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062
12월4일[대림 제1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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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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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Hzu7eDZqgsQ
[의정부교구 김현균 야고보(탄현동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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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는 동료 인간들의 추위와 굶주림, 결핍과 고통을 외면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피정집을 운영하면서 여러 가지 신경 쓸 일이 참 많습니다. 그중에서 제가 가장 각별하게 신경을 쓰는 것은 피정 오신 분들이 내집처럼 편안하게 느끼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입니다.
영성 강의도 최선을 다해 준비합니다. 성찰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운영합니다. 마음의 짐을 훌훌 털어놓을 수 있도록 고백성사도 편안하게 보실수 있도록 배려합니다.
그런데 뭐니 뭐니 해도 중요한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정성이 듬뿍 담긴 맛갈진 음식입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좋은 프로그램에 앞서 잘 드셔야, 그뒤로 모든 것이 술술 풀리며 불만이 줄어듭니다.
아마 예수님께서도 같은 생각이셨을 것입니다. 며칠 동안 당신을 따라다니며 말씀을 듣는 군중이, 먹을 것이 다 떨어져 굶기 시작하자, 선포하시는 말씀도 잘 안먹히는 분위기를 파악하셨을 것입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십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마태 15,32)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향한 예수님의 측은지심과 연민의 마음이 크게 돋보이는 장면입니다. 말씀하시는 투가 마치 우리들의 어머니와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들의 어머니들, 어떻습니까? 어떻게 해서든 하나라도 더 먹이고 싶어 안달입니다. 정말이지 귀찮고 짜증이 날 정도로. 예수님의 마음도 우리들의 어머니 같으시니, 참으로 마음이 편안해지고 훈훈해집니다.
빵을 많게 하는 기적을 묵상하면서, 한 가지 든 생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만 그럴듯하게 하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구름 위에 떠 계시기만 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장밋빛 이상만 제시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의 육체적인 질병을 구체적인 치유 활동을 통해서 참으로 고쳐주셨습니다. 당신 자녀들의 육체적인 굶주림을 구체적인 방법을 통해 진실로 채워주셨습니다.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신 기적사화를 영적으로, 상징으로만 해석해서는 절대 안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육체적인 필요성을 눈여겨 보십니다. 우리 인간이 느끼는 고통을 당신도 느끼고 계십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간절히 바라고 계시는 바 한 가지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건강을 잘 유지하고, 굶주리지 않고, 고통받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동료 인간들의 추위와 굶주림, 결핍과 고통을 외면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들이 영적으로는 물론 육적으로, 결국 전인적(全人的)으로 구원되도록 돕고, 그를 통해 천상 잔치에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동반해야 할 것입니다.
광야에서 일어난 빵을 많게 하신 이 기적은 모세가 광야에서 기적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인 만나 사건을 연상케 합니다. 여자들과 어린이들을 포함해서 4천 명의 장정들을 배불리 먹고도 남은 조각들이 일곱 바구니에 흘러넘쳤습니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풍요로움, 즉 하늘나라의 풍요함을 의미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기적이 완전무결한 기적이었음을 의미합니다. 빵을 많게 한 기적, 모든 군중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은 이 기적을 통해 우리는, 하늘나라의 풍요로움과 천상의 메시아 잔치를 미리 맛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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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bNASAQIYg7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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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는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에 사용된다>
오늘 봉헌에서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에서 당신을 따르던 이들의 병을 고쳐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배고프게 돌려보내서 쓰러지는 일이 없도록 그들을 먹이려고 하십니다. 이를 위해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제자들의 빵이 없었으면 기적을 하시지 않으셨을까요? 그분은 마치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시는 것처럼 그럴 능력이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도 무언가 요구하시는 이유를 알아야만 합니다.
중국 소설 『나는 남편을 파산시키려고 매일 열심히 일한다』는 자기 삶이 미리 정해졌다고 믿는 여성 린멍(Lin Meng)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부유하고 헌신적인 남자인 그녀의 남편은 더 큰 성공을 거둔 후 그녀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재혼하게 될 운명입니다. 린멍이 그렇게 믿는 것입니다. 린멍은 그래서 남편의 사업을 망하게 하려고 결심합니다.
그녀는 남편의 돈으로 실패한 엔터테인먼트 프로젝트에 투자하고, 값비싼 직원을 고용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남편의 자원을 고갈시킬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은 당황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녀의 행동에 저항하거나 의문을 제기하는 대신 그녀의 새로운 노력과 꿈을 지원합니다. 남편을 파산시키기 위해 쉬지 않고 노력하는 동안 예상치 못한 성공이 뒤따릅니다. 그녀가 자금을 조달한 영화는 실패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대 히트가 되었습니다. 그녀가 쇼를 위해 고용한 값비싼 유명인은 기록적인 시청률을 기록합니다.
