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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9. 묵상글 ( 사순 제 3주간 토요일. - 하느님 곁.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아직 / 05:28 추가
^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글 일부. : 아직 / 08 : 20 추가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아직 / 08 : 20 추가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아직 / 03:46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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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9. 사순 제 3주간 토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 곁>
하느님 곁
늘 열려있으나
스스로
있을 수 있다고
자만하는 사람에게
하느님 곁은
거추장스러울 뿐이요
스스로
있을 수 없음을
고백하는 사람에게
하느님 곁은
든든하기 그지없으니
하느님 곁
가까울수록
스스로
있을 수 있다고
자만하는 사람은
한걸음 또 한걸음
거기에서 물러서고
스스로
있을 수 없음을
고백하는 사람은
한걸음 또 한걸음
거기에로 다가가니
하느님께서
곁에 두고 싶어도
스스로
있을 수 있다고
자만하는 사람을
억지로
품지 않으시고
스스로
있을 수 없음을
고백하는 사람을
기꺼이
보듬으신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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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9. 사순 제 3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3.29 05:22
-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것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오늘 복음에서 주인공은 둘입니다.
그러나 오늘 독서와 연결하여 보면 바리사이가 더 주인공입니다.
먼저 그는 기도하려고 간 것이 아닙니다.
왜냐면 그는 하느님 앞에 자랑하러 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랑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면 기도가 하느님과의 진실한 만남이고 통교라면
자랑은 하느님과의 만남과 통교가 목적이 아니고,
하느님이든 인간이든 누구든 상관없이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자랑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든 만나기만 하면 자랑하기 마련이고
그렇기에 굳이 하느님을 만나 뵙고 싶은 것이 아니며,
하느님 앞에 있더라도 하느님 앞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 집중하지 않고 세리에게 눈길을 돌리고 세리와 비교나 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우리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하필이면 하느님께 자랑하냐?
자랑할 데가 없어서 하느님께 자랑하러 왔냐?
이런 바리사이에게 오늘 호세아는 “자, 하느님께 돌아가자!”라고 호소합니다.
지금까지 세리를 봤다면 자! 이제 그 눈을 하느님께 돌리자고,
작은아들처럼 하느님을 떠났다면 자! 이제 하느님께 돌아가자고,
고통을 주신다고 주님을 떠났다면 이제 하느님께 돌아가자고 호소합니다.
그런 다음 호세아는 “하느님을 알아드리자. 주님을 알도록 힘쓰자.”라고 호소합니다.
지금까지 바리사이는 자기가 하느님을 알고 있다고,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하느님이 뭘 좋아하시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먼저 그는 하느님께서 자기의 십일조나 단식을 좋아하신다고 알고 있고
율법을 어기는 세리보다 자기를 하느님께서 더 사랑하신다고 잘못 알고 있습니다.
이런 그에게 오늘 호세아서의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
그러니까 기도하러 갈 때 십일조나 희생제물이나 번제물과 같은 것을 가지고 가서
자기 자랑이나 하는 것을 하느님께서 좋아하시지 않고,
세리처럼 겸손히 하느님께 나아가 자비를 청하는 것을
하느님께서는 더 좋아하신다는 그는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어제 우리는 첫째와 둘째가는 계명이 무엇인지 들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순절에 바리사이처럼 단식하는 것으로
자기만족하고 자기 자랑이나 하고 사랑은 멀리하곤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작 끊어야 할 것은
음식이 아니라 욕망과 미움이고,
비교하며 내가 잘났다는 교만입니다.
자랑과 교만 이것은
모든 사람이 싫어하고
하느님께서도 제일 싫어하시고,
오직 자기만 좋아하는 것임을 오늘 우리는 알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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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9. 사순 제 3주간 토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관상: 동정심으로 향하는 길!
하느님의 숨
2025.03.28. 17:35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3월 28일 금요일 (호명환 번역) 열세 번째 주간: 향심(centering)과 침묵(silence), 고요(stillness)
우리는 동정심을 키우기 위해 기도하고 희망하고 갈망해야 합니다.
리처드 신부는 우리가 하는 정기적인 관상 수양에는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고통받는 사람들과의 연대가 목적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관상이 하는 주요한 역할 중 하나는 에고로부터, 즉 거짓 자아로부터, 그리고 성공이나 돈 혹은 통제력을 얻기 위한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관상의 이런 의미는 절대 그 빛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벗어남의 노력이 다른 무언가를 부여잡기 위한 것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관상이나 묵상의 수양을 몇 달, 혹은 몇 년간 한 후 여러분이 결국 찾아낸 것이 무언인가요? 제가 존재들의 눈물이라는 묵상 글에서 세상의 고통이라고 말한 것에 대한 연민과 동정, 공감 같은 것이 어느 정도의 관상이나 명상 수양 후에 여러분 마음에서 더 커졌나요? 가자 지역의 여성들과 우크라이나의 어린이들, 아프리카에서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 가난한 이들 가운데서 가장 가난한 이들, 심지어는 미국과 전 세계에서 소외된 사람들에 대해서 말입니다. 만일 "내려놓음"으로 인해 생겨난 빈 공간이 곧바로 이 세상에서 고통받는 이들과의 깊은 연대를 추구하려는 열정으로 채워지지 않는다면, 저는 그런 관상이 참으로 그리스도인의 관상이거나 의미 있는 관상이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저 개인의 욕구를 채우는 영성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개인적인 의미에서만 순수한 동기를 찾으면서 관상을 수양해 왔는지 모릅니다. 이것은 정말로 커다란 유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정말로 앞으로 몇 년간을 개인적인 차원에서 예수님을 사랑하기 위한 동기를 찾기 위해 노력할 건가요? 그렇다면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요? 그리고 여러분에게 있어 긍정적인 사랑의 행위란 과연 무엇인가요?
우리가 침묵의 묵상이나 기도 안에 있을 때 우리가 참으로 기도하는 바가 우리 안에서 커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우리 기도와 관상의 거짓 동기와 에고에 기초를 둔 관심사를 내려놓을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참으로 인간의 고통에 대한 동정과 연민, 그리고 인간의 고통과의 연대를 위해 기도하고 희망하고 갈망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십자가가 의미하는 바라고 믿습니다. 십자가상에서 들어올려진 예수님의 두 팔은 인간의 고통스러운 상황에 대한 하느님의 연대와 동정의 마음과 행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줍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 아침은 물론이고 매일 아침 침묵 가운데 앉아 있을 때 우리가 앉아 있는 그 자체가 이런 연대와 동정의 마음을 가지기 위한 기도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거룩하게 되고 하느님 사랑에 우리를 합당하게 되기 위해서 어떤 특별한 규정들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만의 정화를 위해 어떤 규정을 지키고자 하는 지향을 내려놓고 우리 안에 다른 이들의 고통에 대한 동정의 힘이 커지게 하는 지향을 가져야 합니다. '나' 자신만을 위한 동기라면 그것이 아무리 완벽하다 해도, 그리고 우리가 완벽한 실천을 한다 해도 거기에는 진정한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정말로 무엇이 우리에게 이런 수양을 하도록 동기를 부여해 주는지를 살펴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완벽한지에 대해서보다는 우리가 참으로 서서히 성장해가고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야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볼 때,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가 고통받는 이들과의 함께함 안에서 성장하고, 인간과 인간을 초월한 고통, 즉 존재들의 눈물과 연대하며 성장할 때 우리는 비로소 참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한동안 매일 묵상 수신을 중단하였다가 다시 받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묵상 글을 읽을 때마다 위로를 받기도 하지만 동시에 도전도 받습니다. 여기에 함께할 수 있음에 대해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혼자가 아닙니다.
—Nancy M.
Adapted from Richard Rohr, Morning Sit, December 9, 2024. Unpublished teaching.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Exisbati, Untitled (detail), 2021, photo, India,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침묵은 풀밭 위에 뻗져진 저 손처럼 지금 여기에서 살갗을 스치는 풀잎 하나하나를 단순하고 깊이 의식하듯이 현재의 순간에 깊이 참여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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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나'만을 위한 고달픈 싸움을 멈추고....
