼 결국 안동으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김용환은 도박을 하며 가산을 탕진하기 시작했다.
당시 안동 일대 노름판에는
안 낀 곳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
의성김씨 문중에서는 ‘집안을 말아먹을 종손이 나왔다’며
욕을 하면서도 종가가 망하면 문중이 망한다며 김용환이 도박으로 팔아먹은 문중 땅을 십시일반 모금으로 다시 사주곤 했다.
그가 워낙 난봉꾼이라 집안 재산을 거덜 내자 외동딸을 시집 보낼 혼수 비용도 남아있지 않게 됐다.
딸의 시댁에서 장농을 사라고 준 돈마저 딸 몰래 가져가서
도박으로 탕진해서
결국 딸은 친정 큰어머니가 쓰던
헌 장롱을 들고 펑펑 울면서
시집을 갔다.
명문가인 학봉 종가의 여식이 이런 수모를 당하고 있는데도
도박에만 빠져있던 김용환을
문중 사람들이 무척 욕했지만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학봉’과 ‘난봉’이라는 두 봉황이 나왔으니
그만하면 충분한 것 아니냐”
며 욕하는 문중 사람들에게
오히려 큰소리쳤다.
종가가 망하는 것을 볼 수 없었던 일가친척들이 다시 사 준 집과 논밭도 매번 또 다시 팔아버리고 노름판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노름을 하다가 종갓집도 남의 손에 넘어가고 수백 년 동안 종가 재산으로 내려 온 전답 18만여 평(현재 가치로 200~300억 원 상당)도 다 팔아먹고 아내 손을 잡으며
“미안하오, 깊이 뉘우쳤소,
이제 달라지겠소.”
라는 약속도 잠시,
다시금 남은 땅 문서를 들고 노름판을 찾았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 있었다.
그는 도박에서 돈을 딸 때도 많았는데 돈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새벽 몽둥이를 외치고 난 후
쓸어 담은 돈도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
그렇다면 재산이 늘었어야 마땅한데,
항시 그는 그 많은 돈을 도박에서
다 잃었다고만 했다.
그럼 그 많은 돈은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사실 그 많은 돈들은 만주의 독립군에게 보내지고 있었다.
약 300억 원이나 되던 재산이 아무 일도 없는데 그냥 사라지게 되면 독립군 자금으로 보내졌다고 일본군이 의심하고 결국에는 밝혀질 것이라고 우려한 김용환이 스스로 파락호를 자처하며
가족과 문중,
그리고 많은 사람들과 일본군까지 모두를 속이며 독립군 군자금을
댄 것이다.
그가 어릴 적 의병활동을 하던 의성김씨 일족의 김회락은 전투에서 패전해서 학봉 종가 종택에서 은신했지만 결국 일본군에게 잡혔고, 김회락·김흥락·김승락 등은 일본군에게 포박당해 집 마당에 꿇어앉게 됐고 집안이 일본군에게 약탈당하는 등 쑥대밭이 됐다.
김용환은 이 때 할아버지 김회락이 총살당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고 그는 독립군 군자금 모금과 친일 매국노들, 친일 부자들에게 사형 선고장‘을 보내는 등 여러 활동을 하다 1922년 결국 일본제국 경찰에게 체포됐고,
이후 풀려난 뒤 독립군 군자금을 의심 받지 않고 조달을 생각하다 도박으로 잃은 척 하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다 일제가 만주 독립군 군자금을 추적하다 그 중 일부가 ‘안동의 김용환에게서 나왔다.’는 증언으로 치밀하게 군자금을 댔지만 결국 일제의 주요 감시인물로 지목됐다.
그리고 딸이 시집가는 날 행방이 묘연했던 이유도 도박에 빠진 것이 아니라 군자금 관련 혐의로 일본 경찰에 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임종 전 독립군 동지이던 하중환이 병석을 찾아와서
“병이 이렇게 깊은데 정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을 감으실 건가? 그 동안의 독립운동 내용을 가족에게는 말해야 하지 않겠나?”라고 물었다.
김용환은 선비의 후손으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굳이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며 끝까지 함구를 당부했다.
그리고 다시 자리에 누운 지
이틀 후 끝내 세상을 떠났다.
'받은 글'
https://m.cafe.daum.net/spdprpvuswlfmf/B71w/8391?svc=cafeapp클릭
첫댓글 가족들이 너무 힘들었겠어요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거지만
감동 감동 또 감동입니다 이런 분이 계셨기에 대한민국이 존재한것이지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