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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사(褒姒)
포사(褒姒)는 서주(西周) 12대 유왕(幽王) 희궁녈(姬宮涅)의 비이다. 그녀에 관한 이야기는 하나의 신화에서부터 시작된다. 기원전 18세기(포사가 태어나기 1천여년 전) 하(夏)나라의 마지막 왕 걸왕(桀王)이 재위하고 있던 어느날, 포(褒: 지금의 섬서성 포성현<褒城縣>)나라에 살고 있던 두 백성이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게 갑자기 두 마리의 용으로 변하여 하늘로 올라갔다. 그 두 마리 용은 단번에 수천리를 날아가서 하나라의 도성 짐심(斟鄩: 지금의 하남성 공현)에 있던 걸왕의 궁궐에 떨어졌다. 그리고는 피로에 지쳐 입에서 침을 흘리다가 갑자기 입을 열어 "우리는 포나라의 선왕이다."고 말하였다. 겁에 질린 걸왕은 그것들을 죽이려 하였으나 죽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무당을 불러 점을 치게 하였다. 걸왕의 명을 받고 점을 친 무당은 깜짝 놀라며 "절대 손을 대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더욱 놀란 걸왕은 그것들을 밖으로 쫓아 버리려고 하였다. 그러자 그 무당은 "신선이 속세에 내려온 것은 길조이니 폐하께서는 그것들의 침을 잘 간수해 두소서. 침은 용의 정기이니 그것들을 잘 간수해두면 훗날 복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걸왕은 그것들의 침을 쟁반에 받아서 황실의 보물창고인 주거(朱柜)에 보관하였다. 그러자 그 두 마리 용은 큰 비바람을 일으키며 하늘로 날아갔다.
그로부터 1천년이 지난 기원전 9세기 50년대 주나라 10대 여왕(厲王) 말기에 이르러 그 용의 침을 보관해 두었던 주거에서 갑자기 광채가 쏟아져 나왔다. 이것을 본 담당 관리가 여왕에게 달려가서 보고하자, 여왕은 "그 속에 든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관리는 주거를 열어 그 안에 있던 쟁반을 여왕에게 바쳤다. 여왕은 그 이상한 물건을 받아들고 무엇인지 몰라 두려워하다가 그만 그것을 땅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바로 이때 쟁반에서는 1천년 전에 담아두었던 용의 침이 전혀 변하지 않은채 그대로 흘러내렸다. 그리고는 그 침이 자라로 변하여 정원을 기어다녔다. 겁에 질린 여왕은 여인들에게 명하여 옷을 벗은채 자라를 둘러싸고 고함을 지르게 하였다. 당시에는 나체의 미녀들이 사악함을 쫓아낼 수 있다는 전설이 있었다. 갑작스런 소란에 깜짝 놀란 자라는 이리저리 기어다니다가 왕궁 안으로 들어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바로 이때 후궁에 있던 6~7세 가량의 어린 계집종이 우연히 자라의 발자국을 밟았는데 그로부터 그녀는 갑자기 배가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여왕은 그녀가 감히 외간 남자와 정을 통하여 임신을 한 것이라 생각하고는 크게 노하여 그녀를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기원전 828년에 여왕이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선왕(宣王)이 왕위를 계승하였지만, 선왕도 그녀를 석방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수감된지 40년이 지나서 그녀는 갑자기 복통을 일으키다가 계집아이 하나를 낳았다. 이에 선왕은 그 계집아이를 물속에 던져 버리라고 명했다.
임신한지 40년만에 아이를 낳는 괴이한 일을 당한 선왕은 마음이 매우 불안하였다. 바로 이때 수도 호경(鎬京)에서는 다음과 같은 동요가 널리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뽕나무로 강한 활을 만들고
가는 풀로 화살통을 짜니
주나라도 더 이상 남아있지 못하리라
선왕은 크게 분노가 치밀어 뽕나무로 만든 활과 가는 풀로 짠 화살통의 판매를 금지시켰다. 그리고는 이렇게만 하면 주나라 왕실이 안전할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어느날 한 시골 부부가 뽕나무 활과 풀로 짠 화살통을 팔려고 낙양(洛陽)으로 갔다. 그들은 국왕이 그러한 엄중한 금령을 공포한 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성문에 들어서자마자 병사들은 국왕의 금령을 어긴 죄로 그들을 붙잡으려고 했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남편은 재빨리 도망을 쳤으나 불행히도 그의 아내는 병사들에게 붙잡혀서 목이 달아나고 말았다. 얼마나 도주했을까? 졸지에 아내를 잃고 도망자 신세가 된 그 남자는 슬픔을 억누르며 홀로 한적한 강가를 걸어가고 있었다. 이때 그는 강물에 떠내려가고 있는 거적을 하나 발견하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 거적에는 한 계집아이가 깊이 잠들어 있는 것이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당시에 무수한 새들이 하늘을 날며 그 거적을 보호하면서 거적의 네 모퉁이를 물고 밖으로 끌어내고 있었다고 한다. 이를 본 그 남자는 거적에 올라가서 그 계집아이를 꺼내었다. 그러나 죄인의 몸이 된 그 남자는 마땅히 갈곳이 없었던지라 생각 끝에 포(褒)나라로 친구를 찾아갔다.
