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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30. 묵상글 ( 사순 제4주일. - 하느님과 화해하셨나요? 그러면?. 등 )
^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글 일부. : 아직 / 07:40 추가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아직 / 07:45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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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30. 사순 제4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3.30 04:35
- 하느님과 화해하셨나요?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기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하셨다는 바오로 사도의 말은
프란치스코가 주님께서 자기의 회개를 시작하게 하셨다는 말을 상기시키고,
그리스도를 통해 그렇게 하셨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중재자임을 상기시킵니다.
우리는 화해하려고 하지 않고 화해를 잘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화해하기 위해서는 화해할 마음이 생겨야 하고,
화해할 마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화해의 기술을 배워야 하는데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이 모든 것을 하게 하셨다고 사도는 말하는 겁니다.
사실 우리는 여간해서는 화해하려고 하지 않고 하느님과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하느님과 싸운 적도 없고 원수진 일이 없는데 무슨 화해냐고 생각하실 겁니다.
그럴 겁니다.
많은 사람이 사람과는 싸우고 원수지고 하여 화해할 일이 있지만
하느님과는 그럴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실은 그렇기에 화해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과 싸운 적도 없고 원수진 일이 없다고 하는데
그것이 실은 하느님과 아무 상관 없이 산다는 것이 아니고 뭡니까?
나의 출생에 대해서 하느님께 아무 불만이나 원망이 없습니까?
욥처럼 자기가 태어난 것을 하느님께 원망해야 하지 않습니까?
야곱처럼 밤새도록 하느님과 씨름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제가 왜 이런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냐 하면 저의 체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하느님께 왜 나를 태어나게 했냐고 원망한 적이 있습니다.
원하지도 않았는데 왜 나를 태어나게 했냐고 그리고 왜 아버지를 일찍
데리고 가셔서 이 고생을 하게 했냐고 하느님을 원망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나이를 더 먹어 이런 나로 만드신 하느님 실수에 대해서는
용서해드리고 실수는 하셨어도 사랑으로 나를 태어나게 하신 것을
오해한 것에 대해서는 제가 용서 청하며 하느님과 화해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이를 더 먹어 복음을 통해
그리고 수난받으신 주님을 통해 믿음이 더 깊어지면서
하느님 사랑을 더 크게 느끼게 되었을 때부터는 그 하느님 사랑에
충실치 못하고 다른 사랑에 빠진 저를 뉘우치며 하느님께 더더욱 용서 청하는
제가 되었고 오늘 복음의 작은아들처럼 하느님께 완전히 돌아서게 되었습니다.
아무튼 저는 하느님과 화해한 사람이 되었는데
오늘 바오로 사도의 서간을 보면서 아차!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기셨다고
또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고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절이라고 하잖습니까?
그런데 저는 이 직분의 저임을 그리 의식하지 않고 살았고,
당연히 그리스도 사절로서의 삶을 성실히 살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과 아예 상관없이 사는 사람들,
하느님을 원수로 여기며 사는 사람들,
하느님의 원수로 사는 사람들,
십자가의 원수로 사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게 하느님과 먼저 화해한 경험이 있는 제가
그리스도의 사절로서 역할을 더 적극적으로 수행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하느님을 원망한 적이 있고 화해한 적이 있는가요?
그리고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화해의 직분을 수행하고 계신가요?
저나 여러분이나 이런 질문과 도전을 받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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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30. 사순 제4주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수양의 순간....
하느님의 숨
2025.03.30. 04:38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3월 29일 토요일 (호명환 번역) 열세 번째 주간: 향심(centering)과 침묵(silence), 고요(stillness)
미라바이 스타(Mirabai Starr)와 함께하는 짧은 관상 수양!
오늘은 작가요 영적 스승이며 CAC 벗인 미라바이 스타(Mirabai Starr)와 함께하는 짧은 관상 수양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Mirabai Starr, “A Moment of Practice,” in CONSPIRE 2021, 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September 2021, video, 5:40, Youtube.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Exisbati, Untitled (detail), 2021, photo, India,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침묵은 풀밭 위에 뻗져진 저 손처럼 지금 여기에서 살갗을 스치는 풀잎 하나하나를 단순하고 깊이 의식하듯이 현재의 순간에 깊이 참여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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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하느님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마음을 모두 지니신 분이십니다!
하느님의 숨
2025.03.30. 06:01
이 특별하고도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해주는 루카 복음 저자의 세 가지 특징에 대해 언급하며 오늘 복음 묵상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는 바깥쪽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주로 바깥쪽 사람들을 위해 이 복음서를 썼습니다. 그는 바깥쪽 사람들에 관하여 많은 이야기를 썼습니다.
1. 그는 이방인이었습니다. 사실 그는 신약성서 저자들 중 유일한 비-유대인이었습니다.
2. 그는 주로 비-유대인들을 위해 복음서를 저술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예를 들자면, 그는 구약성경을 거의 인용하지 않고,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예언을 성취해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에 대해 별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해 '랍비'라는 호칭을 전혀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족보를 마태오 복음 저자처럼 유대 민족의 창설자인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지 않고 온 인류의 조상인 아담에서부터 시작합니다.
3. 루카 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선호하여 말씀하시는 이들이 대개 이방인들입니다. 사렙타의 과부와 나아만(4,25 이하), 로마인 백인대장(7,9), 남방 여왕(11,31), 티로와 시돈 사람들(10,13), 착한 사마리아 사람(10,30-37), 열 명의 치유받은 나환우 중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드린 사마리아 사람(17,11-19) 등등....
루카 복음 저자는 잃은 사람들과 버림받은 사람들, 죄인들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보여줍니다. 특별히 루카 복음 15장은 잃었다 찾은 양, 잃었다 찾은 은전, 잃었다 찾은 아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더 특별하게 언급해야 할 것은 루카 복음만 유일하게 복음서들 다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불후의 명작(?)인 [탕자의 비유]를 싣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이 비유의 핵심은 두 아들에게 있지 않습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아버지입니다. 우리는 작은 아들을 "탕자"라고 부릅니다. 그렇습니다. 이 둘째 아들은 방탕했고 무모했습니다. 하지만.... 그 아버지는 더 그랬습니다. 다른 측면에서 말입니다. 아버지는 자비와 용서에 있어 우리의 상식을 초월합니다. 라틴어 'prodigus'는 '헤픈' '방탕한'의 의미를 지니지만 '과도한 자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탕자의 비유'가 아니라 '탕부의 비유'라고 말하는 것이 맞습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이 이야기를 들었던 사람들은 자기들이 큰 아들로 비유된다는 사실을 잘 알았을 겁니다. 분명히도요! 그들은 세리들과 창녀들이 예수님을 찾아 와 함께 어울리는 것을 보고 이 사실을 고발했거든요.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예수님은 이 사람들을 큰 아들에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작은 아들을 칭찬하시려는 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이야기의 핵심은 '아버지'에게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자비를 절실하게 깨달은 사람은 강자인 큰 아들이 아니라 약자인 작은 아들이었다는 사실이 우리 모두에게 절대적으로 기쁜 소식(복음)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여직껏 약자였다는 사실에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사실 자체가 하느님 자비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정말로 자비가 너무 헤펐습니다. 우리가 큰 아들의 입장에 있다면 우리는 분명히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큰 아들의 입장에서 보면 아버지는 분명히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작은 아들이 입장에서 보면 상황이 완전히 반전됩니다!
자, 여기서 우리는 아버지를 깊이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는 종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이렇게 말씀하시고 싶었던 겁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자비의 아버지가 바로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논리가 여기서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우리의 논리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이해하는 데 장애물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사순시기 중간쯤에 온 우리가 깊이 묵상해야 할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저 멀리 화가 엄청 나 있는 큰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와 어머니의 두 손과 품에 안겨 있는 작은 아들의 모습이 '나'라는 사실을 우리는 오늘 더더욱 깊이 숙고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잘 보이지 않는 저 모습이 더 부각되지 않아야 하는데.... 우리는 자주 저 모습에 더 많은 신경을 쓰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네덜란드 화가 램브란트는 아버지의 두 손 중 오른 손을 어머지의 손으로, 그리고 왼손을 아버지의 손으로 그렸습니다. 어머니의 손!!! 그렇지만... 아버지의 왼 손이 아들의 왼 어깨를 감싸고 있다는 사실도 우리는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마음을 모두 지니신 분이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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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30. 사순 제4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5.03.30 06:46
건강한 몸을 가지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균형 잡힌 식사를 하고, 매일 꾸준히 운동하면 됩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알고 있지만, 모두 건강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알지만 실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루 1시간의 운동이 가능할까요? 불가능할까요? 그렇다면 인스턴트 음식을 피하는 것은 가능할까요? 불가능할까요?
모두 가능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마음만 먹으면’이라는 조건이 붙게 됩니다. ‘마음먹는다’를 뜻하는 단어는 ‘결심’입니다. 이 뜻은 ‘물길을 틔운다. 물길이 터진다’라는 의미의 결(決)과 ‘마음’을 나타내는 심(心)이 합쳐진 단어로, ‘마음의 물길을 바꾸는 일’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장 먼저 마음을 먹어야 했습니다. 그래야 행동과 실천이 뒤따라옵니다. 하지만 쉬우면 쉬울수록 마음먹는 것을 뒤로 미룹니다. 그래서 건강한 사람은 마음만 먹으면 쉽게 할 수 있다면서 뒤로 미루는 것입니다. 사실 건강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는 분의 대부분은 건강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건강을 잃고 나니 너무 많은 제약이 찾아오고,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신앙인도 그렇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가려면 하느님 뜻에 맞게 살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뜻은 사랑의 길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삶을 살면 됩니다. 어렵지 않아 보이기에 ‘마음만 먹으면’이라면서 뒤로 미루는 것입니다. 이 역시 죽음 앞에서 후회하게 만듭니다.
지금 당장 마음먹어야 합니다. 마음의 물길을 바꿔서 하느님께 향해야 합니다. 후회를 만들지 않는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이 아닐까요?
사순 제4주일인 오늘 복음에서는 우리가 잘 아는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 말씀입니다. 사랑 넘치는 아버지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먼저 작은아들이 구속받지 않는 자유를 누리겠다며 나눠 받은 재산을 들고 고향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의 결과는 배고픔과 모욕과 부끄러움이었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그냥 좌절하고 포기하며 절망의 길을 가는 것이고, 방향을 바꿔서 아버지께 향하는 희망의 길을 가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아버지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큰아들은 재산을 탕진한 동생이 왔다고 잔치를 벌이는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집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는 옳고 동생은 틀렸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이 잘못되었다며 화를 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미움과 원망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사랑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마음을 먹어야 합니다. 미움과 원망의 길이 아닌 사랑의 길을, 좌절하고 포기하는 절망의 길이 아닌 사랑의 하느님께 향하는 희망의 길을 가야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인데, 과연 그 뜻을 따르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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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부끄러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신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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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30. 사순 제4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사순 제4주일은 ‘장미주일(기쁨주일)’이라고 불립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사순절이 지향하고 있는 부활의 희망과 기쁨을 전해줍니다.
오늘 <입당송>에서는 노래합니다.