하느님의 숨
2025.03.29. 05:14
오늘 우리가 듣는 이 비유 말씀은 루카 복음에만 유일하게 나오는 말씀이고, 이 비유에서도 루카 복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두 부류의 강한 대조를 보여줍니다. 영웅들과 악당들! 이런 예는 루카 복음 여러 군데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잃었던 아들의 비유', '진복팔단 다음에 나오는 슬픔 선언' 등이 그렇습니다. 바리사이와 세리는 사회 계층 전체를 볼 때 양극단에 서 있습니다.
바리사이는 "홀로 서 있었습니다." 루카 복음 저자는 이 사실을 이렇게 전합니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혼잣말로 기도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모순 중 모순 아닐까요?! 사실 진정한 기도는 관계성, 특히 하느님과의 관계성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토마스 머튼에 의하면 누군가가 참으로 하느님과의 관계성 안으로 들어서게 되면 그는 하느님의 피조물 모두와, 특히 모든 인간 존재와의 관계성 안으로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모든 존재와의 관계 안에 현존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홀로 존재하신다면 그 하느님은 거짓 하느님일 것입니다. 삼위로 일체를 이루시는 관계성이 바로 하느님의 근본적인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라는 말은 '분리된 자'를 의미합니다. 자기들의 특별한 의로움이 다른 일반 사람들과 분리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그들은 자기들을 '바리사이'라고 칭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도 누군가의 연결 고리가 다 끊어진 '고립된 자아'에 대해 떠벌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자멸로 이르는 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말입니다.
그의 말을 한 번 들어 볼까요. 그의 독백 기도가 처음에는 마치 감사의 시편을 바치는 것처럼 들립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하느님,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그것은 감사가 아닌 자기가 이루어내었다고 착각하는 일들에 대한 자화자찬이었지요?! 그는 하느님께 존경심도 드리지 않고 있고, 게다가 어떤 청도 아뢰지 않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분리되어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하느님에게서도 분리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리된 자아, 즉 에고에 집중하게 될 때, 우리 삶이 참으로 애처롭고 고달파지는데도, 우리는 자주 이 에고의 요구를 무의식적으로, 무조건적으로 따르며 살아갈 때가 많지 않나요?! 이 에고는 모든 것에서 이겨야 하고 모든 일에서 잘나야 하기에 그 삶이 괴로워지는 것입니다. 이런 삶에는 쉴 틈도 없고, "그러려니~"의 여유로움도 전혀 있지 못합니다. 모든 것이 '나'에게 맞추어져야 하는데 실제 현실은 절대 그렇게만 돌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진정한 기도는 에고의 이런 끈질긴 괴롭힘, 즉 이런 고단하고 고달픈 욕구를 알아차리고, 하느님은 물론이고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성을 의식하고, 그 안으로 들어서려는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 한 번 봅시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다른 한 사람인 세리는 하느님께 직접적으로 아뢰면서 그분의 자비를 청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보다 더 본질적인 기도가 있을까요?! 이 세리는 자신을 완전하게 여기지 않을 뿐 아니라 부족하기 그지없는 존재로 여기기에 이 본질적인 기도를 바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원(圓)의 비유를 들어 얘기해 볼까요.... 아마 바리사이의 원은 한자 원의 모습처럼, 주변부가 꽉 막혀 있는 원으로서, 그야말로 자기쪽에서도 아무것도 나갈 수 없고, 바깥쪽에서도 자기쪽으로 들어올 것이 아무것도 없는 원일 것입니다. 그러나 죄책감에 쌓여 있는 세리의 원은 자세히 보면 원이 아닙니다. 주변 부 여러 군데에 너덜너덜 틈이 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틈새는, 일전에도 말씀드렸듯이, 하느님의 은총과 빛과 선(善)이 들어올 수 있는 틈새입니다. 그렇지만 이 원이 참으로 깨달은 이의 원인 것입니다. 참으로 깨달은 사람은 존재가 절대 존재 혼자만으로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온 존재로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틱낫한 스님은 진정한 존재는 그냥 "Being"이 아니라 "Inter-Being"이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문제를 지적하며 자기는 늘 괜찮은 존재로 만들려고 하는 노력은 결국 이 가짜-자아에 패배만을 안겨주는 고달프고 애처롭고 고독한 싸움일 뿐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여유도 자비도 동정심도 없습니다!
오늘의 분명한 진리!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의 상처와 빈틈을 통해 이 세상으로, 부족하고 죄 많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격 안으로 흘러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사순시기를 보내며 마음 깊이 새겨야 할 화두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상처가 있다는 것과 우리에게 빈틈이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역설적인 은총인 것입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이 부족함을 우리 스스로 채울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계속 내주시고도 절대 비워지지 않으시고 늘 충만하신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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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9. 사순 제 3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5.03.29 05:41
요즘 청소년들에게 인기 아이돌 그룹의 노래를 틀어주면 누구의 노래인지 금방 압니다.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으로 이루어진 아이돌 그룹이지만, 그중 누가 부르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맞힙니다. 솔직히 제가 들어보면 다 똑같은 목소리인 것 같은데, 아이들은 이렇게 다른데 어디가 똑같냐면서 저를 이상한 사람 취급합니다. 심지어 딱 5초만 들어도 가수가 누구이고, 어떤 노래인지 제목을 그리고 가사까지도 이야기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요즘 아이들은 천재가 분명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모로서는 이런 부분의 천재가 아니라, 공부에서 천재가 되길 바랍니다. 그런데 이 부분을 잘 보면 공부에서도 천재가 되는 방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요즘 인기 있는 노래를 천재적으로 알 수 있는 이유는 많이 듣고 또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전혀 요즘 노래를 듣지 않는 저로서는 당연히 불가능한 모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반복적으로 똑같은 노래를 듣고, 노래하는 영상도 계속 보면서 귀와 눈에 새겨진 것입니다(공부도 이렇게 하면 되겠지요?).
성경 말씀을 읽어 주고서 어느 성경에 나오는 말씀인지를 대답하라고 하면 대부분 불가능하다고 할 것입니다. 성경이 73권이나 되는데 어떻게 알 수 있겠냐고 하지요. 그러나 성경 말씀을 계속 읽어 온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몇 장 몇 절인 것까지는 대답하기 힘들다 해도, 어느 성경인지는 맞힐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삶 안에서 주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불가능한 이야기일까요? 아닙니다. 평소에 주님 말씀을 계속 읽었다면 가능해집니다. 주님과 기도로 대화하며 가까운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면 가능합니다. 그리고 주님 뜻을 따르는 삶을 통해 가능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바리사이와 업신여김을 받는 세리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바리사이는 자기 공로와 미덕을 하느님께 자랑하고 다른 이들을 멸시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자기 허물을 깨닫고 뉘우치며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에 의지하는 세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세리처럼 회개의 마음과 하느님께 의탁하는 겸손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교만과 이기심을 통해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도저히 들을 수가 없으며, 그래서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 수 없게 됩니다. 당연히 하느님 나라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겸손과 사랑의 마음을 갖춘 사람은 하느님 말씀을 들을 수 있으며, 하느님 뜻에 맞게 살면서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집니다.
하느님 말씀을 듣기 위한 우리의 노력을 살펴봐야 할 사순시기입니다. 복음에 나오는 세리가 보여준 회개와 겸손의 마음을 먼저 갖춰야 합니다. 그래야 삶 안에서 주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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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좋은 기업과 위대한 기업 사이에는 한 가지 차이가 있다. 좋은 기업은 훌륭한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한다. 위대한 기업은 훌륭한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윌리엄 클레이 포드 주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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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9. 사순 제 3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를 들려주십니다. 이 비유에는 대조를 이루는 두 인물, 곧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여기는 죄인인 바리사이와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여기는 의인인 세리가 있습니다.
그들의 가장 큰 차이는 ‘보는 눈’에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서로 달랐습니다. 바리사이의 눈은 자신을 의롭다고 보는 눈이고, 세리의 눈은 자신을 죄인이라고 보는 눈입니다. 곧 바리사이에게는 자신을 높이는 눈이 있고, 세리에게는 자신을 낮추는 눈이 있습니다.
둘째, 그들은 ‘타인을 보는 눈’이 서로 달랐습니다. 바리사이의 눈은 타인을 업신여기는 눈이고, 세리의 눈은 타인을 중히 여기는 눈입니다. 곧 바리사이에게는 꼿꼿이 서서 하늘을 향하는 눈이 있고, 세리에게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눈이 있습니다. 곧 타인의 가슴을 치는 이가 있고, 자신의 가슴을 치는 이가 있습니다.