기원전 782년에 선왕이 죽고 그의 아들 희궁녈(姬宮涅)이 왕위를 계승하였으니, 그가 바로 주나라의 제12대왕 유왕(幽王)이다. 그는 신(申: 하남성 남양현<南陽縣>)나라의 공주를 왕후로 맞아들였으며, 그후 신후(申后)는 태자 희의구(姬宜臼)를 낳았다. 그러나 유왕은 성격이 포악하고 방탕하여 하(夏)의 걸왕(桀王)이나 상(商)의 주왕(紂王)에 못지 않는 폭군이었다. 그는 다른 폭군들과 마찬가지로 그에게 간언을 하는 충신들을 죽이고 미녀들을 선발하여 유희에 빠졌다.
어느날 포나라의 제후 포향(褒향, 향=王+向)이 유왕을 알현하고 간언을 올렸다가 유왕의 노여움을 사서 투옥되었다. 이에 포향의 친구들은 포향을 구하기 위하여 다방면으로 노력하였으나 뾰족한 묘수가 없었다. 포향의 아들 포홍덕(褒洪德)은 주의 문왕(文王)이 상의 주왕을 멸망시킨 고사를 떠올리고는 각지에서 미녀들을 모집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뽕나무 활 때문에 죄인이 된 남자가 강가에서 거두어 갔던 그 계집아이도 아름다운 처녀로 성장하여 그 모집에 응했으니, 그녀가 바로 포사이다.
기원전 780년 포나라의 미녀들을 호경으로 보내자 유왕은 크게 기뻐하였다. 특히 유왕은 선녀처럼 아름다운 포사의 용모를 보고 더없이 흡족해 하였다. 포나라에서 보낸 미녀들을 받아들인 후 유왕은 곧바로 포향을 석방하였다.
포사는 왕궁에 들어가자마자 뛰어난 미모와 총명한 지혜를 발휘하여 즉시 유왕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년 후 그녀는 아들 희백복(姬伯服)을 낳았다. 이때부터 그녀는 왕후의 자리와 태자의 자리를 탈취하기 위하여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였다. 이때 유왕은 포사에게 푹 빠져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좋아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했다.
기원전 773년 유왕은 마침내 포사의 꾐에 말려들어 신후(申后)와 태자 희의구를 폐한 후, 신후를 옥에 가두고 희의구를 신(申)나라로 유배시켰다. 그리고는 즉시 포사와 그녀의 아들 희백복을 각각 왕후와 태자에 책봉하였다. 이해에 포사는 방년 20세의 어린 나이였지만 모든 고관대작들을 피로써 물리치고 당당히 권력의 핵심에 들어섰다. 그러나 포사는 비록 조정의 대권을 모두 차지하긴 하였지만 좀처럼 웃는 법이 없었다. 유왕은 그러한 그녀의 웃음을 보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그녀는 결코 웃음을 보이지 않았다. 어찌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녀가 웃음을 보이지 않자 유왕은 더욱 안달이 나서 참을 수 없었다. 결국 유왕은 그녀의 웃음을 보기 위해 어리석기 짝이 없는 계책을 세우게 된다. 조숙대(趙叔帶)의 반론을 물리치는데 공을 세운 적이 있는 괵석보(虢石父)가 다음과 같은 계책을 올렸다.
"옛날 서쪽의 만족(蠻族)이 강성하여 자주 수도를 침범하였는데, 그들의 급습을 방비하기 위하여 일찍이 20여개의 봉화대를 설치해 두었습니다. 비상사태가 발생하였을 때 봉화에 불을 붙여 불길이 하늘로 치솟으면 부근의 제후국에서 구원병을 보내줍니다. 그러나 근래에는 여러해 동안 천하가 태평하여 그것을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만약 전하께서 왕후와 함께 여산(驪山)으로 가셔서 봉화를 올린다면 그것을 보고 주변의 제후국에서 대군이 구름처럼 몰려들 것입니다. 그들이 급히 달려와서 헛걸음치게 한 다음 그 제후들을 놀린다면 왕후께서는 반드시 기뻐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유왕은 과연 묘책이라 생각하고 포사를 데리고 여산으로 갔다. 여산은 수도 호경(鎬京: 지금의 섬서성 서안시)에서 동쪽으로 약 30km 떨어진 지점에 있다.
☞ 여산봉화(驪山烽火)
유왕은 포사와 함께 여산에 도착한 이후 저녁이 되자 성대한 연회를 베풀고 봉화를 올리도록 명령했다. 당시에 삼군총사령관을 맡고 있던 정(鄭)나라의 제후 희우(姬友)는 그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 황급히 행궁(行宮)으로 달려가서 유왕을 만류하였지만 유왕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유왕의 명령으로 봉화가 오르자 그것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졌다. 수도 부근에 있던 제후들은 밤중에 봉화가 올랐다는 급보를 듣고 수도 호경이 오랑캐에게 포위당한 것으로 판단, 급히 지원군을 편성하여 달려왔다. 이때 유왕과 포사는 여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제후들의 군대가 집결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즐기고 있었다.
