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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괴각승, 혜수 스님
지금 우리 승단은 일찍이 유래를
찾아볼 수 없도록 타락했다.
세인들도 양식있는 사람이면 하지
않는 일을 스님들이 예사로 하고 있다.
청정을 자랑으로 생각해야 할
승가에서 온갖 추잡한
일들이 다 일어나고 있다.
바라는 것이 돈이고
지향하는 것이 종권이다.
어쩌다 세속의 알량한
벼슬아치의 연줄이 닿으면
종단에서 목소리가 커지고
위상이 높아진다고 한다.
이런 판국에 청정한 수행자를
찾는다는 것이 우습다.
저들 타락한 무리들은 비웃을 것이다 .
그들의 눈에는 청정한 것은
비천한 것이며 불쌍하게 보이리라.
그리고 무능한 자라고 무시할 것이다.
그렇다. 분명 돈이 없어
말사 주지 자리 하나라도 차지
하지 못한 것은 무능일 것이다.
그러나 이 무능
이야말로 얼마나 좋은가.
양심을 팔고 수행자의 지조와
자존심을 팔아야 하는 능력이라면
차라리 없는 게 나을 것이다.
비록 돈이 없어 떨어진
누더기를 입고 다닐망정
홀로 외롭고 쓸쓸하게
자기 길을 가는 수행자의 모습은
얼마나 고고하며 아름다운가.
못 먹어 삐쩍 마른 몰골에
마른버짐이 핀 얼굴일지라도
그것으로 좋지 않은가.
차비가 없으면 걸어서 가고
차가운 냉골방, 때 절은 이불을
덮고 자야 하는 객실 신세지만.
아무리 승가가 타락했다고
해도 불법이 있는 한,
밤하늘의 별빛처럼
청정한 수행자는 많이 있다.
나는 전부터 한번쯤
이 길을. 수행자의 아름다운
삶을 이야기 해보고 싶었다.
나 스스로야 청정하게
살았다고 자랑할 수 없지만
많은 스님들의 청정한
삶을 보았기 때문이다.
모두가 타락된 세상에서
청정하게 산다는 것은 쉽지 않다.
너무 외롭고 고달프기 때문이다.
따라서 청정한 수행자는 모두
외골수며 괴각들이라고 볼 수 있다.
개성이 강하고 좀처럼 현실의
안일과 타협할 줄 모른다.
그래서 아무나
쉽게 근접하기가 어렵다.
일대사의 공부 이외에는
관심조차 안 두기 때문이다.
청정한 수행자이며 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괴각으로 혜수 스님이 있다.
혜수 스님을 기억하고 있는
스님들은 다 아시겠지만,
이 분이야말로
우리시대 최고의 괴각이라고
하는데 반론이 없을 것이다.
괴각이란 말을
불교 사전에서 찾아보니
‘언행이 대중의
질서를 따르지 못하고,
유달리 어긋나는 짓을 말하며,
또는 그러한 짓을 하는 사람’
이라고 되어 있다.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서
뿔난다’는 속담이 있다.
머리에 나야할 뿔이
어긋나게 엉덩이에 솟아난 것을
사람의 행실에 비유한 것이다.
혜수 스님의 경우가 엉덩이에
뿔난 것과 같다고 해도 될 것이다.
그만큼 특이한
행실과 개성을 가지고 있다.
쾌락을 추구하는
세속의 사람들이 보면
못된 송아지가 엉덩이에 뿔이
솟아난 식을 보일 것이다.
하지만 세속적인 삶을 보다
철저하게 버린 수행자야말로
세속적인 삶과는 정 반대로
가는 것이니 그 자체로 괴각이다.
안일과 쾌락의 삶과 타협
하지 않는 것도 괴각이며,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자기 삶에 당당한 것이
괴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수행자는 분명 모두가 괴각이다.
혜수 스님은 생긴 모양조차도
평범하지 않고 괴팍하다.
한마디로 나한의 모습이다.
살점 하나 없이
깡마른 체구에 지독한 근시다.
책을 볼 때는 아예
눈을 책에다 붙이고 본다.
그러면서도
역대 조사가 안경 쓴 일이
없다면서 안경쓰기를 거부했다.
만행하기를 좋아해서
해제철이면 한 객실에서
삼 일 이상을 묵은 적이 없다.
전국 사찰을 안 가본 곳이 없다 했다.
