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씀 / 누가복음 17:11-19
오늘은 맥추감사절 주일입니다. 맥추감사절은 지난 반년 동안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고 특별히 감사의 단을 쌓는 날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감사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바비스 깁슨은 그의 저서 “행복한 하루”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행운의 손바닥에 얼마나 많이 쥐게 되었느냐 하는 것은 그대의 행복과 관계가 없다. 그대의 마음속에 감사한 생각이 없으면 그대는 파멸의 노를 젓고 있는 것이다. 제발 부탁이니 다른 공부보다 먼저 감사할 줄 아는 법을 배우라.” 오늘 말씀에는 기도와 순종은 잘하지만 감사를 잘 못하는 문둥병자들이 나옵니다. 기도와 순종, 감사 중에 하나님께서 진정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오늘 말씀통하여 많은 기도와 순종도 귀한 것이지만 더 감사하는 신앙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첫째, 그들은 믿음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이였습니다.(11-13)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님 일행이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촌 어구에서 문둥병자 10명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 9명은 유대인이고 1명은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민족적인 감정으로 인해 서로 상종초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불치의 병을 얻고 천대받고 소외당하는 처지다보니 서로 의지하며 가깝게 지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문둥병자의 모습이 어떠했을까요? 문둥병은 만성 육아 종성 질환으로서 조직과 신경을 파괴시켜 살을 썩게 하는 무서운 병입니다. 몸의 말초부에 결절이 생기다가 결절이 터지면 궤양이 고름이 되어 흐르게 됩니다. 나균은 피부뿐만 아니라 연골 조직도 썩게 하므로 심하면 코가 문드러지고 손가락과 발가락이 떨어져 나갑니다. 눈썹도 빠지고 시신경을 상하게 하기 때문에 눈을 멀게 만듭니다.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신경을 파괴시키기 때문에 바늘로 찔러도 아픈 줄 모르고 찬 것, 더운 것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무감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10명의 문둥이의 모습은 손발과 코가 썩어 문들어지고 눈이 멀어져서 마치 괴물과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육신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정신적이고 영적인 고통도 컸을 것입니다. 문둥병은 전염성이 있어서 문둥병자는 격리 수용시켰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문둥병은 부정한 병으로 문둥병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우고 “부정하다, 부정하다” 외쳐야 했습니다. 그리고 마을 밖에서 살아야 했습니다(레 13:45,46). 사람들은 그들을 멀리하고 가까이 오면 돌을 던졌습니다. 그들은 사랑하는 가족과 생이별을 하여 소록도와 같은 격리된 장소에서 무기징역을 받은 죄수와 같이 무서운 고독가운데 살아야 했습니다. 이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저주를 받았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을 원망하며 세상을 원망하며 저주스러운 인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삶의 기쁨이나 희망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들에게 기쁜 소식이 임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그 마을에 오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소문은 그들에게 희망을 주었고, 생명이 살아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음으로서 희망에 불타올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율법에 금지되었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또 예수님은 늘 무리들로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약한 생각에 잡혀서 자포자기하거나 뒤로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믿음이란 어떤 상황에서도 뒤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전진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10:38,39). 그들은 예수님을 보자마자 멀리 서서 함께 소리를 높여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들으시도록 큰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그들의 외침은 영혼의 절규였습니다. 이처럼 그들은 믿음으로 기도를 간절하게 했습니다. 마침내 그들의 기도는 예수님께 상달되었습니다.