셋째, 그들은 눈이 ‘바라보는 곳’이 서로 달랐습니다. 바리사이의 눈은 자신을 향하여 있고, 세리의 눈은 하느님을 향하여 있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는 스스로 의롭다 자신하고 “꼿꼿이 서서 혼자말로 ...기도하였다.”(루카 18,11) 이 말의 원어를 직역하면, “자신을 향해 기도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루카 18,11)라고 말하지만, 실은 긴 독백으로 하느님께 설교하려 들었습니다. 그러니, 그는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자신을 위해 있어야 했습니다. 곧 하느님이 자신의 가치 확인과 자화자찬을 위해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우러르기보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자신을 앞세웁니다.
반면에, 세리는 하느님을 향하여 있으며, 자신과 하느님의 거리를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루가 18,13). 그리고 그분 앞에서 자신이 진실로 누구인지를, 곧 죄인임을 깨닫고서,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 18,13). 그렇게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에 자신을 맡깁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겸손’은 하느님 앞에 있기에, 자기를 비하하거나 경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자비가 필요함을 알고 그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낮추되, 결코 자신을 하찮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을 중히 여기고 자비를 구하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도 귀중하게 여기고 중시합니다. 그러기에, 겸손은 자신을 낮추기만 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우러르며 존경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언제나 주님 앞에 서 있고, 주님을 향하여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분의 자비를 입고서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자비가 아니면 살 수가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필요한 것은 당신의 자비, 그 외엔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가슴을 치며 하느님을 향해 기도합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 18,13).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루카 18,13)
주님!
제 눈이 당신을 바라보게 하소서.
당신 앞에서 제 자신을 보고, 당신 안에서 타인을 바라보게 하소서.
타인의 존귀함을 볼 줄을 알게 하시고, 제 자신의 가슴을 칠 줄을 알게 하소서.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진정 제게 필요한 것은 당신의 자비오니, 당신의 자비가 아니고서는 살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그토록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푸는 자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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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9. 사순 제 3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작년 재의 수요일에는 제가 주례를 했기에, 올해 재의 수요일은 부주임 신부님이 주례를 하도록 했습니다. 키가 큰 부주임 신부님은 이마에 재를 바르는 것도 큼직하게 발라 주었습니다. 저는 상대적으로 작게 재를 발라 주었습니다. 교우들의 이마에 새겨진 십자가 모양이 마치 악의 바이러스가 침투하지 못하도록 몸에 새겨진 ‘백신’처럼 보였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숱한 전투에서 공을 세운 군인들이 받았던 ‘훈장’처럼 보였습니다. 작년보다 많은 200여 명의 교우들이 사순시기를 시작하면서 악의 세력과 싸우기 위해서 백신을 맞은 것처럼 보여서 든든했습니다. 내년 재의 수요일에는 더 많은 교우가 악과 싸워 이길 수 있는 ‘백신’을 이마에 새기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마에 새겨진 재가 외적인 백신이라면 신부님의 강론은 교우들의 마음에 새겨진 백신 같았습니다.
신부님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사순시기는 주님의 수난과 고통을 기억하며 우리도 주님 수난의 길에 함께 하는 시간이기에 고난과 아픔의 시간일 수도 있지만, 사순시기는 광야에서 하느님을 만났던 이스라엘 백성을 기억하는 시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첫사랑’이 시작된 장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목말랐을 때 하느님께서는 바위에서 물이 샘솟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배고팠을 때 하느님께서는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그러니 사순시기는 회개와 참회의 시간이면서, 사순시기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기억하는 감사의 시간입니다.” 저는 단식은 음식을 절제하는 것이지만, 단식의 진정한 의미는 굶주린 이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만남이며 대화이지만, 기도의 또 다른 의미는 지금 외롭고,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신앙생활과 그릇된 신앙생활을 비유로 이야기하셨습니다. 하나는 바리사이의 헌금과 가난한 과부의 헌금입니다. 헌금의 액수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헌금은 자신을 드러내는 바리사이의 헌금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헌금은 정성 된 마음으로 봉헌하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신 바리사이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기도는 자신을 드러내는 바리사이의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기도는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면서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세리의 기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겸손’을 강조하셨습니다. 기도할 때도, 단식할 때도, 자선을 베풀 때도 다른 사람들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알게 하면 이미 상을 받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도 모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숨은 일도 아시는 하느님께서 갚아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상대적’입니다. 한국에서 제일 부유한 사람도 미국에서 제일 부자인 사람에 비하면 가난한 것입니다. 희생과 겸손의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해도 성인들의 삶에 비하면 매우 부족한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적인 세상에서 너무 쉽게 좌절하기도 하고, 교만하기도 한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상대적으로 평가하거나, 순위를 정하시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우리들의 모습을 사랑하시고, 인정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은 우리의 희망입니다. 희망이란 무엇입니까? 첫째, 희망은 신앙과 같은 말입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거짓 희망을 보게 됩니다. 물가가 안정되고, 경제가 좋아지고, 국민 소득이 늘어날 것이라고 하는 말들은 진정한 희망이 아닙니다. 참된 희망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희망은 기도와 실천을 통해서 자라나는 것입니다. 언젠가 하느님께서 선하고 착한 사람들은 거두어 주신다는 확신을 통해서 현실의 아픔과 고통까지도 이겨내는 것이 참된 희망입니다. 다시 말해서 희망은 신앙과 같은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 희망은 언제나 현재 진행형입니다. 부활에 대한 희망과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많은 박해와 고통을 참고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배가 항해할 수 있는 것은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살이 빠지면 건강하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 건강하면 살이 빠지고 행복해진다고 말합니다. 생활이 안정되면 기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면 생활도 안정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행동 없는 희망은 진정한 희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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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9. 사순 제 3주간 토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 앞에 섰을 때 어떤 모습으로 하느님을 봬야 하는지 우리에게 들려주고 계십니다.
모든 사람의 죄는 그 경중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둠 없는 사람 없고 죄 없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그 나름의 가면을 쓰고 살아갑니다. 깨끗한 가면을 쓰고, 선한 얼굴의 가면을 씁니다. 겸손함의 가면을 쓰기도 합니다. 모두가 그렇게 살아가기에 누구를 특별히 나무랄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느님 앞에서는 그 가면을 벗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느님 앞에서는 그 가면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만약 하느님 앞에서도 우리가 가면을 쓴다면 그 자체로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교만한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두 사람 중 바리사이와도 같은 모습일 것입니다. 그는 하느님 앞에서 꼿꼿이 서서 말합니다.
‘하느님! 제가 저 어둡고 죄 많은 사람과 같지 않음에 감사드립니다.’라고….
하느님 보시기에, 이 얼마나 교만한 모습인가요? 자기 가면을 한껏 눌러쓰고 하느님을 만나는 사람의 모습은 얼마나 추악할까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느님 앞에서 가져야 하는 모습을 들려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만큼은 가면을 쓰지 않고 본연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야 합니다. 이런 모습이 모든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하는 겸손입니다.
⭐유혹이라는 돌부리를 볼 수 있는 방법은?
바리사이는 고개를 들고 다닙니다.
사람들 앞에서도
하느님 앞에서도
그래서 유혹이라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집니다.
세리는 고개를 숙이고 다닙니다.
사람들 앞에서도
하느님 앞에서도
그래서 유혹이라는 돌부리에 걸리지 않습니다.
모든것을 겸손이라는 시선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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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9. 사순 제 3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회개의 삶, 파스카의 삶
“겸손, 신의, 예지”
안팎으로 참 뒤숭숭한 세상입니다. 사상 국내 초유, 최악의 산불에, 국외 미얀마에서는 강진에 의한 대규모 사상자가 발생했고, 교황청에서도 우려와 위로와 더불어 기도의 메시지도 전달했습니다. 국내상황 역시 녹녹치 않습니다. 12.3일 비상계엄후 시작된 내란의 불은 아직도 진행중이요 내전의 위기도 겪는 중입니다. 국내외 상황이 빛과 어둠, 선과 악, 생명과 죽음, 진리와 거짓의 영적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현실입니다.
