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벤느망을 읽고 있는 화가의 아버지 루이 오귀스트 세잔의 초상
궁핍함이 몸에 배었던 다른 인상주의자들과는 다르게, 세잔은 비교적 여유로운 생활을 했었습니다.
특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가난하였던 졸라와는 대조적으로, 세잔은 단 한 번도 돈을 위해 그림을 그린 적이 없었죠. 물론, 그가 남긴 글을 보면 돈에 대해 언급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는 했지만, 세잔은 마음만 먹는다면 돈은 언제든지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세잔의 아버지, 루이 오귀스트 세잔은 엑상프로방스의 유일한 은행의 은행장이었고, 그 전부터 모자 사업으로 자산도 무척 많이 축적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잔은, “우리 집은 여러모로 괜찮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갈피를 잡지 못하는 화가지망생인 나에게는 좀 엄격했다. 하지만 시골 집안이었음을 생각해본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하기도 하죠.
더구나 그에게는 아버지가 매달 부쳐주는 돈 외에도 어머니가 몰래 부쳐주는 돈도 있었죠.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금수저까지인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은수저는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세잔이 돈을 펑펑 쓰고 다녔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검소하게 생활하였고, 그것은 아버지에게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후에도 마찬가지였죠.
세잔의 아버지는 이렇게 사업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다 보니 아무래도 아들이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하였습니다. 아무래도 자신의 사업을 물려 받아 대를 잇기를 바랐었죠. 그래서 세잔의 아버지가 가장 싫어했던 사람이 바로 에밀 졸라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나중에 에밀 졸라가 무척 성공한 소설가가 되니 아버지의 태도도 바뀌었지만, 초기에 에밀 졸라를 보는 루이 오귀스트 세잔의 시선은 '아들을 꼬셔서 헛바람을 집어넣은 못된 놈' 정도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세잔이 법대를 때려치우고 그림 때문에 파리로 갔을 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도 바로 에밀 졸라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잔은 언제나 아버지와 대립각을 세웠었고, 그만큼이나 아버지에게 인정을 받고 싶기도 했었습니다. 그런 세잔의 마음이 잘 보이는 것이 바로 아래의 그림, <레벤느망을 읽고 있는 화가의 아버지 루이 오귀스트 세잔의 초상>입니다.
이 그림은 사실 세잔의 염원이 담긴 상상화에 가깝습니다. 우선, 사업으로 일가를 이룬 사람답게 무척 보수적이었던 세잔의 아버지는 레벤느망(L'Événement)이라는 신문을 읽을 턱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레벤느망이라는 잡지는 사회, 정치, 문화 등에 관한 기사와 비판 평론을 싣는 진보적인 잡지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레벤느망에는 에밀 졸라의 평론이 자주 올라왔었죠. 그러므로 작품에 나오는 장면은 완전히 세잔의 개인적 소망에 의해 구성된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한 것이죠.
그렇다면 세잔은 어째서 이런 그림을 그린 것일까요? 그 힌트는 신문을 읽고 있는 아버지의 뒤에 걸려있는 그림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확인이 잘 되실지 모르겠지만, 벽에 걸린 그림은 바로 세잔이 이 작품을 그리기 몇 년 전에 그렸던 정물화입니다.
세잔이 이 그림을 배경에 넣으면서 말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자신의 그림에 대한 친구 에밀 졸라의 평론을 읽는 아버지, 그 아버지에게 인정받는 자신의 그림과 친구의 글을 염원하면 그린 것은 아니었을까요?
물론, 에밀 졸라는 이 신문에 살롱전을 바보들의 집단이라고 비평하는 바람에 신문사에서 해고당했지만, 에밀 졸라의 성토에 반응이라도 하듯, 이 작품은 세잔의 초기 작품 중 유일하게 화단의 인정을 받게 됩니다.
이처럼 에밀 졸라와 세잔은 다투기도 많이 다투었지만, 서로 힘이 되어주며 계속 발전해 나갑니다. 어떤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는 말이죠.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말처럼, 세상에 영원한 우정도 없나 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우정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아쉽게도 세잔과 에밀졸라의 우정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우정은 결국, 에밀 졸라의 한 작품으로 인해 파국으로 치닫게 되죠.
물론, 이런 사건을 에밀 졸라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습니다. 세잔의 강한 자존심도 한몫 했죠.
처음부터 엄청나게 자존심이 강했던 세잔은 언제나 자신의 그림에 확신을 가지고 있는 전형적인 천재 예술가였지만, 천재가 대개 그렇듯이 별로 사교적이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그림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사람들을 용납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동료 화가들이 자기들 멋대로 내 작품을 평가하는 것을 견딜 수 없다. 내가 언제 그들에게 평가해 달라고 했나? –폴 세잔-
그러다 보니 세잔은 인상주의 화들 사이에서도 고립된 외톨이였죠. 그중에서도 세잔과 사이가 가장 안 좋았던 사람은 바로 에두아르 마네입니다. 어째서인지 세잔은 처음부터 마네에게 열등감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폴 세잔의 작품인 <현대적인 올랭피아>는 마네의 1865년 작 <올랭피아>를 패러디 하여 그린 것입니다. 세잔은 마네에게 심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부단히 그를 능가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하였죠.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런 마네가 세잔의 가장 친한 친구 에밀 졸라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에밀 졸라는 마네가 올랭피아를 그렸을 때 유일하게 우호적인 글을 써 준 사람이기도 했고, 마네도 그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졸라의 자화상을 그려 주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세잔은 그런 마네와 에밀 졸라가 그다지 곱게 보이진 않았습니다.
아마도 질투 비슷한 감정도 있었겠죠. 세잔과 에밀 졸라와의 우정은 마네와 에밀 졸라의 관계에 반비례하여 멀어졌습니다. 그러던 중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집니다.
에밀 졸라가 말년에 소설을 한 편 썼는데, 그것을 본 세잔이 거기에 등장하는 인물을 자신으로 받아들인 것이었죠.
에밀 졸라가 쓴 소설, 즉 <작품>(작품의 제목이 작품입니다)에는 두 예술가가 등장하는데, 그중 한 명은 예술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성공한 인물이었고, 다른 한 명은 사회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실패한 끝에 자살하는 인물이었죠.
세잔은 이 중 첫 번째 인물을 마네로, 그리고 두 번째 인물은 세잔 자신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착각인지, 아니면 진짜 에밀 졸라가 그것을 염두에 두어 쓴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결국 둘 사이의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30년 우정은 끝이 납니다.
세잔이 졸라에게 보낸 아래의 마지막 편지만 남기고 말이죠.
1889년 4월 4일, 가르단.
친애하는 에밀.
친절하게도 보내 준 <작품>을 지금 막 받았네.
루공 마카르 총서의 저자가 잊지 않고 기억해 준 것에 감사드리네.
그리고 지나간 세월을 추억하며 저자의 손을 잡고 악수를 청하는 바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