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2월
10일 화요일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고집하고
있다. (마르코 7,1-13)
You disregard God's
commandment but cling to human tradition."
말씀의 초대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이렇게 해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터전에 사람을 창조하셨고, 그 목적이 당신의 피조물을 돌보는 것임을
선언하신다(제1독서).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나를 헛되이 섬긴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들려주시며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고 질타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학생들은 성현들의
가르침을 교과서로 배운다. 부처의 가르침은 ‘자비’이고, 공자의 가르침은 ‘인’(仁)이며, 예수의 가르침은 ‘박애’라고 쓰면 정답이다. 일반의
종교 이해는 그렇지만 교우들의 신앙생활이나 교회에서 가장 강조되는 것이 무엇일까? 사랑일까, 주일을 지키는 것일까? 아니면 고해성사와
성체성사일까, 단체 활동일까?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무엇이며 가장 강조했던 가르침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내가 믿는
세상에 대한 해답이기도 하다. ‘하느님
나라’였다. 복음서에는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를 시작으로 ‘하느님 나라’에 대한 설명과 비유가 압도적으로 많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 6,10) 하고 기도하라 하셨다. 그분께서 마침내는 하느님
나라 때문에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 후 초대 교회의 상황은 ‘하느님 나라의 선포’를 유업으로 증언하기보다는 ‘당신들이
죽인 나자렛 사람 예수가 바로 하느님의 메시아였다.’는 진실 규명의 강조가 더 시급했다. 생사 존폐가 달린 박해 정국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하느님 나라’보다는 주일 미사나 고해성사가 더 중요한 것이 되었다. 교회 역사의 강조점이 하느님 나라에서 그리스도로, 성사 생활로 탈바꿈해
왔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강생 목적과 십자가 죽음의 이유는 강조점에서 저 멀리 가 버렸다. ‘각주구검’(刻舟求劍)이다.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마음은 내게서 떠나 있다. 너희의 전통을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는 이사야서의 말씀이 가슴을 아리게 찌른다. 나도 바리사이가
되어 버렸음이 부끄럽다.
이 세상은
공평할까요? 아니면 불공평할까요? 많은 사람들이 불공평하다는 말을 종종합니다. 그래서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는 말도 있지요. 즉, 사람이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성패는 운에 달려 있는 것이지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그냥
세상에 순응하면서 포기하며 살아가야 할까요? 결과만을 바라보며 살아간다면 이 세상에서의 모든 노력이 쓸데없고 부질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결과만이 모든 것이 아님을 우리는 종종 깨닫게 됩니다. 원하는 결과를 내지 못하더라도 노력 그 자체를 통해서 얻는 것들이 더 많다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체험을 할 수 있고, 새로운 만남을 갖게 되며 이로써 새롭게 다가오는 주님을 체험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포기하고
좌절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또한 불공평하다는 생각에 빠져 불평불만 속에 살아서도 안 됩니다. 대신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함으로 내게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깨닫는다면 그 자체로 가장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이 됩니다.
결과에 운운할 것이
아닌, 하느님 뜻에 맞춰서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세상의 법칙에 흔들리지 않고 하느님 뜻에 맞게 살아간다는 그 자체에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과거 예수님 시대의
종교지도자들은 하느님의 뜻이라고 말하면서 조상들의 전통이 담긴 율법을 철저하게 앞세웠습니다. 이는 요즘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에 가면
바리사이들의 후예라고 말하는 초정통파 유대인(ultra-Orthodox)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더운 여름날에도 검고 두꺼운 외투를
입고 검은 챙이 달린 모자를 쓰고 다닙니다. 그러면서 613개의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지요. 문제는 율법을 확대 해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사랑을 보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엄격하게 만들어 사람을 구속하고 이로써 하느님의 사랑을 보지 못하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에 대해 항의하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라고 꾸짖었던 것입니다.
율법만을 내세워서
하느님의 사랑을 보지 못하는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의 모습과 운칠기삼 등의 세상 법칙을 내세워서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어쩌면 매우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의 법칙을 지키고 순응하며 포기하는 것이 아닌, 하느님의 계명에 철저하게 의탁하고 그 안에 담긴 하느님
사랑에 감사하며 기뻐할 수 있는 우리가 되는 것을 주님께서 가장 원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제나라 재상 관중은
전쟁 통에 길을 잃었을 때 늙은 말을 풀어 길을 찾았습니다. 젊은 말은 빠르지만 늙은 말은 지름길을 압니다. 세월은 지혜입니다. 머물지 않는
세월, 나이 듦은 복입니다(이영만).