흡사 혼돈과 야만의 시대가 도래한 듯 합니다. 사탄의 시스템, 악의 카르텔에 의한 상상할 수 없는 예측불허의 초현실적 상황이 벌어집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평화롭고 슬기롭게 해결되기를 마음 간절합니다. 이런 와중에 가톨릭교회의 ‘사순시기’가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이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역시 판별의 잣대는 진리요 지혜요 길이요 빛이신 주 예수님입니다. 참으로 기도와 회개로 모두가 흥분을 가라앉히고 이성과 양심을 되찾아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삶을, 지극히 침착하고 평온한 삶을 살도록 온갖 노력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정말 기도와 회개가 절실한 작금의 현실입니다. 인간현실은 이렇듯 복잡다난해도 순리에 따라 펼쳐지는 봄철의 자연은 우리에게 큰 가르침과 깨우침을 줍니다.
봄철이 되니 다시 만개하기 시작한 봄꽃들이 수도원을 덮고 있으며 회개의 삶, 파스카의 삶을 촉구하는 듯 합니다. 봄꽃도 많고 부를 봄노래도 참 많습니다. 요즘 샛노란 개나리꽃도 한창입니다. 겨울을 지낸 ‘파스카의 봄꽃들’이라 모두가 청초합니다. 오래전 써놓은 두편의 시를 나눕니다.
“겨울 지낸 개나리
햇빛 환한 봄날도 너무 어두워
샛노란 꽃 초롱들
가득 켜 들고
대낮의 어둠 환히 밝히고 있네”<2001.4.11.>
햇빛 환한 대낮의 어둠처럼 문명의 야만시대라는 역설적 현실이 펼쳐지고 있는 오늘입니다. 대낮의 어둠 환히 밝히고 있는 청초한 봄꽃 영혼들로 살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역시 답은 기도와 회개를 통해 참나로 돌아가는 길뿐입니다. 얼마전 잠시 대지를 촉촉이 적셨던 봄비에 떠오른 시입니다.
“마음을 촉촉이 적시는
봄비!
하늘 은총
내 딸 아이 하나 있다면
이름은
무조건 봄비로 하겠다”<2005.3. >
봄비같은 회개의 은총입니다. 회개의 촉구와 더불어 회개의 은총을 전하는 호세야 예언자의 말씀이 참 좋은 위로와 힘이 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우리에게도 큰 울림의 감동을 선사하며 마음을 순화합니다. 그대로 하나의 시처럼 들립니다.
“자, 주님께 돌아가자.
그분께서 우리를 잡아 찢으셨지만
아픈데를 고쳐 주시고
우리를 치셨지만 싸매 주시리라.
이틀뒤에 우리를 살려 주시고
사흘째 되는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어
우리가 그분 앞에서 살게 되리라.”
회개한 영혼들에게 앞당겨 실현되는 파스카의 삶입니다. 파스카의 봄꽃들 같은 청초한 삶, 파스카의 삶, 회개의 삶입니다. 은총의 사순시기는 물론 이 거룩한 미사시간, 회개의 마음으로 새벽처럼, 봄비처럼 오시는 주님을 영접함은 물론 주님 공부에 전념하라는 예언자의 호소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알자.
주님을 알도록 힘쓰자.
그분의 오심은 새벽처럼 어김없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비처럼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시리라.”
이어지는 예언자의 탄식이 참된 회개를 통해 겸손과 신의, 예지의 삶을 살 것을 호소합니다.
“내가 너희를 어찌하면 좋겠느냐?
너희의 신의는 아침 구름 같고, 이내 사라지고 마는 이슬같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
희생제물이나 번제물을 바치는 전례의 거부가 아니라 혼동된 우선순서를 바로 잡으라는, 회개와 겸손, 신의와 예지를 우선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오늘 복음의 가난한 세리의 기도와 회개입니다. 바리사이의 기도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똑같이 “오, 하느님!”으로 시작합니다만 내용은 완전히 다릅니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기도합니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기도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보여줍니다. 이건 대화의 기도가 아니라 나르시즘, 자기자랑, 자기도취에 빠진 독백입니다. 자기를 모르기에 기도한다며 남판단하는 죄를 짓습니다. 참으로 자기를 모르는, 낯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참 유치하고 무지한 바리사이의 기도입니다. 전혀 하나마나한 할 필요없는 기도입니다. 반면 가난한 세리의 기도는 단순명료하고 솔직절박합니다.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합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우리가 바칠 기도는 이 자비송 하나뿐입니다. 이 자비송과 더불어 시작하는 미사입니다. 참으로 부끄러워할 줄, 두려워할 줄 아는, 참으로 자기를 아는 회개와 겸손, 신의와 예지의 사람, 세리입니다. 주님의 최종결론이자 심판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주님은 가난한 세리처럼 부단히 회개와 겸손으로 낮춰지고 비워지는 삶을 사는 우리에게 신의와 예지의 주옥같은 선물을 주시니,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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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9. 사순 제 3주간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8,14)
죄인임을 고백하게 하는 겸손
근엄한 바리사이는 교만하게 자기 자랑을 했을 뿐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세리를 깎아내렸지요. 결국 그는 교만의 죄로 자신의 의로움을 하찮은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반면 거룩하신 하느님께 영광을 돌린 세리는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지요. 그는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자비를 간청하기만 했습니다. 그는 태도로, 가슴을 치는 몸짓으로, 자비만을 구하는 간청으로 스스로를 고발했습니다. 그러니 교만으로 망해 버린 바리사이를 교훈 삼아, 그런 일이 없도록 조심하십시오. 거만한 몸짓은 의로움을 앗아 가고, 건방진 자기 자랑은 그가 받을 상을 앗아 갔습니다. 하느님께서 판결을 내리시기도 전에 자기를 치켜세우며 스스로 판결을 내리다가 비천한 죄인보다 더 못한 자로 심판받았지요. 결코 그대를 다른 사람 앞에, 그가 아무리 나쁜 죄인이라 해도, 내세우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겸손은 아주 무서운 죄를 지은 죄인도 구원합니다.
-대 바실리우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7
지성을 버리고 순수한 무지를 경험하라
예수가 열두 살 되던 해에도...(루카 2,42).
이제 여러분은 이렇게 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처럼 진보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도 참회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들이 참회를 하지 않는다면 게으름의 죄를 짓는 게 아닐까요?’ 여러분,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단식이든, 밤을 새우는 것이든, 기도하는 것이든, 무릎을 꿇는 것이든, 고행을 하는 것이든, 두건을 머리에 쓰는 것이든, 딱딱한 잠자리에 드는 것이든, 혹은 이와 유사한 것이든 간에, 모든 유형의 참회는 우리의 몸과 육체가 끊임없이 영을 거스르기 때문에 고안된 것입나다. 육체는 영에 비해 너무 강합니다. 그래서 육체와 영 사이에는 다툼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 다툼은 영원한 다툼입니다. 여기 이 세상에서 육체는 대담하고 강합니다. 그 이유는 육체의 고향이 이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육체를 편듭니다.
이 세상은 육체의 조국이고, 육체의 친척인 음식과 음료와 양생 역시 육체를 편듭니다. 이 모든 것이 영을 거스릅니다. 영에게 이 세상은 낯선 곳입니다. 영의 친척과 가족은 모두 천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영이 천상을 향해 돌아서서 그곳을 본향으로 삼기만 한다면 많은 동무를 사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육체에다 참회의 고베를 씌우는 것은 낯선 땅에서 영을 돕고, 이 싸움에서 어느 정도 육체를 약화시키기 위해서입니다.(360)
✝️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하느님 신앙과 원불교의 일원상
19세기 한민족의 위기 의식과 종교적 각성은 동학(천도교)의 창건이라는 역사적 사건만이 아니라, 한국 종교사에서 또 하나의 놀라운 창조적 사건, 곧 불교의 한국적 토착화라는 결실로서 원불교라 부르는 민족적 세계 종교의 출현을 보게 만들었다.