언젠가 내게 한 철에
전국을 세 번씩 돈다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걸음이
무척 빠르고 산을 잘 탔다.
자기 다리를 스스로
황새 다리라고 했는데
살점 하나 없어 팔뚝처럼 가늘고
양말을 신으면
양말목이 흘러내리는 정도다.
그 가는 다리에 검은 고무신을 신고
때로는 하루 종일 걷기도 하고
험한 산을 오르기도 한다.
다리가 가늘어서인지 앉을 때는
꼭 결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한번 앉으면 때로는 하루 종일
좌선삼매에 빠지기도 하고,
졸기도 잘하는 편이어서
대중처소에서는 젊은 선객의
빈축을 받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자리에 눕는 일이 별로 없고
밤에도 장좌불의를 했다
좌선을 하다가 정 피곤하면
잠도 앉아서 잔다는 식이다.
스님이 해인사
강원에 있을 때라고 한다.
동안거 중 납월팔일(음력 12월 8일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서 깨침을 이루신 날, 성도절)
용맹정진은
어느 선원에서나 연례행사다.
해인사 선원에서도
납월 용맹정진을 하게 되었다.
이 때는
전 산중의 대중이 희망자에
한해서 참여할 수 있는데
강원의 학인도 자원하면
그 용맹정진에 참여할 수 있었다.
학인으로 혜수 스님도 자원을 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선원에서
혜수 스님은
안 된다고 입방을 거절했다.
선원에서 그렇게 결정이 나면
그것이 바로 법이기 때문에 참여를
거절당해도 항변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그날 납월 초하루
용맹정진이 시작되는 그 시간부터
혜수 스님이 보이지를 않은 것이다.
납월
초하룻날 새벽에 입제를 해서
팔일날 새벽에 회향을 하는데
혜수 스님이 계속
보이지를 않더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찾는 사람도 없었다.
그렇게 용맹정진 일주일이 지나갔다.
당시 해인사 선원은 조사전.
퇴설당. 선열당으로 나눠져 있었다.
선열당이 제일 아래에 위치하고
선원대중의 대부분이
여기에서 공부를 한다.
그리고
퇴설당은 20여 명이 공부를 하고
퇴설당 위쪽으로 조사전이 있는데
여기는 주로 구참 납자들이
십여 명 정도 공부를 하는 곳이다.
용맹정진은
특별한 행사이기 때문에
조사전 스님들과 퇴설당 스님들이
선열당으로 모여서 공부를 한다.
이날
납월 팔일날 용맹전진을
무사히 잘 회향하고
조사전 스님들이
조사전으로 돌아오니 방안에서
구린내가 진동을 했다.
이상하게
생각하고 이리 저리 찾다가
탁자 밑을 열어보니
그 속에 혜수 스님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더라는 것이다.
일주일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결가부좌한 채로 말이다.
따라서 똥오줌도
앉은 채로 본 것이다.
그러니 방안에
냄새가 진동할 수밖에.
그 때 다리가 앉은 채로 굳어져
병원에 가서 물리 치료를
받고서야 펼 수가 있었다고 한다.
이 정도면 가히 사람의 한계를
뛰어넘는 인내와 끈기다,
단순히 오랫동안
참고 견디는 힘으로는
이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좌선삼매에 들어가는
공부의 힘이겠는데 이런 것을
공부에 득력을 했다고 할 것이다.
혜수 스님
스스로도 그 때 육체는 이미
조복을 받았다고 말했다.
나는 혜수 스님과 인연이 많아서
여러 철을 같이 살기도 하고
산행 길에 따라다니기도 많이 했다.
계율을 철저히 지키는 율사
이기도 해서 오신채가
들어가는 음식은 안 먹었다.
그러나 옆에서 누가
율사라고 하면 싫어했다.
오직 자신은 선사라는 것이다.
음식점에서 음식을 사 먹을 때도
미리 오신채를 넣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했다.
또 식당에서 사 먹는 음식이지만
먹고 난 뒤에는 발우 공양하듯이
그릇을 물로 씻어 마셨다.
같이 간 스님이 음식을 남기면
나무라고 자기가 대신 먹었다.
비록 사찰을 벗어나 음식점에서
사 먹는 음식이지만 그 음식의
귀중함은 차이가 있을 수 없고,
수행자는 먹고 자는 것이
사찰 안에서나 사찰 밖에서나
한결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대구 동화사에서의 일이다.