“즐거워하여라. ...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위로의 젖을 먹고 기뻐 뛰리라.”(이사 66,10-11 참조)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의 백성이 여호수아와 함께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기쁨의 파스카 축제를 지냈고, 그 다음 날에는 만나가 멈추고 그 땅에서 난 음식을 먹었음을 전해줍니다(여호 5,10-12 참조). 이는 부활과 함께 먹게 될 생명의 양식을, 나아가서 하느님과 함께 벌어질 천상의 식탁을 미리 암시해줍니다.
<제2독서>에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하느님과 화해를 이루고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하게 된 기쁨을 전해줍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 기쁨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2코린 5,21)
<복음>에서는 ‘하느님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밝혀줍니다. 흔히, 이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 혹은 ‘돌아온 탕자의 비유’로 불리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비로운 아버지와 두 아들의 비유’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두 탕자 아들들에 대한 아버지의 자비에 대한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이야기에서, 작은 아들과 큰 아들의 차이는 극렬하게 드러납니다. 어제 <복음>인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루카 18,9-14)와 흡사합니다. 곧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루카 18,9) 바리사이와 ‘큰 아들’이, 그리고 스스로 죄인이라고 여기는 세리와 ‘작은 아들’이 비교되며, 대조를 이룹니다.
이들은 ‘보는 눈’이 서로 다릅니다. 곧 큰 아들은 자신을 의인으로, 작은 아들은 자신을 죄인으로 바라보며, 큰 아들은 다른 이들을 업신여기며, 작은 아들은 다른 이들을 존중하며, 큰 아들은 바라보는 곳이 자기 자신이지만, 작은 아들은 하느님과 아버지입니다.
<첫째 이야기>는 ‘돌아온 탕자 작은 아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루카 10,18)
참으로 벅찬 아름다움입니다. 성공해서 귀환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러 가는 것이기에 더욱 아름답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죄지었음에 대해 뉘우치고 통탄해 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죄로부터 일어나 아버지께 돌아가는 행위 속에 있습니다. 곧 ‘뉘우친 바를 행동으로 고백하는 일’에 일입니다.
바로 이 일을 두고,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진정한 회개’는 ‘뉘우침’이라는 내면적인 통회와 ‘돌아옴’이라는 외면적인 행동을 요청합니다. 예컨대, 베드로와 가리옷 유다가 다 같이 스승을 배반하고 통탄해 했지만 베드로는 예수님께 돌아와 구원의 길을 갔고, 유다는 돌아오지 않음으로써 파멸의 길을 간 것과 같습니다.
<둘째 이야기>는 ‘죄도 모르고 돌아오지도 않은 탕자 큰 아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동생이 유산을 챙기는 바람에 함께 유산을 받았을 것입니다. 유다 법에 따르면, 큰 아들은 다른 아들의 두 배를 받으니 동생의 두 배를, 곧 3분의 2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나머지 재산이 모두 자신의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큰 아들에게 말합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루카 15,31). 그러나 그는 아버지를 아들로서가 아니라 종으로서 섬겼습니다. 그는 돌아온 동생을 동생으로 맞아들이지도 않으며, 그를 맞아들이는 아버지의 자비로운 처신에도 화내며, 자신의 옳음을 주장하며, 잔치에 동참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몰랐기에, 회개하지도 돌아오지도 않은 탕자였습니다.
<셋째 이야기>는 ‘자비로운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큰 아들과 작은 아들에게 드러나는 것은 ‘아버지의 자비(르하밈)와 신실하심(헤세드)’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유산을 챙겨 집을 떠나는 아들을 떠나보내는 아버지는 그 아들이 방종으로 유산을 다 탕진하리라는 것을 훤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허비할 때에도, 그에게서 결코 신뢰를 거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니, 바로 그처럼, 당신을 거부하고 배신할 때마저도, 결코 그에게서 희망을 거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춥니다. 그리고 미리 마련해 두었던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워주고, 신발을 신겨주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풉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사실, 우리는 바로 이 아름다운 장면의 주인공들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저희가 이 자리에 이렇게 있을 수 있음은 바로 당신께서 저희에게서 희망을 거두지 않으신 까닭이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온갖 죄와 허물과 탓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마저도, 결코 저희에게서 신뢰를 거두지 않으신 까닭입니다. 단지 죄를 용서하신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그 죄를 덮어주고 가려주고 보호해 주신 까닭입니다. 결코 저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결코 희망을 거두지 않으신 까닭입니다.
이는 우리도 그렇게 용서하라는 뜻이요, 단지 용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지켜주고 보살펴주라는 뜻입니다. 그에게서 결코 희망을 버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하시듯이 우리도 형제들을 신뢰하고 자비로워라는 말입니다. 형제에게서 결코 신뢰를 포기하지 않는 일이요, 희망을 놓지 않는 일이며, 결코 사랑을 거두지 않는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기쁨”이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말하리라.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루카 15,18)
주님!
오늘 제가 뉘우치고 돌아가서
아버지께 행동으로 죄를 고백하게 하소서.
최보다 더 깊은 아버지의 사랑에 눈물 흘리게 하소서.
뻔히 알면서도 믿어주시고 기다려주시고 품으시는
그 사랑에 안기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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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30. 사순 제4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아침 산책길에 기분 좋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새롭게 옷을 입는 나무들입니다. 연한 녹색의 새잎이 기분을 좋게 합니다. 자연은 이렇게 겨울이 지나고, 새봄이 왔음을 알려줍니다. 다른 하나는 저를 환영하는 새들의 노래입니다. 며칠 전에 녹음한 것이 있는데 잠시 들려드리겠습니다. 아름답죠? 어릴 때 읽었던 동화가 생각납니다. “어느 마을에 욕심쟁이 거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정원에서 아이들이 노는 것을 싫어해 높은 담장을 쌓고 '출입 금지' 팻말을 붙였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 거인의 정원에는 늘 겨울만 계속되었습니다. 봄, 여름, 가을이 찾아와도 다른 곳에는 꽃이 피고 새들이 노래했지만, 거인의 정원은 항상 춥고 쓸쓸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들이 몰래 담장을 넘어와 정원에서 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얼어붙었던 정원에 봄이 찾아왔고, 꽃이 피고 새가 노래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거인은 자신이 잘못했음을 깨닫고, 아이들에게 정원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는 담장을 헐어버리고, 아이들과 함께 정원을 가꾸며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봄은 우리의 마음을 열면서 찾아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우리 마음에 봄이 오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우리의 마음에 ‘욕심, 질투, 욕망, 교만, 게으름, 분노, 원망’이 있으면 세상에는 봄이 올지라도, 우리 마음은 추운 겨울이 계속될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들이 그 땅의 소출을 먹은 다음 날, 만나가 멎었다. 그리고 더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만나가 내리지 않았다. 그들은 그해에 가나안 땅에서 난 것을 먹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가기까지 40년의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정화’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십계명’을 실천했습니다. 사순시기는 우리의 마음을 정화하는 시간입니다. 단식, 기도, 희생, 자선은 우리의 마음을 정화하는 좋은 방법입니다. 본당에서는 이번 사순시기에도 성경 필사를 하도록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 마음에 봄이 오는 길을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온 아들’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 마음에 봄이 올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것은 ‘회개’입니다. 방탕한 생활을 했던 둘째 아들은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아버지께 돌아와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자비로운 아버지는 둘째 아들의 모든 잘못을 용서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큰아들의 이야기도 하셨습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의 집에 살면서도 그 기쁨을 잘 몰랐습니다. 아버지의 집은 언제나 화사한 봄이었지만, 큰아들의 마음은 ‘겨울’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어머니를 생각하였습니다. 어머니는 방황하면서 집을 나갔던 둘째 형을 걱정하였습니다. 형이 돌아오면 먹을 수 있도록 늘 따뜻한 밥을 한 공기 준비하였습니다. 어느 날, 둘째 형이 바람처럼 집으로 돌아오면 어머니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어머니는 둘째 형을 위해서 따뜻한 밥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어머니의 가슴에는 앞가림을 잘하는 형제들의 자리도 있었지만, 방황하던 둘째 형을 위한 자리가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둘째 형이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이 늘 마음 아팠습니다. 그래서 둘째 형이 돌아오면 어머니의 그늘이 모처럼 활짝 갠 하늘 같았습니다. 돌아보면 저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큰아들처럼 지냈습니다. 이해하고, 용서하는 어머니의 마음보다는 무시하고, 비난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집에 있었지만, 마음은 세상의 것들에 있었던 큰아들과 같았습니다.
사순시기입니다. 어디에 있는지도 중요하지만, 어떤 마음을 가지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둘째 아들처럼 ‘희망’을 간직하고 아버지의 집을 그리워한다면, 방향을 돌려서 아버지께 돌아올 수 있다면 자비하신 아버지께서는 사랑으로 받아 주십니다. 큰아들처럼 ‘비난과 불평’을 간직하고 있다면 아버지의 집에 있을지라도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방황하고 있다면 희망의 배를 타고 아버지께 돌아오면 좋겠습니다. 아버지의 집에 있으면서도 불평과 불만이 있다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버지의 자비를 배우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면서, 사람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따지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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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30. 사순 제4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내용입니다. 돌아온 아들의 비유이지요.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유혹이 찾아옵니다. 크게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작은아들에게 하나, 큰아들에게 하나가 있지요.
작은 아들은 아버지를 통해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그러고는 그것을 자기의 것인 양 쓰고 또 씁니다. 그 재물이 자기에게 주어진 의미가 무엇인지도 잊은 채 말입니다. 또한 아버지를 떠납니다. 아버지 옆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아버지를 부담스러워하고 급기야 떠나게 됩니다.
우리도 이런 유혹을 받게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나에게 준 것을 내 것인 양, 내가 잘나서 받은 것인 양, 사용합니다.
큰아들에게 나타나는 신앙인의 유혹은 이것입니다. 아버지의 것이 모두 자기의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모두 포기하고 아버지만을 위해 살아갑니다. 사실은 진짜 아버지를 위해 산 것이 아니라 훗날의 자기 욕심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지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가끔 자기보다 남이 인정받는 꼴을 못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 열정이 더 인정받아야 하고, 내가 더 잘했고, 내가 더 유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안달 난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것이 신앙인에게 찾아오는 유혹입니다. 그러나 작은아들, 큰아들 할 것 없이 아버지에게는 아들이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내가 이런 모습이건, 저런 모습이건 상관없이 하느님의 아들, 딸임을 잊지 않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이 마음이 우리가 힘들 때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하기 때문입니다.
⭐블랙아이스
블랙아이스(Black ice)
낮 동안 도로 위에 내린 눈이 녹았다가 밤사이에 다시 얼면서 생기는 검은색 얼음을 말합니다. 사전적 의미는 도로 표면에 생긴 얇은 빙판을 의미하며 주로 도로 결빙 현상으로 교통사고가 많이 발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블랙아이스(Black ice)는 검정 얼음을 영어로 표현한 것
얼마 전 은사 신부님께서 넘어지셨습니다.
신부님과 함께 식사하는데 오른쪽 손목에 검은 멍을 보게 되었습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여쭤보니 블랙아이스에 넘어지셨다고 하셨습니다.
