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고 보니 모두가 기다림이었다
기다린다는 것은 지루함과 그 지루함에서 오는 몸과 마음의 고통을 인내로 견디어 내어 스스로에게 이겨내는 것이다.
기다린다는 것은 고통을 포함한 시간과의 싸움이다. 이 기다림을 이겨내기 위하여는 때로는 피와 땀과 노력과 사랑을 다 바칠 수도 있다. 기다림은 필연적으로 인내와 같이 하기도 한다. 다방면에서 다양하게 공격해 오는 수많은 적(기다림을 해제하려는 모든 것들은 기다림의 적이다)들로 부터의 공격과 그에 의한 고통을 참고 견디어 내며 기다리는 것이다.
기다리는 대상이 그 인내를 포함한 기다림의 가치가 충만하여야 한다. 기다림이라는 것은 항상 가슴 벅찬 일 만은 아니다. 때로는 애가 타고 짜증이 나기도 하고, 때로는 포기하려는 강렬한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그런데 이 복잡다난한 감정을 안고 품어주는 인내를 포함한 기다림이 없다면 삶이 얼마나 무미건조하고 삭막해질지, 아니 삶이란 가치가 송두리째 없어질지도 모른다. 초조와 불안과 근심 걱정이 없는 무미 건조한 삶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기다림의 의미와 가치를 역시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다.
삶 속에서, 언제나 그 삶은 기다림과 인내를 요구한다. 그 대상의 가치에 따라서 짧거나 길 수가 있을 뿐이다. 그 인내를 포함한 기다림을 포기하거나 회피할 수 있다. 더 높은 가치를 발견한다면. 그러나 기다림은 절대 공짜가 없다. 곧 혹은 나중에 라도 크든 적든 꼭 댓가를 요구하고 지불해야 한다.
나는 기다림에 대한 도사가 되어있다. 내가 원하는 것에 대한 기다림은 좀 무식할 정도이다.
이건 내 비밀이다.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기 전이다. 내가 막 수출 사업을 시작했고 역시 사시 공부도 같이 할 때였다. 사시합격해서 바로 결혼하기로 하여 만나던 중 어느 하루는 서울역 앞 시계탑 밑에서 오후 2시에 만나기로 하였다. 나는 10분 전에 도착하여 기다리기 시작하였는데... 오후 6시가 좀 지나 뻐스 정류장에서 헐레벌떡 뛰어 오는 아내를 만났다. 일방적인 약속이어서 잊고 다른 볼 일을 보고 서대문 쪽에서 노량진 집으로 가는 뻐스를 탓는데 서울역이 가까워 오자 약속 생각이 나서 시계탑을 보니 내가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 차를 세우고 달려 왔다는 것이다. 나는 그 땡볕 아래서 4시간 이상을 기다렸었다. 그때는 그 기다림에 대한 고통들이 만남으로서 다 사라져 버렸다.
기다림이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것은 대상을 기다리지 못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을 참지 못 하는 것이다. 시간과의 싸움은 곧 자기와의 싸움이다. 참는 것이 기다림이고 이기는 것이다. 기다림에는 반드시 참고 견디고 이겨내는 것이 뒤따른다. 아니면, 포기이다. 그 포기의 결과는 나약함과 후회일 것이다.
그 외 나의 기다림은 지금까지의 내 삶 곳 곳에서 나를 바로 세웠다. 그러한 기다림들을 생각하면, 내 삶의 많은 부분들이 그 기다림으로 채워졌다. 그런데... 지금도 기다림을 계속하고 있다. 내 스스로 만들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나를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기다려야 하는 것도 있다. 그건 그렇게 마음을 매다는 것은 아니다. 그 외, 지금의 간혹 있는 기다림들은 역시 힘들다. 과거와는 다른 것은, 전에는 그 기다림의 상대를 내가 직접 찾아 가기도 했지만 이제는 마냥 기다려야 하는 것이 다르다.
이곳은 대부분 기다리는 때 들이 많다.
은행에서도 긴 줄을 잘도 서서 기다린다. 신호등 없는 4거리에서는 어떤가?
복잡한 출 퇴근 시간에도 한 차의 흐트림없이 먼저 도착한 차 순서대로 차례 차례로 잘도 건너간다. 주택가 도로에는 stop 싸인이 꼭 몇 개씩 있다. 그 앞에서는 브레이크를 확실하게 밟고 잠깐 정지하였다 출발한다. 불만없이 길게 늘어 선 차들이 잘도 지킨다. 보는 사람이 없는데... 겪어보니 지낼만 하다. 나는 원래 잘 견디니까. 그래도 급할 때는 오버 테이킹over taking(추월.오이꼬시=앞 차를 급히 지나쳐서 가는 것)을 하기도 했었는데... 이제는 안 한다. 나이가 더 들었거든.