그녀의 가장 무모한 사업 결정조차도 예상치 못한 이익을 가져옵니다. 그녀의 노력은 파멸을 초래하기는커녕 자신만의 제국을 건설하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자신을 운명의 희생자가 아니라 남편의 그늘을 넘어 자신의 정체성과 가치를 형성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남편도 아내인 린멍을 더 존경하는 눈으로 바라보며 더욱 신뢰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그녀를 단순히 사랑하는 아내가 아니라 엄청난 힘과 비전을 지닌 파트너로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왜 요구하셨을까요? 단순히 당신에게 받은 것에 감사하기만을 위하셨을까요? 아닙니다. 본래 그들은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어야 했습니다. 그 일에 그들이 봉헌한 것이 쓰여 자신들도 하느님의 일에 합당한 사람이라고 여기고 하느님도 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저도 신학생 때 유학을 다녀오고는 공부가 쉽지 않음을 알고 신부가 되었을 때 다시 유학 가라고 하셨을 때는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느낍니다. 주교님이 저에게 있는 무언가를 요구하시는 이유는 상호 존중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내가 그분을 위해 아무것도 봉헌하지 않는다면 본당에 나가 본당신부를 하였어도 크게 고마워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물론 저 자신도 그분께 합당한 사제가 아니라고 여겨 적당히 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인간의 죄를 위해 모든 보속을 해야 더 완전하겠지만 예수님은 당신 혼자 모든 것을 이루길 원치 않으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명확하게 예수님의 보속에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꺼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 수난의 부족한 부분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골로 1,24)
저는 신자들에게 봉헌을 강조합니다. 그 이유는 그 봉헌된 것으로 신자들에게 다시 돌려줘 그것으로 선교할 자금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소공동체에 돌려줘 가정방문 할 때 선물을 사라고 하고 가두 선교할 때도 다른 사람들에게 선물을 나누어주라고 합니다. 그것들은 모두 봉사하는 그분들이 낸 교무금과 헌금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게 저는 신자들을 존경하게 되고 신자들도 본당 신부에 합당한 신자라는 자부심을 가지게 됩니다.
1849년 세관의 검사관으로 일하던 어떤 사람이 직장에서 해고당했습니다. 아내는 오히려 기뻐하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당신이 좋아하는 문학을 본격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네요. 아마 이 해고가 당신에게 좋은 기회가 될 거예요.”
그리고 아내는 현금 뭉치가 든 작은 가방을 가져와 꺼내 놓으며 또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혹시나 해서 당신 봉급에서 지금까지 따로 마련해 놓았어요. 당신이 글을 쓸 동안 우리는 이 돈으로 살아갈 수 있을 거예요.”
그 남편의 이름은 너새니얼 호손이고 그가 그렇게 해서 쓴 소설이 유명한 ‘주홍글씨’입니다. ‘주홍글씨’나 ‘큰 바위 얼굴’과 같은 위대한 소설을 집필하게 된 것에 어떤 누구도 호손이 자기 능력만으로 그렇게 할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영광은 아내와 함께 받아야 정당할 것입니다.
부부가 함께 무엇을 이루어냈을 때 그것이 누구의 공로인지 정확히 나눌 수 없습니다. 다만 두 사람이 함께 같은 영광을 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 부부가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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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이스트 프리스코의 반 모임에 다녀왔습니다. 본당에서 교우들을 만나는 것도 기쁨이지만, 반 모임에서 만나는 것도 제게는 큰 기쁨입니다. 다섯 부부와 아이들이 함께했습니다. 저를 포함 11명이 복음을 읽고 느낌을 나누었습니다. 자매님은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라는 말씀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영화 ‘암살’에서 배우 이정재가 이런 대사를 하였습니다. “내가 해방될 줄 알았으면 친일파로 살았겠나!” 일제 강점기에 친일파로 살았던 사람은 대한민국이 그리 쉽게 독립할 줄 몰랐습니다. 자매님은 암살 이야기를 하면서 언젠가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때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서 세상을 자기의 뜻대로 산 사람도 이렇게 말할 거라고 했습니다. “내가 하느님 나라가 있는 줄 알았으면 하느님의 뜻대로 살았을 텐데!” 우리 신앙인들은 하느님 나라가 있음을 믿기에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고 복음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형제님은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른다는 말씀을 나누면서 사이비 종교가 사람들을 현혹한다고 하였습니다.
형제님은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씀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대학생 때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을 읽고 충격받았다고 했습니다. 책은 예수님은 예언자 중의 한 명이라고 했고,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내용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고,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었는데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이고, 복음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과 말씀이고, 복음은 죽었지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인데 사람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만을 생각하면 그럴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한 형제님은 ‘영원한 생명’이라는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작년에 세례받으면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사제가 세례 대상자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청합니까?’ 그러면 세례 대상자는 대답합니다. ‘신앙을 청합니다.’ 사제는 또 묻습니다. ‘신앙은 여러분에게 무엇을 줍니까?’ 그러면 세례 대상자는 대답합니다. ‘신앙은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세례받았을 때 응답했던 말이 생각났다고 합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고 합니다.
저도 ‘그날과 그 시간’이라는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고통을 느낀다면 당신은 살아 있는 것이고, 당신이 타인의 고통을 함께 아파한다면 인간입니다. 당신이 믿는 종교를 타인에게 설명하기보다는 당신의 행동을 보고 사람들이 당신이 믿는 종교를 이해하게 하십시오.’ 톨스토이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은 지금이고,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은 지금 함께 있는 사람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일은 지금 함께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과거는 지금 하는 일이 쌓인 것이고, 미래는 지금 하는 일들로 채워지기에 인생에서 중요한 건 바로 지금입니다. 그러니 지난 일 때문에 후회하지 말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지 말자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영원한 생명은 ‘상태’의 개념이 아니라 ‘존재’의 개념이라고 말했습니다. 11명이 복음 말씀을 나누니 말씀의 식탁이 풍요로워졌습니다. 반장님이 본당 소식을 전하고, 실천 사항을 정하면서 복음 나누기를 마쳤습니다. 복음 말씀이 살아 있는 그곳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오늘도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나라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 오늘 복음은 이사야 예언자가 꿈꾸었던 하느님 나라가 현실이 되고 있음을 이렇게 선포합니다. “말 못 하는 이들이 말하고 장애인들이 온전해지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눈먼 이들이 보게 되자, 군중이 이를 보고 놀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저도 반 모임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꿈꾸었던 하느님 나라가 현실이 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하며,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나는 반 모임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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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5,29-37: 많은 병자를 낫게 하시고, 빵의 기적을 베푸심.