한번은 여럿이 만행을 하는데
객으로 간 사찰에서 앞질러
먼저 도착한 우리가 장난으로
사찰의 천왕문 대문을 잠갔다.
절집
천왕문이 대개 다 그렇듯이
문 옆에
달리 대문이 있는 것이 아니다.
문만 상징적으로 있는 것이다.
따라서 대문을 잠갔다 하더라도
대문 옆으로 돌아서
들어오면 되게 되어 있다.
그러나 혜수 스님은
장부가 문을 두고
돌아서 들어갈 수 없다고 하여
문을 열어 줄 때까지
문 밖에 서 있는 것이다.
우리는 숨어서 보다가 혜수
스님의 고집이 얼마나 가겠느냐며
그냥 두고 들어와 객실에서
저녁을 먹고 발을 씻었다.
그 때까지도
혜수 스님이 들어오지 않자
우리는
스님이 화가 나서 절로
들어오지 않고 아마 돌아갔는가.
보다고 생각하고 그냥 잠을 잤다.
그리고 아침에 길을 떠나기
위해 나와 보니 그 때까지
문 앞에 그냥 서 있는 게 아닌가.
그때야 비로소 당황하여
대문을 열어드리고 사죄를 했지만
본인은 태연자약했다. 밤새도록
서서 참선을 했다는 것이다.
스님의 이같은 기행은 모두가
남이 흉내낼 수 없을 뿐 아니라
깊은 수행의 힘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오대산 상원사에서는
불기에다가 똥을 담아
불전에 올렸다가 대중들에게
쫓겨난 일도 있었다.
뒤에 왜 그랬느냐고 물었더니
''주지가 삼보정재를 착복해서
파계행위를 하고 다니고
대중수발을 소홀히 하는 데도
대중이 아무 말도 못하는
것이 미워서 그랬다”고 했다.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실 대중이 쫓아내
야 할 사람은 주지인데,
주지의 파계행위에는 침묵하고,
주지의 편을 들어 힘없는
혜수 스님을 쫓아낸 것이다.
항용 비겁한 대중은 힘있는
권력에는 비굴하게 행동하고
힘없는 정의를
향해 돌을 던지는 것이다.
제주도 관음사에서 같이 살 때다.
십여 명의 대중이 모여서
결제를 하고 참선을 했는데,
한번은
대중들이 제주도는 섬이니 만큼
해수욕을 하자는 제안을 했다.
대중이 모두
다 찬성하는 일이고 하여 삼일
동안 해수욕을 하고 돌아왔다.
그 때 혜수 스님은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도 않고 자신을
남아서 큰방을 지키겠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잘 되었다고 생각하고
혜수 스님만 두고
해수욕을 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우리가 돌아온 날
혜수 스님이 마당가에
있는 수각에서 나체로 목욕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나체로 도량을
이리 저리 돌아다니는 것이다.
대중들은 입승
스님이 말려야 한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조용한 산중 절이지만
청정하고 엄숙해야 할
도량에서 나체로 돌아다니는
것은 지나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옷을 들고 갖다 주면서
이제 그만 옷을 입으시라고 했다.
그러자 스님이
“스님들은 해수욕장에 가서
온갖 사람들이 다 보는데
발가벗고 목욕을 하지 않았소.
그런데 여기는 우리 사중의 대중들
밖에 보는 이가 없는 것 아니요.“
”아니, 그래도 여기는
부처님의 도량이 아닙니까?“
”아니, 입승 스님은 아직도 공부가
그 정도 밖에 안 되는 것이요,
수행자가 있는 곳은
어디든지 도량이 아니요.
그리고 적막한 산중보다야
사람이 많은 해수욕장이 더
귀중한 부처님 도량이 아니요.“
나는 그만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못하고 말았다.
스님의 법담에
한방 얻어맞은 것이다.
혜수 스님은
너무 일찍 열반에 들었다.
지금 살아 있어도 오십대
중반 정도의 나이다. (2003년?)
요즘같이 종단이 어지럽고
갈수록 승가가 타락해 가는 때에
혜수 스님 같은
기행승, 괴각승이 그립다.
특히 선방에 대중은 많아도
진정한 선객이 드물고 갈수록
운수행각을 하는 사람들이 줄어드는
이 때 혜수 스님같은 운수
행각의 선객이 그리운 것이다.