새벽 무렵 왕실을 구원하기 위한 제후들의 군대가 사방에서 달려와 여산 아래에 집결하였다. 그들은 비록 밤새워 달려왔지만 그러한 피로도 잊은 채 오로지 왕실을 구하겠다는 충성심으로 불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막상 여산 아래에 도착한 이후 전열을 정비하고 사방을 둘러보아도 적들의 그림자도 구경할 수 없자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보고 있던 유왕은 크게 만족하면서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아무런 외침이 없었으나 내가 심심해서 한번 봉화를 올려본 것뿐이오. 그러니 모두들 원대복귀하여 명령을 기다리도록 하시오."
이 말을 들은 제후들과 병사들은 자신들의 귀를 의심하였지만 사실을 알고난 이후에는 허탈감에 빠져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모습을 본 포사는 비로소 웃음을 참지 못하고 생긋 웃었다. 이리하여 마침내 유왕은 웃음이 담겨있는 포사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여산봉화'의 고사이다. 그후 유왕은 그러한 계책을 건의한 괵석보에게 상으로 황금 1천냥을 하사했다.
포사의 아름다운 웃음을 본 이후 유왕은 그녀의 웃는 모습을 다시 한 번 더 보고 싶어서 봉화를 자주 올렸을 뿐만 아니라 그녀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려고 했다.
기원전 771년 유왕은 신(申)나라에 유배시켰던 태자 희의구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신나라의 제후는 원래 유왕의 장인이자 희의구의 외조부였다. 그는 차마 자기의 외손자를 죽일 수가 없었기에 유왕에게 그 일의 부당함을 알리는 상소를 올렸다.
"옛날 하(夏)왕조의 걸왕은 말희(妺喜)를 총애하여 망했고, 상(商)왕조의 주왕은 달기를 총애하여 망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폐하께서는 포사를 총애하여 적자를 폐하고 서자를 옹립함으로써 부부의 정은 물론 부자의 정도 끊었습니다. 그러니 즉시 명령을 거두지 않으신다면 이 나라도 망하고 말 것입니다."
유왕은 이것을 다 읽어보기도 전에 화를 억누르지 못하고 격분하였다. 그는 신속하게 명령을 다시 내려 신나라 제후의 작위를 박탈한 다음 그를 토벌할 준비를 하였다.
신나라의 제후는 단독으로 중앙정부의 공격에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호경 부근의 만족(蠻族) 견융부락(犬戎部落)의 추장과 동맹을 맺었다. 신나라의 제후는 견융의 추장에게 자기의 외손자가 왕위를 찬탈하기만 한다면 호경의 모든 금은보화와 많은 남녀를 노예로 바치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이에 견융의 추장은 즉시 1만 5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호경을 공격하였으며, 신나라의 군대도 그와 동시에 호경으로 향했다.
신나라와 견융부락이 연합하여 공격해왔지만 유왕은 거기에 큰 위협을 느끼지 않았다. 조그만 제후국과 오랑캐 부락이 아무리 연합하여도 결코 그들이 300여년의 역사를 가진 주나라의 적수는 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견융부락의 군대가 호경성 아래에 다달았을 때 유왕은 봉화를 올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삽시간에 봉화의 불길이 하늘로 치솟아 올라 전국으로 퍼졌다. 그러나 밤새워 달려와야 할 제후국들의 구원병은 끝내 오지 않았다. 봉화의 불길을 본 제후들은 지난번에 유왕과 포사에게 속았던 경험이 있었던지라 이번에도 그들의 노리개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유왕은 유명한 이솝우화의 목동과 같은 신세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제서야 유왕은 발을 동동 굴렀지만 이미 때는 늦었었다. 호경에 미리 숨어있던 신나라의 군사들이 성문을 열어 젖히자 견융부락의 군사들은 손쉽게 호경에 진입할 수 있었다. 크게 당황한 유왕은 포사를 데리고 근위병의 호위를 받으며 여산으로 탈출하였지만, 뒤따라온 견융의 군사들을 막아내지 못하고 결국은 견융족에게 붙잡여 목이 달아났다. 그러나 견융의 추장은 포사를 보고는 그 미모에 반하여 차마 죽이지 못하고 자기의 아내로 삼았다. 그 이후 그녀의 행방에 대해서는 어떻게 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만족(蠻族)의 수중으로 잡혀간 최초의 중국 황후로 기록될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마지막 행적에 대해서는 다른 설도 전해지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신나라의 제후가 견융부락의 황음무도한 행위에 분개하여 진(晋), 위(衛), 진(秦), 정(鄭)나라와 연합하여 견융을 물리치고 포사를 데려가지 못하게 했다. 그렇지만 포사는 신나라의 제후가 자기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스스로 목매달아 죽었다는 것이다. 이때가 기원전 771년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