예수님께서는 산으로 가시어 자리를 잡고 앉으셨다. 사람들이 다리 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장애인들과 말 못 하는 이들을 예수님께로 데려온다. 그분의 옷자락을 잡는 데 그치지 않고 그분의 발치에까지 온다. 그들은 신앙을 표현하고 있다. 다리를 저는데도 불구하고 산으로 애써 올라왔고, 산에 오른 다음에는 그분의 발치에 있기만을 바라고 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으로 치유된다. 사람들은 비록 외딴곳이었지만,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는 것에 지칠 줄 몰랐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32절) 제자들이 사람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더라도, “이 광야에서 이렇게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이만 한 빵을 어디서 구하겠습니까?”(33절)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북돋우고 그들이 더욱 동정심을 느끼도록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34절) 물으신다. 예수님은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주린 자를 먹여 주신다. 우리는 인간에 대한 예수님의 자비, 불쌍히 여겨주시는 마음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다. 이 차별 없고 순수한 사랑을 우리가 실천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변화뿐 아니라 세상의 변화도 이룰 수 있다.
복음은 이 기적 사화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엘리야나 엘리사보다도 더 훌륭한 분이심을 말하고 있다. 또한, 모세와 같은 예언자라는 사상도 들어있는 것 같다. 그 옛날 모세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로 먹인 것처럼 예수께서는 외딴곳에서 백성을 먹이신다. 예수님은 기도하신 다음 빵을 나누어 주신다. 이제 우리는 이웃에게,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자비심을 갖고 우리와 같은 형제로 대해주는 그래서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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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저 군중이 가엾구나.”(마태 15,32)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으로 “다리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못하는 이들”(15,30)을 고쳐 주시는 것으로 만족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굶주림까지도 해결해 주시고자 ‘빵의 기적’을 일으키시며, 당신을 따르는 군중을 향한 사랑과 애정을 온전히 드러내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에서 일으키신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한 이는 바로 ‘군중’이었습니다. “그러자 많은 군중이 다리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못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왔다.”(15,30)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이 가장 필요한 이들을 예수님께 데려갈 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넘치는 사랑을 보여 주십니다. 그 사랑을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한 이들에게만이 아니라 그들을 데려간 우리에게도 주십니다. ‘빵의 기적’은 치유 기적을 체험한 이들만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있던 모든 사람, 바로 ‘군중’을 위하여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는 주님의 산으로 오는 이들에게 하느님께서 궁극적으로 이루어 주실 은총에 대하여 알려 줍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이사 25,8) 그리고 이 말씀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이루셨습니다.
대림 시기 동안 우리도 ‘군중’이 되어 보면 어떨까요? 하느님의 은총이 가장 필요한 이들을 예수님께 데려갈 때, 예수님의 ‘가엾은 마음’은 은총이 필요한 그들과, 우리 모두에게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시며 죽음을 없애 주신 구원’을 체험시켜 줄 것입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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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은 모든 것을 원상복구하려고 오신 메시아입니다.>
“많은 군중이 다리 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 못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왔다. 그들을 그분 발치에 데려다 놓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그리하여 말 못하는 이들이 말을 하고 불구자들이 온전해지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눈먼 이들이 보게 되자, 군중이 이를 보고 놀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 광야에서 이렇게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일 만한 빵을 어디서 구하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하시자, 그들이 ‘일곱 개가 있고 물고기도 조금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땅에 앉으라고 분부하셨다. 그리고 빵 일곱 개와 물고기들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에 가득 찼다."(마태 15,30-37)
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메시아” 라는 증언입니다. 대림 시기는 모든 억압과 고통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고 구원해 주시는 메시아, 즉 구세주를 기다리는 시기이고, 메시아(구세주) 예수님께서 주시는 해방과 구원을 잘 받기 위해서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30절-31절의 ‘예수님께서 장애자들을 고쳐 주신 이야기’는 앞의 11장에 있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요한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마태 11,2-6)
여기서 예수님 말씀은, 당신이 실제로 하시는 일을 설명하신 말씀이기도 하고, 구약성경 이사야서의 예언을 인용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날에는 귀먹은 이들도 책에 적힌 말을 듣고,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이사 29,18)
이 예언은 ‘메시아 시대’에 대한 예언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바로 그 메시아, 즉 인간들을 구원하려고 오신 구세주이신 분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여러 가지 신체장애를, 인간들을 괴롭히는 여러 가지 억압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굶주림의 고통’도 그런 고통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래서 ‘사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해방과 구원을 주려고 오신 메시아”라는 증언입니다.>
2)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하시는 일에 관해서, 마르코복음에 있는 다음 이야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서 말하였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마르 7,32-35.37)
여기서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를 원문대로 번역하면, “저분이 모든 것을 좋게 하셨다.”인데, ‘좋게 하다.’라는 말은, 천지창조 이야기에 반복해서 나오는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에서 온 표현입니다. 그래서 “저분이 모든 것을 좋게 하셨다.”는 “저분은 고장 난 이 세상을 고쳐서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던 처음의 상태로 회복시켜 주시는 메시아시다.”라는 뜻이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입니다."(로마 5,17)
<한 사람의 죄로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다는 말은, 원죄 때문에 세상이 온통 망가지고 고장 났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이 세상과 인간들을 고쳐서 원상복구하시는 분, 즉 메시아이신 분입니다.>
3) 하느님 앞에서 완전하고 완벽한 인간은 없습니다. 이야기 속의 장애자들과 배고픈 사람들은 곧 나(우리) 자신입니다. 예수님은 나(우리)를 고쳐 주시고,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이야기 속의 ‘군중’과 ‘장애자들’을 따로 구분해서 생각할 이유가 없습니다. 여기서 ‘군중’이라는 말은 장애자들과 병자들을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비장애인이 장애인들을 데리고 온 단순한 상황이 아니라, 절박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함께 온’ 상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고쳐 주신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완전해지는 것도 아니고, 저절로 구원받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쪽에서도 최선을 다해서 응답해야 하고 또 스스로 노력해야 합니다. 종말의 하느님 나라는 ‘한처음의 완전함’이 회복된 나라이고, 신앙생활은 그 ‘완전함’에 참여하기 위해서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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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회 故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어 거기에 자리를 잡고 앉으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다가왔다. 그 중에는 절름거리는 사람, 눈먼 이들, 다른 불구자와 말 못하는 이들이 있었다.