둘째, 그들은 믿음으로 순종하는 사람들이였습니다. (14) 예수님은 지금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바쁘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져야 하는 문제로 마음이 많이 무거웠습니다.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멈추어 서서 그들에게 관심을 줄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울부짖는 기도를 외면치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발을 멈추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이는 그들에게 임한 놀라운 구원의 음성이었습니다. 생명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들을 무서운 질병의 굴레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해방의 음성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보시고 한 눈에 그들의 육신의 상태와 마음 상태를 아셨습니다. 그런데도 고쳐주시지는 않고 가서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이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믿음 없이는 갈 수 없습니다. 가서 제사장에게 몸을 보인다고 해서 과연 병이 나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불신과 회의를 극복해야 했습니다. 혹시 낫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두려움도 극복해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 대한 야속한 마음을 극복해야 했습니다. 고쳐주시고 가라해야 하는데 문둥병자라고 차별당하는 것 같아서 자존심도 극복해야 했습니다. 이처럼 열명의 문둥병자들은 자신들의 자존심과 불신과 의심과 두려움을 극복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그들이 단순히 말씀에 믿고 순종하여 나아갔을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가는 도중에 그 추한 나병이 깨끗이 낫게 된 것입니다. 그 추하고 더럽고 지긋지긋한 병이 어린아이의 살과 같이 보드랍고 깨끗하게 낫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몹쓸 불치의 병도 고칠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긍휼과 자비가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셋째, 하지만 그들은 감사하는 신앙생활은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였습니다. (15-19) 그들이 추한 병이 나았을 때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꿈인가 생신가 살을 꼬집어보았을 것입니다.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춤을 추었을 것입니다. 정말 이 은혜는 평생 갚아도 갚지 못할 은혜입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까? 그 중에 한 사람만이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찬양하며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가던 길을 멈추고 예수님께 돌아와 그 발아래 엎드려 감사했습니다. 그는 바로 유대인이 경멸하는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이렇게 돌아와 예수님께 엎드려 감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마리아 한 사람만 돌아와 감사하고 유대인 아홉 명은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홉이 돌아오지 않은 것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먼저 제사장에게 가야한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제사장에게 갔다가 그 후 예수님에게 갈 것이라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문둥병이 낫자 갑자기 그동안 보고 싶었던 가족들을 먼저 만나보고 ‘주님께 천천히 감사드려도 괜찮겠지’라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알고 보니 나병이 아니었던 것 같아”, ”사실 나는 약을 잘 복용하여 회복되어 가고 있었어“ 등등 이런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그들이 나음을 받고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치 않은 것은 분명히 큰 죄입니다. 감사하지 않는 것은 영적인 문둥병자가 되는 길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예수님은 “언젠가 감사하겠지뭐“ 하며 그들을 이해해 주셨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은혜를 받고도 감사치 않는 아홉을 인하여 마음이 몹시 상하셨습니다. 슬퍼하셨습니다. 아니 분노하셨습니다. 특히 선민인 유대인들이 감사치 않은 것으로 인해 더욱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감사치 않은 영적 문둥병을 책망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온 자가 없느냐?” 감사치 않는 것은 죄 중에 큰 죄입니다. 로마서 1:21절은 감사치 않는 것이 죄를 짓게 되는 근본 원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어쨌든 감사치 않는 자는 영적인 문둥병자입니다. 감사하는 자가 십분의 일밖에 안된다는 사실은 감사하는 신앙생활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잘 말해 줍니다.
어느날 하나님께서 두 천사에게 각각 바구니 하나씩을 주고 한 바구니에는 ‘기도’를, 다른 바구니에는 ‘감사’를 담아오라고 명하여 교회로 내려보냈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두 천사가 바구니를 가지고 올라왔는데 기도를 담은 바구니는 더 이상 담을 수 없을 정도로 가득 차 있었지만, 감사를 담은 바구니에는 겨우 세 개만 들어 있었습니다. 이처럼 감사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말해 줍니다. 우리는 내 바구니에는 몇 개의 감사가 들어 있는가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감사는 하나하나 헤아려 볼수록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찬송가 저자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약한 마음 낙심하게 될 때에 내려 주신 주의 복을 세어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받은 복을 세어보아라.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받은 복을 세어보아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찬 429장). 우리가 감사할 것이 많으면서도 감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채는 것입니다. 우리가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감사하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심령이 메마르게 되고 불평, 불만, 짜증, 신경질이 쌓이게 됩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인간의 기본자세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들의 본성은 감사할 줄 모르고 늘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아무리 믿음이 좋다고 해도 감사하지 않으면 그 신앙은 잘못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감사는 찬양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자는 찬양하게 됩니다. 또 찬양하게 되면 감사하게 됩니다.