블랙아이스가 진짜 위험한 이유는 대비하지 않고 위험이 없다고 믿고 있는 찰나에 사고가 난다는 것입니다. 대비하지 않았으니 사고는 그만큼 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마음에도 블랙아이스는 존재합니다. 우리가 우리 경험을 맹신하는 순간 블랙아이스를 우리는 못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큰 사고 없이 지나가기를 바랍니다. 늘 눈에 보이지 않는 위험을 조심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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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30. 사순 제4주일. 키엣 대주교님.
진실된 화해
‘화해’는 부활절을 기쁜 마음으로 맞이하기 위해 꼭 필요합니다. 주님과의 화해 보다 더 어려운 것은 ‘가족과의 화해’일지도 모릅니다.
오늘 복음은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인자한 아버지는 작은 아들의 자유를 존중하여 떠나보내면서 다시 받아들일 준비도 하고 있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 방탕한 삶을 살다 돌아온 아들이지만 아버지는 성대한 축하를 합니다. 모든 인간의 죄를 용서할 준비를 하고 계신 관대한 주님의 모습입니다.
그에 반해 이기적인 형제는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동생이 재산을 갖고 떠난 후 형은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었지만 그는 원망만이 남아 황폐한 영혼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에게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자신의 형제를 동생이 아닌 ‘저 아들’이라고 부르는 그는 이미 형제애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큰 아들처럼 편협하고 이기적이며 증오를 품고 살아갑니다. 스스로 정직하고 도덕적이라는 지극히 주관적인 잣대로 다른 사람을 쉽게 판단하고 비판합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인자한 아버지는 관대한 사랑을 지니신 주님이시고, 동생은 쉽게 죄를 짓고 살아가지만 다시 또 회개하고 아버지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편협한 큰 아들은 가족과 이웃 그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하고 심지어 다른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 가는 것조차 막는 우매한 사람을 상징합니다.
작은 아들은 비록 불효를 저질렀지만 아버지께 돌아가 드릴 말씀을 준비합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아버지는 아들이 준비한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달려가 안아 주었습니다. 사랑은 수식어가, 긴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참된 진실만이 필요할 뿐입니다.
사순절의 반이 지났습니다. 바오로 성인의 말씀을 함께 되새겨보며 나의 마음과 삶을 돌아보십시오. 비록 방황과 우매함으로 수없이 많은 죄를 짓고 있지만 나를 기다리시는 따뜻한 아버지가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형제 여러분,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기신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화해’는 새로운 행복과 평화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참회’와 ‘화해’는 주님 곁으로 돌아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비록 주님과 멀어져 방황하고, 크고 작은 죄를 짓고 있지만 아버지께서는 그러한 나를 언제까지나 어두운 골목 끝까지 나와 기다리고 계십니다.
내가 그분을 사랑하기 이전부터 나를 사랑하신 아버지이신 주님께서는 내가 그분을 찾기 전에 나를 찾으시고, 내가 그분에게 용서를 빌기 전에 나를 용서해 주시는 분입니다.
인자한 아버지이신 주님,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형과 아우 중. 나는 어떤 모습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2. 오늘 복음의 구절들을 다시 한번 읽어보고 나의 가슴에 닿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3.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지금 내가 필요한 참회와 화해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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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30. 사순 제4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귀향歸鄕의 여정
“자비로운 아버지를 닮아가는 삶”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아.
슬퍼하던 이들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오늘은 “즐거워하여라(Latare)” 입당송 첫 라틴어 문자대로 래타레 주일이라 부르는 사순 제4주일입니다. 또 기쁨을 상징하는 장미색 제의처럼 장미주일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부활축제를 앞당겨 맛보는 주일이자 역시 귀향의 기쁨을 미리 체험하는 주일이기도 합니다. 그대로 집을 떠난 또 하나의 작은 아들인 우리의 귀향을 축하하는 미사잔치처럼 생각됩니다. 주님을 만난 기쁨을 노래하는 시편 34장 화답송도 흥겹기 한이 없습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늘 찬양이 있으리라.”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이 넘치고,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좌우간 오늘 미사잔치에 참석하신 분들!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향의 기쁨을 맘껏 누리시길 바랍니다. 어제 영문 주석을 읽으며 한 단어에 완전히 사로잡혔습니다. “homecoming(귀향;歸鄕)”이란 말마디가 참 반가웠습니다. 즉시 강론 제목을 “귀향의 여정”이라 정했습니다.
제1독서 여호수아기에서 보듯이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귀향의 여정중 길갈에 진을 치고 예리코 벌판에서 파스카 축제를 지낸 다음날 그땅의 소출을, 누룩없는 빵과 볶은 밀을 먹으니 그대로 귀향의 기쁨을 미리 체험합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역시 코린토교회 신자들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한 귀향의 기쁨을 고백합니다. 귀향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에게 신선한 활력을 제공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하느님께서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 거룩한 사순시기,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를, 귀향의 기쁨을, 하느님의 의로움을 체험하는 이 복된 미사잔치 은총이 귀향의 여정중인 우리에게 샘솟는 활력의 원천이 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잃고 지내는지요! 고향이란 말만 들어도 마음이 설렙니다. 고향을 찾는 마음, ‘고향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homesick at home)’ 역설적 존재인 사람들입니다. 고향을 찾듯이 영혼의 고향인 교회를 수도원을 끊임없이 찾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되찾은 아들의 비유이자 자비로운 아버지의 비유라 부를 수 있는 복음은 늘 들어도 샘솟는 감동과 영감을 제공합니다. 자비로운 하느님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정말 잘 들어나는 복음중의 복음, 순복음입니다. 과연 나는 누구인가? 자비로운 아버지, 큰 아들, 작은 아들 모두가 나를 비춰주는 거울같은 분들입니다.
돌아갈 고향집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돌아갈 본향의 고향집은 궁극의 희망이자 목적지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고향집을 잃고 무명의 존재가 되어, 존재감없이 자녀다운 품위를 잃고, 길을, 희망을 잃고 익명으로, 되는 대로, 함부로, 막 살아들 가는지요! 아버지의 집을 떠나 방황하는 작은 아들은 바로 나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나 극한 상황중에 있던 작은 아들에게 구원의 섬광처럼 떠오른 아버지가 계신 고향집이었습니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절망의 좌절상태에서 용기를 내어 벌떡 일어나 아버지가 계신 고향집을 향해 귀향의 여정에 오른 작은 아들입니다. 귀향할 아버지의 집이 없어 절망중에 목숨을 끊는 이들도 참 많을 것입니다. 마지막 희망의 끈, 귀향할 아버지의 집을 결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살아 있는 한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향의 여정중임을 결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복음의 오매불망, 노심초사 작은 아들을 애타게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은 그대로 우리를 기다리는 자비로운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작은 아들을 환대하는 아버지의 환호가 감동자체입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마시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바로 이것이 자비로운 아버지의 마음이자 모습입니다. 자비로운 아버지를 만나 본래의 존엄한 품위를 되찾은 작은 아들입니다. 이어 베풀어진 즐거운 잔치는 그대로 또 하나의 작은 아들들인 우리의 귀향을 축하하는 이 거룩한 미사잔치를 닮았습니다. 아버지의 관대한 조치에 불평하며 항의하는 편협하고 옹졸한 큰 아들의 모습 또한 우리 어둔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반면교사가 되는 작은 아들, 큰 아들 모두가 우리 인간의 보편적 모습입니다. 격한 감정으로 아버지에게 항의하는 큰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호소가 감동적입니다. 오늘 복음의 결론 같은 다음 말씀은 복음의 큰 아들은 물론 교회에서 모범적 신자생활을 하는 큰 아들같은 이들에게 크고 긴 여운을 남깁니다. 바로 자비하신 아버지의 진면목입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한다.”
여전히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복음입니다. 오늘 사순 제4주일 다해 강론을 제가 “하느님의 기쁨”이란 제목으로 최초로 한 것은 1989년 3월5일 부제때이고, 무려 36년이 지난 오늘도 제가 전혀 변한 것 같지 않으니 순간 깊은 좌절감도 듭니다. 그래도 자비하신 아버지의 자녀다운 삶의 참 좋은 모범 파스카의 예수님이 계시니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새삼 사랑 공부에는 늘 영원한 초보자요 늘 새로운 시작뿐임을 깨닫습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자비로운 아버지를 닮아가는 ‘귀향의 여정’, ‘예닮의 여정’에 참 좋은 도움이 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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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30. 사순 제4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습니다
아버지가 있으니 두 아들이 있습니다
두 아들이 있으니 아버지입니다
작은 아들이 살아계신 아버지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면
자기에게 돌아올 몫을 요구합니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에게 기꺼이 줍니다
작은 아들은 자기 몫을 요구함으로써
살아계신 아버지와 관계를 끊습니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에게 나눠줌으로써
작은 아들과 관계를 이어갑니다
큰 아들은 살아계신 아버지께
무슨 이유인지 아무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큰 아들에게도 나눠줍니다
두 아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으니
아버지에게 남아 있는 것은
오직 두 아들 뿐입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마냥 행복합니다
두 아들의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작은 아들은 자기 몫을 챙겨
살아계신 아버지를 떠납니다
더 이상 아버지와 함께 하지 않습니다.
작은 아들에게 아버지는 이제 아버지가 아닙니다
아버지는 집 나간 작은 아들을
마음에 애틋하게 품고 있습니다
따로 있어도 작은 아들과 함께 합니다
아버지에게 작은 아들은 늘 그렇게 아들입니다
큰 아들은 자기 몫을 챙기지도
살아계신 아버지를 떠나지도 않습니다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의 일을 함께합니다
큰 아들에게 아버지의 일은 아버지의 일일 따름입니다
아버지는 곁에 있는 큰 아들이
너무나도 믿음직스럽고 든든합니다
아버지는 큰 아들에게 자신의 일을 맡깁니다
아버지에게 자신의 일은 곧 큰 아들의 일입니다
아버지에게 큰 아들은 늘 그렇듯 아들입니다
큰 아들의 아버지이기에 아버지는 행복합니다
큰 아들에게 아버지는 일을 맡기는 주인입니다
주인의 종이기에 큰 아들은 무언가 못마땅합니다
모든 것을 탕진한 작은 아들이 돌아옵니다
작은 아들이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
아버지는 마냥 기쁘고 좋습니다
작은 아들은 주인의 종이 되겠다지만
아버지는 늘 그렇게 아들의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을 위한 잔치를 베풉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온 작은 아들이니
잃었다가 되찾은 작은 아들이니
작은 아들의 생일잔치입니다
아버지의 아들이기보다
주인의 종으로 스스로 자리매김하던
큰 아들은 못마땅합니다
염치없이 돌아온 동생 아닌 동생도
마냥 마음 좋은 아버지 아닌 아버지도
이들이 벌이는 잔치도
큰 아들이 드디어 화를 냅니다
이미 두 아들에게 모든 것을 나눠주어
이제는 아무 것도 갖지 않은
달랑 두 아들의 아버지일 뿐인
바로 그 아버지에게
이미 아버지의 모든 것을 가진
큰 아들이 뒤늦게 화를 냅니다
종의 주인이 아닌 아들의 아버지께
아버지의 아들이 아닌 주인의 종으로서
자기 몫을 달라고 윽박지릅니다
아들과 늘 함께하던 아버지는
함께 있어도 함께 있지 않던 아들에게
더 이상 줄 것이 없습니다
나의 것이 아들의 것인 아버지는
나의 것은 없고 아버지의 것만 있다고 여기는
아들에게 이미 모든 것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마음이 아픕니다
자기 몫을 모두 탕진한 작은 아들보다
자기 몫을 깨닫지 못하는 큰 아들 때문에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란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 되찾았단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하지 않겠니.”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가졌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을 주셨고
이제 우리가 당신이 되어
이제 우리가 당신이 하셨듯이
이제 우리를 모든 이에게 주기를 바라십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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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30. 사순 제4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을 사순 제4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통해서 자비와 사랑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두 아들을 둔 아버지의 비유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또는 하느님 나라의 본질에 관한 예수님의 수많은 비유 가운데 백미(白眉)라고 할 수 있습니다.