하늘나라란 무엇인가? 이런 병으로 고생하는 이들이 모두 치유되어 건강한 모습으로 하느님과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그런 하늘 나라는 죽음 다음에 들어가는 나라가 아니라 이미 여기에서 맛볼 수 있고 체험될 수 있는 나라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라고 말씀하신 대로 이런 병자들을 고쳐주러 오셨기 때문이다.
오늘날 예수님은 이런 병자들을 누구를 통해서 어떻게 고쳐주시는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이 "빵 일곱 개가 있고 물고기도 조금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예수님은 그것을 손에 드시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제자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준 빵은 무슨 빵인가? 예수님은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요한 6,51)라고 말씀하셨다. 살아있는 빵이란 무엇인가?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라고 베드로가 말한 대로 빵은 "생명의 말씀"이다.
오늘날 우리가 병든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할 빵은 바로 "생명의 말씀"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병든 것은 아모스 예언자가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것이 아니고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아모8,11)라고 말씀하신 대로 생명의 빵인 영원 생명을 주는 말씀을 먹지 못한 데에서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그리스도인은 "하늘 나라의 교육을 받은 율법학자는 마치 자기 곳간에서 새 것도 꺼내고 낡은 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마태 13,52)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생명의 말씀을 먹고 그것을 자기 곳간에서 나누어 주는 사람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란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거기에서 생명을 얻고 거기에서 병을 치유 받고 거기에서 배불리 먹고 그것을 나누어 주는 사람이다. 하늘 나라는 이 생명의 빵을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 안에서 체험되고 건설되는 나라이다.
오늘 우리는 우리 주위 사람들에게 이 생명의 말씀을 나누어 주라고 불리움을 받고 파견되는 사람이다.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먹은 사람만이 생명의 빵을 병든 이웃에게 나누어 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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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님]
‘주님의 기도’는 기도하는 법을 알려 달라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이 기도를 바칠 때 먼저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고 청합니다.(루카 11장 참조) 그렇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대림 시기 동안 하느님 나라가 오기를 청하며 동시에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를 기다립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우리가 기대하는 미래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려 줍니다.
우선 이사야 예언자는 산 위에 마련된 기름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베푸시는 성대한 잔치로 하느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준비하신다고 선포합니다. 이사야는 그 나라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성대한 잔치가 열릴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물론 이 비범한 잔치를 베푸시는 분께서는 ‘만물의 주님’이시며 잔치는 ‘모든 민족들’에게 열려 있습니다. 이 잔치에서 하느님께서는 마침내 죽음을 영원히 없애시고 당신 백성의 눈물을 닦아 내시어 구원을 이루실 분으로 제시되십니다.
이사야가 묘사한 하느님 나라에는 은총과 기쁨이 충만합니다. 다만 우리가 그 성대한 잔치에 앉기까지는 시간이 걸립니다. 하느님 나라의 성대한 잔치에 초대받았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기에 희망을 간직하고 있지만, 이에 합당한 우리만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이 이를 잘 설명합니다. 갈릴래아 호수로 가신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자리를 잡으십니다. 그러자 많은 군중이 다리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못하는 이들을 데려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시고,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빵 일곱 개와 약간의 물고기로 굶주린 백성을 모두 배불리 먹이십니다.
하느님 나라가 오기를 청하며 예수님을 기다리는 일은, 주님과 함께 치유하고 용서하며 섬기는 일에 동참함으로써 완성됩니다. 우리 주변에 어려운 이웃들을 주님 앞에 데려오고 가진 것이 부족하더라도 함께 나누는 것이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해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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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그 안에 담겨진 사랑이 있으므로>
+ 찬미 예수님
신학생이었던 시절 필리핀으로 봉사활동을 갔을 때의 일입니다. 북쪽 오지에서 봉사활동을 마칠 즈음 제가 묵었던 가정집에서 마지막 저녁식사가 열렸습니다. 석별의 정을 나누는 저녁식사라고 하면 성대한 잔치가 예상되시겠지만 제가 지냈던 지역은 한 달 평균 소득이 한국 돈으로 이천원 남짓한 아주 가난한 곳이었습니다.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온 가족이 모였고, 저를 돌봐주셨던 나이 지긋한 어머니께서는 저를 위해서 아껴둔 것이 있다며 요리를 꺼내 놓으셨습니다. 그 요리는 다름 아닌 해산물, 즉 증기에 찐 게였습니다.
감사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린 뒤 요리를 바라보니 게 껍데기의 구석구석에 먼지가 보였습니다. 아무래도 꽤나 오래전에 요리를 한 뒤 먹지 않고 따로 보관한 음식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쌀밥을 덜어주시는데 그 아래에는 살아있는 작은 개미들이 보였습니다. 오랫동안 그들과 살지 않았다면 도무지 먹지 못했을, 그리고 여전히 선뜻 손을 대기에는 어려운 음식이었지만 저는 차려진 식사를 끝까지 다 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지막 이별 선물로 마음을 담아 차려주신, 그 식사에 담긴 어머니의 마음을 결코 거절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식사를 마칠 때까지 앞에 앉아 저를 지긋이 바라보시던 사랑 가득한 눈빛을 저는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약 15년이 지난 지금도 이따금씩 그 가족들은 잘 지내고 있을지 떠올리곤 합니다.
