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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탄 메흐메트 2세와 오스만 군대. 필자 제공 |
유럽 최대 거점도시 콘스탄티노플
술탄 메흐메트 2세의 초상화. 필자 제공 |
메흐메트 2세와 그의 시대
5세기 말에 서로마가 멸망한 이후에도 동로마제국은 건재해 이후 1000년 동안 비잔티움제국이란 이름으로 명맥을 유지했다. 6세기에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통치 아래 과거 로마제국 영토의 상당 부분을 수복하는 등 위세를 떨쳤다. 수도 콘스탄티노플 주민들은 자신들의 도시가 로마제국의 유산을 이어받은 ‘세계의 중심’임을 자랑스러워했다. 이 도시는 유럽과 근동 아시아의 교차로라는 입지 덕분에 이후 오랫동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유럽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거점 도시로서 동방 물산을 서양으로 공급하는 물류창고 역할을 했다. 이곳에서는 먼 동양에서 온 중국산 비단과 도자기, 무엇보다도 인도와 동남아시아에서 온 후추를 비롯한 향신료가 집적된 후 베네치아 상인들을 통해 유럽 내륙으로 유통됐다.
이처럼 엄청난 부가 몰리는 도시이다 보니 일찍이 8세기경 이슬람 팽창의 물결이 들이닥친 이래 비잔티움제국과 그 중심지인 콘스탄티노플은 끊임없는 침략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때마다 주민들은 도시를 둘러싼 견고한 성벽에 의지해 외침을 막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말처럼 수세기 동안 이어진 전쟁으로 비잔티움제국의 국방력은 점차 고갈돼 왔다. 무엇보다도 14세기 초반에 부상한 오스만튀르크의 위협을 막아내기가 더욱 버거워졌다. 1361년경에 이르면 오스만제국은 비잔티움제국이 전성기를 누릴 때 차지했던 영토 대부분을 점령했다. 심지어 흑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해협마저 빼앗긴 탓에 비잔티움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이라는 도시국가나 진배없는 처지가 됐다.
이러한 상황은 아나톨리아 고원지대에 거주하던 오스만튀르크족의 발흥에서 연유했다. 13세기 말에 오스만튀르크 왕조(이하 오스만 왕조)는 소아시아 변경지역에서 할거하던 부족 중 주도적인 가문으로 자리를 굳혔다. 새로운 환경과 상황에 슬기롭게 적응한 이들은 불과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서 소아시아는 물론 발칸반도의 대부분 지역을 지배할 정도로 성장했다. 이제는 콘스탄티노플마저 넘볼 정도로 강국이 됐고, 실제로 1396년과 1402년 연거푸 콘스탄티노플 공략을 시도했다. 하지만 비잔티움제국은 운 좋게도 이 시기에 오스만제국이 티무르 몽골제국의 침략을 받는 덕분에 몰락을 면할 수 있었다. 이로부터 약 20년이 지난 후 오스만의 압박은 재개됐다. 이처럼 15세기 초반부터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오스만의 위협이 상존하면서 조국을 등지고 서유럽으로 떠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동료 주민 중에는 이들을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이로부터 반세기도 안 돼 이들의 비난은 어떤 면에서는 부러움으로 바뀌었다.
1451년 메흐메트 2세가 오스만제국의 새로운 술탄으로 즉위하면서 흑해 연안에 전운(戰雲)이 감돌기 시작했다. 약관 19세였으나 그는 냉혹한 성격에 야심만만하고 비범한 인물로 알려졌다. 실제로 일거수일투족이 이전의 술탄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인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난공불락의 도시 콘스탄티노플을 수중에 넣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아왔다. 실제로 메흐메트는 평소에도 매일 밤 자신의 면전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전기를 낭송케 할 정도로 전쟁사에 매료돼 있었다. 그는 자신의 꿈은 알렉산드로스와 카이사르를 결합한 진정한 세계의 지배자가 되는 것이라고 공언했다. 이러한 그의 호언이 빈말이 아님은 그가 당대 군사학에 매우 정통해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 엿볼 수 있다. 그는 유럽 지도와 선진화된 공성전을 다룬 이탈리아의 군사학 논고들을 입수, 이를 토대로 연구함으로써 최신 군사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술탄은 병참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공성전에 필요한 대포와 화약 등 필수물자를 최대한 확보하는 한편, 무엇보다도 이의 동원시스템을 마련했다.
메흐메트는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마스터플랜에 따라 콘스탄티노플 공략 작전의 시동을 걸었다. 도시를 직접 공격하기 이전에 먼저 콘스탄티노플을 외부와 고립시키는 일부터 시도했다. 1452년 4월 중순 술탄은 흑해로 통하는 길목인 보스포루스 해협에 연한 유럽지역의 가장 협소한 병목 구간에 새로운 성채 건설을 착수했다. 요새의 설계 단계에서부터 깊숙이 개입할 정도로 술탄은 열의를 보였다. 성채를 신설하는 목적은 분명했다. 아시아 쪽에 있는 기존 성채(아나돌루 요새)의 맞은편에 새로운 요새를 건설해 흑해로 통항하는 모든 선박을 감시 및 통제하려는 것이었다. 직접적으로는 인원과 물자가 바다를 통해 콘스탄티노플로 보급되는 것을 완전히 차단해 본격적인 공격 개시 이전에 도시의 숨통을 단단하게 조이려는 조치였다. 술탄의 독려에 강행군한 결과 마침내 1452년 8월에 새로운 성채인 ‘루멜리 요새’가 완공돼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기쁨에 넘친 술탄은 잠시 이곳에 머물면서 저 멀리서 그 자태를 뽐내고 있는 ‘천 년의 도시’ 콘스탄티노플을 날카롭게 살펴보았다.
소문대로 도시는 가히 ‘철옹성’이라 불릴 만했다. 거의 완벽한 방어시설을 갖추고 있는 듯했다. 넓은 마르마라 만(灣) 쪽은 거센 물살과 높고 두꺼운 성벽으로, 좁은 금각만(金角灣·Golden Horn)으로 통하는 입구는 수면 아래에 설치된 굵은 봉쇄용 쇠사슬로 방비되고 있었다. 발칸반도로 이어진 육지 쪽은 더욱 난공불락이었다. 육지 쪽을 막고 선 이중 성벽은 총 길이가 6.5㎞에 이르고, 사이사이에 192개의 우뚝 선 망루가 설치돼 있었다. 이중 성벽의 외벽은 높이가 7.6m이고 내벽은 무려 12.2m에 달했다. 외성벽 앞에 설치된 방책과 너비 20여m에 이르는 해자(垓子)까지 감안할 경우, 가히 삼중 성벽이라 불리기에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