되찾은 아들은 회개한 죄인이요 큰아들은 늘 하느님을 섬겨 온 의인으로 상징됩니다. 다시말해서 예수께서 식탁 친교를 나눈 세리와 죄인들이 작은아들에 속한다면,늘아버지 옆에서 섬겨 온 큰아들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로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죄인과 의인 그리고 유다인과 이방인들을 모두 동일한 자녀로 사랑하는 무한한 사랑과 자비를 베푸십니다.
바라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지식과 율법을 통해서 만나는 하느님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집을 나가 방황하다 돌아온 작은아들을 아무런 조건 없이 기쁘게 맞이하는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율법에 갇힌 하느님을 바라보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죄인들의 비참한 처지를 동정할 줄 모릅니다. 자신도 동생과 같은 처지를 당할 수 있다는 겸허히 되돌아 봄 없이 자비와 사랑 마음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큰아들의 태도는 바리사이들의 율법주의를 그대로 반영합니다.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잘 지킴으로써 하느님의 구원을 당연히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하였습니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시려는 구원은 무한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므로 인간의 어떠한 공로로도 맞바꿀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구원을 얻기 위히여 우리가 할 일은 구원에 맞갖은 공로를 많이 쌓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구원을 받아들이고 구원의 본질인 하느님의 사랑을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일상안에서 큰 아들의 모습과 작은 아들의 모습을 일상에서 만나게 됩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잘 지키고 아무런 흠없이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고 있다고 자만자족하는 큰 아들과 같은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모습을 지니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한편으로는 인간의 부족함과 나약함으로 인해 세상의 여러가지 유혹에 무너져 하느님 앞에 부끄러운 죄인이라고 자신를 비하하고 좌절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런 두 모습을 지닌 인간을 겸허히 들여다 보며 자비와 사랑의 하느님을 바라보도록 주님께서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고상한 생각들과 훌륭한 말로 남들을 훈계하고 가르치지만 거기에 자비와 사랑이 없으면 큰아들과 같은 바리사이파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우쳐주십니다. 이와 반대로 자신은 죄많은 사람이라고 어둠의 길을 헤메이더라도 깊이 뉘우치고 용서를 청하할 때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체험하게 되고 작은 아들처름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다시 새롭게 일어 설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의 자비와 사랑을 체험하는 한주간 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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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일요일 성체의 날✝️
성 프란치스코의 태양 형제의 노래(피조물의 노래)
1지극히 높으시고 전능하시고 좋으신 주님,
2찬미와 영광과 영예와 모든 찬양이 당신의 것이옵고(참조: 묵시 4,9.11),
3홀로 지극히 높으신 당신께만 이것들이 속함이 마땅하오니,
4사람은 누구도 당신 이름을 부르기조차 부당하나이다.
5내 주님, 당신의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찬미받으시옵고
6그 가운데 각별히 주인이신 해님 형제와 더불어 찬미받으소서.
7해님은 낮이옵고, 그로써 당신께서 저희를 비추시나이다.
8아름답고 장엄한 광채로 빛나는 해님은,
9지극히 높으신 당신의 모습을 지니나이다.
10내 주님, 달 자매와 별들을 통하여 찬미받으시옵소서(참조: 시편 148,3).
11당신께서는 빛 맑고 귀하고 어여쁜 저들을 하늘에 마련하셨나이다.
12내 주님, 바람 형제를 통하여 그리고 공기와 흐린 날씨와 갠 날씨와
13모든 날씨를 통하여 찬미받으시옵소서(참조: 다니 3,64-65).
14저들로써 당신 피조물들을 기르시나이다(참조: 시편 103,13-14).
15내 주님, 쓰임새 많고 겸손하고 귀하고 순결한
16물 자매를 통하여 찬미받으시옵소서(참조: 시편 148,4-5).
17내 주님, 불 형제를 통하여 찬미받으시옵소서(참조: 다니 3,66).
18그로써 당신은 밤을 밝혀 주시나이다(참조: 시편 77,14).
19그는 아름답고 쾌활하고 씩씩하고 힘차나이다.
20내 주님, 우리 어머니인 땅 자매를 통하여 찬미받으시옵소서(참조: 다니 3,74).
21그는 우리를 기르고 보살피며
22울긋불긋 꽃들과 풀들과 온갖 열매를 낳아 주나이다(참조: 시편 103, 13-14).
23내 주님, 당신 사랑 까닭에 용서하며(참조: 마태 6,12),
24병약함과 시련을 견디어 내는 이들을 통하여 찬미받으시옵소서.
25평화 안에서 이를 견디는 이들은 복되오니(참조: 마태 5,10),
26지극히 높으신 이여, 당신께 왕관을 받으리로소이다.
27내 주님, 우리 육신의 죽음 자매를 통하여 찬미받으시옵소서.
28살아 있는 어느 사람도 이를 벗어날 수 없나이다.
29불행하옵니다, 죽을 죄를 짓고 죽는 이들이여!
30복되옵니다, 당신의 지극히 거룩한 뜻을 실천하며 죽음을 맞이할 이들이여,
31두 번째 죽음이 저들을 해치지 못하리이다(참조: 묵시 2,11; 20,6).
32내 주님을 찬미하고 찬양들 하여라(참조: 다니 3,85).
33감사를 드리고, 한껏 겸손을 다하여 주님을 섬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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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30. 사순 제4주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15,32)
오늘 복음의 작은 아들은 길을 잃으면 비로소 길을 찾게 된다, 는 말의 진실성을 입증해 보인 사람, 곧 인생길을 걷는 사람들의 본보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길을 걷는 것은 곧 길을 찾는 여정이고, 그 길 위에서 가장 본질적인 질문인 길을 걷고 있는 나는 누구이며, 나는 도대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라는 질문의 답을 찾을 수 있는 영적 수행이기도 합니다. 길을 걷는 것은 외적인 길을 걸으면서 실은 자기의 내면으로 향해 걷는 것이고 그 길의 끝은 한 번도 대면하지 못한 참 자기를 만나고, 결국 하느님을 만나는 곳인 마음 깊은 곳으로 향한 영적 순례이기도 합니다. 그 길을 걷고 있는 우리는 집을 떠났고 집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지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위에 있으며, 작은아들을 통해 배우는 것은 아버지 집으로 가는 길은 아무리 멀다 해도 결코 멀지 않다, 는 사실입니다.
지금껏 세상의 많은 곳을 여행하였지만, 저의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여행의 끝은 바로 아버지의 집이며, 그 아버지의 집에 대한 그리움과 목마름으로 저는 에르미타주를 찾아갔던 것입니다. 이런 결행은 헨리 나웬처럼 저 역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에르미타주 미술관의 「탕자의 귀향」을 직접 내 눈으로 보고 렘브란트의 심정을 그리고 그의 시선에서 그 그림을 통해 특히 작은아들과 아버지의 마음을 보고 싶었고, 더 절실히 느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화란 출신의 렘브란트는 유명한 화가였기에 젊은 날의 그의 삶은 화려하고 풍족하고 부유한 삶을 누렸었지요. 정상에 오르면 내려와야 하는 것처럼 차츰 그의 삶은 내리막길로 내달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렘브란트가 탕자의 귀향을 그린 시기는 대략 그의 황혼기인 1866년과 1867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렘브란트 삶의 마지막 시기에, 그는 한 자식을 제외한 자녀 4명과 두 아내 그리고 모든 재산과 명예 등, 모든 걸 다 잃어버리고 난 뒤에 비로소 탕자의 그림의 거친 손과 부드러운 손을 가지고 계신 눈먼 아버지의 자비로운 모습을 그토록 아름답게, 오묘하게 그릴 수 있었던 겁니다. 렘브란트는 비극이란 비극, 상실이란 상실을 다 겪고 난 뒤에야 탕자의 귀향을 그릴 힘과 영감을 얻게 되었으며, 하느님 사랑과 자비의 실체를 꿰뚫어 보았기에 불후의 명작을 그렸던 것입니다. 그가 겪은 상실과 그에 따른 고통은 내면의 모든 것을 비워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스펀지처럼 온전히 내면 깊이 흡수하고 수용해서 그런 빛과 따뜻하고 아름다운 색깔로 하느님의 자비를 묘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름지기 예술가라면 상실을 딛고 살아남은 법을 배우고 난 뒤 작품을 통해 그것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데 어쩌면 이는 바로 렘브란트를 두고 하는 말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같은 화란 출신의 저 유명한 빈센트 반 고흐는 이 작품을 보고 “수없이 죽음을 맛보지 않았더라면, 결코 이런 그림을 그리지 못했을 거야.”라고 했다고 합니다. 렘브란트만이 아니라 우리 역시도 스스로 죽고 또 죽은 끝에야 하느님의 사랑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 모릅니다.
렘브란트는 자기 상실의 실체와 그 깊이를 복음의 작은 아들에게서 찾고 만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사실 작은아들은 집을 떠나기 전에 그것이 어떤 결과를 빚을지 몰랐으며, 상실을 통해 자신이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점이며, 이는 우리 역시도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에서 그리고 자신을 찾기 위해서는 반드시 상실과 고통을 겪어야만 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외적인 상실을 통해 그리고 관계의 단절을 통해 그는 비로소 자기 내면에서 솟구쳐 오르는 마음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난 아직 돌아갈 집이 있고 그곳에 아빠가 계시다, 는 사실의 깨달음입니다.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자!, 이런 고백은 우리에게도 해당되고 적용되는 은혜로운 표현입니다. 자기 잘못과 실패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어려움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것은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과 죄송함으로 말미암은 내적 혼란과 갈등일지도 모릅니다. 처음엔 아버지의 자비와 사랑에 대한 신뢰보다 자기 잘못에 대한 집착과 부끄러운 수치심으로 주춤거리고 망설였겠지요. 하지만 모든 것을 다 아시면서도 붙잡지 않으시고 “아들아, 가야 한다면 가거라. 다만 내가 너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잊지 말거라. 나는 네가 떠난 이 자리에서 네가 다시 오는 순간까지 너를 기다리마!”라고 말씀하신 아버지의 마음과 모습을 회상하면서 그는 돌아갈 용기를 갖고 자기 발목을 묶고 있던 죄책감과 부끄러움의 보따리를 내려놓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빠 하느님은 모든 것을 다 허용하십니다. 심지어 죄까지도, 그 이유는 우리가 무엇을 해서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사랑받는다, 는 걸 깨달을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다 허용하시고 받아들이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작은아들을 통해 말씀하고 싶은 ‘복음의 기쁜 소식’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풍부하게 내렸습니다.”(로5,20)라 고 말씀하셨고, 예수님께서는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하지만, 많은 죄를 용서받은 사람은 더 큰 사랑을 드러내기 마련이다.”(루6,47)하고 말씀하셨지요.