감사는 합격을 했다거나 승진을 했다거나 병이 나았다거나 하는 것과 같이 어떤 특별한 감사제목이 있을 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였습니다(살전 5:18). 그리고 시편 50:23a절은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는 금메달을 따는 등 위대한 업적을 쌓아야 되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범사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돈이 드는 일이 아닙니다. 힘든 일이 아닙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캐나다 큰빛 교회 임현수 목사님이 북한에서 석방되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2015년 북한의 취약계층을 도우러 평양에 갔다가 국가전복혐의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죄목은 김일성이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했다해서 신성모독죄였습니다. 나중에 사형에서 종신형으로 바뀌었지만, 하루 24시간 비디오카메라로 감시하고, 총을 맨 병사들이 앞에서 지켰습니다. 2년 6개월 동안 독방에서 혼자 지내야 했습니다. 추운 겨울에 언 땅을 곡갱이로 파야했고, 동상으로 발가락 10개가 까맣게 변하고, 몸무게가 20킬로나 빠졌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원망하기 쉬웠겠습니까? “가난한 북한 동포 도우러 갔는데 이 고생을 하게 하십니까?” 실제로 그는 순간순간 원망이 나오려고 했지만, 그때 마다 성경 700구절을 외우고, 찬송가를 불렀다고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감사와 기쁨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감사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도우셔서 석방이 되었습니다. 석방된 뒤에 감사한 것이 아니라, 무시무시한 감금상태에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한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감사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얼마나 비참한 죄인들이었습니까? 교만, 판단, 미움, 시기, 질투, 음란, 안일, 혈기 등으로 나병환자처럼, 추하고 냄새나던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우리를 위해 주님께서 보혈을 흘려주시고 추한 죄를 다 씻어 주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감사를 잘하지 않습니다. 감사는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감사는 자꾸해야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 새 날을 주신 것을 감사하고, 저녁에는 하루를 지켜 주신 것을 감사하고, 주일에는 일주일 동안 험난한 세상에서 지켜 주시고, 자녀들을 돌봐주시고 지켜 주신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바 은혜가 크고 놀라운데 감사대신 불평을 잘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크고 놀라운 은혜를 기억하고 자꾸 찾아서 하나님께 감사의 단을 쌓아야 하겠습니다. 불평과 불만, 원망과 저주는 모든 질병의 원인이 되지만, 감사는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특효약입니다. 행복은 감사의 문으로 들어와서 불평의 문으로 나갑니다. 행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항상 ‘감사’가 풍성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짜증이 날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괜히 큰 소리를 지르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그때 의식적으로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를 열번을 소리내어 외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던 자” 찬송을 부르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신경질과 짜증나는 마음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평강과 감사가 깃드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몹쓸 일은 은혜를 저버리는 일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은혜만은 배반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열 가지 은혜를 받았어도 한가지 상처를 받으면 열가지 받은 바 은혜는 다 잊어버리고 그 한가지 받은 바 상처만 마음 깊이 새기고 쓴 뿌리를 품습니다. 그래서 속담에도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한은 돌에 새긴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자들은 열 가지 상처받은 일이 있어도 한가지 은혜 받은 일이 있다면 그 한가지 은혜 받은 것만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들이 가져야 할 기본 자세입니다.
19절을 보면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예수님은 한 사마리아인이 돌아와 감사하는 것을 보시고 심히 기뻐하셨습니다. 이로 볼 때 감사는 많은 기도보다 더 예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우리는 과거 문둥병자와 같이 죄로 인해 추해지고 고통하는 삶을 살던 자들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불러주시고 깨끗하게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좋은 것으로 우리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시고, 영혼이 만족한 인생을 살게 하셨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아픔도 있고 어려움도 있었지만 오히려 어려움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체험하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 사랑의 교회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늘 되새김으로 배은망덕한 아홉명처럼 되지 마시고, 주님께 돌아와 무릎을 꿇고 감사하는 한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감사가 우리 생활에 차고 넘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진정으로 행복한 인생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