현재 한국 종교계에서 교단의 규모와 교세는 전통 불교나 그리스도교의 그것에 미치지 못하지만, 포교 사업, 교육 사업 , 병원 의료 사업 , 각종 구제 복지 사업 , 열린 방송 매체를 통한 문화 사업 , 그리고 종교 간의 대화 운동에 있어서 놀라운 역동성과 ‘작지만 참신한 종묘 로서 주목을 받는 종단이 원불교이다. 여기에서는 원불교의 중심 종지인 일원상(一圓相) 진리의 조명을 통하여 한민족의 하느님 신앙이 원불교의 일원상 진리 체험을 통하여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간략하게나마 고찰할 것이다.
원불교의 창시자 소태산(少太山) 박중빈(朴重彬, 1891一1943) 대종사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한민족의 국운이 위기에 처하고 민생이 도탄에 빠지며 세계 열강의 식민지 침탈로 뭇 생명들이 고난과 피폐함을 겪을 때 , 동시에 유불선 전통 종교와 동학 등 신흥 민족 종교, 그리고 기독교 같은 외래 종교가 세상 구제의 처방을 내리며 저마다 제 소리를 발할 때, 이 모든 다양한 사상과 종교의 중요 경전을 공부하고 몸소 구도자로서의 고행과 수행 끝에 일원상의 진리를 깨달아 새로운 진리 생명 운동을 일으켰다
종단의 이름이 시사하는 바처럼, 원불교는 불교, 유교, 선교, 천도교, 기독교 등 한민족에게 영 향을 끼친 중요 종교의 교리와 가르침을 존중하고, 그 핵심 진리를 포용적 자세로 대하되, 근본적으로 ‘불법(佛法)에 연원을 정함으로써 불교의 한국적 토착화를 이루는 동시에 불교 사상을 주체적으로 현대화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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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9. 사순 제 3주간 토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겸손으로 용서구하는 회개의 기도를 /
박윤식 [big-llight] 2025-03-28 ㅣNo.181093
한 유다 청년이 율법 학자에게 자랑했다. “저는 탈무드를 세 번 읽었습니다.” 사실 탈무드는 분량이 방대해 참으로 놀라왔다. 그런데 학자는 감탄은커녕 대꾸다. “그대가 세 번이나 읽었다고? 그럼 탈무드는 그대를 몇 번이나 읽었는가?” 청년은 이에 크게 깨닫고 돌아갔다나.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사실 바리사이가 기도한 대로 불의를 저지르지 않았기에 그를 의인이라 할 수가. 일주일에 단식을 두 번이나 하고 십일조 내었다고 과연 의롭다할 수가. 의로움은 전적으로 하느님께 자신의 겸손을 드러내는 삶에서만 나오니까. 자신을 성찰하지 않는 이는 그 어떤 위대한 일을 하여도, 의인이 될 수는 없을 게다. 하느님 없이 스스로 의롭게 할 수 있는 이는 정녕코 없기에.
많이 가지면 많이 드러내고 싶으리라. 자리가 높으면 인정받고 싶어 하리라. 그게 다 본능이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자랑에 앞서 먼저 낮추라신다. 세리의 겸손에 비해 바리사이의 넋두리는 속 좁다. 사실 세리는 죄와 연관된 삶을 사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주고 있다. 그러기에 그의 기도는 주님 자비를 청하는 단 한마디뿐이다. 자신을 낮추었기에 은총을 받을 수 있었다.
톨스토이의 ‘무엇이 인생인가?’ 라는 책의 ‘돌’에 대한 것이다. 두 여인이 현자의 가르침을 받으러 왔다나. 그 중 한 여인은 자신을 큰 죄인이라 여겼고, 또 한 여인은 평생 율법을 지키며 이렇다 할 죄를 짓지 않았단다. 현자는 첫 번째 여인에게 “나가서 당신이 들 수 있는 큰 돌 하나 갖고 오시오.” 라 하고, 다른 이에게는 “가능한 작은 돌 많이 가져오시오.” 라고 일렀다.
다시 현자는 가져 온 것들을 제자리에 놓으라고 말했다. 첫 여인은 돌의 자리를 금방 찾아 갖다 놓았지만, 다른 여인은 도무지 어디서 주웠는지 몰라 그냥 돌아왔다. 현자는 말했다. “저 여인은 돌을 주운 곳을 기억하였기에 그 큰 돌을 제자리에 두었고, 그대는 그 많은 작은 돌을 어디서 주웠는지를 정녕 기억을 못했기에,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이라오. 죄도 마찬가지죠.”
죄 짓는 족속 회개로 깨끗해지기에 그리 큰 부담 없이 산다나. 일견 올바른 신앙 같지만, 여기에는 하느님 자비의 여지가 없을뿐더러 하느님께서도 들어설 리 없다. 이는 구원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게 아닌, 나에게서 오는 거니까. 스스로 구원받을 자격조차 없다고 여겨야만 하느님 향하리라.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는 게 기도다. 이것이 하느님을 향해 우리 마음을 여는 것이고, 그분 은총이 우리에게 거기로 들어오는 통로이니까. 그리하여 하느님을 초대하여 자신과의 소박하고 격의 없는 소통에, 겸손하게 열린 마음으로 응답할 수가 있으면 참 좋겠다.
애절한 기도는 주님도 기억하신다. 우리가 잊더라도 때가 되면 들어주신다. 여겨 달라는 한마디 말만으로도 은총을 받을 게다. 필요한 말은 많지 않다. 오히려 남을 속이거나 변명과 자랑이 필요할 때에 말 많이 한다. 기도는 그러한 행위가 아니다. 자신의 덕을 쌓지 못해 과장된 포장을 드러내는 죄인으로 살기보다, 자신의 죄를 회개로 용서를 청하는 기도드리자. 하느님은 남모르게 이루어지는 선행에 대해서도 티끌하나 버리지 않고 알아보신다. 그분은 자신이 실천한 선행과 덕을 자랑하는 의인보다, 겸손하게 용서를 청하는 죄인을 더 기쁘게 받아 주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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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9. 사순 제 3주간 토요일. 한창현 모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루카 18,9)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비유에 첫 번째로 등장하는 바리사이는, 자신이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자들과 같지 않다고 하면서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두 번째로 등장하는 세리는, 자신이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죄인이기에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느님께 간청합니다.
이 비유를 듣고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요?
유다인에게 의로움은 율법을 충실히 지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과 자신을 구분하는 바리사이의 모습에 동질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감히 하느님께 다가가지 못하는 죄인 세리를 보면서 업신여기는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곧 그들에게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의로움과 업신여김을 구분하는 기준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세리가 의롭게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의로움과 업신여김에 대하여 그가 가지고 있던 기준을 완전히 뒤엎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는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높이느냐 아니면 낮추느냐가 기준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판단 기준을 적용하기 전에 오늘의 복음을 한 번쯤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의 충실한 종교적 실천을 낮게 평가하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자신의 기준이 전부인 양 그 기준에 들어맞지 않는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태도를 경계하도록 강조하시며, 특별히 세리가 보여 준 겸손의 덕행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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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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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9. 사순 제 3주간 토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자신이 의롭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은 모두 평가의 대상이 됩니다.
그가 말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기가 생각했을 때 자신보다 의롭지 않다고
아니 오히려 죄인이라고 판단되는 이들입니다.
이미 그는 자신이 의롭다고 판단하는 것을 넘어
다른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남을 판단하면서 그는
하느님의 자리에 앉아있습니다.
죄를 짓지 않고 단식하며 십일조를 내는 것은
엄청난 노력입니다.
그 노력은 그를 완벽한 신앙인으로 만들어 줍니다.
하지만 자신의 노력으로 완벽함에 도달한 사람은
더 이상 하느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의 노력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데
굳이 하느님께 의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에서 바리사이와 세리가 생각하는
완벽한 신앙인의 모습이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가 생각하는 신앙인은
자신의 노력으로만 완벽에 도달하는 사람이며
세리가 생각하는 신앙인은
하느님께 의지해서 완벽에 도달하는 사람입니다.
신앙 생활을 하느님과의 관계로 생각한다면
바리사이의 방법은 잘못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의 방법은 오히려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리가 의롭게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의 동사는 수동태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수동태 문장은
많은 경우 하느님을 그 주체로 봅니다.
즉 '하느님께서 세리를 의롭다고 하셨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필요없는 바리사이는
하느님께서 그가 의롭다고 말씀하시는 것도
필요없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노력은 무슨 의미를 갖는지
질문하게 됩니다.