뉘우치는 사람에게는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작은아들에게 요구한 것은 사실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 자신 스스로 아버지께 자신의 잘못된 선택과 행동에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청하는 뜻으로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15,19.21)라고 했지만, 아버지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며, 살진 송아지를 잡아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15,20.24)라고 하시면서 성대한 잔치를 벌입니다. 용서를 위한 어떤 조건도 단서도 없었습니다. 아들에게는 아버지의 관계를 스스로 부정했기에 아들의 자격이 없다고 하였지만, 아버지의 시선에서는 아들은 여전히 아버지의 아들이었습니다. 다만 작은아들은 아버지의 시선에서 보면 집을 떠나기 전의 육적이고 거짓된 어제의 아들은 죽었고, 집으로 되돌아옴을 통해서 영적이고 참된 아들로 새롭게 거듭난 것뿐입니다. 아버지에게는 아들이 떠나고 난 후 미어지는 사랑의 아픔이 있었고 되돌아온 이후는 주체할 수 없는 기쁨으로 넘쳐났습니다. 단지 이별의 아픔보다 재회의 기쁨만이 그리고 비 온 다음에 땅이 굳듯이 떠나기 이전보다 부자 관계는 더 돈독해지고 친밀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제 관점에서는 렘브란트의 그림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거의 눈이 멀다시피 한 아버지가 아들을 눈으로 보았기에 알아본 것이 아니라 손으로 어루만져서 사랑하는 아들을 알아보았으리라고 상상하게 만든 아버지의 손입니다. 사랑에 눈먼 아버지 그러나 가엾은 마음으로 아들을 어루만지면서 아들을 알아보신 것처럼 아빠 하느님께서 우리를 알아보신 것은 바로 아버지의 부드러운 손으로 우리의 굽은 등을 어루만짐을 통해서 아실 것입니다. 등을 쓰다듬어 주시고 어루만져 주시는 저 손이 바로 약손이며 생명의 손입니다. 이 아버지의 변함없는 따뜻한 손길로 어루만짐을 아들도 느꼈기에 잔치에 함께한 사람들과 더불어 편하게 기쁘게 잔치를 즐길 수 있었으리라 상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잔치는 하늘나라의 잔치의 표징이며, 우리가 하늘나라에서 누릴 하느님과의 친교를 상징합니다.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이 넘치고,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이제 곧 잔치가 벌어질 것이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시34,6./루15,31)
끝으로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합니까? 동구 밖에 나가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아버지와 돌아오는 작은 아들 중에 누가 먼저 상대를 알아봤을까요? 예로니모 성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더 많이 사랑하는 이가 더 먼저 알아보았다.” 아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한없으신 자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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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30. 사순 제4주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큰아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강만연 [fisherpeter] 2025-03-29 ㅣNo.181118
오늘 주일복음은 탕자의 비유입니다. 저는 오늘 복음에 대해 전통적으로 교회가 해석하는 해석에서 좀 탈피해서 묵상해봤습니다. 오늘 낮에 주일복음이 탕자 이야기라 무엇에 중점을 두고 묵상할까 주제를 고민하다가 큰아들에 중점을 두고 묵상하자고 마음먹고 묵상했습니다. 여기서 좀 더 나아가 전통적으로 보면 교회는 큰아들에 대해 부정적으로만 해석했습니다. 지금까지 강론이나 다른 영성서적에 탕자의 비유를 해석한 어떤 자료에도 큰아들에 대해 좋은 시각으로 해석한 걸 한 번도 보질 못했습니다. 저는 이건 좀 너무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복음이나 성경 자료 해석을 할 때 고정적으로 해석한 틀 안에서만 해석을 하려고 합니다. 저는 교회의 해석에 반기를 들자고 하는 건 아닙니다. 만약 이런 방식으로 해석을 하게 된다면 우리는 복음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시야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건 교육학 학문에서 바라보면 획일적인 사고만 주입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고 창의적인 생각을 원천적으로 막는 결과밖에 되지 않습니다. 쉬운 비유 하나 들겠습니다.
어떤 죄수가 형사법정에 있습니다. 누가 봐도 형법상 죄를 범한 게 명백합니다. 우리는 단순한 사실관계로만 가지고 판결을 하지 않습니다. 또한 최종 상급심에서 판결이 선고될 때까지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법익의 관점에서도 무죄추정의 원칙의 법리가 적용됩니다. 왜 이런 제도가 있겠습니까? 한 명의 억울한 피고인을 만들지 않기 위한 법적인 장치입니다. 그래서 검사와 변호사 간 치열한 법리 공방을 통해 모든 소송자료를 참고해 법관이 공정하게 판결하는 게 일반적인 소송 원리입니다. 만약 큰아들이 우리가 해석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해석하니 좀 억울하다는 생각에 소송을 제기했다는 가정 하에 큰아들의 입장에서 한번 들어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만약 교회가 전통적인 해석으로만 해석을 한다면 이런 오류도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극단적인 해석입니다. 작은 아들에 대해 호의적인 시각으로만 해석하면 그럼 오히려 계명과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인식을 가지게 할 우려가 있는 것입니다. 큰아들처럼 성실히 사는 게 오히려 바보 같은 삶이 되는 것처럼 비춰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치 않습니까? 저는 절대 큰아들을 옹호하는 건 아닙니다. 만약 이걸 액면 그대로 교회가 해석하는 전통적인 면을 고수한다면 어쩌면 성실하고 신실하게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도 바보 아닌 바보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큰아들에 대한 교회의 시각도 인정을 하지만 너무 획일적으로 해석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하느님은 대자대비하신 분이니 회개한 죄인 한 명이 회개하지 않은 아흔아홉 의인보다 더 낫다고 해서 그렇게만 본다면 누가 하느님을 신실하게 따르려고 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게 없어도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은 많습니다. 세상에서도 법이 있어서 준수하는 사람도 있지만 법이 없어도 상식과 도덕이 충만한 사람은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사회상규라는 틀 안에서 세상법을 지키고 사는 사람도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제는 이런 면을 절충해서 복음을 해석해 균형적인 시각으로 복음을 바라봐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매날 전통적인 해석만 고수해서 해석하는 걸 하느님께서 이 현상을 바라보신다면 과연 어떤 생각을 하실 것 같은가요?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생각을 공장에서 물건 만들어 생산하듯이 우리의 사고방식을 획일적으로 하게끔 창조하시지 않았다는 걸 생각해본다면 이젠 우리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큰아들을 바라보는 시각을 큰아들 입장에서 어느 정도는 큰아들을 두둔하는 면도 있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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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30. 사순 제4주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회개로 조건 없는 하느님 자비를 입도록 /
박윤식 [big-llight] 250329. 20:00 ㅣNo.181114
세상에는 두 가지 인간관계가 있다나. 하나는 깨어질 수 있는 관계, 또 하나는 깨어질 수 없는 것일 게다. 이를테면 직장의 사장과 직원은 언제나 깨어질 수 있다. 이는 서로 이해타산에 따라 결합되거나 강제로 구속되는 경우이니까. 곧 계산적이거나 강압적인 관계일 테니. 반면에 부모와 자식은 결코 깨어지지 않는 관계일 것이다. 아무리 연을 끊는다 해도 자식인 이상 언제까지나 자식이다. 이 관계는 어떤 계산에 따라 결합된 것도 강제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니까.
‘되찾은 아들의 비유’ 이야기는 언제 읽어도 감동이다. 어리석을 정도로 착한 아버지이기에. 예나 지금이나 자식 농사만큼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나. 부모 마음같이 움직여 주지 않기에. 자식 잘되길 바라는 잦은 잔소리, 심지어 윽박질러도 이 일 만큼은 원대로는 어렵다. 결국 자식 이길 부모 없다는 말처럼, 부모들 의지대로 되지 않는 게 세상사 부모님의 공통된 고민거리다.
이 비유에서 작은아들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끊었다. 그는 깨어질 수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를 졸라 재산을 챙겨서 곧바로 달아났다. 오래 기다린 가출이었다. 손에 돈을 쥔 그는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흥청망청 다 탕진했다. 결국 처참한 상황에서야 비로소 아버지를 떠올렸다. 그 비굴한 배고픔서 자신의 품위는 없고, 아버지와의 관계가 깨졌다는 것을 알았다.
탕자 아버지는 아들이 재산을 달라 했을 때 몽땅 날릴 걸 알았지만, 그래도 자식의 기를 꺾지 못했다. 아버지 예상대로 돈 떨어진 둘째는 힘을 잃었다. 돈깨나 쥐었을 때나 힘이 있기에 어쩜 당연했다. 이렇게 기가 죽을 때 은총이 다가온다. 그래서 결국 배고픔에 굶어 죽을 지경의 알거지가 되자, 아버지의 따뜻한 품을 느꼈다. 저 멀리 돌아오는 아들을 미리 본 아버지는 달려가 둘째를 끌어안고는 입을 맞추었다. 이렇게 그 아버지는 풀이 죽은 자식의 기를 일으켰다.
아들은 품팔이꾼 하나로 받아주길 바랐지만, 아버지는 죽은 놈이 다시 살아났다며 잔치를 베푼다. 아들은 천한 종으로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둘도 없는 귀한 아들로 안았다. 이처럼 부모 마음은 한결같다. 아버지는 자식이 어디에 있든 간에 늘 가엾은 마음이 변함없다. 언제라도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입 맞출 자세이다. 아버지에게는 아들이 비록 방탕하여도 아들인 게다. 이 관계는 훈련 받는다고 얻어진다거나, 아니 그 어떤 조건에서도 결코 깨지는 관계가 아니다.
이처럼 우리와 하느님과의 관계도 결코 깨질 수 없다. 아무리 큰 죄로 떠났다 해도 결코 당신 품에서 내치지 않을 게다. 아무리 당신과의 관계를 끊으려 해도, 그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시리라. 이 하느님 마음도 바로 이 부모 마음과 별반 다를 수가. 우리가 그 마음 다 헤아리지 못할 정도로 때로는 강하게 꾸짖지만, 그분께서는 늘 안타까움으로 잘되도록 끝내 기다리신다.
아무튼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한없는 하느님의 자비를 잘 드러낸다. 가출한 아들의 방탕함도, 오만한 큰애의 그 고집도 아버지 자비에 끝내 녹으리라. 잘못을 회개하기를, 당신 말씀대로 살기를 그토록 바라시기에. 우리 신앙인은 믿음의 생활이 더하여지면서 이런 하느님 자비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더 깨닫게 되리라. 우리를 애타게 기다리는 그분께로 발걸음을 되돌리자. 그러면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무조건 용서하고 안아주시는 그분의 무한한 사랑을 이해할 수 있을 게다. 그분의 조건 없는 이 자비를 이웃과 늘 나눠가지면 하느님은 더더욱 기뻐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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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30. 사순 제4주일. 한창현 모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큰아들은 작은아들이 환대받고 있다는 소리에 너무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큰아들을 찾아와서 타일렀습니다.
