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침 첫차를 타고 서울로 갔습니다.
버스를 내린 동서울터미널 주변은 바람이 몹시 차가웠습니다.
명동성당으로 가면서 그래도 햇빛은 찬란하구나 싶더군요.
이제는 그리움으로만 불러야 하는 한사람을 보내는 날...
새벽2시에 잠자리에 들어 5시에 일어나야 했지만
그의 가는 길을 지켜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그가 눈을 감았다는 소식을 들은 날, 장레식장으로 가서 조문을 했지만
그를 다시는 추억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강박이 그렇게 하게 했을까요...
아니면 그러지 않으면 편치 않을까봐 그랬을까요...
그냥 어떤 이유나 목적도 없이 그저 그러고 싶었습니다.

김근태 즈카리아의 영결미사가 엄수되고 있었습니다.
그의 영혼이 하나님의 품 속에서 평안을 얻기를 기도했습니다.
평소에 그가 즐겨 불렀다는 '사랑으로'으로 같이 부를 때 많은 사람들이 흐느꼈습니다.
"바람부는 벌판에 서 있어도 나는 외롭지 않아..."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주리라~"
오열을 하면서 울려퍼지는 이 노래.
저의 애창곡이기도 한 이 노래를 근태형도 즐겨 불렀다고 하네요...

전태일다리에서 노제를 마치고 마석모란공원으로 떠나는 영구차를 향해
깊은 목례로 김근태 선배를 보냈습니다.
평화시장...
스무살 초반 식당에서 배달일을 하면서 익숙해진 곳...
오랜 회상에 잠겨 걷다가 의류도매가게를 지나다 아들녀석 옷이 필요하단 말이 생각나
겨울잠바를 하나 사고 비올 때 우리가 입을 우의 두벌을 사가지고 지하철을 탔습니다.
삼각지에 내렸습니다.
남영동 대공분실...
서울 살 때 지나가면서 '저기가 근태형이 고문당했던 곳이라지...' 한번 더 보고 지났던 곳.
그곳에 가보고 싶었습니다.
지금은 경찰청산하 인권보호센터로 변모했더군요.
건물에 들어서는데 알 수없는 미세한 공포감이 저를 엄습합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가니 복도 양 옆으로 조사실이 쭉 있어요.

이렇게 서 있으니 또 미세한 공포감이 밀려와요. 여기에 잡혀온 것처럼...
천천히 걸어서 근태형이 고문받았던 조사실로 갔어요.

센터 직원들이 조화를 놓았더라구요.
이 방에서 모진 고문을 가한 경찰의 과오를 사죄하는 의미가 담긴 것이겠죠.
그리고 조사실...

아, 이렇게 깨끗하고 깔끔할 수가...?
마치 방송국 녹음실에 온 것처럼 방음벽이 되어 있고...
이 곳에서 그런 야만적인 행위가 저질러졌다니 실감나지 않는 분위기.
조그만 창에 눈이 갑니다.
근태형이 잡혀와 이 곳에 내동댕이쳐져 전기고문, 관절뽑기, 볼펜심문까지
고문기술자 이근안 경감에게 악랄한 고문을 당할 때,
저 창으로 한가로운 거리의 소음이 들리고
라디오에선 노래와 웃음소리가 흘러 나오고...
아, 나는 이 곳에서 죽음을 넘나들고 있는데
저 바깥 세상사람들은 저렇게 아무일 없다는 듯이 살고 있구나...
그 때의 절망, 고립, 공포.
마침내 저들이 하란대로 진술조서에 서명을 하고...
한 인간이 발가벗겨져 참혹하게 무너져 내릴 때의
그 상황을 우리는 미루어 짐작할 뿐입니다.
바닥에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김광석이 부르는 '부치지 않은 편지'를 틀었습니다.
근태형에게 들려주는 마지막 노래...
풀잎은 쓰러져도 하늘을 보고
꽃피기는 쉬워도 아름답긴 어려워라
시대의 새벽길 홀로 걷다가
사랑과 죽음이 자유를 만나
언강 바람속으로 무덤도 없이
세찬 눈보라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 흘러 그대 잘가라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되리니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되리니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
뒤돌아 보지 말고 그대 잘가라