6월부터는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럴 것이라 생각했는데... 한국과는 달리 (한국은 건물 공사 완료 기간이 짧고 부지런해서 예정보다 더 빨리 끝내기도 한다) 작년 초에 시작하거나 중반에 시작한 많은 건물들과 빌딩들의 외부. 내부 공사 중이고, 은행 보험사 변호사 증권 거래인 외화 매매인 선물 거래인 등 등 가정에서 컴퓨터로 근무한 유즈드(used=관습화 된)된 씨스틈이 더 좋아서 계속 2틀 내지 3일만 사무실에 출근해서 근무하고 나머지 날들은 가정에서 일하고 있다. 내 큰 아들도 한 주일간 2틀, 어제 오늘 다운타운 office in TD Tower에서 일하고 나머지 날들은 집에서 일한다. 고로 Nothing has changed to me 이다.
나의 경험으로는, 기다림의 결과가 기다림의 한계에 다다를 쯤에 나타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인내는 쓰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달다' 라는 문구도 기억해 보지만, 이제는 도사가 되어서 기다리는 동안 여러가지 수의 경우를 다 드려다 보면서 기다리기에 쓰다니 달다 니 하는 순진한 생각들은 생겨 나지 않는다. 그래서 가능한 한 기다림의 경우를 만들지 않으려고 애쓴다.
내가 말하는 기다림의 것은 거대하고 거창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내 스스로는 그런 것을 싫어한다. 부질없는 삶을 살게 될 것이기에. 그냥, 내가 스스로 바라는 작은 것. 약속이다. 내가 만든 약속. 그런데 이 넘은 때로는 엄청 클 수가 있다. 어떤 이유에서든 때로는 약속이 안되는 결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제는 그럴 때, '아하~ 뭔가 새로운 것을 주기 위하여서 이구나' 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이 기다림은 거의 대부분이 혼자서 해야 한다. 특히 내가 하고 있는 기다림이란 더욱 그렇다. 그 결과가 나를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영향 할 수가 있다고 인식할 때 초조하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적 고통이 외로움으로 더욱 포기를 실행하도록 유혹한다. 특히 갸웃=통풍에 대한 고통이 잦아 들 때까지의 기다림도 그 중 하나이다. 그것 역시 엄청난 인내를 요구하고 나는 감당하고 있다. 내가 지금도 겪고 있거든.
그때 다시 이 기다림의 가치를 생각해 낸다. 그리고 내 스스로 와 의 싸움을 생각해 내고 어떻게 할 것인가?를 다시 묻는다. 당연 싸워 이겨야지 하는 답이 나 온다. 그러면 기다림과 싸워 이겨야지. 상처 투성이가 되더라도. 또한 이 정해진 싸움 외에는 회피할 어떤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은 스스로 이겼다고 하는 자기 만족을 얻을 때까지 무식하게 또 싸운다. 이게 기다림이다. 나에게는. 내일 또 기다림이 있을 것이고, 또 이겨내어야 하고... 지기도 한다. 그때 쓰라린 가슴의 고통은 혼자 다 감당하여야 한다. 그리고 승리의 기쁨은 모두에게. 내가 그 주인공이므로.
첫댓글 인간에게 기다림이란 엄청난 고통의 시간 들이고 인내의 시간들 일겁니다.
잠깐의 스릴과,즐거움 그리고 만족 을 위해서 엄청나게 나를 희생 해야 하고
긴시간을 참아내야 하는 고통이 따르게 되있습니다, 우리의 일생은 기다림의
시간들의 연속이고 나이 를 먹으면서 기다림에 길들여집니다.
이제는 못참고 속에서 천불이 나고 그런것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 됬습니다.
젊음의 시절과 정말 달라진것은 도인처럼 기다림을 생활속에서 절제되어
천천히 아주 잘 견디며 살고 있다는 게 현실 입니다.그래서 한평생 살다보면
자연히 익어가는 맛있는 과일과 같아지지 않을 까요?
함께 해 주신 루비님께 감사합니다.
삶의 고수 다운 멋진 생각의 답글에 공감합니다. 편안한 밤 되십시요~
맞습니다!
나이가 드니 기다림도 이제 화가 나거나 지루하지 않습니다!
나이드니 모든게 바뀌는군요
벼가 익어 가듯이...
역시 삶의 내공 고수다운 말씀입니다. 종종 내공고수의 일필참삶의 수를 시전해 주시길 바랍니다. 건강하고 행복한 밤 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