이처럼 음식을 베푼다는 것, 무언가를 먹이고자 하는 마음은 사랑을 기반으로 합니다. 그리하여 시골에 계신 할머니들은 손주들이 오면 반찬 하나라도 더 손에 들려 보내고 싶어 합니다. 부모님들은 자녀들을 위해 기쁜 마음으로 영양가 있는 식사를 준비하고, 후손들은 돌아가신 분들을 기억하며 제사 음식을 차립니다.
이렇듯 식사란, 누군가에게 마음을 드러내는 가장 원초적인 표현 방식인 셈입니다. 저 역시 주일학교 교사들이 일을 마치면, 혹은 저를 찾아오는 손님들이 있으면 가능한 무엇이라도 먹여서 돌려보내고자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사랑의 행동을 보여주십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현재의 우리들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자비로운 시선과 측은한 사랑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에서 명확히 드러납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
오늘 복음이 이야기 하듯, 이 군중은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 불구자들과 말 못하는 이들입니다. 기적을 통해 예수님으로부터 병을 치유 받은 이들은 이제 먼 길을 돌아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렇듯 기적을 베푸신 후에도 예수님의 시선은 이들의 인간적 상황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리하여 육체적인 고달픔을 자기의 일처럼 여기시며 무엇이라도 먹이고 싶어 하십니다.
이 이야기에서 가엾은 군중은 우리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고통 중에 처해있는, 혹은 짊어지고 있는 어려움에 해결을 청하는 우리들은 주님의 입장에서 이토록 측은하고 마음이 쓰이는 존재인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은 최후의 만찬,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의 고통까지 모두 연결됩니다.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에 측은함이 없고 사랑이 담겨져 있지 않았다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겪으신 모든 고통은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의 상황을 아셨기에 사랑하는 제자들을 불러 모아 빵을 쪼개어 나누어주시고 포도주 역시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성체성사를 제정하심을 통해 언제까지고 당신의 식사를 우리에게 베풀어주고자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삶에서 지쳐가는 우리들, 먼 길을 돌고 돌아 주님께 다가가는 우리를 위해 언제나 무언가를 먹이고자 배려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먹이는 행위”는 당신의 몸을 직접 희생함으로써 극적으로 완성됩니다.
가난한 부모가 자신의 배고픔은 꾹 참고 푼돈을 모아 철부지 어린 아이에게 음식을 사주는 것처럼 이 행위에는 희생과 사랑이 전제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 그리고 그 중에서도 특별히 외롭고 지쳐있는 자들에게 당신을 기꺼이 내어주십니다. 그야말로 인간에게 사랑과 희생으로 지어낸 밥이 되어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언제나 우리의 자리를 살펴주시고 모든 고통을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를 먹여 살리고자 하시는 주님의 사랑에 힘입어 항상 든든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이러한 사랑은 이천년 전에 있었던 일시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 자비로운 시선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성체성사를 통해 지극히 원천적인 그 모습 그대로 전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땅에 앉으라고 분부하셨다. 그리고 빵 일곱 개와 물고기들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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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몇 년 전, 우연히 길에서 고등학교 동창을 만났습니다. 친구가 “와~ 정말 오랜만이다. 잘 지내지?”라고 묻습니다. 이 말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럼 잘 지내지. 너는 어때?”라고 말했습니다. 그 친구도 “나도 좋지. 너 좋아 보인다.”라고 인정해 주었고, 다음에 만나서 못 나눈 이야기를 나누자고 약속하면서 헤어졌습니다. 이 친구와의 만남 뒤에 그 짧은 대화가 계속 기억났습니다. ‘정말로 잘 지내고 있는가?’라는 물음 때문입니다.
사실 당시에 그렇게 잘 지내지 못할 때였습니다. 부모님께서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고, 또 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심적으로 매우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습관적으로 “잘 지낸다”라고 말했던 것은 과연 무엇일까 싶었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약한 모습이 아닌 강한 모습만 보여주려는 마음 때문일까요? 아니면 그냥 습관적으로 나온 말일까요?
우리는 자기를 숨기려는 마음이 일차적인 것 같습니다. 특히 자기의 약하고 부족한 모습은 절대로 보여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허세로 가득 차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자기를 숨길수록 힘들어지는 것은 나약한 ‘나’ 자신이었습니다.
사람에게 보여주기 싫은 모습들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계심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부족하고 나약한 ‘나’를 고백하면서 그분께 위로받고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받아주시는 주님께 솔직하게 자기를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어 자리를 잡자 많은 군중이 몰려듭니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 불구자들, 말 못 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당시에는 상선벌악과 인과관계의 원칙을 내세워서 병을 죄의 결과로 보는 모습이 가득했습니다. 따라서 병이 있어도 숨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집 안에만 갇혀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 앞으로 다가옵니다. 주님께 굳은 믿음을 가지고 솔직하게 자기를 내려놓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말 못 하는 이들이 말하고 불구자들이 온전해지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눈먼 이들이 보게 됩니다.
이렇게 주님께 굳은 마음으로 솔직하게 자기를 내려놓는 사람이 커다란 은총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으로 다가오는 사람을 그냥 되돌아가게 하지 않으십니다. 빵의 기적을 베풀어주십니다. 배고파서 되돌아가다가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를 것을 걱정하시면서 말이지요.