누가 말했다. “혜수 스님은
이 땅의 불교계 마지막
괴각승“ 이라고. 맞는 말이다.
나 역시 혜수 스님 이후에
스님 같은 괴각승을 보지 못했다.
혜수 스님은 열반도 그답게 했다.
밀양 표충사 내원암
객실에서 열반했는데
낮에 뒷산 사자평을 스님들
몇 분과 걸어서 넘어 왔다고 한다.
그리고 저녁에 객실에서
일행들과 담소를 하다가
손에 찻잔을 든
채로 좌탈입망한 것이다.
나는 뒷날 소문으로 스님의
열반 소식을 전해 들었다.
전하는 말로는 그 날 낮에 같이
산을 넘어온 스님들이
차를 마시며 법담을 나누다가
누가 혜수 스님에게
“스님은 정말 좌탈입망을 하실
수 있는 경지까지 갔습니까?“
하고 따지며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스님이 그렇다고
대답하고 그만 찻잔을 손에
들고 열반을 했다는 것이다.
만일 세력있고
돈 많은 큰스님이었으면
조사열반이라고
세상이 소란했겠지만
일평생 가난한 수행승으로,
괴각승으로, 떠돌이승으로 살았던
스님은 떠날 때도
괴각승답게 그렇게 가셨다.
혜수 스님이 떠나고 지금 스님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큰스님이 아니기
때문에 그 흔한 문집 하나 없다.
깨달음을 얻었다고
오도송을 남긴 것도 없다.
스님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오직
한 조각 추억 속의 기행들 뿐이다.
그 기행 때문에 대중처소에서
몇 번이나 쫓겨난 일도 있었다.
점잖고 고상한 체 하는 사람들로
부터는 비난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스님은 기행을 하고
괴각을 부린다는 핑계로
막해막식으로 계행을
어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누구처럼 저자거리를
돌아다니며 무애반야를 말하고
도인의 체하는 것을 제일 싫어했다.
기행이나 괴각 행을 하는 것도
지난 뒤에 살펴보면
그것이 그 당시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행위였으며
큰 법문이었고 사람을 각성
시키며 통쾌하게 하는 짓이었다.
누가 말했던가.
‘생이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나는 것이며,
죽음이란 한 조각
구름이 소멸하는 것’ 이라고.
우리의 삶은
기실 뜬구름과 같은 것이다.
특히 수행자의 삶은
삶 자체가 한 조각 뜬구름이며
자취 없는 바람이다.
탐욕과 애욕을 버리고
구도일념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혜수 스님이 문경의 희양산에 있는
봉암사 희랑대 토굴에 있을 때다.
나는 그 해 겨울
봉암사 큰절에서 살았다.
혜수 스님은 큰절에 내려와서
공양을 하고 토굴로 올라가곤 했는데,
가끔 나에게 저녁에
토굴로 올라오라고 했다.
올라가 보면 당면을
삶아서 아무런 양념도 없이
그냥 참기름 한 방울에 간장으로
간을 맞추어서 먹자고 내놓았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모르고
당면을 먹으면서 담소를
나누다 보면 문 밖에
눈이 수북하게 내린 때도 있었다.
그러면 또 추위도 잊고
눈 내리는 산사의 밤풍경을
바라보기도 하고 그랬다.
겨울. 희양산의 추위는 대단했다.
추위 속에 토굴
문짝이 바람에 부서졌다.
그때 봉암산은 몹시 가난해서
사중에서 그 문짝을
새로 달아 줄 형편도 못 되었다.
할 수 없이 스님은 당신의 속가
에다가 연락해서 문짝을 고쳤다.
그 때 비로소 스님의 고향이
문경군 농암이란 것을 알았다.
평소에 고향에 대해서,
고향의 부모형제에 대하여 일체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십 육세에 출가해서 오대산
상원사에서 스님이 되었다고 했다.
은사 스님이 누군지
들은 기억이 있는데 잊었다.
그리고 돌아가신
날짜도 모르겠고 다만 가을이
라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다.
열반 후 화장을 했으니
육신은 한줌 재가 되어 흩어졌고
제삿날이 돌아와도
기억해 주는 사람조차 없다.
지나고 보니 혜수 스님의
모든 괴각 행위는 하나의 멋진
퍼포먼스였다는 생각이다.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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