그렇게 찾아온 아버지에게 큰아들은 그동안 속으로만 간직해 왔던 섭섭함을 꺼내 놓습니다.
사실 큰아들은 “종처럼”(루카 15,29) 아버지가 시키는 것을 열심히 해 왔습니다.
때로는 자신도 친구들과 즐기고 싶었고, 아버지께서 염소 한 마리 정도는 내주시면 좋겠다고 기대하였습니다.
큰아들의 처지에서 보면 아버지는 큰아들에게 고맙다는 표현조차 한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큰아들이 섭섭함을 꺼내 놓은 상황에서 아버지는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였을까요?
요즘 시대의 상담가들이라면, 마음을 몰라주어서 미안하다고 사과부터 하고, 억울한 마음을 달래 주라고 조언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사과 대신에 큰아들에게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15,31)라고 말합니다.
아버지는 큰아들의 ‘종처럼’이라는 표현에 가장 마음이 쓰였을 것입니다.
그가 모든 것이 큰아들의 것이라고 한 말은 “너는 결코 종이 아니다.”라는 말의 다른 표현일 것입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마음속으로 큰아들처럼 우리 자신에게 좋은 일이 생기기를 기대하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만 좋은 일이 생기는 것 같아서 하느님께 섭섭할 때가 있기도 하고,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사과하시거나 달래 주시지 않습니다.
어렵겠지만 한 가지는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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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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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30. 사순 제4주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작은아들이 자기 몫을 청합니다.
그가 자기 몫을 청할 때 아버지는 이미
작은아들이 곧 떠날 것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부분에서
큰아들에게 하는 말을 보면
작은아들은 굳이 자기 몫을 따로 받지 않아도
쓰고 싶은 만큼 쓸 수 있었을 것입니다.
떠나갈 것을 알면서도
아버지는 작은아들에게 몫을 줍니다.
그렇게 작은아들은 떠나갑니다.
복음은 먼 고장이라고 표현하는데
아마도 지금까지의 삶과 전혀 다른 삶을
시도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까지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살아왔다면
이제는 내가 원하는 것을 모두 해 보겠다는 마음입니다.
그가 먹을 것이 없어 돼지를 치게 되었다는 것을 보면
그는 이스라엘 땅을 벗어난 것 같습니다.
그는 단순히 아버지 곁을 떠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끊은 것입니다.
율법에 매이는 것이 싫었고
그것에서 벗어나야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하느님 없이도 잘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내 마음대로
내가 주인공인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 삶은 쉽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어
그는 다시 아버지께, 하느님께
돌아갈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 마음대로 산다는 것은
하느님의 계명을 거부하는 것이었고
그렇게 하느님을 거부한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거부하면서 그는 결국
하느님에게서 오는 생명도 거부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거부하면서 자신이 신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노력만으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노력이라는 이름으로
결국 자신을 괴롭힙니다.
그 결과는 자유로움이 아니라
더 큰 고통으로 다가왔습니다.
물론 아버지를 떠나지 않았던 큰아들도
자기는 행복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하느님 곁에 머무는 것이 좋지만은 않게 생각됩니다.
그러다보니 큰아들도 떠나고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느님 곁에 머무는 것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이
우리에게 행복을 주는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회의감에
누구는 하느님을 떠나고
누구는 억지로 남아있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이 행복하냐는 질문에
선뜻 답을 하기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돌아가기만 하면
우리가 손을 내밀기만 하면
우리를 반겨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큼
행복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 행복을 발견할 수 있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희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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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30. 사순 제4주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루카 15, 32)
꽃샘추위
속에서도
개나리
목련화가
피어납니다.
봄의
경이로운
생명입니다.
하느님의 세계를
회복하는
사랑이며
우리 자신을
내려놓는
회개입니다.
사랑의 회복이
사랑의 진정한
회개입니다.
자기만을 내세우는
아집을 내려놓는
비움의 시간이
사순입니다.
낮추는 것이
비우는 것이며
비우는 것이
끝내 우리를
살리는 길입니다.
참사람이
되는 길은
이렇듯
서로가
서로를
살려내는
사랑의
길입니다.
탄생과 변화의
두려움까지
끌어안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왜곡될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어느 누구도
소외될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은
어떠하신 분이
우리의
아버지
하느님이신지를
잘 보여주십니다.
영혼을
되살리는 일은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의 회개로
하느님의
사랑으로
우리는
다시 하느님을
얻게 되었습니다.
떠나는 것도
돌아오는 것도
머무르는 것도
깨닫는 것도
모두 아버지
하느님의
영역입니다.
여기부터가
아닙니다.
지금부터가
중요한
우리들의
인식과 시각의
변화입니다.
우리의 삶은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 하는
맞아들임의
잔치이며
되찾는 생명의
축제이며
하나되는
일치와
머무름의 기쁜
향연(饗宴)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만 있는
사랑의 완성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큰아들
작은아들의
삶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이
되찾으시는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입니다.
지극한
사랑과 함께하는
기쁜 주일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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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30. 사순 제4주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복된 죄!
강론에 지나치게 큰 의미를 부여하는 동시에, 강론하시는 것을 너무 행복해하는 한 시골 작은 본당 주임 사제에 얽힌 사연입니다.
하필 그 주일 복음 내용이 ‘탕자의 귀환’ ‘작은아들의 비유’였습니다.
신부님은 ‘이게 웬 떡이냐?’며 일주일 전부터 명 강론을 준비하고 또 준비했습니다.
드디어 주일 교중 미사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그는 치밀하게 준비하고, 세밀하게 손까지 본 강론 보따리를, 존재 자체로 고맙고 사랑스러운 신자들, 백퍼센트 어르신들인 교우들께 신나게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작은아들이 얼마나 불효자인지? 그가 아버지를 떠나가서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그가 저지른 죄가 얼마나 불경스러운 죄인지를?
그럼에도불구하고 아버지는 식음을 전폐하며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을, 그야말로 감동적으로 풀어나가셨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강론을 듣고 있던 교우들은 이제나저제나 집 나간 작은아들이 돌아오기만을 목빼고 기다리고 있는데, 30분, 50분이 지나 한 시간이 다 되어가는데도 불구하고, 작은아들은 돌아올 줄을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고정된 자세로 한 시간 가까이 강론을 듣고 계시던 신자들은 드디어 슬슬 힘겨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엉덩이를 들썩이고, 연신 하품을 해대고, 시계를 바라보고, 마침내 이렇게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집 나간 작은아들은 대체 언제 돌아온댜?”
그리고 다음 스케줄로 인해 초조하셨던 한 어르신께서 강론 중에 손을 들고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신부님, 손주 결혼식도 가야 하는디, 이제 고만 작은아들, 쌩하니 들어오라고 하시요!”
오늘 탕자의 귀환을 주제로 한 복음 말씀은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 가장 아름답고 의미심장한 비유로 유명합니다.
많은 영성가들이 이 비유 말씀만으로 수많은 영성 서적들을 저술했습니다.
여러 화가들도 이 비유 말씀을 아름다운 작품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저희 사제들도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온몸과 마음으로 절절히 느끼게 하는 탕자의 귀환을 주제로 강론하다 보면 자연스레 강론이 길어지기 십상입니다.
저는 오늘 그래서 작은아들이 돌아온 이후 상황에만 시선을 집중시켜봤습니다.
사실 오늘 이 아름답고 감동적인 비유의 주인공은 집 나간 둘째 아들이 아니라 언제나 목 빼고 기다리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래서 이 비유의 제목은 ‘탕자의 귀환’, ‘작은아들의 비유’, ‘잃었던 아들의 비유’라기 보다
‘자비하신 아버지의 비유’가 더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온 신경은 온통 작은아들이 돌아올 동네 초입으로 향해 있었습니다.
이제나저제나 간절히 기다리고 계시던 아버지는 초주검 상태가 되어 터벅터벅 멀리서 걸어오는
작은 아들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거동도 불편하신 아버지께서는 그냥 있지를 못합니다.
아들을 향해 냅다 달려가십니다.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춥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는 우리가 저지른 죄와 타락, 배반을 훨씬 능가합니다.
무조건적인 용서를 베푸시는 그분의 사랑은 죄를 고백하는 죄인들보다 앞서가십니다.
아버지에게서 오는 죄의 용서는 그 어떤 전제 조건도 없습니다.
그저 돌아오기만 하면 됩니다.
회개만이 요청됩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가 다가가기 전에 먼저 죄인들을 찾아오시며, 새 삶을 요구하십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비유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곧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명확히 깨닫게 합니다.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은 측량이 불가능한 무한한 사랑입니다.
그분의 마음은 죄인들에 대한 연민의 마음으로 인해 크게 고동칩니다.
참혹한 죄인들을 당신께로 인도하는 그분의 음성은 감미로운 천상음악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천하에 둘도 없는 대죄인인 우리에게 단 한 마디 질책의 말을 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환대하시고 꼭 안아주십니다. 등 두드려 주시고 일으켜 세우십니다.
우리가 저지른 죄는 심각했지만, 결국 그 죄는 복된 죄가 되었습니다.
비록 우리 죄가 나쁜 것이었지만, 그 죄로 인해 하느님의 자비가 펼쳐졌고, 우리에게 구원이 선물로 다가왔으며, 그로 인해 하느님의 영광과 위대함이 만천하에 드러났으니, 복된 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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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30. 사순 제4주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전례는 사순절의 엄숙한 분위기에도 기쁨이 있다. 악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자비와 형제들과의 화해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참 기쁨이 있는 것이며 그 때문에 오늘이 “기쁨의 주일”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약속의 땅, 자유의 땅에 도달하여, 자유와 승리의 기쁨을 하느님께 돌리며 감사드렸다. 광야에서 당했던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약속의 땅에 들어와서 감사드릴 수 있었듯이 주일의 모임과 미사는 이러한 기쁨을 확인해주는 것이다. 한 주간에 있었던 모든 일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하고 새로운 한 주간의 삶을 계획하고 은총을 구하는 시간이어야 한다. 미사는 자유와 해방을 체험하는 시간이다. 일상에서 당했던 수모, 마음 상함, 상처, 슬픔, 아픔, 원한, 미움, 분노 등 모든 것을 떨쳐버리고 여유를 되찾는 시간이다. 이러한 시간이 되기 위해 우리는 하느님과 진정으로 화해하여 올바른 관계를 맺어야 하며, 형제들과도 화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 루카 15,1-3.11-32: 잃었다가 되찾은 아들의 비유
되찾은 아들의 비유의 주인공은 전후반을 연결하는 아버지이다. 전반부에서는 작은아들이 자기 몫의 유산을 달라고 하여, 고향을 떠나 ‘방종한 생활로’(13절) 탕진하고, 그들의 생각으로는 더는 잘못될 수 없는 처지인 돼지를 치는 사람이 될 정도로 나빠지고 이제는 돼지가 먹는 먹이를 먹어야 할 만큼 처지가 변하자(16절), ‘제정신이 들어’(17절),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와 품꾼으로라도 써주기를 아버지께 청했다. 그러나 멀리서 아들을 본 아버지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20절). 그리고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왔다고 성대한 잔치를 열라고 했다. 왜냐하면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왔으므로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기 때문이라고 한다(24절).
