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예 황제의 무덤과 사당 위치 확인이 주는 의미
▶백성에게 맞아 죽었다는 사실은 역사 조작한 가능성 높아
▶조선의 청구도에도 기록되어 있는 무덤
1. 시작하는 말
우리 철원이 한민족 역사에서 중심에 섰던 시기가 궁예의 태봉국이다.
한때 천하의 중심이었던 태봉국이 급전 직하한 것은 수하로 키웠던 왕건의 배신
때문이었다. 궁예는 적어도 신라 왕실의 후손으로 정통성을 갖고 있는데 반해
왕건은 지방 호족의 자손으로 황제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반역을 통하여 궁예황제를 몰아내고 자신이 권력을 찬탈하면서
역사를 자신들의 입맛에 맞도록 조작했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 철원의 경우 태봉국의 정도 1100주년 기념 사업을 대대적으로 했음
에도 정작 궁예의 무덤이나 사당의 존재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고 있었다. 우리
가 추진하는 태봉국을 기리는 사업에 사당이나 무덤이 확인된다면 그 의미는 매
우 크다는데 아무런 이론이 없을 것으로 사료된다.
이런 와중에 본 신문 지난호에서는 박승극 소설가가 쓴 궁예 사당과 무덤
에 관한 내용을 발굴 게재한 것은 획기적인 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따라서 이번 호에서는 궁예 황제의 무덤에 대해 역사적으로 기록된 사실을 정리
해 향후 철원군에서 추진하려는 사업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데스크
분석으로 게재하고자 한다.
2. 문학작품에 나타난 기록
가. 육당 최남선의 기록
우리나라 대표적인 학자인 육당 최남선이 1924년 쓴 '풍악기유(楓嶽記
遊)'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삼방개울을 끼고 남으로 오리쯤 가면 조그만 전우(殿宇)가 보이는 것은
태봉의 궁예왕을 숭봉한 곳인데~ 그 당우(堂宇) 뒤로 돌담같이 보이는 것은
석축 봉분의 남쪽 면이요, 그 북서 양면은 고제(古制)가 온전하고….”라고
기록해 무덤과 사당의 위치를 기록하고 있으면서 민간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내용을 근간으로 최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구레왕(궁예)은 삼방골짜기로 들어왔다.~~먹을 것을 찾고 몸을 숨겨 재
기할 땅을 둘러보는데 어떤 중이 나타나~ 이 병목 같은 속에 들어와 살길을
찾는 것이 어리석다하자~
(궁예가) 아아 천지망아(天之忘我·하늘이 나를 잊었다는 뜻)로다 하여
봉우리에서 심연을 향해 몸을 던졌는데~ 우뚝 선 채로 운명했다. 선 채로
금관(金棺)을 만들고~.”(풍악기유)
위의 내용을 보면 그 동안 역사책에 기록된 '보리이삭을 훔쳐먹던 궁예
황제가 백성들에게 맞아 죽었다'는 내용과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궁예는 죽어서도 이 삼방 지역을 지키는 구레왕으로 칭해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백성들로부터 외면받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은 확실해 보인다.
나. 박승극 소설가의 기록
지난 호에 소개된 궁예 황제의 능과 사당의 내용을 적나라하게 묘사돼
있는데 그 내용을 다시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다.
삼방의 북촌! 서울의 북촌과 마찬가지로 빈궁한 사람만 모인 곳! 이들은
정말 환자로서 약수를 먹으러 왔지만 돈이 없는 탓에 이 깨끗지 못한 곳에
있게 된 것이다. 여기를 지날 때에 무슨 이상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동구를 나서면 좌편으로 궁예릉이 있는데 참으로 빈궁해 보였다. 늙은
전나무가 서있고 다 헐어진 돌담이 둘러있으며 그 안에 두어간이 되는 기와
집 - 이것이 궁예의 능이다.
한 때는 왕! 최후의 전사를 하게된 이곳에 저것만이 최대의 유적으로 남
아 있을 줄이야 어찌 예측하였을까? 문 위에는 <尊敬閣>이라고 쓴 조그만
현판이 걸려있으며 내실에는 궁예 - 태봉왕의 아주 무섭게 생긴 초상이 붙어
있다. 이구석 저구석 검은 현판에 흰 글씨로 추억의 한시와 긴글이 써있으며
그 중에는 <丙午年五月泰封殿宇重建>이니 하는 것들이 눈에 띄었다. 하략-
위 글에서 병오년 오월은 궁예 황제가 28년이 지난 시기이다. 즉 왕건이
죽은 뒤에 다른 왕에 의해 사당과 무덤이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이 의
미는 궁예가 백성들에게 린치를 당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반증하고 있다.
