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흔들리지 않는 뜻을 세워라. 又
來書를 細讀數過에 足見 辦鐵石心으로 立決定志하여 不肯草草라. 但只 如此崖到臘月三十日이더라도 亦能與閻家老子로 廝抵리니 更休說 豁開頂門眼하여 握金剛王寶劍하고 坐毘盧頂上也라. 宗杲嘗 謂 方外道友하되 曰 今時 學道之士가 只求速效일뿐 不知錯了也라하니 却謂 無事省緣 靜坐體究하며 為空過時光은 不如 看幾卷經하며 念幾聲佛하고 佛前에 多禮幾拜하며 懺悔平生所作底罪過하여 要免閻家老子의 手中鐵棒이라하니 此是愚人의 所為니라.
보내온 편지를 여러 번 꼼꼼히 읽으면서 그대가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굳은 의지를 세워서 공부하기에 듬직하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았습니다. 다만 이처럼 공부하다 죽더라도 염라대왕 정도는 상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다시는 “정수리의 눈을 활짝 떠 금강왕보검을 잡고서 비로정상에 앉아야 한다”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제가 일찍이 밖에서 살며 공부하는 사람에게 “오늘날도 배우는 선비들이, 다만 빨리 효과 보기를 구할 뿐, 그것이 잘못된 줄 알지 못한다”고 하였더니, 그는 도리어 “일 없이 세상 인연을 줄여서 고요히 앉아 공부한다고 하며 세월을 헛되이 보내는 것은, 몇 권의 경을 보면서 소리 높여 염불하고 부처님 앞에서 절하고 기도하며 평생 지은 죄과를 참회하여 염라대왕의 엄벌을 피하는 것만 못하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어리석은 사람이 하는 짓입니다.
而今道家者流가 全以妄想心으로 想日精月華하며 吞霞服氣라도 尚能留形住世하여 不被寒暑所逼인데 況回此心此念하여 全在般若中耶아. 先聖이 明明有言하되 喻如太末蟲이 處處能泊하나 唯不能泊 於火燄之上이듯 衆生도 亦爾하여 處處能緣하나 唯不能緣 於般若之上이라. 苟念念에 不退初心이어 把自家心識이 緣世間塵勞底하여 回來抵在般若上하라. 雖今生에 打未徹이라도 臨命終時에 定不為惡業所牽하여 流落惡道니라. 來生出頭에 隨我今生願力하여 定在般若中에 現成受用하리라. 此是決定底事라 無可疑者니라.
燄:불당길염
지금 도가의 무리들이 허망한 생각으로 전부 해와 달의 정기를 상상하고, 그 노을의 기운을 삼키기만 하여도 오히려 세상의 추위와 더위에 상관하지 않고 오래 살 수 있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하물며 이 마음을 돌이켜서 반야 가운데에 오롯이 둔다면 무엇을 더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옛날 성현께서는 분명히 “아무 곳에나 파리가 달라붙을 수 있더라도 불꽃 위에만은 달라붙지 못하는 것과 같이, 중생 또한 그러하여 곳곳마다 인연을 맺을 수는 있으나 반야 위에서는 인연을 맺을 수 없다”라고 비유하셨습니다. 진실로 생각마다 초심에서 물러남이 없이 마음의 알음알이로 세간의 번뇌에 인연 맺었던 것들을 돌이켜 반야 위에 두셔야 합니다.
그리하면 비록 이번 생에 화두를 뚫지 못한다 하더라도 목숨을 마칠 때에는 반드시 나쁜 업에 끄달려서 나쁜 길에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다음생에 이번 생의 원력을 따라 반드시 반야 가운데에서 현재 있는 그대로의 공부를 이어갈 것입니다. 이것은 확고한 이치로서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衆生界中事는 不着學해도 無始時來 習得熟하여 路頭亦熟이어 自然取之니라. 左右가 逢其原이면 須着撥置어다. 出世間學般若心은 無始時來로 背違라 乍聞知識의 說着이라도 自然理會不得이라. 須着立決定志 與之作頭抵하여 決不兩立이어다. 此處에 若入得深하면 彼處에 不着排遣하여도 諸魔外道가 自然竄伏矣이니라. 生處는 放教熟하고 熟處는 放教生이 政為此也니라. 日用做工夫處에 捉着欛 柄하고 漸覺省力時 便是得力處也니라.
중생의 일은 배우지 않아도 아주 먼 옛날부터 잘 익혀왔고 갈 길 또한 익숙해져 있기에 중생계의 일을 자연스레 취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대가 공부의 근원을 만나려면 모름지기 잘 익혀왔던 중생들의 나쁜 버릇들을 없애셔야 합니다.