우리 신앙 생활의 기준은 하느님과의 관계입니다.
그것을 놓친다면
우리는 엉뚱한 신앙 생활을 하면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만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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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9. 사순 제 3주간 토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루카 18, 14)
바라사이도
세리도
회개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는
겸손을 먹고
자라납니다.
겸손이
기도를
키웁니다.
기도는
오히려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려오는
것입니다.
더 낮은 곳에
계시는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거짓 없는
기도가
우리를
의롭게 하는
진정한
기도입니다.
의롭게 되는
진정한 기도는
그 누구도
업신여기지
않습니다.
치켜세움과
깔봄은
진정한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의
신분이 아니라
사람다운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
기도의
본질입니다.
기도가
겸손을 만나면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갑니다.
기도는
겸손된
회개로
우리를
새롭게
태어나게 합니다.
기도는
우리의 삶을
반영합니다.
우리의 겸손이
우리의 진실한
회개가
기도입니다.
기도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이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겸손이며
우리 자신의
참된
회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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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9. 사순 제 3주간 토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겸손하고 진솔한 세리의 기도
복음서 안에서 예수님께서 수시로, 사사건건 강한 대립각을 세우시던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바리사이’란 말은 ‘~로부터 분리되다’란 의미를 지닙니다.
바리사이들의 머릿속에는 자신들이 죄인들이나 이방인들, 불결한 사람들과는 철저히 분리되는 존재, 하느님으로부터 선별된 거룩한 존재라는 의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그러한 바리사이들의 선민의식과 우월감, 겉과 속이 다른 위선적인 신앙을 절대 그냥 못 넘기셨습니다.
눈에 띄는 즉시 그들의 말씀 따로 삶 따로의 이중적인 모습을 신랄하게 지적하고 비판하셨습니다.
바리사이들의 위선과 교만은 하느님과의 대화인 기도 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그들의 기도를 보십시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 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루카 18, 11-12)
교만과 자만으로 똘똘 뭉쳐진, 기가 차지도 않은 바리사이의 기도입니다.
그가 바친 기도의 가장 큰 문제점은 겸손의 결핍입니다.
성찰과 자기 인식의 부족입니다. 바리사이의 마음속에는 자신이 ‘무익한 종’이라는 의식보다
‘유익한 종’이라는 의식이 강했습니다.
하느님께서 큰 자비와 은총을 베푸셔서 티끌 같은 자신을 축복하셨음을 까마득히 잊고 순전히 자신의 힘으로 오늘 여기 있다는 그릇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바리사이처럼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고 자신이 대단하다고 믿는 사람은 하느님 은총을 통한 의화(義化)가 전혀 필요하지 않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느님은 필요 없으며 결핍과 한계와 모순투성이의 인간인 자신에게만 의존하므로 그 길의 끝은 결국 멸망이요 죽음인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을 꽤뚫어보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속마음과는 전혀 다른 기도를 장황하게 늘어놓을 때, 하느님께서도 결코 달가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가감 없는 진솔한 대화를 좋아하실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차라리 반항적인 예언자 예레미야의 기도가 돋보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를 예언자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은 저를 아주 바보로 만드셨습니다.”
하느님께 건넨 욥의 대화는 더 솔직합니다.
“저는 너무나 비참해서 주님께서 저를 만든 날을 저주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모범으로 세리의 기도를 소개하십니다.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습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 18,13)
자비하신 주님 앞에 언제나 부당한 죄인인 우리가 눈만 뜨면 드려야 할 기도가 세리의 기도입니다.
언제나 죄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리가 틈만 나면 쏘아 올려야 할 화살기도가 세리의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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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9. 사순 제 3주간 토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8,9-14: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
바리사이는 하느님께 기도하러 간 사람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가 하느님을 향하여 감사기도를 바친다고는 하지만, 실은 자기 자신을 향하여 기도한 것이다.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한다는 핑계로 허영에 빠져 교만하고 이기적인 사람이 된다면 단식이 그에게 무슨 득이 되며, 십일조를 바치면서 자랑하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남을 비난하고 단죄한다면 그 십일조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바리사이는 계속 나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기에 바쁘다. 주님의 이름을 고백하며 찬양의 제물을 하느님께 바치는 사람은 자신 안에 숨어있는 사탄을 경계해야 한다. 바리사이에게 한 것처럼 다른 교만으로 우리를 취하게 할 것이다.
세리는 감히 눈도 들지 못하고 멀찍이 서서 기도를 드렸다. 하느님의 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방종한 삶을 살아온 자신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느님이 두려웠다. 그의 몸짓에서 자신의 악행을 책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어리석은 바리사이는 뻔뻔스럽게 눈을 치켜뜨고 꼿꼿이 서서 제 자랑을 했지만, 세리는 자신의 행동을 부끄럽게 여긴다. 자기 죄를 고백하고 의사에게 자신의 병을 알리며 자비를 간청한다. 그 결과, 주님께서는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14절) 바리사이는 교만하게 자기 자랑을 했고, 세리는 겸손하게 자기 죄를 고백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바리사이의 자선보다 세리의 고백을 더 기뻐하셨다.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돌아간 것은 그가 겸손 때문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이웃과 비교하여서는 안 된다. 우리가 보고 또 비교하며 따라야 할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다. "내가 남들만큼 선한가?"가 아니라, "내가 하느님 앞에 선한가?"이다. 즉 우리들의 선행이나 신앙생활이나 그 기준, 척도는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마 우리가 우리의 삶을 예수님의 생과 비교할 때는 우리도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할 것이다. 이 사순절이 우리에게 큰 은총의 기간이 될 수 있도록 이런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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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9. 사순 제 3주간 토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천사들도 하느님 앞에서는
제가 보좌 2년차 되던 해의 일이었습니다.
이제 본당 주임신부로 나가기 위해서 마음속으로 많은 계획을 짜고 있었고 하면 잘 할 것 같은 자신감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백화점에 갔다가 나와서 성당으로 차를 몰고 돌아오는데 한 냉동탑차가 제 옆에서
달리면서 잠깐 차를 세워보라는 것입니다.
저는 차를 세웠습니다.
직원들이 입는 단정한 옷을 입고 말하기를, 자신들도 저 백화점에 납품하고 나오는데 상품이 몇 개가 남는데 싼 값에 사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들어가서 고급스럽게 포장되어 있는 제주도 옥돔박스를 보았습니다.
마침 명절도 다가오는 때라 저는 거기 남은 모든 것을 다 구입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떠나고 박스 하나를 풀어보았더니 한 박스에 두세 마리만 위에 보이게 포장되어 있고 밑에는 모두 얼음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완전 속았던 것입니다.
저는 속은 이유를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당시 사제가 되어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이고
너무 많은 사랑과 인정을 받고 있던 때라 매우 교만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누구에게 물어볼 생각도 하지 않고, 신학이나 성경에는 전문가일 수 있지만 세상 어떤 것에서도 문외한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작은 노력으로 큰 성과를 얻으려는 허황한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내가 받을 준비가 되어있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기를 당하는 것은 내가 그런 것을 원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제 값을 주고 선물을 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왜 사기를 당하겠습니까? 다 자신의 탓인 것입니다.
똑똑하고 전문적인 직업을 가졌던 사람들이 보통 사기를 더 많이 당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근무하던 곳에서는 자신이 프로이고 인정받는 사람이라는 그 교만한 생각 때문에 조금만 그럴싸하게 포장된 것이 있다면 누구에게 조언을 청할 생각도 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결정해 버리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는 성전 맨 앞자리에 앉아 자신이 하느님 앞에서 의인이라고 자신하며
기도합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느님의 자비만을 청합니다.
어머니는 한 자녀가 자기는 머리가 좋아 공부를 잘 했다고 고개 뻣뻣이 자랑하고 있고, 한 자녀는 성적을 잘 못 맞았다고 잘못했다고 미안해한다면 누가 더 예뻐 보일까요?
머리가 좋고 성적을 잘 맞았다면 그런 좋은 머리를 주시고 공부를 시켜주신 부모님의 덕이
더 큰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머니는 지금은 못했어도 다음엔 잘 해 보겠다고 자비를 청하는
자녀가 더 안타깝고 예뻐 보일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님 앞에서 혼자 잘나서 잘 살고 있다고 당당해 하는 것보다 꼴불견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앞에서는 어떻겠습니까?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주셨는데 우리가 어떻게 머리를 당당하게 들고 의인행세를 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 앞에서 잘 살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은 교만 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당신 없이는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무언가를 했다면 그것은 주님께서 도와주셨기 때문입니다.