북극성을
찾아서(홍기운,
‘좋은생각’ 중에서)
한 고등학생의
트위터 글이 화제가 됐다.
“태풍은 좋겠다.
진로도 있고.”
하물며 태풍에도
경로가 있는데 자신은 진로를 찾지 못해 답답했던 모양이다. 우리의 진로 여정은 항해와 같다. 이때 꼭 바라볼 것이 북극성이다. 그것을 보면
적어도 방향을 잃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북극성과
같은 크고 밝은 주님이 계십니다. 내 인생을 밝게 비춰주시는 그 분을 바라볼 때 어떠한 고난과 시련 앞에서도 기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을
잃어버리지 마십시오.
어렵고 힘들 때
하늘을 올려 보세요. 멋진 하늘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정하신
10계명에 준해서
-이기정신부-
사람들이 정한
사항들은 틀릴 때가 많습니다. 국가행정부터 그렇지요. 그런가하면 가정문제도 결혼하고 달라지고 애 낳고 달라지고 또 있습니다. 부모관계도 아기
때부터 보면 청소년 청년 장년 결혼 후 매번 달라집니다.
조변석개(朝變夕改)하는
게 우리 자신들인데도 큰 소리는 잘도 칩니다. 불변하는 진리와는 상관없이 마음 취향 따라 달라지는 사람들 한심하지요. 신앙인들은 하느님이 정하신
10계명에 준해서 구약부터 오늘까지 살고 있지요.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마르코
7,7~8)”
영혼의
정결예식
-양승국신부-
요즘 다시 유명세를
타고 있는 한 철학자의 표현이 있습니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요즘 우리에게, 특히 우리 시대 젊은이들에게 필요한 말인 듯합니다. 시대의 고민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나 인간 삶에 대한 깊은 사유(思惟)는
뒷전입니다. 존재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나 공동선의 진작을 위한 노력 역시 안중에 없습니다. 그저 단 한치 앞의 현실적이고 육체적인 대상들,
본능적이고 말초적인 대상들에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한때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일념으로 수많은 젊은이들이 청춘과 목숨을 아끼지 않던 순수의 시절이 있었습니다. 더 나은 세상의 건설, 더 큰 가치관을 위해 사랑도 젊음도
내어놓던 뜨겁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를
돌아봅니다. 자신의 내면을 돌보고 영혼을 살찌우려는 노력은 뒷전입니다. 그저 육체를 돌보기 위해 갖은 정성과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습니다.
우리는 외모지상주의라는 정말 요지경 속 같은 특별한 문화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천박한 문화는
예수님 시대에도 존재했습니다. 영혼과 정신은 썩어문드러져 가는데도 몸만 ‘빡빡’ 잘 씻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바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영혼이나 내면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정해진 규정에 따라 목숨 걸고 손과 발만 열심히 씻었고, 그게 신앙생활의
척도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외모보다 마음을 더 소중히 여기시는 분입니다. 또한 이 세상 그 어떤 사람이든 생명이 붙어있는 한 그 자체로 존귀하고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입니다. 장애우든 임종직전의 환우든, 키가 크든 키가 작든, 평범한 외모이든 남과 다른 외모이든, 본국인이든 외국인이든 그
누구든 하느님 창조의 손길이 담겨있는 거룩한 하느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는 손과
발을 씻는 정결례 대신 이제 마음과 내면을 씻는 정결례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영혼과 정신을 씻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우리 정신이
형이하학적인 것에만 머무르지 않고 형이상학적인 차원으로 한 단계 끌어올리려는 노력을 의미합니다. 더 순수하고 더 지고한 영혼의 소유자가 되기를
염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저 내 한 몸 잘
먹고 잘 사는 데 혈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세상, 더불어-함께 잘 사는 세상을 추구하는 노력을 의미합니다. 더 고귀하고 가치 있는 일에
헌신하려는 노력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영혼의 정결예식을 위해 오늘 하루 더 인간답게 살지 못한 부분에 대해 더 깊이 성찰을 거듭해야겠습니다. 공동선의 증진을 위해 더 내 내어놓지
못한 것에 대해서 크게 가슴을 쳐야겠습니다. 더 이타적이고 더 희생적이고 더 충만하게 살지 못했음에 깊이
반성해야겠습니다.
