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에서 찾은 보약 ④
꽃잎은 차, 뿌리는 감기예방! 버릴 것 하나 없는 도라지
[편집자주] 본란에서는 제철에 맞는 음식을 한의학적 관점에서 접근한 ‘텃밭에서 찾은 보약’을 소개합니다. 안전한 먹거리에 관심이 많은 권해진 원장은 8년째 텃밭을 가꾸고 있으며 ‘파주환경연합’ 공동의장을 맡아 활발한 지역사회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추석 명절에는 차례상을 준비하지 않아도 나물 세 가지 정도는 해야 할 것 같지요. 고사리, 무순나물, 도라지 이렇게 세 가지로 색조합을 하거나 박나물, 콩나물까지 해서 다섯 가지를 하기도 합니다.
“깐 도라지는 마트에도 시장에도 다 파는데….” 매번 명절 때마다 제가 도라지를 까고 자르기 싫어서 푸념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맛이 같냐? 그리고 하얗게 보이려고 물에 오래 담가 두고 파는 거라 맛없어. 손으로 직접 까야지.” 하십니다.
사온 도라지는 물에 씻지 않습니다. 물에 담가 두면 껍질 까기가 쉽지 않아서지요. 칼로 살살 겉을 긁으면 아주 얇은 막이 벗겨집니다. 그런 후 쓴맛을 줄이기 위해 소금을 넣어 비비며 씻습니다. 깐 도라지는 세로 방향으로 자른다기보다는 가른다는 말이 어울리도록 갈라줍니다. 콩나물 굵기까지는 아니지만 얇을수록 길수록 맛있어 보이기는 합니다. 그 후 물에 담가두었다가 요리를 합니다.
◇심는 자리를 옮겨줘야 잘 자라는 도라지
인삼이 6년근 4년근에 따라 효능과 가격이 다르듯이 도라지도 4년근 이상을 ‘길경’이라 부르고 약으로 씁니다. 인삼에 들어 있는 사포닌 성분이 도라지에도 있어서인지 둘은 자주 비교 대상이 됩니다. 두 식물의 뿌리를 캐놓고 보면 더 닮아 있습니다. 인삼처럼 4년 동안 한곳에서 계속 자라주면 좋겠지만 도라지는 같은 자리에서 3, 4년이 지나면 대부분 썩어서 없어집니다. 그래서 4년근을 만들려면 2년이 되었을 때 자리를 옮겨서 심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도라지는 약이 될 때까지 4년 이상을 기르기가 쉬운 작물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썩으면 썩는 대로 그냥 한자리에서 5년 동안 계속 도라지를 수확하시는 분도 있다고 합니다.
처음 텃밭에 도라지를 심은 이유는 뿌리를 약으로 쓰려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2년 정도 키워서 자리를 옮기지 않고 나물로 먹으려고 한 거랍니다. 그런데 첫해에 줄기 끝에서 바람 따라 흔들거리는 보라색 도라지꽃을 보니 밭일의 힘듦을 잊을 만큼 예뻤습니다. 심심산천의 백도라지가 무색하게도 저희 밭에서 보라색 꽃을 만개해 하늘거렸지요. 도라지는 보라색과 흰색 꽃이 7~8월에 피는데, 왜 저희밭에서는 보라색 꽃이 흰 꽃보다 더 많은지 인터넷으로 찾아보다가 도라지꽃을 차로 마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꽃을 차로 마신다는 사실은 뿌리만 먹을 수 있다고 알고 있었던 저의 호기심을 자극했지요. 꽃차는 도라지꽃의 수술을 제거하고 약한 불에 덖어서 만듭니다. 잘 말린 꽃을 따뜻한 물에 넣으면 보라색으로 변하면서 꽃잎도 물에 떠 그 빛깔이 정말 예쁘답니다.
텃밭에서는 호미 정도로만 땅을 일구고 작물을 수확하는지라 가을에 고구마를 캘 때 숨어 있던 하지감자가 나오기도 합니다. 그렇게 우연히 땅속에서 보물을 찾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는데, 도라지를 키울 때도 비슷한 경우가 있습니다. 나물로 도라지를 먹을 때는 계절에 상관없이 캐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꽃이 지고 줄기가 말라버린 후에는 가끔 도라지뿌리를 못 찾기도 합니다. 여기쯤 심었는데 하며 캐보면 아무것도 나오지 않거든요. 썩어서 사라진 것인지 우둔한 농사꾼이라 찾지 못하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다음 해 그 장소에서 도라지꽃이 피어오르면 그리 반가울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숨어 있던 도라지 보물을 찾게 됩니다.
민간에서는 쓴 도라지에 달달한 배를 넣어 목감기를 예방하기 위해 많이 마십니다. 저도 배를 많이 수확하는 계절에는 한의원 약탕기에 배와 도라지를 함께 달여서 한약처럼 만들어 두었다가 감기 초기나 목에 가래가 생길 때 마십니다. 길경은 폐와 기관지 급성 염증이라 할 수 있는 감기, 편도선염에 많이 쓰이고 가래를 삭여서 배출하는 효능도 있습니다. 민간에 알려진 대로 한약으로도 쓰이는 거지요.
◇다른 약재를 끌어주는 도라지, 감기 예방에 딱
그런데 한의사들만 아는 길경의 효능이 있습니다. 다른 약재의 효능을 끌어주고 폐 부위나 상체(한의학에서는 ‘상초’(上焦)라고 부릅니다)로 올라가는 능력이 있습니다. 물건을 많이 실은 배가 항구로 나아가듯이 길경이 다른 효능 좋은 약재들을 데리고 상초 부위로 가는 겁니다. 그래서 폐에 기운이 부족한 분들 약에는 보약에 길경을 함께 넣어 폐를 보해주는 것이지요. 반대로 열이 항상 머리로 오르는 분들이 있는데, 인삼처럼 열성이 강한 약재와 길경이 함께 배합된 약재를 쓰면 열이 더 심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도라지 이야기를 쓰려면 수세미 이야기도 같이 해야지.” 어머니가 한마디 하십니다.
그러면 저는 “민간에서는 그렇게 넣어서 달여 먹지만 한의원에서는 수세미 잘 쓰지 않으니까.” 합니다.
자연스럽게 다음 글은 수세미 이야기입니다. 9~10월은 많은 작물을 수확하는 때입니다. 동아박, 노각오이, 방앗간에 벌써 다녀온 빨간 고추까지 말입니다. 이렇게 풍성해지니 조상들에게 차례상도 올리고 꽉 찬 달을 보며 소원을 빌곤 했나봅니다.
권해진 래소한의원장, <우리동네한의사>저자
출처 한의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