의인은 자기가 잘났다고 떠드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 없이는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무슨 큰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겸손한 마음을 지닌 자신이 누군지 아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독일 철혈정책으로 유명한 비스마르크 재상이 있었습니다.
문제의 해결은 연설과 과반수의 찬성으로 해결되지 않고, 다만 ‘철과 피’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독재자였습니다.
어떤 누구도 그의 의견에 반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싸움의 기술도 뛰어난 인물이라 사적인 자리에서도 자기와 의견이 맞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결투를 신청하고는 하였습니다.
한 번은 비스마르크의 말에 한 교수가 반대의견을 내었습니다.
역시 비스마르크는 그 교수에게 결투를 신청했습니다.
아마도 당시에는 결투신청을 거부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
자신은 싸움을 할 줄 모른다는 교수에게 비스마르크는 그러면 무기는 아무 것이나 교수보고 결정하라고 하였습니다.
“자, 무기를 결정하시오.”
결투신청을 받은 학자가 고민 끝에 갖고 온 무기, 그것은 바로 소시지 두개였습니다.
비스마르크는 화를 벌컥 내자 학자는 차분하게 설명했습니다.
“나는 칼도 창도 사용을 해 본 적이 없소.
그래서 내가 가장 잘 아는 이 소시지로 무기를 만들었소.
한 개의 소시지에는 독이 들어 있고, 한 개의 소시지는 독이 들어 있지 않소.
선택은 당신이 먼저 하시오. 무엇이든 남는 것을 내가 먹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비스마르크는 몹시 당황했습니다.
만약 자신이 독이 든 소시지를 선택해서 그걸 먹는 순간을 상상하자 얼굴에 핏기가 가셨습니다.
조금 전의 자신만만함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한참 동안 고민하던 비스마르크가 마침내 입을 열었습니다.
“좋소. 내가 졌소.”
그 이후로 비스마르크는 결투신청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자신만만해하다가 피 보는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내가 지금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하느님 앞에 서게 될 때 완전히 잘못된 것들이었음을 알게 된다면 그 때는 너무 늦게 될 것입니다.
인류가 아무리 똑똑하고 과학이 발전했다고 해도 우주가, 생명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도 증명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옳고 그름이 아니라 잘하고 잘못했음이 아니라, 하느님은 우리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는 자세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학생이 선생님을 대하는 자세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나는 학생이고 당신은 선생님이라는 것을 인정하면 그만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당신은 하느님이고 나는 당신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만 하면 그만입니다.
아무 죄도 지어본 적 없는 천사들도 하느님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얼굴과 몸을 자신들의 날개로 가린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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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9. 사순 제 3주간 토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위선자의 신앙생활은, 신앙생활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8,9-14)”
1) 이 비유에 나오는 바리사이의 오만한 모습은,
예수님의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 마음을 아신다.
사실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루카 16,15).”
예수님께서는 비유에서 바리사이의 태도를 ‘꼿꼿이 서서’로 묘사하셨고, 그의 기도는 ‘혼잣말’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꼿꼿이 서서’는 그의 오만함을 나타내고, ‘혼잣말’은, 그의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자기의 신심을 과시하고 자랑하는 ‘잘난 체’ 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 태도는 하느님 앞에서 ‘혐오스러운 것’입니다.>
반면에,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기도하는 세리의 모습은, 그의 겸손함과 회개의 진실함을 나타냅니다.
2) 바리사이가 강도짓, 불의, 간음죄를 저지르지 않은 것은 사실일 텐데,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만 그런 것이고, 마음속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1-22ㄴ).”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마태 5,27-28).”
인간들은 다른 사람의 ‘겉만’ 보고 판단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속을’ 먼저 보십니다(루카 11,40-41).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라는 바리사이의 말은,
다음 가르침에 연결됩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 7,1-3)”
<예수님의 기준으로는, 바리사이의 죄는 ‘들보’이고, 세리의 죄는 ‘티’입니다.>
마음속에 죄가 가득 차 있는데도 자기는 죄를 짓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위선자가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그 자체가 위선이고, 그 말은 아무 의미 없는 ‘빈말’입니다.
3) 바리사이는 자기가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친다고 자랑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위선자들의 단식과 십일조를 이렇게 꾸짖으셨습니다.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마태 6,16).”
<이 말씀은, 위선자들의 단식은 단식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실제로 밥을 굶는다고 해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단식은 단식이 아니라 위선일 뿐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루카 11,42).”
<‘사랑 없이’ 바치는 것은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4)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라는 말씀에서 ‘의롭게 되다.’ 라는 말은, ‘구원받을 자격을 얻다.’ 라는 뜻입니다.
바리사이는 그 자신의 위선과 교만 때문에 구원받을 자격을 얻지 못했고, 세리는 진실하게, 진심으로 회개했기 때문에 그 자격을 얻었습니다.
“자신을 높이는 이”는 “의인이라고 자처하는 위선자”입니다.
“낮아지고”는 “구원받지 못하고”입니다.
“자신을 낮추는 이”는 “진실하게 회개하는 이”입니다.
“높아질 것이다.”는 “구원받을 것이다.”입니다.
5) 비유에 나오는 세리는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죄인이고, 바리사이는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죄인입니다.
‘회개’는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합니다.
그래서 세리는 회개를 했지만, 바리사이는 자기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이라고 생각했으니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고 해서
죄가 없어지거나 지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할 것들을
모르고 있는 것도 죄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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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9. 사순 제 3주간 토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18,9-14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을 ‘의로움’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참된 의로움은 내가 노력한 공로로 쟁취하는게 아니라,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기도하며 그분 뜻을 헤아리고, 그 뜻에 순명하는 이들에게 선물처럼 주어지지요. 그런데 오늘 복음 속 비유에서는 그런 기도의 목적을 잘못 이해하여 엉뚱한 기도를 바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바리사이입니다. 그는 율법을 어기지 않고 철저히 지킨 자신의 공로를 통해, 죄인이나 부정한 이들과 거리를 둔 채 철저히 분리된 삶을 살아온 그동안의 노력을 통해 자신이 ‘이미’ 의로워졌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즉 그는 기도의 목적을 상실한 상태인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마음으로 하느님을 마주한 채 그분께 기도를 드리면서도, 그분 앞에서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기는 커녕 꼿꼿이 선 채로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는 하느님께 자기 자랑을 늘어놓기에 바쁜 모습을 보입니다. 자기는 일주일에 두 번이나 단식재를 지키고, 소득의 10분의 1이나 하느님 대전에 봉헌하는 거룩하고 의로운 사람이라는 겁니다.
이 바리사이는 자신이 의롭다고 여기기에, 지금 그에게는 부족하거나 아쉬운 것이 하나도 없기에, 그에게는 딱히 하느님이 필요치 않습니다. 세상에서 고통과 시련을 겪는 작고 약한 이들에게는 하느님만이 유일한 희망이자 주님이시기에 간절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으며 그분의 은총과 보호를 구하지만, 재물과 권력 모두를 가진 이 바리사이는 그것들에 기대고 의지하기에 간절하게 하느님을 찾지 않는 겁니다. 그런 그에게 하느님은 자신의 거룩함과 의로움을 드러내주는 ‘수단’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요. 즉 그 자신이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 이들이 보이는 특징은 자신의 주관적인 기준을 가지고 이웃을 함부로 판단한다는 점입니다. 그가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의 전반부에서 그런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 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기도라는 형식을 취하고는 있지만, 말로는 하느님께 ‘감사’드린다고 하고 있지만, 그의 말에서는 의롭고 거룩한 사람인 자신이 죄를 지어 부정해진 저들보다 우월하다는 마음가짐이, 그 우월의식을 바탕으로 이 세상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웃 형제들을 무시하고 깔보며 심지어 ‘죄인’ 취급하는 교만과 독선이 묻어나는 겁니다.
