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룡포와의 因緣
옷소매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만나서 가르치고 배운다면 무척 큰 인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연(緣)이 너무도 많다.
첫째, 혈연(血緣)이다.
부모, 형제, 자매는 끈끈한 혈연의 관계이다. 혈연의 관계는 이해가 깊은 관계라 말할 수 있다. 무엇을 좀 잘못해도 용서할 수 있으며 좀 손해를 보아도 참을 수 있는 그러한 관계이다.
둘째, 지연(地緣)이다.
지연이란 같은 지역에 살면서 고향을 같이하고 여러 가지 얽히고설키는 땅과의 연이라 할 수 있다. 이웃집에 함께 산다든지 농사일을 함께 한다든지 하게 되면 땅과의 깊은 연을 가지게 된다.
셋째, 학연(學緣)이다.
같은 학교에 다니므로 동문의 관계가 맺어지고 학연이 이루어지게 된다. 선후배간의 당겨주고 밀어주는 끈끈한 정이 학연을 이룬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연(緣)의 고리가 무척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느껴 질 때가 많다.
혈연은 말할 것도 없겠지만 지연, 학연도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인 것 같다.
구룡포와 나와의 인연은 부모, 형제, 자매가 살고 있어 혈연의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요, 이곳이 나의 고향이라서 지연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 해서 이곳의 학교를 다녀서 학연이 있는 것도 물론 아니다.
그런데도 무슨 인연이 있을까? 내 몸과 마음은 늘 이곳에 머물러 있다.
내가 처음 구룡포를 방문한 것은 50년대 말 전쟁의 상처가 아직 남아 있을 무렵이다. 나는 중학교 수학여행으로 이곳을 다녀갔는데, 그때에 남은 깊은 인상은 대보의 등대이다. 나는 등대를 난생 처음 보았다. 등대지기의 슬픈 노래가 귓전에 들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대보의 보리밭은 고향의 앞뜰을 보는 것처럼 정감이 넘쳤다.
두 번째 구룡포에 온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로 해양 언어 조사차 문예반 학우들과 이곳에 오게 되었다. 민박을 하면서 2명이 1개조가 되어서 바닷가 집을 방문하여 주로 사투리를 조사해 보았으나 별 소득이 없었다. 낮 동안 활동을 하고 저녁에는 모여서 낮에 수집한 언어를 서로 얘기해 보았으나 뚜렷한 게 없었다.
우리 조는 선배 한사람과 나였으므로 둘이서 의논을 하였다. 바닷가로 가서 생전 처음 보는 해녀들을 만나보기로 하였다. 해녀들을 만난 순간 우리는 의외로 제주도 사투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정말 기상천외의 수확이 아닐 수 없었다. 제주도 사투리를 처음 듣는 순간 나는 외국말을 듣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깜짝 놀랄 정도로 제주도 사투리를 많이 수집하였다. 선배와 나는 쾌재를 불렀다. 우리는 수집 상황을 조금 비밀로 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바다의 경관에 매혹되어 모래사장도 거닐고, 해수욕도 즐기며 마음껏 놀 수 있었다.
그 때 수집된 제주도 사투리 중에 아직도 나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재미있는 말은 “맨드롱 한 대 호릅릅 드럽서게”이다. 도대체 무슨 말일까? "따끈따끈 하니 천천히 드세요.”라는 너무도 재미있는 사투리이다. 우리는 수집된 해양언어들을 모두 정리하여 교지에 수록하고, 친구들로부터 오래도록 부러움을 살 수 있었다.
그 때 구룡포읍의 전경은 전형적인 어촌이었으며, 고래잡이배들이 많이 있었고 촘촘히 서있는 일본 집들과 입구에 있었던 돌문이 너무도 인상적이었다.
세 번째 이곳에 온 것은 교감이 된 후 두 번째 학교로 구룡포 여종고에 근무하게 된 때이다. 96년 3월, 바다 바람이 몹시 차게 느껴지고 근40년 전과는 너무도 다르게 항구가 변해 있었다. 나는 가장 먼저 돌문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지역 개발이라는 대명제에 그만 돌문이 철거되었다는 이야기는 나를 무척 서운하게 하였다. 그리고 우리가 민박을 하였던 그 일본 집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찾을 수가 없었다.
