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가 많은 날이다.
그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다가 허겁지겁 다시 올라가서 휴대폰을 챙겨 나온다. 은행에 들러서 출금전표를 쓰고 도장을 찍더니 얼굴을 찡그리며 난감해한다. 다른 도장을 가지고 온 모양이다. 다시 돌아가기도 뭣한지 엉거주춤 그렇게 한참을 서 있다. 아마 그런 자신이 미워졌는지도 모르겠다.
버스에 올라서는 교통카드를 왜 현금 넣는 곳에 대고 있었을까? 차에 오를 때마다 곧장 해오던 일상적인 일이지 않은가. 운전기사로부터 지청구를 듣게 되는 빌미를 준 것이다. 굳이 이유를 찾는다면 전송하는 이와 작별 인사의 말을 건네며 손을 흔들고 한 손으로는 카드를 찍으려다 그리된 것인가 싶다. 세 가지 동작을 한꺼번에 하기에는 너무 짧은 순간이다. 요즘 들어 부쩍 행동이 굼뜨고 얼굴이며 걸음걸이가 나이티를 제법 내고 있는 데다 이런 일까지 보태다니. 그다지 젊지도 않으면서 영화로 치면 3차원 영화를 찍듯 다중 작업을 한 셈이다.
거기다가 운전기사까지 까칠하게 대할 게 뭐람. 저상버스를 모는 사람이 아닌가. 그녀보다 한참이나 느린 동작으로 위태롭게 차에 오르는 이도 많이 보았는데, 그럴 때마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날선 말을 날릴 게 아닌가. 친절이 몸에 배야 하는 처지도 그렇지만 건강에도 그다지 좋을 리 없을 텐데. 어떤 이는 마이크를 착용하고 손님들이 차에 오르내릴 때마다 인사를 너무 잘 해서 기분이 좋아지게 했다. 내리는 승객의 대답도 유쾌하게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그런 날, 승객들은 살맛이 났을 테고 조금 착해지는 걸 느끼지 않았을까.
얼굴은 겉으로 봐서는 평온해 보였지만 방귀 뀐 사람이 성낼 수도 없는 처지라 내색을 못하는 것뿐인가 보다. 우선 무안해서 조용히 자리에 가 앉는다. 마치 오리들이 떠다니는 잔잔한 수면과 달리 물밑에는 붕어와 송사리 떼들이 이리저리 몰려다니듯이 마음이 붐비고 있을 테다. 아니면 나이테를 들여다보게 하는 일들을 떠올리며 가슴 한구석이 무너지는 소리를 듣고 있을는지. 승객들은 그다지 예민하게 굴 필요까지 없는 일이어서인지 무심한 표정이다.
한때는 텔레비전을 시청하며 이것저것 치우고 아이들을 닦달해서 등교시킬 정도로 눈과 귀를 열어놓고 손발을 바쁘게 움직였다. 기계도 오래 쓰면 기능이 떨어지듯 부리던 몸도 용량이 축소되어 가는데 상심하고 있는 그녀에게 위로가 필요해 보였다. ‘그럴 수도 있지 뭐’, ‘누구나 그때가 되면 그 길을 간다.’는 말로 다독거려주고 싶다.
젊어서는 욕망과 불안이나 고민들로 마음이 복잡해지면 그저 단순해져보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지 않았던가. 무인도나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 살고 싶다고. 이제 바라던 단순함이 이루어지려고 하지 않은가. 해 저물녘의 놀빛은 저리도 아름다운데, 너도 맞고 나도 맞이할 저물녘은 그게 아닌가 보다.
그녀는 곧잘 한 가지 일에 초점을 맞추어서 클로즈업시킨다. 사진작가들이 꽃밭을 배경으로 인물을 찍을 때 배경을 흐리게 처리하는 아웃포커싱이 있다. 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인물의 머리카락은 안개처럼 흐린 꽃무리 속에서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예술 사진이라면 아름다운 장면이 되겠지만, 일상에서는 주변을 보지 못하고 반쪽만 보면 감동이 아니라 感傷이 될 것이다. 하루에 한 가지 일을 겨우 마치고 소파에 기대거나 조금 전의 일은 까맣게 잊고 있다가 놀라서 허둥거리는 일이 잦다. 얼마 전만 해도 부엌에서 국 냄비를 얹어놓고 자리를 비웠다가 냄비가 까맣게 타는 위험천만한 일이 있었다.
어제 일이다. 문상을 다녀오는 길에 상가에서 오랜만에 만난 사촌오빠와 버스를 같이 타고 오게 되었다. 세월만큼이나 쌓였던 회포를 푸느라 두 사람은 기분 좋게 들떠 있었다. 그는 거추장스런 코트를 벗어 선반에 얹으며 ‘혹시 잊을지 모르니 내릴 때 챙겨 달라’는 부탁을 했다. 요즈음 들어 자주 일어나는 건망증 이야기를 예로 들며 ‘부탁한 말 자체마저 잊어버리는 수가 있다’고 대꾸를 했다. 두 사람은 도착할 때까지 이야기에 몰두했으면서도 헤어질 때는 못내 아쉬워했다.
말이 씨가 되었는지 아침에 사촌오빠로부터 전화가 왔다. 같이 탔던 버스회사를 물었다. 그때서야 옷을 챙겨달라는 그의 말이 떠올랐고 지금까지도 까맣게 잊고 있었는지 그녀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종일 마음을 졸이다가 저녁에 그에게 전화를 건다.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겨우 연락이 닿았지만 옷은 없다고 했다. 걱정이 현실이 된 것이다. 시트콤이라면 유쾌하게 웃고 말았겠지만 남에게 손실을 입히는데 한몫을 했으니 궁색하게 더 찾아보자는 말을 전한다.
애면글면해봤자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옷이 나와 인연이 다했다’는 말을 듣자 자기들 부부도 그런 일이 자주 생기다 보니 바보들의 행진이라고 말하면서 웃는다고 전한다. 그에게 동지애 같은 것을 느꼈나 보다. ‘나이 든다는 건 그렇게 좀 모자란 듯 살라는 뜻일 거예요. 천지개벽이 나거나 전쟁이 터진 게 아니니 나이테가 늘어서 나이티 좀 냈다고 고민하지 말아요.’ 자신에게 할 말을 그에게 한다. 비슷한 처지에 겪게 되는 건망증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지 유쾌한 웃음소리가 방안에 가득하다.
그녀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사람은 낯선 나다.
(송복련 님의 수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