3. 궁예황제의 무덤을 기록한 청구도
청구도는 김정호가 만든 조선 지도이다. 그 내용을 보면 평강군 복계역
북쪽으로 하갑리, 상갑리라는 마을이 있다. 더 북쪽으로 삼방역에서 내려 약
수터를 지나 북쪽협곡을 따라 올라가면 궁예의 돌무덤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
어 있다.
궁예 황제 무덤이 있는 삼방협은 '上, 中, 下防'을 합한 말로 북방의 적
을 막은 천혜의 협곡이다. 또한 삼방약수는 북한 천연기념물 238호로 정확한
위치는 강원도 세포군 삼방리이다. 삼방약수는 삼방역으로부터 북서로 약 1
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약수터의 앞에는 북에서 남으로 남대천이 흐르고 있다. 지질학적으로 보
면 여기가 추가령 지구대의 중부에 속하는 곳이다. 지금은 북한의 병약수 공
장에서 쓰고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4. 역사에 기록된 궁예 황제의 내용
가. 고려사 절요
“왕공이 이미 의기를 들었다"하니 나라 사람으로 달려오는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며, 먼저 궁문에 이르러 북을 치고 떠들며 기다리는 자도
또한 만여 명이나 되었다. 궁예는 이 소식을 듣고 어찌 할 바를 모르다가
미복으로 북문을 빠져 나가서 바위 골짜기로 도망하였다가 조금 후에 부양
백성에게 살해되었다. - 고려사 절요 권 제 1 태조 신성태왕 -
나. 삼국사기에 기록된 궁예의 출생
궁예(弓裔)는 신라 사람으로 성은 김씨이고, 아버지는 제47대 헌안왕
의정(誼靖)이며 어머니는 헌안왕의 후궁이었는데 그 성과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또는 48대 경문왕 응렴(膺廉)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5월 5일에 외
가에서 태어났는데.....
다. 삼국사기 열전 기록된 내용
“궁예(弓裔)는 신라 사람으로 성은 김씨이고, 아버지는 제47대 헌안왕
의정(誼靖)이며 어머니는 헌안왕의 후궁이었는데 그 성과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또는 48대 경문왕 응렴(膺廉)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5월 5일에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그 때 지붕 위에 흰 빛이 있어 긴 무지개처럼 위로
하늘에까지 뻗쳤다".
라. 삼국사기 왕창근의 거울 사건
창근이 거울을 벽 위에 걸어두니 햇빛이 거울에 비치자 가늘게 쓴 글
자가 있었다. 이를 읽어보니 옛 시 같은데 그 대강은 다음과 같았다.
『상제(上帝)가 진마(辰馬)에 아들을 내리니 먼저 닭을 붙들고 후에 오
리를 잡을 것이다. 사년(巳年) 중에 두 마리의 용이 나타나 한 마리는 청
목(靑木) 중에 움추리고 한 마리는 흑금(黑金)의 동쪽에 나타날 것이다.』
위의 내용은 궁예가 새로운 나라를 세울 것을 예언한 내용으로 보여진다.
마. 궁예가 황제꿈을 키우던 칠장사
궁예 황제가 왕실에서 버림받고 유모의 손에서 자라다가 세달사(世達寺)
에 들어가 중이 되어 선종(善宗)이라 이름했다고 한다. 궁예는 이곳 칠장사
에서 13세까지 활쏘기와 무예를 연마했다고 하는데, 아직도 그 활터가 있다.
궁예의 어릴 때 활 쏘는 모습이 지금도 칠장사 명부전의 벽화로 남아 있다.
5. 나가는 말
궁예 황제는 우리 철원의 문화 유산이다. 고구려 옛 땅을 찾기 위해 세
웠던 왕궁터는 비무장지대에서 복원을 기다리고 있다. 그 동안 폭군으로만
알려졌던 궁예에 대한 재평가가 학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다행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궁예는 백성들이 버린 인물이 아니라
는 점은 확실하다.
궁예왕은 죽어서도 삼방지역의 화복을 지배하는 신(神)으로 받들어지고
있다는 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여기서 궁예가 구레왕, 즉 고려
(후고구려)왕으로 일컬어졌다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항상 역사는 승자의 기
록이고 패배자는 못된 인물로 그려질 수 밖에 없다.
지난 역사를 뒤집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일방적으로 매도된 원한을 풀
어주려는 노력은 우리의 몫이라는 생각이다. 따라서 북한땅 삼방협에 남아
있을 궁예왕릉을 남북교류의 상징으로 삼아 제일 먼저 공동조사하면 하는
바램을 가져 본다.
[철원소식] 궁예 무덤 위가 주는 의미 중에서
첫댓글 아마도 중국이나 일본 때문에 우리나라 역사가 너무나 많은 왜곡이 있는것 같습니다
역사학자들이 많이 연구하고 노력해서 우리나라 역사를 제대로 세우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