< 우리가 모르고 먹는
선악과 >
-전삼용신부-
미국의 소설가
드라이저의 작품 “아메리카의
비극”은 욕심만 쫓아
사는 인생의 말로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클라이드 그리피스란
청년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먹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먹지 못하고 제대로 입지도 못한 채 살았습니다.
그의 마음엔 어떻게
하든지 돈을 벌어 부자가 되겠다는 결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바로 약방의 사환으로 취직하였다가 조금 커서는 캔사스 시에서 가장 큰 호텔의 종업원이 됩니다.
호텔 보이로 있는
동안 주급 이외에도 손님들이 던져주는 팁의 수입이 제법 많았으므로 그 수입은 자기 어머니에게 말하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일에 사용을 했습니다.
하루는 친구들과
함께 여자들과 어울려 남의 차를 훔쳐 타고는 야외로 놀러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어린아이를 치는 교통사고를 냈습니다.
그는 경찰에
체포될까봐 그 길로 도망쳐 공장을 경영하는 숙부의 집으로 찾아가 공장 직공으로 숨어서 일하게 됩니다.
공장 주인의
조카라는 체면을 지키며 숙부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으려고 열심히 일하며 의복도 단정하게 입으려고 하였지만 실제로는 값싼 월급쟁이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던 중 숙부의
집과 가까이 지내는 상류계급의 한 처녀를 사귀게 되었고 그 처녀와 결혼이 될 듯한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클라이드는
이미 결혼을 약속하고 임신까지 한 공장 여직공을 애인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돈과 명예와
부귀에 욕심이 생긴 클라이드는 부잣집을 처가로 삼기 위하여 임신한 여직공을 연못에 밀어 넣어 죽게 하고는 부잣집 딸에게
찾아갑니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살인 사건의 발각과 동시에 사형대인 전기의자였습니다.
돈은 좋은
것일까요,
나쁜
것일까요?
사실 돈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 또한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문제는 돈 안에
독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자연산 복어를 먹을
때 꼭 제거해야만 하는 부위가 있습니다.
복어가 아주 맛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어느 부위를 제거하지 않으면 치명상을 입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 또한 그런 시각으로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고 모조리
먹으려다가는 클라이드의 운명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식당에서 식사할 때
늦게 도착하는 사람을 위해 음식을 조금 떼어 남겨놓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는 늦게 오는
사람에 대한 배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뿐만 아니라 우리 생명까지도 하느님의 것으로 고백하는 신앙인들입니다.
그런데도 하느님의
몫을 배려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가히 도둑이라 불려도 마땅할 것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약탈할 수 있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약탈하면서 “저희가 어떻게
당신을 약탈하였습니까?”
하고
말한다.
십일조와 예물이
아니냐!“(말라
3,8)
하느님은 분명
십일조와 예물이 당신의 소유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그것까지
먹었다가는 하느님의 소유를 약탈하게 됩니다.
오늘 독서에
하느님께서는 아담에게 모든 것이 당신 것임을 잊지 않도록 나무 한 그루만 당신 것임을 잊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경고하십니다.
아담에 에덴동산을
일구는데 도움을 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하느님은
그것 하나만 상징적으로 당신의 것으로 기억하며 모든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잊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현재의 가톨릭
신앙에서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와도 같은 하느님께 해당된 것들을 아무 두려움 없이 약탈하고 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어쩌면 복어 배에
있는 독까지 함께 먹는 것처럼 우리 자신도 모르게 돈에 중독되어가는 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모든 것을 주시지만 상징적으로나마 모든 것이 당신 소유임을 고백하는 방법을 그 중 십분의 일을 봉헌하는 것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사는
시간도 마찬가지고 에너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면
우리 생명까지 당장 가져가실 수 있습니다.
진정 십일조를 내지
못하는 것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는 것처럼 죽음에 이르는 길을 수도 있음을 느낀다면 우리가 이렇게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마르코7,2) -김대열신부-
더럽다는 말도,
깨끗하다는 말도 상대적일 수 있는 말입니다.... 더럽다거나
깨끗하다는 것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제자들이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더러운 손으로 먹었다고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 사람들은 단정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커다란 죄라고 믿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말하고 있는
깨끗함과 더러움의 구분에도 식별이 요구됩니다. 정말 슬프도록
재미난 것은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참 많은 이유로
만들어진 수 많은 종류의 권력들과 그 권력들이 의도적으로 생산해낸 편견들로 인해
깨끗함과 더러움이
뒤바뀌는 경우는 참으로 많았고, 지금도 여전히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봅니다.
