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상아(吾喪我)
내 안에는 두 자아가 있다. 선한 길과 옳음을 따르게 하는 ‘나’와, 악과 욕심을 붙드는 ‘나’가 있다. 우리는 어떤 결정을 내릴 때마다 이 두 자아의 갈등 속에서 선택하며 살아간다. 어쩌면 진정한 나는, 나를 지나치게 앞세우지 않고 비우며 잊어갈 때 비로소 드러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존재감을 느끼며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는 그 존재를 실재(實在)로 깨닫기보다 막연한 ‘나’를 진짜 나라고 여기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 ‘나’는 변화하는 욕망과 감정이 만들어낸 허상일 수도 있다. 참된 내가 아니라 무상(無常)한 자아가 빚어낸 그림자 같은 존재인 것이다.
철학자 플라톤은 이데아론에서 ‘원형의 나’를 좇아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의 나는 진정한 존재의 그림자에 불과한 ‘모형의 나’라는 것이다. 그는 이를 ‘동굴의 비유’로 설명했다. 동굴에 갇힌 사람들은 밖에서 비쳐 들어오는 그림자만을 현실이라 믿는다. 그러나 실제 세상을 보고 돌아온 이의 말을 사람들은 믿지 못한다. 그림자를 실재로 여기기 때문이다.
장자는 『제물론』에서 오상아(吾喪我)를 말했다. 이는 ‘나(我)’를 비우고 잊어버릴 때 비로소 참된 ‘나(吾)’를 만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는 ‘호접몽’에서 “내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는지, 나비가 내가 된 꿈을 꾸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지금의 내가 과연 진정한 나인가를 묻는 말이다. 장자는 크고 작음, 아름다움과 추함, 선과 악, 옳고 그름에 대한 집착조차 덧없는 것이라 보며 무위자연의 삶을 이야기했다.
예수께서도 두 사람을 통해 이를 보여주셨다. 한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가진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자신을 따르라 하셨다. 그러나 그는 재물에 대한 집착 때문에 끝내 자아를 내려놓지 못했다.
또 한 사람은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었다. 예수께서 부르시자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곧바로 일어나 나아갔다. 그는 눈을 뜨고 구원을 얻었으며, 길가에 머물던 삶에서 벗어나 길 안으로 들어와 예수를 따랐다. 이는 고기 잡던 어부들이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른 모습과도 닮아 있다. 그는 욕심의 ‘나(我)’가 아니라 순수한 ‘나(吾)’를 찾은 것이다.
장자의 오상아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삶의 방향을 일깨워 준다. 욕심과 집착을 내려놓고, 자신만을 앞세우는 자아를 비우고 잊으라고 말한다. 그렇게 욕망의 ‘나(我)’를 내려놓을 때, 비로소 참된 ‘나(吾)’를 만날 수 있다고 말한다.
2026. 05. 16. 최동석 신부의 느릿한 장자 여행 강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