병의 치유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그 이상을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굳은 믿음을 가지고 솔직하게 주님 앞에 자기를 내려놓아야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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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과 사람 그 사이에 사람>
마태오 15,29-37 (많은 병자를 고치시다, 사천 명을 먹이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로 가셨다. 그리고 산에 오르시어 거기에 자리를 잡고 앉으셨다. 그러자 많은 군중이 다리 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 못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왔다. 그들을 그분 발치에 데려다 놓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그리하여 말 못하는 이들이 말을 하고 불구자들이 온전해지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눈먼 이들이 보게 되자, 군중이 이를 보고 놀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 광야에서 이렇게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일 만한 빵을 어디서 구하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하시자, 그들이 “일곱 개가 있고 물고기도 조금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땅에 앉으라고 분부하셨다. 그리고 빵 일곱 개와 물고기들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에 가득 찼다.
<사람과 사람 그 사이에 사람>
“많은 군중이 다리 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 못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왔다. 그들을 그분 발치에 데려다 놓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마태오 15,30)
사람과 사람
그 사이에
사람이 있네
사랑하고픈 사람과
사랑받고픈 사람
그 사이에
사람이 있어
사람이 사랑하고
사람이 사랑받네
사람과 사람
그 사이에
사람이 있네
안고픈 사람과
안기고픈 사람
그 사이에
사람이 있어
사람이 안고
사람이 안기네
사람과 사람
그 사이에
사람이 있네
주고픈 사람과
받고픈 사람
그 사이에
사람이 있어
사람이 주고
사람이 받네
사람과 사람
그 사이에
사람이 있네
먹이고픈 사람과
먹고픈 사람
그 사이에
사람이 있어
사람이 먹이고
사람이 먹네
사람과 사람
그 사이에
사람이 있네
낫우고픈 사람과
낫고픈 사람
그 사이에
사람이 있어
사람이 낫우고
사람이 낫네
사람과 사람
그 사이에
사람이 있네
일으키고픈 사람과
일어나고픈 사람
그 사이에
사람이 있어
사람이 일으키고
사람이 일어나네
사람과 사람
그 사이에
사람이 있네
살리고픈 사람과
살고픈 사람
그 사이에
사람이 있어
사람이 살리고
사람이 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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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의 마음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른 아침, 잠에서 깨면서 ‘살아있구나’ ‘오늘 하루를 또 허락하셨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하느님께서 이날을 허락하신 이유가 있고, 기대하시는 바가 있는데 얼마나 알아듣고 그에 부합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를 성찰합니다. 그리고 하루의 끝에서 허물로 누벼놓은 삶에도 불구하고 지켜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마음이 새로워지면 매일이 새날인데 은총의 새날을 만들지 못한 안타까움에 부끄러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에 가득 찼습니다. 정말 이런 일이 가능한 일입니까? 그렇다면 왜 오늘날엔 기아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그냥 버려두십니까? 그들에게 기적을 베풀어 주지 않으시는 주님이 야속합니다. 영적으로뿐 아니라 육체적인 질병을 고쳐 주셨고, 육체적인 굶주림을 채워주셨던 주님께서 오늘도 여전히 당신의 능력으로 배부르게 해 주시길 청합니다.
사실, 세상의 굶주림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기적을 베풀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나누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제대로 베풀면 세상의 기아는 사라집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아무리 큰 기적을 베풀어 주셔도, 내가 베푸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굶주림은 여전히 계속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기적을 베풀어 주신 의미를 품어 생각하면 능력의 주님을 제대로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어진 은총의 결과물에 매여 있으면 언제든지 풍요롭게 베풀어 주실 수 있는 주님은 뵙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총의 열매보다도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감사를 드리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이 광야에서 이렇게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일 만한 빵을 어디서 구하겠습니까” 하는 마음은 거두어들여야 합니다. 먼저 내놓고 감사하면 더욱 풍성해 집니다.
예레미야서 31장 33절을 보면 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게 된다고 하시며 “주님의 말씀이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겠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나는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하느님이 되신 그분이 오늘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지켜주시고 앞길을 열어주십니다. 허물을 용서하시고 우리를 위해 기적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도구 삼아 당신의 할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고 제자들이 다시 군중에게 나누어준 행위는 바로 나눔의 가르침을 줍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것은 자기들끼리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필요로 하는 모든 이와 함께 나눠야 합니다. 따라서 기적을 보지 말고 오히려 주님의 능력에 응답하여 기적을 이루는 사람, 기적을 전하는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먹고도 남는 일곱 바구니는 주님을 따르는 우리가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군중을 바라보시며 지니셨던 마음은 측은지심, ‘가엾구나’ 하는 마음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녀를 향한 ‘애간장이 녹는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공명하십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바라보는 사람이 많아질 때 예수님의 기적은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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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대림시기”는 자신의 ‘간절한 갈망’과 마주하는 시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프고 어두웠던 암흑의 군사독재 시절에 ‘김지하’ 시인은 그 간절함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 태양도 빛을 잃어/ 아 캄캄한 저 가난의 거리//
어디에서 왔나/ 얼굴 여윈 사람들// 무얼 찾아 헤메이나/ 저 눈 저 메마른 손길//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여기에 우리와 함께/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우리와 함께 하소서.”(금관의 예수)
오늘 <복음>에는 ‘간절한 갈망’으로 목마른 이들, 곧 “군중이 다리 저는 이들과 눈 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 못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산 위로 예수님께 다가왔습니다.”(마태 15,30 참조)
이들은 자신의 갈망을 품고, 더러는 스스로 올라오지도 못해 이끌려와 예수님의 다가왔지만, 그분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이들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 안에 당신의 빛을 불어 넣으십니다. 그들의 질병을 치료하시고,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 주십니다. 고쳐주기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 마음 속 깊은 곳도 환히 보시고, 깊이 숨겨진 못 다한 말도 다 들으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가까이 부르시어 이르십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마태 15,32)
군중은 치유는 받았지만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치유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여전히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마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맞은 사람을 치료해주고 여관으로 데려가 돌보아줄 뿐만 아니라 여관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드리겠습니다.”(루카 10,35)라고 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깊고 깊은 ‘사랑의 신비’를 깊이 새겨야 할 일입니다. 청하지도 않았는데도 이미 먹이시고, 미처 바라지도 못했는데도 이미 용서하시고, 뒷날까지도 가엷게 여기시는 그 저린 마음의 사랑을 말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오히려 “이 광야에서 이렇게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을 만한 빵을 어디서 구하겠습니까?” 하고 걱정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물으십니다.