구약성서의 레위기 15장19절부터 33절까지, 그리고 18장19절, 20장18절에는
여성의 생리 자체를
불결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인 것이지요.
하지만 구약을 믿는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오랜 역사도 레위기에서 말하는 것처럼
여성의 생리를
불결한 것으로 보아왔다는 것입니다.
이는 종교적 권력을
가진 자들의 잘못된 생각을 하느님의 뜻으로 탈바꿈했던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어떤 민족, 어떤
문화의 역사를 보아도, 이와 비슷한 일들은 자연스럽게 있어왔습니다.
한반도의 역사를
살펴봐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 양반이니,
상놈이니 하는 신분제도 역시 당시 권력집단이 기득권과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지요.
신분상 힘을 가진
자들은 권력 유지를 위해서 힘없는 자들을 천하고 더러운 존재로 몰아가야만 했습니다.
낮은 신분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사람들 스스로도 세월과 함께 자신들을 천한 존재로 받아들였던 어둡고 슬픈 역사입니다. 이러한 사회 구조는
오늘날에도 형태만 다를 뿐 과거와 마찬가지로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힘을 가진
자들은 힘이 없는 이들을 눈 아래로 보려는 성향을 자연스럽게 보입니다.
더럽다는 말도,
깨끗하다는 말도 상대적일 수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는 마음에 따라
깨끗함과 더러움이 바뀔 수 있다는 말입니다. 차별을 만들고자
하는 이의 눈에 들어온 누군가가 더러운 것이 아니라,
차별을 만들고자
하는 그 마음이 더러운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식사 전
손을 닦는다는 것은 조금만 종지 하나 가져다 놓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손을 잠시 담그었다가 마른 천으로 닦는 것을 뜻합니다. 즉, 바깥에서
손을 닦았던 안 닦았던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지요.
이런 모순적 기준을
가지고 제자들을 비난하는 바리사이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 하시며 야단을 치십니다.
분명히 깨끗하고
더러운 것은 존재합니다. 그리고 깨끗해지고 더럽혀진 것도 존재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어떤 대상이던지 그 대상을 바라보고 있는 마음의 건강입니다. 건강한 마음만이
있는 그대로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더러운 것을 보고 더럽다고 하고 있는지,
깨끗한 것을 보고
깨끗하고 하는지를 말입니다.
그래야만 자신의
마음이 건강한지 그렇지 못한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 중 하나는 선과 악, 깨끗함과 더러움의 식별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조재형신부-
손님이 찾아
왔습니다.
‘감기’입니다.
목이
따끔거리고,
코가
막히고,
힘이
없습니다.
손님은 제게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너무 무리하지
말고,
음주도 적당히
하고,
잠시 쉬라고 찾아
온 것 같습니다.
일정도 조절하고
감기와 며칠 친구하면서 지내야 할 것 같습니다.
돌아보면 내가
원하지 않았던 손님이 가끔씩 찾아 왔습니다.
유행성 출혈열로
한동안 병원에서 지내기도 했습니다.
어머니께서 병원에
있는 동안 함께 해 주셨습니다.
다리의 골절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기도 했습니다.
통풍도 가끔
찾아와서 저를 쉬게 해 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아름답게 만드셨는데
우리는 살아가면서 ‘고통’이라는 손님을
만나게 됩니다.
제 몸을 찾아 왔던
손님처럼 고통도 종류가 다양합니다.
불가에서는 고통을
크게 4가지로 이야기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고통,
미워하는 사람을
다시 만나야 하는 고통,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
탐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고통입니다.
불가에서는 이런
고통은 집착에서 벗어나야만 비로소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합니다.
교회도
‘고통’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두 가지 관점에서
고통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박해의 시대에
고통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회라고 받아들였습니다.
금과 은도 단련을
받듯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고통을 통해서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받아들였습니다.
이 세상은 지나가는
것이고,
우리에게는 영원한
삶이 기다리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세상의 악이라는
관점에서 고통을 이해하기도 하였습니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원하지 않는 것들이 함께 있다고 합니다.
세상의 악은
구조적인 경우도 있고,
인간의 탐욕과 집착
때문에 생기기도 합니다.
