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스님의 법석에 흠이 없으려면 李參政 漢老 問書
邴이 近扣籌室 伏蒙激發蒙滯입새 忽有省入이라. 顧惟하니 根識이 暗鈍하여 平生學解가 盡落情見이니라. 一取하면 一捨하며 如衣壞絮하고 行草棘中하듯 適自纏繞라. 今 一笑에 頓釋하니 欣幸을 可量이리오. 非大宗匠의 委曲垂慈라면 何以致此리오.
제가 요즈음 큰스님을 뵙고 어리석음을 일깨워 주는 가르침을 받았기에 공부에 갑자기 진전이 있습니다. 돌이켜 생각하니 근기가 아둔하여 평생 배워서 아는 것이 모두 알음알이에 떨어졌던 것입니다. 알음알이를 하나 취하면 다른 하나를 버리며 헤진 솜옷을 입고 가시밭을 가득 자신을 얽어맸던 것입니다. 이 얽힌 매듭을 지금 한 웃음에 단박 푸니, 기뻐서 행복한 마음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대종장(大宗匠)의 자비로운 가르침이 아니라면 어찌 여기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李參政: 이참정의 호는 脫空 거사로서 시호는 文敏이다. 진사에 급제하고 여러 번 한림학사에 추천되었으며, 고종이 즉위하자 병부시랑에 임명되었다. 쓴 책은 「초당집」 100권이 있다.
籌室: 주실은 제 4조 우파국다 존자가 한 사람을 제도할 때마다 작은 막대기 하나씩 모으더니, 나중에 방안을 가득 채우게 되었다. 뒷날 이 방안의 막대기로 그의 다비식을 치렀다. 그 뒤 제방에서 오는 납자를 맞아 교화하는 곳을 존칭해서 주실이라 불렀다.
自到城中으로 著衣喫飯하며 抱子弄孫하여 色色仍舊하되 既亡拘滯之情하고 亦不作奇特之想하며 其餘宿習舊障도 亦稍輕微이니 臨別叮嚀之語는 不敢忘也니라. 重念에 始得入門이나 而大法을 未明하여 應機接物에 觸事未能無礙하니 更望컨대 有以提誨로 使卒有所至라야 庶無玷於法席矣이니라.
천주성에 돌아와서 옷 입고 밥 먹고 손자들과 놀아가며 살아가는 모습은 옛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이미 인연에 걸리는 정이 없고, 또한 기특한 생각도 내지 않으며, 그밖에 옛날에 익혔던 나쁜 버릇들도 조금씩 가벼워지고 있습니다. 저와 헤어질 때에 하셨던 간절한 말씀을 감히 잊지를 못합니다. 거듭 생각함에 비로소 공부에 들어갔으나, 아직 큰 법을 밝히지 못하여 경계를 맞아들일 때마다 걸림돌이 없지는 않습니다.
다시 바라옵건대 스님의 친철한 가르침이 저로 하여금 큰 법에 다가가도록 해 주시어 스님의 법석에 흠이 없도록 하소서.
☞ 가르침이 올발라야 배우는 이들의 공부에 진전이 있다. 공부를 하는데 진전이 없다면 하는 공부를 다시 점검해야 한다. 주어진 인연과 자신의 공부가 올바른지……
출처: 禪 스승의 편지 , 대혜 종고 『서장』, 원순 옮김
첫댓글 서장은 한문으로 읽는 것은 포기했습니다. 주실 같은 내용을 제가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제가 서장을 읽은 지가 오래 돼서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그리고 읽을 당시 내용이 너무 어려워서 기억이 안 나는 것도 있을 겁니다마는,
지금까지도 읽은 것으로 보면, 대혜선사의 답장에는 행이 없습니다.
아마 서장 전체가 거의 그렇지 않나 생각되는데...
행은 없고, 그리니까 화엄식으로 말하면, 事는 없고 理만 있습니다. 그러면 어려워져요.
화엄경이 방대하지만 범부에게도 쉬운 것은, 깊은 이치도 있지만 화엄경엔 행이 다반사로 설해집니다.
그래서 읽기가 크게 어렵지는 않습니다.
모르는 이치는 그냥 모르는대로 넘어가면 되거든요?
그러나 행은 어려운 게 없어요.
보살이 실망하지 않는다, 보살은 중생을 위해 기꺼이 생사의 바다로 들어간다...
이런 것들이 主인데, 이런 내용은 어디가 어려운 곳이 있습니까?
무술의 고수들 보세요.
어떤 기술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설명을 하면 잡다한 이론이 지루하게 설해집니다.
그런데 그 이론의 끝을 행으로 보여주면 아주~ 간단합니다.
그 복잡한 이론을 행으로 보여주면 그냥 한번~ 으로 끝나는 겁니다.
이치와 행은 이런 차이가 있어요.
"천주성에 돌아와서 옷 입고 밥 먹고 손자들과 놀아가며 살아가는 모습은 옛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이미 인연에 걸리는 정이 없고, 또한 기특한 생각도 내지 않으며, 그밖에 옛날에 익혔던 나쁜 버릇들도 조금씩 가벼워지고 있습니다. 저와 헤어질 때에 하셨던 간절한 말씀을 감히 잊지를 못합니다. 거듭 생각함에 비로소 공부에 들어갔으나, 아직 큰 법을 밝히지 못하여 경계를 맞아들일 때마다 걸림돌이 없지는 않습니다."
--->이참정이 행복해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지요?
공부의 여러 단계 중, 기쁨의 단계이지요.
한 경계가 열리면 기쁨이 몰려옵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빛을 봤으니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러나 대다수의 공부가(기독교 포함) 이 다음이 없어요.
이참정의 공부를 지켜봅시다.
알음알이를 하나를 알면 하나를 떼어내야하는데 그것이 무엇이라고 머리속에 가득 담고 있으니 엉키고 설키고 있네요.
표현이 재미있으면서 맞는 말씀이구나 싶습니다. 이렇게 된다면 복잡한 머리속도 시원하고요.
보현선생님 댓글 가르침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_()()()_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고맙습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