“‘너희에게는 빵이 몇 개나 있느냐?’ 그러자 그들이 ‘일곱 개가 있고 물고기도 조금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마태 15,34-35)
그렇습니다. “빵”은 ‘이미’ ‘그들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것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 사실’, 곧 우리 가운데 빵이 있다는 ‘알고 있는 이 사실’을 일깨워주시고 확인시켜 주십니다. 그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빵 “일곱 개”는 완전함의 숫자요, 거기에 더하여 ‘물고기’를 가지고 있었으니, 그것은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도 일곱 바구니에 가득 찰”(마태 15,37) 정도였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우리가 가진 것을 충분히 잘 알고 ‘알고’있지만,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의 가치를 ‘찾는 사람’, 곧 “참된 빵”이신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 진정한 순례자요 대림의 길을 걷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광야”에 있지만, 방황하는 이가 아니라 ‘이미 찾은’, ‘이미 와 있는’ 빛을 따라 길을 걷는 순례자로서,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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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군중이 가엽구나.”(마태 15,32)
주님!
당신은 속 깊은 곳도 환히 보시고 깊이 숨겨진 말마저도 다 들으시니,
제 안에 당신이 새겨준 가엾이 보는 마음을 드러내시어,
제 마음이 당신 마음 되게 하소서.
그 마음으로 약한 이들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게 하소서.
제가 당신 마음에 들게 하시고, 당신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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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삶은 선택이자 은총이다>
-하느님의 꿈을, 참행복을 선택합시다-
“제 한평생 모든 날에, 은총과 자애만이 따르리니, 저는 오래오래, 주님 집에 사오리다.”(시편 23,6)
삶은 선택이자 은총입니다. 하느님의 꿈을, 행복을 선택합시다. 그대로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이런 이들이, 하느님의 꿈을, 행복을 선태해 사는 이들이 지혜로운 자들입니다. 옛 현자의 가르침도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혼자만의 즐거움은 아무리 커져도 원래 상태로 되돌아 간다. 즐거움은 나누어야 더 커지고 더 오래간다.”<다산>
“즐거움은 누림을 급히 하지 않아야 늙도록 이어지고, 복은 다 받지 않아야 후손까지 간다.”<사잠>
수도생활 초창기부터 42년 동안 수도원에 정주하면서 참 많이 강조해온 주제가 영적전투와 더불어 하느님의 꿈입니다. 무엇보다도 사람은 꿈이, 희망이, 비전이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존엄한 품격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영적전투를 계속할 수 있는 동력도 이런 꿈과 희망, 비전에서 나옵니다. 참 행복과 기쁨도 하느님의 꿈이, 희망이, 비전이 실현될 때 나옵니다.
한밤중 일어나니 설마설마하던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는 불행한 소식입니다. 오늘 강론 주제와는 너무나도 다른 역사적 퇴보의 비현실적 현실이며 후진국에서도 있을까 말까한 대다수 국민의사에 반하는 비상계엄선포가 국회의 의결대로 속히 해제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며 피해도 최소한으로 끝나길 기도하는 마음입니다. 정말 유능한 정부라면 국민을 꿈꾸게 하고 희망과 비전을 지니게 할 것입니다. 이런 꿈과 희망이 비전이 사라질 때 대다수 국민은 길을, 빛을 잃고 방황하며 마음도 정신도 영혼도 병들기 마련입니다.
하느님만을 찾는 수도자는 물론이고 믿는 모든 이들이 하느님을 꿈꿔야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물론이고 성서와 교회의 모든 사람들을 통해 하느님의 꿈은 실현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면에서 우리 믿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꿈나무와 같은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천상의 꿈이, 희망이, 비전이 사라지면 탐욕의 본능만 남고 세상은 아수라장의 지옥도가 펼쳐집니다. 얼마전 흰눈으로 가득 덮힌 온누리를 보며 예전 써놨던 하늘꿈이란 글이 생각났습니다.
“땅도 춤춘다 추위도 막을 수 없다. 밤새 하늘 꿈꾸고 나니 온통 흰눈 덮인 하얀땅 하늘 은총이 온누리를 덮었네.” <2009.12.>
과거가 사람을 만들지만 하느님 꿈의, 하느님 희망의 미래가 우리를 치유하고 위로하며 하느님의 사람으로 만듭니다. 하느님 꿈의 희망이, 비전이 우리를 하느님을 닮게 합니다. 이사야서의 하느님의 꿈은 얼마나 고무적이요 위로와 힘을 주는 지요!
“만군의 주님께서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 그분께서는 이 산위에서, 모든 겨레들에게 씌워진 너울과 모든 민족들에게 덮인 덮개를 없애시리라.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주시리라.”
‘모든 민족’, ‘모든 겨레’, ‘모든 사람’등 예외없이 모두가 구원되는 그날의 현실을 꿈꾸는 이사야가 당신의 참 아름답고 좋은 꿈을 우리와 나눕니다. 이런 꿈의 사람들은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의 꿈을 실현하며 삽니다. 무지와 죽음의 너울과 덮개를 치워버리고 함께 나누고 서로의 눈물을 닦아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해인생이 아닌 축제인생을 삽니다. 언젠가 그날을 오늘 앞당겨 살며 고백합니다.