교회는 세상의 악은
함께 연대해서 하느님의 뜻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사람들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자신과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못했고,
강한 사람들은 약한
사람들을 지배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전쟁의
역사이며,
비극의
역사였습니다.
지금은 아무도
그러한 행동을 정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불과
200년 전만
해도,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고,
정복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프리카의
흑인들,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은 피부와 문화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소중한 전통이 파괴당했고,
그들의 전통은
사라져야 했습니다.
우리 민족도
제국주의 역사관에 의해서 희생당하였습니다.
우리는 일본에
의해서 나라를 빼앗긴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그것이
잘못된 역사라고 생각하지만 당시에는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다양한 생명체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생명체는 하느님 보시기에 좋았다고 합니다.
서로 경쟁하고
싸워서 정복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창조
목적에 맞도록 서로 이해하고,
조화를 이루며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살아야 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유대인들의 율법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잣대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대하였습니다.
자신들의 생각과
다르게 행동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잘못되었다고 말을 합니다.
먼저 이야기를
듣고,
왜 그렇게 했는지
묻지도 않고 먼저 단죄를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들 역시 짧은
시간 이 지구라는 별에 잠시 머물다 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날까지,
우리는 머물다 가는
사람처럼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인인
것처럼 사는 것은 교만입니다.
오늘 하루를
지내면서 옆에 있는 분들과 다른 점은 무엇인지,
비슷한 점은
무엇인지,
그러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존엄한
품위의 삶
-하느님의
자녀답게-
-이수철신부-
한
번뿐이 없는 삶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자체가 은총이요 축복입니다.
사람답게,
하느님의 자녀답게, 존엄한 품위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사는 것은 우리의 권리이자 의무입니다.
이렇게
살아야 행복하고 자유롭고 풍요한 삶입니다.
삶은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숙제입니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
장엄한
사람 창조의 순간입니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이 바로 은총이요,
하느님의
모습으로 계속 성장해야 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평생숙제이자 공부입니다.
사실
사람이 되는 일보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일보다 더 중요하고 힘든 일도 없습니다.
"내가
거룩한 것 같이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
"너희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바로
이것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위대한 평생과제입니다.
'사람답게'를
분명하게 틀잡아 주는 것이 '하느님의 자녀답게'입니다.
세례성사은총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역시
하느님의 자녀로의 성장은 평생과정이자 평생과제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어떻게
하면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은(善) 삶, 참된(眞) 삶, 참 아름다운(美)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하느님을 닮은,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오늘
소개할 묵상 내용입니다.
소개에
앞서
여기
수녀원의 이양진 분다 수녀의 모친 최 세실리아 자매로부터 받은 카톡내용을 소개합니다.
최
세실리아 자매는 요셉수도원 초창기부터
약
25년 이상을 대축일 때마다 수도원의 꽃꽂이 봉사를 해 준 놀라운 믿음의 자매이고,
이양진
분다 수녀는 어머니와 함께 중학교 때부터 요셉수도원을 다녔습니다.
"엘레강스
신부님, 환영 환영합니다. 보고파용“
"아,
여기 이양진 분다 수녀도 피정중입니다.“
제
귀국을 환영하는 자매에게 분다 수녀의 소식을 알렸고
면담
때 분다 수녀에게 엘레강스의 뜻을 물었습니다.
"젠틀하다,
신사답다, 멋있다, 미남이다라는 뜻입니다.“
다시
아이패드 사진을 찾았더니 그 풍부한 내용에 아주 만족했습니다.
'elegance:
세련된
취미를 밑바탕으로 하여 사치스러우나 화려하지 않은 완벽한 아름다움,
화려하게
장식된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자연히 우러나는 고상한 아름다움, 당당해서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는 기품’
얼마나
풍부한 내용인지요.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을 부단히 닮아갈 때 바로 엘레강스 사람입니다.
오늘
저는 강론을 통해 하느님이 보시기에 참 좋은 엘레강스 사람이 되기 위한 묵상을 나눕니다.
첫째,
'사랑의 사람'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의 모두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참됨(眞)으로, 좋음(善)으로, 아름다움(美)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을,
이웃형제를,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지구는
사람 혼자만 살아가는 게 아니라 생명있는 모든 것이 함께 살아가는 곳입니다.
빈부격차의
불평등의 사회, 파괴되고 착취되는 자연이나 동물들,
이것은
하느님이 원하시는 세상이 아닙니다.
사랑부재의
거칠고 험한 현실입니다.