세간을 벗어나서 반야를 배우는 마음이 아주 먼 옛날부터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선지식이 설한 법을 언뜻 듣고서는 자연스레 그 이치를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흔들리지 않는 뜻을 세워서 이 뜻으로 화두를 챙겨 결코 두 생각을 내지 말아야 합니다. 반야 공부에 깊이 들어가면 중생의 일은 물리치지 않더라도 모든 마(魔)와 외도가 자연스레 숨거나 항복하는 것입니다.
낯설어 있던 공부는 낯이 익게 되고, 낯이 익었던 나쁜 버릇은 낯설게 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평소에 공부하는 곳에서 칼자루를 잡고 점차 힘을 더는 것이 느껴질 때, 바로 힘을 얻는 곳입니다.
☞ 화두를 공부하는 사람은 어떤 경계에도 흔들림이 없이 화두를 챙겨가야 한다. 화두를 떠나 다른 생각이 일어나는 것은 모두 망상이다.
출처: 禪 스승의 편지 , 대혜 종고 『서장』, 원순 옮김
첫댓글 때와 곳은 앞의 편지와 같습니다.
원순스님께서 고향이 마산이라고 들었습니다. 문맥을 읽다보면 서부경남의 사투리 어투가 있어서 표준말처럼 보이나 어색한 부분도 있네요.
"비록 이번 생에 화두를 뚫지 못한다 하더라도 목숨을 마칠 때에는 반드시 나쁜 업에 끄달려서 나쁜 길에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다음생에 이번 생의 원력을 따라 반드시 반야 가운데에서 현재 있는 그대로의 공부를 이어갈 것입니다. 이것은 확고한 이치로서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공부해햐 하는 이유이네요.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어렵지요?
영명연수선사님
께선 염불과 선을 함께 해나가면
뿔달린 호랑이라고..;;
정토와 선을 ~~
화두도 꼭 챙겨
죽을때 나쁜곳으로만
끄달려가지 않길 발원 드려봅니다.
공양 고맙습니다._()_
이 모든것을 하는
이것이 무엇인가?
마하반야바라밀_()_
오늘도 정성어린 공양 감사드립니다.
제가 거의 보현행원으로 불교에 입문하디시피 하여 그런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화두참선 가르치시는 스승님들의 가르침을 보면
늘 용보다는 체를 강조하시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반야가 중요하고, 반야를 깨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토록 반야를 강조하시는 것은
중생들의 용이 부족하니 기본 체력을 키우기 위해 체를 강조하시는 것일까요?
아니면 스승님들의 지극한 자비심으로 대중의 근기에 맞춘 가르침인지요?
체와 용이 따로인줄 알기 때문이죠 이건 중국 불교계의 고질적 병폐인듯
보현행원품이 중국에서도 유명했지만 그들의 화엄 이해는 어디까지나 先悟비로법계 後修보현行海 즉 먼저 깨닫고 그후에 보현행원 하겠다는 거지요 이건 한국 불교에도 지금까지 내려오는 고정 관념 입니다 그래서인지 무비스님이 그렇게 화엄을 좋아하고 화엄경 강의를 하시지만 화엄경 강의에 보현행원은 없어요 비로법계와 보현행원을 따로 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주위에서 보듯 오직 깨달음 먼저 입니다 성철스님도 그랬어요 깨친 후에 보살행이든 보현행이지 깨치기 전에는 그 분들께는 오직 깨침만 있어요 깨침이 보살행과 따로 있는게 아닌데, 수행을 보면 완전 따로 입니다
그러니 불교는 기독교 같은 실천행이 없다는 소리를 줄곧 듣지요 비로법계와 보현행원이 둘이 아닌데, 지금까지도 불교계는 둘로 알거든요? 이건 보조지눌도 마찬가지
제가 보기엔 오직 원효만이 둘이 아니었음
@普賢. 이런 주장을 하면 우리나라 불교계에서 제가 살아남을수 있을까요?
그래서 지금 화엄강의와 보현행원 강의 보세요
화엄강의에는 보현행원이 없고
보현행원 강의에는 화엄이 없어요
완전 따로 놉니다
한번 유심히 보세요
화엄은 저 높은 가르침인데 반해
보현행원은 화엄을 다 공부한 뒤에 해야 하는 좋은 일에 불과 합니다
밥 다 먹고 마시는 커피가 보현행원이죠
자세한 가르침 감사드립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물레방아에 물이 흐르듯
화엄과 보현행원이 같이 갑니다.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