후반부는 ‘성실한’ 아들의 반응을 그리고 있다. 큰아들은 항상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서 자기의 본분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잔치가 벌어진 이유를 듣고는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지 않으려 한다(28절). 그 아들을 달래기 위해 아버지가 나간다. 그때 그 아들은 아버지의 지나친 너그러움을 책망하고 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29-30절). 자기 동생의 입장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다. 오직 자신의 성실함이 무시당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인간적 정의의 저울에 달아보면 큰아들이 옳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정의의 척도에 두지 않고 사랑과 용서의 차원에 두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동생뿐 아니라, 형과 같은 이기적이고 관대하지 못한 사람들까지도 구원될 수 있을 것이다. 동생보다 형이 더 잘못했다고 생각되는 점은, 매일 아버지와 함께 지내는 행복을 누리면서 사랑의 잔치가 계속됐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이 곧 잔치인 줄 모르고, 아버지와 하나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의무감과 기쁨이 없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31-32절). 사랑의 모습을 되찾았기 때문에 즐거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비유가 겨냥하는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이 기쁜 소식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깨우쳐주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아버지의 설명을 듣고 받아들여 함께 그 잔치에 참여할지 어떨지를 결정해야 하는 형의 입장과 같은 사람들이다. 예수께서는 이들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정의’와 ‘이기주의’가 자신들을 하느님으로부터 갈라놓는다는 것을 알고, 복음 때문에 부딪히게 될 걸림돌을 뛰어넘어 복음이 가지고 있는 큰 기쁨을 발견하도록 도와주고자 하시는 것이다. 즉 반대자들의 마음을 꾸짖음과 동시에 정복하시려는 것이다.
이렇게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하느님의 용서를 선포하면서 우리가 모두 하느님 앞에 죄인임을 깨닫고 우리의 알량한 정의나 공치사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만일 그분이 당신 사랑의 문을 열어주시지 않으면 되돌아온 아들도, 성실하다고 하는 아들도 다 잔치에 참석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아무 조건 없이 주어지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되돌아가야 할 이 사순시기에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하나의 훌륭한 가르침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모든 사람을 당신과 화해시켜 구원하셨다고 바오로 사도는 말하고 있다(2코린 5,19-20절). 인간 편에서 먼저 하느님과 화해할 수는 없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께 대한 잘못에 대해 해결할 능력은 없는 것이다. 하느님만이 그 화해의 주도권을 가지신 분이시다. 하느님께서는 방탕한 아들에게 그러했듯이 크나큰 사랑과 용서로 인간을 포용하심으로써 인간을 당신과 화해시키신다. 하느님의 이러한 화해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형제가 되시어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시어 봉헌되시는 그 순간부터 이루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위해 죄 있는 분이 되신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께로부터 무죄 선언을 받는다(2코린 5,21). 즉 거룩하게 된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이러한 사실을 알려준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은 인간들의 모든 거절, 도피, 이기주의 등의 행위와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어리석고 냉랭한 오만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이 사순절을 통하여 하느님과 화해하고 그에 앞서 우리 형제들과의 화해를 이루도록 하자.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모두를 당신의 기뻐하시는 잔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 주신다. 이 잔치란 바로 부활의 파스카 신비에의 참여일 것이다. 이러한 마음으로 이 사순시기를 지내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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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30. 사순 제4주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회개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사탄의 가장 큰 계략
이무석 교수의 책에 ‘작은 눈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었던 한 여자의 사연이 나옵니다.
그녀는 사회에서 이름만 대면 누군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성공한 여성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녀가 정신분석학 대가인 이무석 교수를 찾아왔습니다.
그녀의 고민은 남편이 자신과 같은 완벽한 여자를 두고 술집 여자와 바람을 피웠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남편을 용서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돌아오면 1시간마다 어디에 있었는지 물어보고, 혹시 거짓말이 아닌지 처음부터 다시 되풀이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아 그 여자를 만나러 가기로 하였습니다.
그 전날 꿈을 꾸었는데 얼굴도 모르는 그녀가 나타났고 눈이 얼굴의 반은 돼 보일 정도로 컸다는 것입니다.
이무석 교수는 ‘혹시 눈 작은 콤플렉스가 있으세요?’라고 물었습니다.
흠칫 놀라더니, 사정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녀는 눈이 작지 않고 단지 쌍꺼풀만 없었습니다.
자기 동생은 쌍꺼풀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빠가 동생만 예뻐하는 것입니다.
아빠의 사랑을 받기 위해 심부름도 잘하고 공부도 1등을 놓친 적이 없습니다.
그래도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끼자 그 탓을 자신이 아빠와 동생이 가진 쌍꺼풀이 없는 것으로
판단해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눈 작은 콤플렉스를 가지게 되었고 남편이 바람을 피운 것도 분명 다른 여자의 눈이 크기 때문이라고 판단해버린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회개’입니다. 회개가 무엇입니까? 다시 아버지께 돌아가는 일입니다.
방탕한 생활을 하던 아들은 아버지께 돌아왔고, 형은 집 밖에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려 하지 않습니다.
둘째는 회개하였고 첫째는 하지 못했습니다.
둘째는 왜 회개할 수 있었을까요?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둘째가 느낀 고통의 원인은 ‘아버지의 부재’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첫째는 고통의 원인이 ‘아버지가 주실 수 있는 것의 부재’였습니다.
곧 친구들과 함께 먹고 놀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 주지 않은 것에 있습니다.
그에게 고통은 아버지 자체가 아닌 아버지가 주실 수 있는 무엇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는 자꾸 그 부족한 것으로 돌아가려 하고 둘째는 아버지 자신에게 돌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탄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인간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처럼 가장 큰 고통이 하느님의 부재가 아닌 하느님께서 주실 수 있는 것의 부족함으로 믿게 해야 합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예에서 여인이 자기 고통이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 것 때문이라고 믿게 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고통의 원인이 아버지의 부재였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사랑받지 못한 것에 고통의 원인임을 알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아버지의 마음에 들기 위해 쌍꺼풀 수술을 하면 될까요? 둘째는 어떻게 아버지께 돌아갔을까요? 아버지가 지금까지 자신에게 베푼 은혜를 묵상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집에만 있으면 행복할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아버지께 돌아가는 길은 아버지를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반면 첫째는 아버지께 돌아가는 길을 자기에게 염소 새끼 한 마리 주는 것으로 여깁니다.
자기의 문제가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고 아버지를 사랑하려고 하는 노력이 없는 것이 아닌, 아버지가 줄 수 있는데도 주지 않는 무엇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 사탄의 속임수는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뱀은 인간이 죄를 짓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 보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아담에게 부끄러움과 두려움의 원인을 하느님께서 만들어주신 저 여인 때문이라고 믿게 한 것입니다.
실상은 에덴동산의 모든 행복을 주신 하느님 사랑을 묵상하여 아버지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한 자신에게 있는데도 말입니다.
저도 어렸을 때 가난한 것, 그래서 200원짜리 크레파스도 사 갈 수 없는 처지 때문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진짜 어머니가 계신다는 다리 밑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처지가 되자,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이 부모에 대한 확신이 적었기 때문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부모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알려고 노력했습니다.
어머니가 가져온 단팥빵과 흰 우유, 우리를 위해 일하신 아버지의 굳은살이 그 증거였습니다.
먼저 하느님 나라를 구해야 합니다.
갱년기에 들어서 가끔 잠이 안 올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수많은 원인을 제거하려 방법을 썼습니다.
그러나 바로 내려가서 성체조배 한 시간만 하면 바로 잘 잘 수 있습니다.
모든 문제는 하느님의 부재에 있습니다.
이것을 앎이 회개의 첫걸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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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30. 사순 제4주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큰아들’이 잘한 일은 무엇일까? 없습니다.>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루카 15,1-3).”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루카 15,21-24).”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루카 15,28-32)”
1)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작은아들’은 죄를 지었지만 ‘회개한 아들’이고, ‘큰아들’은 의인이라고 자처하면서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죄인’입니다.
<큰아들은, 죄인이었던 사람들의 회개를 인정하지 않고, 죄인들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단정적으로 주장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뜻합니다.>
“도대체 큰아들이 잘못한 일은 무엇이냐?”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큰아들이 잘한 일은 무엇이냐?”부터 물어야 합니다.
31절-32절의 아버지의 말은, 겉으로 보기에는
부드럽게 타이르는 말이지만, 사실은 꾸짖는 말입니다.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라는 말은, 큰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있지 않음을 꾸짖는 말입니다.
<몸은 함께 있지만 마음은 떠나 있었습니다.>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라는 말은, 큰아들이 ‘남의 집’에서 ‘남의 일’을 하는 것처럼 일했음을 꾸짖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남의 일을 하는 것처럼 일했다.’가 아니라, ‘남의 일을 했다.’입니다.
큰아들이고 상속자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집은 곧 그 자신의 집이고, 아버지의 일은 그 자신의 일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남의 집’에서 ‘남의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말을 기준으로 해서 생각하면, “큰아들이 잘한 일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의 답은 “없다.”입니다.
따라서 “큰아들이 아버지에게 화를 낼 자격이 있는가?” 라고 누가 묻는다면, 대답은 “자격이 없다.”입니다.
큰아들이 아버지에게 한 말을 단순하게 정리하면,
“나에게는 상을 주어야 하고, 작은아들에게는 벌을 주어야 한다.” 라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그런 요구를 할 권한이나 자격이 큰아들에게 있는가? 없습니다.
<죄인들에게 천벌을 내리라고 하느님께 요구할 권한이나 자격은, 어느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2) 우리말 성경의 29절-30절은, 큰아들이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른 것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원문을 보면, 그는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를, 아버지의 명을, 아버지는, 아버지의
가산을”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말의 원문은
“당신을, 당신의 명을, 당신은, 당신의 가산을”입니다.
또 그는 동생을 동생이라고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30절의 ‘저 아들이’ 라는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죄를 짓고 돌아온 저 놈은 당신의 아들이지 나의 동생은 아니다.” 라는 표현입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않는 그 아들에게 아들의 자격이 있을까? 없습니다.
<주님을 주님이라고 부르지도 않는 신앙인이라면, 신앙인의 자격이 없습니다.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당신을 배반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자, 제자들이 몹시 근심하면서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라고 물었는데(마태 26,22), 그때 배반자 유다만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라고 물었습니다(마태 26,25).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스승님’이라고 부른 것은 그가 이미 예수님을 배반했고, 마음이 예수님에게서 완전히 떠났음을 나타냅니다.>
3) 예수님께서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와 목적은, 32절의 아버지의 말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기뻐해야 한다는 것.
<이 말은, 아버지께서 죄인들 때문에 슬퍼하실 때
함께 슬퍼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버지의 잔치에 참석해서 아버지와 함께 기뻐하려면, 그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회개’입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벌어진 잔치에 작은아들이 참석할 수 있었던 것은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큰아들도 회개해야만 그 잔치에 참석할 수 있습니다.