생명
있는 모두가 살아야 하는 공존의 사랑, 공존의 세상입니다.
어제
수녀님들과 식사하면서 절절히 깨달은 것이 '함께'입니다.
잘난
이든 못난 이든 '함께
먹어야 하고, 함께 일해야 하고, 함께 기도해야 한다는 것,
결론하여
함께 살아야 한다.'는 깨달음입니다.
오늘
창세기의 아름다운 정경은 그대로 하느님의 사랑 충만한 '공존의 세상'을 보여줍니다.
뉴튼수도원에서
일화가 생각납니다.
에제키엘
수사님의 소임은 닭과 오리를 키우는 일입니다.
사무엘
원장님이 나에게 정중히 부탁했습니다.
"신부님,
부탁이 있습니다.“
잔뜩
긴장했습니다.
"닭좀
잡아 주시겠습니까?“
닭이
많아 제가 수도원을 떠나기전 잡아 주겠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닭을 선뜻 잡겠다는 형제가 없어 그냥 나에게 던져본 말이었습니다.
"다른
것은 다 할 수 있는 데 그것 만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닭을
안 먹으면 안 먹었지 잡지는 못하겠습니다.“
정중히
사양했고, 나중 다른 야무진 형제가 잡았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비단
하느님 사랑, 사람 사랑에 머물 것이 아니라,
생명있는
모든 것에로의 사랑으로 끊임없이 확산되어야 할 우리의 사랑입니다.
매사
많이, 넓고, 깊게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 체험의 지름길입니다.
둘째,
'말씀의 사람'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한 창조입니다.
오늘
창세기 천지창조 과정을 보십시오.
순전히
말씀을 통한 창조입니다.
말씀에
즉각 순종하여 창조된 질서와 조화의 세상입니다.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은
하느님의 현존입니다.
말씀은
생명이자 빛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위로하고 치유합니다.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나 거듭 새롭게 창조되는 우리들입니다.
바로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이 오늘 복음의 주인공인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공부하는 것은 우리의 평생의무입니다.
말씀을
공부하고 실행하는 말씀의 사람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하여
'읽기- 묵상-기도- 관상-실행'의 시스템에 따른 렉시오 디비나 수행이 그토록 중요합니다.
이래야
주님의 마음을 닮아 사랑은 물론 분별력의 지혜도 선사받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꾸짖은 후,
다음
말씀을 통해 그분이 얼마나 하느님의 마음에, 하느님의 말씀에 정통해 있는지 깨닫게 됩니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말씀공부와
말씀실행에 소홀할 때,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며 헛되이 주님을 섬길 수 있는 것은
누구나의
가능성입니다.
하여
평생 말씀을 사랑하여
말씀대로
'말씀의 사람'이 되어 사는 것은 우리 모두의 거룩한 의무입니다.
셋째,
'찬미의 사람'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찬미의
종교, 찬미의 사람인 그리스도인입니다.
특히
우리 수도자들의 하느님 찬미는 각별합니다.
찬미의
기쁨으로 사는 수도자입니다.
사막
같은 세상에 찬미의 기쁨 없다면 무슨 기쁨으로 살 수 있겠는지요.
하느님
사랑은 말씀 사랑으로, 찬미의 사랑으로 표출되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할수록 깊어지는 찬미의 삶입니다.
고해인생을
축제인생으로, 사막인생을 낙원인생으로 만들어 주는 찬미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찬미는 수도자의 존재이유라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찬미가
우리를 치유하고 위로합니다.
주님과의
우정을 깊게 하며 사랑을, 믿음을, 희망을 증진시킵니다.
우리를
정화하고 성화하며 내적성장과 내적성숙을 이뤄줍니다.
바로
찬미와 감사의 미사와 시편전례기도가 '기쁨의 꽃'처럼 피어나는 여기 성전이 상징하는바
천상예루살렘이요
사막같은 세상의 오아시스입니다.
순경(順境)이든
역경(逆境)이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구히 '찬미의 사람'으로 살 때
주님의
한량없는 평화의 축복이요 참 좋고 아름다운 삶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은 사랑의 사람, 말씀의 사람, 찬미의 사람으로 살게 하십니다.
"주님,
저희 주님, 온 땅에 당신 이름, 이 얼마나 크시옵니까!"(시편8,2ㄱㄴ).
아멘.