복도를 지났더니 박종철이 물고문 당하다 숨진 조사실이 있어요.
이 방에서 대학생이었던 박종철은 선배의 이름을 대라는 수사관의 고문을 견디다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요.
그 때 생각이 나네요.
봄꿈각시를 만나러 기차를 타고 내려가는데
중앙일보에 조그맣게 조사받던 대학생이 죽었다는 기사를 보았어요.
아, 이거 큰 게 터졌구나. 이제 군부독재의 끝장이 보이는구나 하는 예감이 들더군요.

4층에 박종철 기념 전시실이 꾸며져 있더군요.



98년엔가 한겨레신문사가 주최하는 어느 행사에서
김근태선배를 직접 보게 되었지요.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대부이자 살아있는 전설을 직접 보게 된 것이죠.
그런데...명성에 걸맞은 카리스마와 외모를 기대했던 저는
그 분이 문 옆 벽에 기대서서 수줍은 듯 계신 것을 보고 좀 놀랐습니다.
뭔가 어눌하고 답답해보이는 인상이었지요.
솔직하게 말하면 실망 같은 것...
재작년 동일방직 여공들이 책을 냈을 때 출판기념행사장에서 그를 본 지인이 하는 말이
"김근태씨가 나를 첨에 못 알아보더니 나중에 와서 이야기를 나눴는데...
몸을 가볍게 게속 떨고 있더라..."고 하더군요.
가슴이 아팠습니다.
아, 우리가 어찌 고문이라는 야수와도 같은 상태를 경험한
한 인간의 상처와 그 내면을 헤아릴 수 있을까.
그가 그 때 남영동에 끌려갔다 오고 나서
어떤 내면의 세계와 싸우고 있는지 우리는 마음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기대와 요구를 할 뿐, 그도 한 인간이란 걸 잊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이는 온유하고 평화롭고 정이 있고 겸손한 바로 '사람'이었습니다.
권력보다는 원칙을 지키려고 애쓰고
인간의 품위가 무엇인지 보여 주었습니다.
또 한명의 '바보 정치인'으로 우리 곁에 있었습니다.
그는 외쳤지요.
"2012년을 점령하라~ 서여의도를 점령하고 광화문을 점령하라~"
그가 2012년을 못 보고, 얄궃게도 이틀을 남기고
우리 곁을 홀연히 떠나갔습니다.


(민주주의자 김근태 사회장 자료집에서)
첫댓글 그를 야만적으로 고문했던 악명 높은 고문기술자 이근안 경감이 목사가 되었다고 하더군요...그렇지요. 못 되란 법은 없지요. 그런데 그는,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는 그는 그때의 고문후유증으로 고생하다 이른 나이에 간 김근태님 조문은 물론 일언반구 말이 없어요... 오히려 "내가 한 일은 애국이다", "다시 돌아가도 같은 일을 할 것이다", "범죄자가 민주화 유공자로 인정돼 좌절감을 느낀다"고 말하는가 하면 "나는 고문기술자가 아니고 굳이 붙인다면 신문기술자다. 신문도 하나의 예술"이라고 말했다더군요. 어젯밤 늦게 술을 마신 저는 이근안을 가만히 둬도 괜찮은건가 물었습니다...열이 나더군요 ㅠㅠ
더러운 정치판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던들 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이렇게 또 아쉬운 인물 한 분을 눈물로 보냅니다.
이근안 목사의 설교를 들어보면 더 가관입니다. 정의가 살아있기는 한건가요? 좋은 사람들 다 보내고 남아있는 사람은 더욱 미안해지는 시대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부산하던 마음이 갑자기 ..........
숙연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