“보라, 이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이분께 희망을 걸었고, 이분께서는 이분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희망을 걸었던 주님이시다. 이분의 구원으로 우리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주님의 손이 이 산위에 머무르신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전례 잔치에 잘 어울리는 우리의 하느님 고백입니다. 이사야 예언자야 말로 부단히 하느님을 꿈꿨던 희망의 사람, 비전의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이사야의 하느님 꿈을 고스란히 계승하고 있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며 그대로 하느님의 꿈이 예수님을 통해 실현됨을 봅니다. ‘고치시고’ ‘먹이시는’ 잔치를 통해 실현되는 하느님 나라 잔치의 꿈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발치에 데려다 놓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주셨다. 그리하여 말못하는 이들이 말을 하고, 불구자들이 온전해지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눈먼 이들이 보게 되자, 군중이 이를 보고 놀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예수님을 만날 때 온전한 치유요 하느님 나라의 실현임을 깨닫습니다. 이어 빵 일곱 개와 물고기들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나누어 주었고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합니다.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바구니에 가득합니다.
없어서 가난과 굶주림이 아니라 나누지 않아 가난이요 굶주림이니 이는 하느님 책임이 아니라 우리가 나누지 않은 책임입니다. 정말 하느님을 꿈꾸는 희망의 사람, 비전의 사람은 하느님의 꿈나무가 되어 그 사랑의 열매를 부단히 나누는 사람들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하느님의 나라 미사잔치가 우리 모두 하느님을 꿈꾸며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를 앞당겨 살게 하십니다.
“보라, 당신 백성 구원하러 주님이 오시리니, 주님을 맞이하러 달려가는 이는 복되어라.”(복음 환호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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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산을 오르는 이유>
“그날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
오늘도 어제 그제와 마찬가지 구조입니다. 독서 이사야서의 예언이 복음의 예수님에 의해 실현되는 구조입니다.
만군의 주님께서 산 위에서 잔치를 베푸실 거라는 이사야 예언대로 복음의 주님께서 산 위에서 사천 명을 위한 잔치를 베푸십니다.
그런데 눈치채셨겠지만 이 잔치는 등산객들의 술판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거한 파티를 즐기는 이들의 잔치도 아닙니다.
이사야서도 그렇고 복음도 그런데 이 산 위에 오를 이들은 모두 다리 절고 눈멀고 말 못하는 불구자들이며
그래서 세상에서 수치를 당하고 눈물을 흘리는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거기에 자리를 잡고 앉으셨다. 그러자 많은 군중이 다리 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 못하는 이들과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왔다.”
사실 건강하고 이 세상에서 잘 나가는 사람들이 굳이 산에 오르진 않을 것입니다. 불구자들과 불구로 인해 수치와 설움을 당하는 이들이나 산 위에서 치유와 위로와 구원을 받기 위해 오를 것입니다.
“이 산 위에서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주시리라.” 이제 이해가 됩니다. 왜 주님께서 다리 저는 이들을 산에 오르게 하시는지. 평지도 걷기 힘든데 다리 저는 이들이 왜 산을 오르는지.
왜 앞을 못 보는 이들을 주님께서 산에 오르게 하시는지. 도우미 없으면 오를 수 없는 산을 왜 맹인들이 오르는지.
이 산을 오르게 하는 것은 성한 다리가 아닙니다. 이 산을 오르게 하는 것은 올라야만 할 필요이고,
오르고자 하는 열망입니다.
다리가 성해 이 세상 여기저기 신나게 구경 다니고 싸돌아다니느라 산에 가는 것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는 우리는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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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그리고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마태15,30ㄴ.37ㄱ)
<함께 기뻐하자!>
오늘 복음(마태15,29-37)은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를 고치시는 말씀'과 '사천 명을 먹이시는 말씀'입니다.
많은 군중이 다리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못하는 이들과 또 다른 많은 이들을 예수님 발치에 데려다 놓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께로 몰려온 많은 군중을 보시고 측은지심을 드러내시어,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빵 일곱 개와 물고기들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군중에게 나누어 주어 그들을 모두 배불리 먹이십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이신 예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아픈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평화와 기쁨을 잃고 살아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는 비구원의 상황인 죽음의 상황을 드러내는 표지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런 사람들을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희년의 기쁨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ㄴ-19)
그리고 오늘 독서(이사25,6-10ㄱ)도 바로 그런 사명을 갖고 오시게 될 메시아에 대한 희망과 기쁨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이사25,8)
내가 먼저 주님께로 나아가 기쁨이 되고, 그래서 너도 이 기쁨으로 초대해 함께 기뻐하는 기쁨(부활.구원)이 됩시다!
계엄이라니???
계엄은 비구원,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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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마태 15, 37)
하늘 아래
있어서는 안될
일이 우리에게
다시
일어났습니다.
간밤에
우리는
모두
간절한
마음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시대정신에
한참
뒤떨어진
진풍경을
아픈 마음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단 한 번도
빵이 되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어리석게도
자기 스스로를
몰락으로
몰고 갑니다.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께서는
그 어떤 권력에도
끌려다니지
않으십니다.
목숨을
내놓지는
못할지언정
목숨을
위협하는
뻔뻔한 작태를
더 이상
좌시해서는
안됩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끝나는
어리석은
거짓의
삶입니다.
행복과 평화를
만드는 빵이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다시
가르쳐 주십니다.
가치와
양심으로
돌아가야 할
생명의
대림시기입니다.
무의미하고
가치 없는
썩어 있는
빵은
결코 모두를
배불리
먹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을
새롭게 하는
생명의 빵은
오늘도
자신의 목숨을
우리에게
내놓습니다.
우리에게는
다시 뜨겁게
살아야 할
생명의 빵이
있습니다.
생명의 빵에서
출발하는
희망의
새날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생명의 빵은
평화를
망가뜨리지
않습니다.
평화를 되살려
우리에게 주실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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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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