겉보다 속이
중요하다 -반영억신부-
우리는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게 됩니다. 더러운 것을 만지지 않았어도 습관적으로 씻습니다. 위생적인 생활을 하는 것은 건강에 큰 영향을 줍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신을 청결히 합니다. 남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유다인의 전통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관습이 있었는데 왜 손을 씻게 되었는가는 관심이 없고 손을 씻지
않았다는 것에만 마음을 둔 것을 지적해 줍니다. 사실 모든 음식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육적인 생명양식으로서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합당한 마음으로 먹기 위해서는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은 기본적인 예의였습니다. 위생적인 의미도 있지만 정화의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감사와 기쁨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미사전례 때에
참회예절이 있듯이,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과 예의로서 손을 씻고 음식을 먹었던 것입니다(유광수 신부). 그런데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그 내용은
잊은 채 전통을 고집하면서 손을 씻었느냐? 아니냐? 를 가지고 더러운 손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미사중에 사제는
예물준비를 하고 손을 씻으면서 혼자 기도합니다. “주님, 제 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제 잘못을 깨끗이 없애주소서.” 사실 겉보다 속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외적인 것을 통해 내면의 깊이에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 사제들의
정체성에 있어서도 사목자는 곧 선교사임에도 불구하고 사목자의 관점에 더 큰 비중을 두기를 고집한다면 본래 복음 선포자로서의 소명을 소홀히 하는
오류를 범할 것입니다. 본당신부하려고 신부가 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사제가 된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각기 지켜야 할 전통과
관습이 있지만 그것을 시대와 상황에 따라 재해석하고 쇄신할 수 있어야 미래에 희망이 있습니다. 과거에 집착하면 세상의 빛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2,2).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인용하여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마르7,6-7)
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알맹이보다도 껍데기에 마음을 빼앗긴다면 여전히 같은 꾸중을 들을 것입니다.
내용보다도 형식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강조하며 거기에 얽매이다 보면 우리의 예배는 헛되고, 헛된 행위가 되고 맙니다. 따라서 우리는 전통을 중요시 하되 그
의미와 내용을 제대로 알고 시대를 앞서며 합당한 예배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좋은 전통과 관습이라 하더라도 하느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좋은 것이 아니니 마땅히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간혹
“부득이 주일미사
참례를 못하여 주님의 기도 33번을 하였는데 고해성사를 봐야 되느냐?”
“몸이 불편한데
미사전례 때 앉고 일어서고 꿇는 것을 따라 해야 하느냐?”
“고해성사를 본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판공성사를 또 봐야 하느냐?” 라고 묻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런 질문에 대답을 일일이 해 드려야 합니까?
중요한 것은 내가
행하는 것의 의미와 내용을 알고 거기에 얼마나 충실하였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명하신 바에 얼마나 사랑으로 응답하느냐의 문제 입니다.
법은 함부로 무시하여서도 안 되고 내 입맛에 맞게 합리화시켜서도 안 되느니 만큼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전통과 관습을 지켰으면 좋겠습니다. “말로나
혀끝으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창세 1,26) -오상선신부-
여러분은 누구를
닮았어요? 엄마
닮았어요? 아빠
닮았어요? 어릴 땐
몰랐는데 나이 들어
갈수록 부모님 모습이 내
모습이죠?
세상
사람들 참
다양합니다. 다민족으로 구성된
나라들을 가보면 정말 사람들이
이렇게도 다양하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말입니다. 지구상의 수많은
생명체들 중에 사람은 가장 비슷한
종이랍니다. 그러니 나와 좀
다르다고 사람 차별하고
무시하면 되겠어요? 인종이
다르던 종교가
다르던 언어가
다르던 문화가
다르던 우린 어짜피 한
아버지의 자녀들이랍니다.
왜냐하면 우린
모두 하느님께서 당신
모습대로 당신과 비슷하게
만든 형제들이랍니다.
하느님을 닮은
여러분은 그러기에 나의
형제요 자매입니다.