비유에서는 아버지가 작은아들에게 벌을 내리지 않고 잔치를 벌이는 것에 화가 나서 그 자신이 집에 들어가기를 거부한 것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하느님 나라로 바꿔서 생각하면, 큰아들이 ‘밖에’ 있는 것은, 실제로는 집에 들어갈 자격을 얻지 못해서 못 들어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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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30. 사순 제4주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15,1-3.11ㄴ-32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부모님은 자녀들을 믿고 사랑하는 마음을 어떻게 표현하실까요? 바로 ‘기다림’을 통해서입니다. 여러가지로 부족해도, 수많은 실수와 잘못들로 당신을 걱정시키고 마음을 아프게 해드려도, 결국은 올바른 길을 찾아갈 거라는 믿음으로, 언젠가는 당신 마음을 알아주리라는 기대와 바람으로 묵묵히 지켜보시며 기다려주시는 겁니다. 오늘 복음 속 비유에 등장하는 아버지도 아들들을 그렇게 믿고 기다려 주십니다. 아들들과의 관계가 틀어진 것이 당신 탓이 아님에도, 그들이 당신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고 미움과 원망의 마음을 내려놓도록, 그렇게 본인들을 향한 아버지의 진심을 깨닫고 다시금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도록, 끝까지 기다려주시며 자비와 사랑으로 품어주시는 겁니다.
먼저 작은 아들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그는 아버지의 보살핌과 사랑 덕분에 안정적인 삶의 터전에서 풍족하고 편안한 삶을 누리면서도 아버지께 감사하는 마음을 갖지 않았습니다. 자기는 더 신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데, 아버지가 자신을 답답하게 구속하여 그러지 못하는 거라고 여겼지요. 그래서 언제나 아버지의 품에서 벗어나기를 바랐고, 어느 순간 그 바람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아버지께 이런 청을 합니다.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본인이 당연히 받아야 할 몫을 챙겨간다는 태도입니다. 그런데 그가 아버지로부터 ‘가불’받은 것은 ‘유산’, 즉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신 이후에나 자신에게 돌아올 몫이었습니다. 그걸 먼저 달라고 청하는 것이 얼마나 철 없고 무례한 짓인지 헤아리지 못했던 겁니다. 그렇게 아버지 가슴에 대못을 박고 떠났으면, 본인이 바랐던대로 자유롭게 기쁘게 잘 살았어야 하는데 그러지도 못했습니다. 미래도 삶의 목표도 전혀 생각하지 않은 채 그저 눈 앞의 쾌락만 쫓으며 자기가 받은 재산을 펑펑 써댔고, 금새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지요. 그리고는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유다인들이 부정한 짐승으로 여기는 돼지들의 수발을 드는 비참한 처지가 됩니다. 그런 그의 모습은 마치 연줄이 끊어진 ‘연’과도 같습니다. 아버지라는 ‘연줄’이 없으면 더 높은 하늘로 훨훨 날아갈 수 있을줄 알았는데, 막상 연줄이 끊어지자 세상의 거센 풍랑을 감당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마구 휩쓸리다가 결국 땅바닥에 떨어지고 만 것이지요. 그제서야 그는 깨닫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을 답답하게 구속하는 존재가 아니라 단단하게 중심을 잡을 수 있도록 지켜주는 버팀목이었음을… 그래서 용기를 내어 아버지께 돌아갑니다.
다음으로 큰 아들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큰 아들은 동생처럼 아버지랑 같이 못살겠다며 집을 뛰쳐나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몸만 아버지 곁에 있었을 뿐 마음으로 함께 하지는 못했지요. 동생이 그랬듯 아버지 곁에서 큰 은총과 복을 누리고 있었음에도 그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기쁜 것인지를 깨닫지 못했던 겁니다. 그저 아버지 때문에 자기가 하고 싶은 건 참고 하기 싫은 건 억지로 해야한다고 여겨 괴로워했습니다. 자신이 아버지를 위해 그런 희생과 노력을 하니 당연히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자기 바람대로 되지 않자 오랜 시간 동안 마음 속으로 아버지를 원망했습니다. 자기가 뭐 대단한 걸 바란 것도 아니고 친구들과 먹고 마시며 즐길 ‘염소’ 한 마리만 주셨으면 됐는데, 그 소소한 바람조차 알아주지 않은 아버지가 미웠습니다. 그럼에도 꾹 참고 티내지 않으며 아버지 곁에서 묵묵히 일해왔던 건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면 그 재산이 다 자기 것이 되니, 그 때 가서 그동안 참았던 욕망들을 다 이루겠다는 꿈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아버지에게 받은 재산으로 온갖 욕망을 실현하며 방종하게 살다 온 저 얄미운 동생놈을 탓하고 혼내시기는 커녕, 그를 위해 잔치까지 베풀어주시는 아버지의 모습에 너무나 서운하고 화가 나서 그만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맙니다. ‘난 지금껏 종처럼 당신 말에 복종하며 일만 했지 단 한 순간도 당신 아들로 산 적 없다’고, ‘당신과 함께 살아온 시간들이 나에겐 정말 지옥 같았다’고, ‘그런데 사사로운 정에 휘둘려 공정치 못한 처사를 하는 당신이 정말 밉고 원망스럽다’고 아버지 가슴에 대못을 박은 겁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작은 아들이 집을 나가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그를 말리고 싶었고 붙잡고 싶었습니다. 그 녀석은 아직 그렇게 큰 재산을 감당할 준비가 안 되어 있음을, 미성숙함과 무절제로 인해 결국 모든 것을 잃고 큰 절망을 겪게 될 것임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그냥 떠나보낸 것은 그만큼 그를 아끼고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직 철이 덜 든 작은 아들은 마치 럭비공과 같아서 억지로 붙잡으려 들면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튀어나가 관계가 아예 끊어질까 두려웠습니다. 젊은 시절 자신이 그랬듯, 집 나가서 고생 좀 하다 보면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이, 든든한 버팀목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를 깨달을 거라 기대한 것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작은 아들의 철 없고 무례한 모습에 화를 내지도, 어떻게 살아야 한다며 시시콜콜 충고를 하지도 않고, 그저 믿고 떠나보냈습니다. 그리고는 그가 잘 지내기를 바라고 또 바랐습니다. 그 녀석이 결국 재산을 탕진하고 거지꼴로 산다는 소식을 들은 뒤로는 괜히 죄송스런 마음에 밖에서 방황하지 않기를, 어서 당신 품으로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작은 아들이 저 멀리 오는 게 보이자 버선발로 마중나가 따뜻하게 안아주고 맞아주었습니다.
그런데 작은 아들과의 관계를 회복한 기쁨도 잠시, 이번엔 큰 아들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게 됩니다. 내가 믿고 사랑하는 아들이기에 내 모든 것을 아낌없이 다 내주었는데, 적어도 큰 놈 만큼은 내 진심을 알아줄거라 생각했는데, 한 순간도 내 아들로 산 적이 없다니, 내가 그렇게나 밉고 원망스러웠다니, ‘나는 대체 그동안 뭘 한 걸까’하는 생각에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너는 왜 애비 마음을 몰라주느냐’고 큰 아들을 원망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아들이란 놈이 어떻게 아버지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며 그를 혼내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랬다가는 불 난 집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될 테니까요. 오해와 상처로 인해 큰 아들과의 관계가 영영 끊어져버릴 테니까요. 지금 이 순간 아버지로서 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일은 진심을 보여주는 것 뿐입니다. 그래서 온 마음을 담아 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오늘 복음 속 비유의 핵심 주제는 ‘화해’입니다. 자비로운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여러 가지 이유로 당신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우리들과 화해하기를, 그렇게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얼마나 바라시며 어떤 노력을 하시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사실 지금 내 모습이 작은 아들에 가깝든, 큰 아들에 가깝든 그런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죄를 지어 당신으로부터 멀어져도, 혼자만의 오해와 착각에 빠져 당신을 원망하며 차갑게 등을 돌려도, 우리를 끝까지 기다려주시고 큰 자비와 사랑으로 품어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런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그분과 화해해야 합니다. 그분과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도록 항상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 자녀로 살아가는 참된 기쁨과 행복을 온전히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와 온 마음으로 함께 있다면, 그분의 기쁨이 곧 나의 기쁨이 되고 그분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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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30. 사순 제4주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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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30. 사순 제4주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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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30. 사순 제4주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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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30. 사순 제4주일.
또 하나의 기적을 기대하는 삶
<2025.3.30> 아침을 여는 묵상 (눅 17:11~19절)
❝또 하나의 기적을 기대하는 삶❞
❚ 하나님 나라는 오직 예수님의 긍휼을 구할 때 얻으며, 그분의 발아래 엎드릴 때 또 하나의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 기적을 경험하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 연약함을 고백하는 삶이어야 합니다(11~14절).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에 예수님은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에 있는 한 마을에 들어가셨습니다. 이때 열 명의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가까이 가지는 못하고, 멀리 서서 소리를 지릅니다. 나병환자는 한 나라의 왕(대하 26:23, 웃시야 왕)이라 할지라도 사람들과 접촉하며 살아갈 수 없는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간절한 마음을 담아 소리쳤습니다(13절). 예수님은 부정하여 당신에게 찾아오지 못한 사람들을 찾아가십니다.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말씀하셨고, 그들은 그 말에 순종하여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습니다(14절).
사람들의 이해와 사랑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형편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택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지식은 불완전했습니다. 그럼에도 낫기를 포기하지 않고 불쌍히 여겨 달라고 예수님께 간구했습니다. 내 믿음이 연약하다고, 기도를 잘하지 못한다고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께 나아가 간구하고, 순종할 때 기적은 일어납니다. 사실 믿음과 순종은 결코 분리할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을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의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고백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늘 내 안에 있는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과 욕망과 소극적인 믿음에 대하여 긍휼히 여겨 주시길 간구합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의 연약함을 고백할 때, 또 하나의 기적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 은혜임을 고백하는 삶이어야 합니다(15~16절).
열 명의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았지만,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드린 사람은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했습니다.
간절한 부르짖음에 따른 순종이 치명적인 병에서 치유를 경험했지만, 그 치유는 결국 기적을 만들어내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함으로 완성이 됩니다. 매일 매일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인정하고, 그 은혜 앞에 감사하고 찬송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시 119:164)... ‘일곱 번’은 단순히 숫자적 의미로 7회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정해지지 않은 횟수, 즉 ‘자주 또는 끊임없이’를 뜻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할진대, 매일 매일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그 이름을 찬양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일상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할 때, 또 하나의 기적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 영광임을 선포하는 삶이어야 합니다(17~19절).
예수님은 아홉 명의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17절). 아홉 명의 사람들은 병에서 고침을 받는 것으로만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다시 돌아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께 감사의 고백을 드렸던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만이 구원을 얻게 되는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18~19절). 나병이라고 하는 치명적인 육신의 병에서 치유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영혼의 구원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기적을 그는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하나님의 의는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 없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구원의 문제는 다릅니다. 예수님께 돌아와 영광을 돌린 그 사람은 단순히 병을 치유 받는 것 이상의 은혜를 받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의 믿음을 통해 구원을 얻는 은혜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찾으시는 아홉 명의 사람들중에 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예수님 앞에 엎드리어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감사함으로 영광을 돌리는 자에게만 허락되는 더 크고 특별한 또 하나의 기적이 있습니다. 오늘이라고 하는 하루를 맞이하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모든 영광을 올려 드릴 때, 또 하나의 기적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며 날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감사할 이유를 더 많이 발견하는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답게 잃어버렸던 예배와 감사를 찾아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이 될 수 있기를(눅 17:11~19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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