더불어 다정다감 하셨던 민박집 아주머니도 전혀 찾을 길이 없었다. 깊은 추억 속에 오래 간직해 둘 청소년 시절의 낭만인 것 같다.
네 번째, 이번에는 내가 교장이 되어서 이곳에 오게 되었다.
이곳에 연(緣)이 있었다면 금의환향이라고 축하도 받고 그 흔한 꽃다발도 좀 받았을 텐데 나의 발걸음은 너무도 무겁고 힘이 없었다. 왜 그랬을까? 너무도 낙후된 교육 시설과 읍. 면 지역의 대부분 학교들이 여러 교육 문제가 많다는 사실을,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두 번씩 그것도 관리자로 근무한다는 것이 너무 부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을 정리하고 발걸음을 가볍게 그리고 굳은 신념으로 새로운 학교생활을 시작하였다.
“학생들이 오고 싶은 학교, 모든 직원들이 근무하고 싶은 학교, 그래서 즐거운 학교”가 된다면 학생들의 장래는 밝아지고 선생님들도 보람을 가지고 근무할 수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좋은 일에는 으레 동참자가 생기게 마련이다. 학생들도, 선생님들도 ,학부형도, 지역주민들도 학교 일에 동참하고 관심을 가지면서 새로움이 날로 더해 가는 것 같다.
우리말에 삼세번이라는 말이 있다. 나는 삼세번보다 한 번 더 많은 네 번씩이나 인연을 맺었으니 이곳 구룡포와 나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깊은 인연(因緣)이 되어 버렸다. (2000.구룡포중.종고 교지 창간호 사라(砂羅)에 게제 되었음)
첫댓글 오래된 추억입니다. 그때가 무척 그립습니다. 희로애락이 많았습니다. 문제가 많은 학교 생활이 마음에 남아있습니다. 그때 고생한 선생님들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와주었던 지역주민들 지금도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학생들을 위해서 솔선수범해준 선생님들께 지금도 감사하고 있습니다.음으로 양으로 도와주었던 많은 분들을 마음에 새겨둡니다.
교수님의 제2의 고향 같은 구룡포, 아름답고 추억이 묻어나는 인연에 대한 글, 인연의 의미를 새겨보며 잘 읽었습니다.
혈연, 지연, 학연과는 상관이 없는 인연, 그러나 중학교 수학여행, 고등학교 때의 사투리 조사, 교감 승진 발령 그리고 교장 승진 첫 부임지 까지, 이곳과 맺은 대단한 인연입니다. 세월이 지날수록 그때와는 많이 변하였지만 그걸 겪은 사람의 마음은 그때보다 더 절실하겠지요. 잘 읽었습니다.
교수님의 구룡포와의 인연은 이해관계가 없는 가장 아름다운 추억입니다. 바다 인근에 산적이 없는 저는 많이 부럽습니다.
구룡포와는 땔래야 땔수없는 깊은 인연인것 같습니다. 저는 이번 나들이가 두번째이긴 해도 잠시스쳐 지나온지라 구룡포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었는데 교수님의 글을통해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감사드립니다.
저는 산촌에서만 근무해서 섬이나 바다가 보이는 어촌에서 근무해 보고 싶었는데 어쩌다 보니 단 한번도 근무해보지 못해 지금도 동경의 대상입니다. 구룡포와의 인연이 많으시니 추억도 많으리라 생각 됩니다. 잘 읽었습니다.
김교수님의 구룡포와의 아름답고 소중한 인연. 영원히 잊을수가 없는 추억이 되겠습니다..귀한 글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
저도 영일군에서 10년간 근무하면서 구룡포에 자주 출장갔습니다. 포항에서 비포장 도로라 갈때마다 고생을 하였습니다. 고기가 많이 잡히는 구룡포 항구는 낮에도 술취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포항수협보다 영일수협이 규모가 컸습니다.예전을 회상하며 잘읽었습니다.
교수님께는 구룡포가 제 2의 고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학창시절의 추억에 이어서 교직에 계시면서도 많은 제자들을 길러낸 곳이기에 구룡포와 바다가 늘 마음 속에 머물고 좋은 글로도 남겨주신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