사랑으로 써가는
내 삶의 법
-기경호신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씻는 인습에 관한 논쟁(1-7절)과 코르반 인습에 관한 말씀(9-13절)은 유대인들과 그리스도교인 사이에 있었던 충돌을 반영해
주고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교인의 삶과 율법뿐 아니라 조상들의 전통에 따라 사는 유대인들의 삶의 상이한 단면을 알 수 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런 상황을 상기시키면서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는 예수의 가르침을 좀 더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모세오경에 나오는 인간이 지켜야 할 도덕적인 윤리규범들을 삶을 위해 해석하고 적용해 왔다. 그런데 기원전 4-5세기 전부터 율법학자들이 등장하여
이런 도덕적 원칙들을 좀 더 구체적으로 확대하여 해석하고, 실생활에 세목별로 적용하고, 정의를 내리고 수많은 규칙을 만들어냈다. 이것이
구전되어오다가 서기 3세기에 이르러 집약해서 기술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율법에 따르면 오늘 복음의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어야 하는 것’도
문제가 되었다.
손
씻는 것은 종교의식행위로 해야 하는데 초점이 있었다. “모든 식사 전에 손을 씻어야 하고, 요리가 바뀔 때마다 손을 씻어야 하며, 씻는 물을
특별히 큰 동항아리에 넣어 두어야 하며, 그 물은 정결 예식 외에 달리 쓰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또 손을 처음 씻을 때에는 양손은 손가락을
위로 향하게 하고, 그 위에다 달걀 껍질 하나 반 정도의 물을 부어 손목까지 흘러내리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양손이 젖어있는 동안 양손 각각을
주걱으로 문지른 다음에, 손과 손가락 끝을 아래로 하고 물을 손목에서 손끝까지 흘러내리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 앞에 부정하며
악령이 침범하고 가난해지며 파멸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형식보다 사람을 위하는 삶의 속살을
중요시하셨다.
‘크르반’은
히브리어로, 유대교인이 물품을 하느님께 바쳐 속인(俗人)이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서약문을 말한다. 그런데 부모와 사이가 나쁘면 코르반 서원문을
이용하여 부모 봉양을 저버리는 수가 있었다. 종교를 빙자하여 인륜을 짓밟는 짓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위한 법(2,27), 십계명
가운데 인간에 관한 계명(10,19), 하느님을 섬기고 사람을 아끼라는 사랑의 이중계명(12,28-34)을 강조하셨다. 그분은 율법의 근본정신인
사랑에서 벗어나 재물을 사람보다 더 귀하게 여겨 인간을 소외시키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바리사이들은
약속된 구원의 도래를 앞당기기 위해서 율법뿐 아니라 조상들의 전통까지도 철저히 지키도록 백성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세심한 사람들은 복잡한 규칙을
엄수하느라고 하느님의 중요한 계명을 망각하거나 소홀히 하는 위험과 세칙을 엄수함으로써 자만에 빠지거나 교만해지는 위험도 없지 않았다(마태
23,23 참조). 이런 모습은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곧 외적 형식과 규범 준수에만 몰두하여 성경 말씀의 실천에는
소홀하거나, 규범을 잘 지키고 있으니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자만하는 이들도 있다. 정작 중요한 것을 마음의 지향이요 순수한 마음으로 혼신을
다해 사랑하는 것인데도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마음과 행동의 불일치, 그리고 하느님의 계명 대신에 인습만을 고수하고 있는 잘못을 지적하셨다. 곧 하느님 계명의 엄수를 핑계로
인간에 대한 사랑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도 형식주의나 법규준수에 얽매이지 말고 그 속살인 법의 정신과 진실하고 순수한 사랑의
마음으로 하느님과 인간을 사랑하도록 하자! 법에 끌려가는 사람이 되지 말고 사랑의 삶으로 향기로운 법을 써가는 우리가 되도록
하자!
한상우신부-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은
언제나 아름답습니다.
우리의
시간을 살아있는
시간이 되게하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삶을 일깨워주는 전통은
하느님과의
만남인 계명을 더욱
충만케합니다.
삶을
풍요롭게하는 전통은
계명안에서 하느님과 사랑을
드러냅니다.
계명과 무관한
삶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이 빠져버린
전통은 또 다른 간섭과
족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전통도
사람이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정화되지
않는다면 전통또한 정화될 수
없을
것입니다.
생명의 아름다운
길을 가르쳐주는
계명은 그 어떤
것으로도 교체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전통과
계명이 아니라 진실된 약속을
지키지는 않는 우리들이 문제인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은 것들이
되기위해 우리자신부터
아름다워지는 계명의 하루되시길
기도드립니다.
하느님 계명안에
산다면 우리가 가야 할
모든 길은 더 한층 새롭고
설레이는 기쁨과 희망의
선물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을 위한
길은 언제나
자유롭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진짜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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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 합니다. 행복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