그런 바리사이처럼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려는 태도 자체를 버려야 합니다. 나를 다른 사람과 비교해봐야 얻을 수 있는 건 둘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나보다 못났다고 여겨지는 이들을 보며 교만에 빠지거나 혹은 나보다 잘났다고 여겨지는 이들을 보며 시기와 질투, 절망에 빠지거나… 하느님의 참된 자녀는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과 자신을 비교하며 그분을 닮기 위해, 그분을 닮은 거룩하고 의로운 존재가 되기위해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해 노력할 뿐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세리가 기도하는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는 전능하고 거룩하신 하느님에 비추어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고 연약하며 비천한 존재인지를 너무나 잘 알았기에 감히 그분 앞에서 당당하게 서 있을수도, 그분을 뵙기 위해 고개를 들 수도 없었습니다. 그저 하느님께서 은총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며 그분께 자신을 온전히 의탁할 뿐이었지요. 그 결과 하느님을 닮은 거룩하고 의로운 존재로 변화될 수 있었던 겁니다. 기도는 하느님을 설득하여 내가 원하는 걸 얻어내기 위해 하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기 위해, 그분 뜻에 철저히 순명하며 따르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그런 참된 기도만이 우리를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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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9. 사순 제 3주간 토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자신을 낮추는 이는 ”
우리는 흔히 들었는데 그러면서도 썩 달가와하지 않는 말 중에서
‘고통은 인간을 성숙시킨다.’라는 금언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선 고통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당장 싫고 피하려고 하지만 그래도 고통은
지내놓고 보면 나를 성숙시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좋은 것을 주시지만 때로는 매서운 매로 나를 치시지요.
아무리 작은 고통이라도 겪을 동안에는 힘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나만 그 고통 중에 있는 것 같아 입에서는 불평이 나오기 쉽습니다.
호세아 예언자는 하느님의 사랑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잡아 찢으셨지만 아픈 데를 고쳐 주시고, 우리를 치셨지만 싸매
주시리라.”(호세 6,1)
예언자는 이어서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이틀 뒤에 우리를 살려 주시고, 사흘째 되는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어,
우리가 그분 앞에서 살게 되리라.”(2절)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를 우리는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자신이 완전하고 신심 깊은 사람으로 드러내려고 합니다.
하기야 일 주일에 두 번 단식하거나 십일조를 낸다면 그는 보통 신심이 깊은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자신을 사람들에게 더군다나
하느님 앞에 드러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하나의 인간의
의무와 윤리로만 따지는 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아니고 다 율법 중심으로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따뜻하고 숨쉬는 인간의 모습, 하느님과의 사랑의 모습은 없습니다.
그에게는 철저하게 조절되는 법 조항이 있을 뿐입니다.
세리는 이와 반대로 사람이나 하느님에게 드러낼 것도 내세울 것도 없지만 그에게는
하느님의 자비에 전적으로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문제는 바리사이와 세리에게서 다른 것이 있다면 바리사이는 자만심과 교만이 있고
세리에게는 겸손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진정한 봉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드러내고 싶거나 내가 ‘이런 사람이다.’라는 사람은 인간적으로는 내세울 것이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고 모든 것이 자기 중심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하느님이마저도 사실 관심이 없을 수 있습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을 내세우고 드러내면 끝인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누가 알아주던 말던
조용히 자기 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에게 인정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봉사고 공동체에 보탬이 되면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누구를 더 사랑하시겠어요? 사람의 성숙이 덜 한 사람일수록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합니다.
듣고 보면 ‘자기 자랑하는 사람’을 보면 걱정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사실 진정한 봉사자이고 하느님은 물론이지겠지만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사랑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죄인까지 포용하시는 주님이시지만 바리사이들의 자만과 독선에 대해서는
엄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자기로 끝나지 않으시고 바로 소외된 이들을 업신 여길 뿐 아니라
자기 틀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릇된 성서해석으로 백성들을 잘못으로
몰아 넣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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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9. 사순 제 3주간 토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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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9. 사순 제 3주간 토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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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9. 사순 제 3주간 토요일.
충성된 종의 자세를 갖춘 삶
<2025.3.29> 아침을 여는 묵상 (눅 17:1~10절)
❝충성된 종의 자세를 갖춘 삶❞
❚ 용서가 있는 믿음 안에서 조건을 바라지 않는 충성된 종이요, 바른 제자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 충성된 종의 삶이란 무엇입니까?
➲ 일상의 삶에 용서가 있는 삶입니다(1~4절).
예수님의 가르침은 매우 단호했습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실족하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기 목에 큰 맷돌을 매달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그에게 더 유익하다는 것(1~2절)입니다. ‘실족하게 하다’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대상에 있어서 ‘작은 자 중 하나’ 즉, 보잘 것 없고, 연약한 사회적 약자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실족하게 한다면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임을 경고하고 계십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타인을 실족하게 하는 삶이 아니라 용서하고, 이해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일곱 번 네게 실수를 하고, 일곱 번 돌아와 용서를 구한다면 마땅히 그를 용서해야 한다(3~4절)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고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향한 경고의 메시지로 듣습니다. 나 한 사람의 잘못된 언행을 통해 믿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주변의 사람들이 신앙에 이르는 길에 장애물이 되지 않도록 절제된 삶 그리고 진리에 순종함으로 영혼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용서’라는 단어는 솔직히 큰 부담감으로 다가옴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인가?는 여전히 미지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나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주님의 은혜와 능력 안에서는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십자가에서 죽게 한 모든 사람들까지 용서하시고, 이해하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 일상의 삶 속에서 작은 것이라도 ‘용서’라고 하는 단어를 먼저 떠올릴 수 있는 주님 앞에서 충성된 참 제자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순종이 있는 믿음의 있는 삶입니다(5~6절).
예수님의 가르침에 부담스러웠는지 제자들은 ‘...더 큰 믿음을 더하소서...’(5절)라고 요청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6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리고 제자들에게 요구하시는 믿음은 양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종류의 믿음이냐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얼마나 크냐? 작으냐?의 문제가 아니라 제자들 안에 참된 믿음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이 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6절,b)... 참된 믿음은 순종의 열매를 낳게 되어 있습니다.
답답한 현실의 문제 앞에서 믿음을 의심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서 그러한 현실의 문제의 담을 뛰어 넘을 수 있는 큰 믿음을 달라는 식의 기도를 드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내 자신이 그렇게 기도하는 속내를 살펴보면 이는 정말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드러내는 기도가 아니라 지극히 내 삶의 안위와 평안을 바라는 내 개인의 영광을 위한 기도였음을 보게 됩니다. 작은 겨자씨 안에 담겨있는 생명이 큰 역사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내 작고 미약한 믿음의 씨앗 안에 담겨진 예수의 생명을 통해 놀라운 능력의 역사를 경험하는 삶이기를 소원합니다.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만 있어도 불가능한 용서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내 자신의 믿음의 한계를 인지하여 겨자씨만 한 믿음의 역사를 소망하는 영적인 갈망이 식지 않는 그래서 주님 앞에서 충성된 참 제자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보상이 없는 순종이 있는 삶입니다(7~10절).
밖에서 열심히 일하고 돌아온 종을 대하는 주인의 태도는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특별하게 편의를 봐 준다거나 고맙다고 따로 인사하지 않습니다(7~9절). 왜냐하면 주인과 종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무익한 종에 불과합니다. 내가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입니다...’(10절)...라고 고백하는 삶이 제자의 바른 삶입니다.
이 땅에서 남들보다 더 많은 수고를 감당하고 있다고 생각되어 진다면 이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만 돌려야 합니다.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생색을 내고 싶어 하는 마음이 결국 공동체에 악영향을 끼치는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문제의 시작은 내 자신을 드러내려는 욕구에서 시작이 됩니다. 나를 낮추면 아무 문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무익한 종이라고 내 스스로가 여기며 조용히, 묵묵히 일하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남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음에도 하늘의 상급 하나 받지 못한다면 이보다 더 비참함은 없을 것입니다. 그저 ‘나는 무익한 종에 불과’합니다. ‘나는 그저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삶을 통해 주님 앞에서 충성된 참 제자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잃어버린 제자의 마음과 삶을 회복하도록 말씀 앞에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며,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용서하고, 믿고, 순종하여 주님의 제자다운 삶, 부끄럽지 않는 제자의 삶, 하늘의 상급을 쌓는 제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눅 17:1~10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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