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쪽으로 사업장을 옮긴 우리는 아무 거리낌이 없이 결혼사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한족들은 하나같이 한국에 오는 것을 열병처럼 갈망했다..
또 한족들의 특성은 비록 외형적으로는 가난 하게 보여도 집에는 몇천만원씩 가지고 있는 알부자들이 많았다.
그리고 현지 마담들은 대부분 연고로 맺어져 있어서 신원확인에 문제가 없었다.
어떤 마담은 산부인과 의사로 공직에 있다가 퇴진한 분으로
여성들 대부분을 낳을 때 자기 손으로 받은 여성이었고 ,
한 교장선생님 출신의 퇴직한 분은 내가 가면 20여명의 아래 라인들과 식당에 모여
"우리를 살려주시고 좋은 직업을 주시는 주피터 고석홍 사장님.만수무강 하십시오"라고
중국어로 건배사를 하는 등 중국인 특유의 과장 화법으로 고마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현징에서는 주피터와 같이 일한다는 데 대해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다.
우리가 하얼빈쪽으로 갔을 무렵 문영애 소장도 하얼빈쪽으로 미국인과 함께 옮겨왔다.
그 미국인은 아예 미국으로 가지 않고 문소장과 함께 천년만년 살자고 그런지
문소장에게 25만불을 투자해서 공동명의로 연길에 호텔객실을 사두었다고 했다.
그런데 내가 한국에 있을 때 그분이 밤에 음주운전을 하다가 트럭에 부딛처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미국에 있는 가족들 아무도 그의 시신을 거두러 하지 않아
가족들의 분노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가 있었다.
이 소장은 비록 위장결혼으로 많은 돈도 잃고 명예도 잃었지만
특유의 근면함과 노력으로 나와 함께 하얼빈에서 2년여간 200여명을 결혼시켜 3억원 이상을 벌어서
위장결혼으로 진 빚을 다 갚고 연길 개나리 단지에 아파트 3채를 샀다.당시 아파트 값은 아주 저렴했다.
그러면서 항상"주피터 고사장님은 내 은인"이라며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나 또한 이소장을 다시 만나 중국 하얼빈에서 많은 남성들을 성혼 시키는데 도움이 되었으니 결국 상부상조였다.
하얼빈에서의 나의 사업에 대해서는 많은 일화가 있다.
사업은 폭발적으로 발전했다.매월 10명정도 보내는 것은 보통이고,17명까지도 보낸 적이 있었다.
그럴 경우 빽마진이 인당 몇백만원에 이르렀다.
나의 연주에 대한 사랑도 점점 더 커갔다.어떤 때는 베트남 하노이로 갔다가
일박하고 곧 인쳔 공항으로 들어와 하얼빈행 아시아나를 타고 가서 연주를 만나기도 했다.
하얼빈에 있는 한국식당이며,백화점등을 다니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려고 노력했지만
한국음식보다 훨씬 맛이 덜했다.
다만,인당 150위엔하는 해물요리빕 부페는 너무 좋아서
내가 갈때마다 연주와 함께 가서 즐겼다.비싸기도 했지만 메뉴도 좋았다.
때로는 노천에서 하는 공연을 보기도 했고,
하얼빈 빙등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장중했다.
그사이 연주는 내핏줄을 여러번 낙태시켰다.우리는 진정 행복이 무엇인가 사랑이 무엇인가?가슴속으로 느꼈다.
또 연주는 스스로 한국과의 거래하는 서류회사인 박문철씨의 어머니의 회사를 개척해서 나의 사업에 큰 도움이 되었다.
연주는 중국말은 커녕 한자도 모르면서 오로지 눈치로 서류를 체크해서 틀리지 않도록 진행했고,
그 큰 하얼빈 시내를 한번만 가 보았으면 정확히 다 알 정도 눈썰미가 좋았다.
택시기사는 가급적 조선족을 이용했는데 꼭 그 기사의 전화번호를 알아서
다음번부터는 예약해서 이용하는데 편리하게 했다.
나와 기차로 연길까지 가서 아파트 3채를 구입해 주면서 노후에 연길에서 같이 살자고 다짐했다 .
그런데 2009년 초가 되자 하얼빈쪽과 의 결혼도 말썽이 나기 시작했다.여성들이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현지에서 여성을 공급하는 취강이라는 자의 횡포가 더없이 커갔다.
그는 무조건 결혼수수료 마진의 50%요구다다가
이를 거부하자가 밤에 큰 돌 서너개를 창문으로 던져 위협했지만 다행히 다치지는 않았지만,이번에는 깡패들을 시켜
칼을 들고 와서 위협한 적도 있을 정도로 이것은 결혼이 아니라 전쟁이었다..
그래서 이소장이 어느 날인가부터 방정을 떠나서 한국으로 오고 싶어했고 어느날 귀국했다..
곧 연주도 2009년 2월 초 하얼빈에서 연길에 갔다.
나는 다시 2월 28일 연길에 가서 연주를 만나고 귀국했는데 그후 전화가 끊겠다.
이 소장에게 물었지만 모른다는 대답뿐이었다.
나에게도 말하지 않고 용정에서 두 아이들을 만나 한국으로 탈북길에 오른 것이다.
또 잡힐까 두려워서 말하지않고 떠난 것이다.
그해 5월초 연주가 태국의 수용소에서 나에게 전화했다.나는 뛸 듯이 기뻤다.그녀가 살아있었으니...
얼마후 한국의 하나원에 있다면서 전화가 왔다.
나는 그녀가 한국에서 편하게 살게 하기 위해 집도 마련하고 세간살이도 준비했다.
이렇게 연주는 2차 탈북 시도 끝에 자유의 대한민국 품에 안겼다.
그리고 11월초 하나원에서 나왔다.
9개월 여만에 다시 만났는데 배가 불룩했다.
그런데 급한 일이 있어서 연길에 갔다와야 한다고 했다.
귀국후 이소장으로부터 연주가 8개월 된 나의 아이를 낙태시키고 왔다는 것이었다.
그해 2월에 연길에서 만나 사랑을 나눈 것이 임신이 된 것이다.
한국에 와서 12월초 주피터에 입사시켰다.
그렇지만 별로 반가와 하거나 고마와 하지 않았다.
하나원에서 나와 중국 연길에 갔을 때 내가 준 휴대폰 요금이 너무 많이 나왔다고
통신사에서 전화가 와서 확인해보니,어떤 남자와 계속 통화하고 있었던 사실이 밝혀졌다.
하나원에 있을 때 어떤 여자의 소개로 그 남성과 통화하면서 알게 된 것이었다.
15년여 동안 갈망하던 자유 때문이었었을까?
연주가 배신한 것이었다.그녀는 곧퇴사했다.그리고 인연이 끊겠다.
그녀는 그 남성과 곧 결혼했다.몇년이 지난 어느날 이소장이 그남성과 이혼했다면서 용서해주라고 했다.
그렇지만 나는 외면했다.그후 어느날 연주에게서 문자가 왔다.
" 사장님!벌을 받고 죄값을 치르고.."그러나 나는 끝내 그녀를 외면했다.
2016년 4월27일 한밤에 이소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다음날 전화하자" 연주가 어제꿈에 고사장님이 교통사고 났다고 말하면서
꼭 자신이 직접할 수 없으니 전화해 보라고 해서 전화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코웃음을 첬다.그러면서 연주 자신이나 염려하라고 했다.
그런데 곧 5월3일 실제로 교통사고가 났다.연주의 꿈이 나를 살렸구나 생각하고 나는 연주에게 전화했다.
한국에 와서 외면한 지 6년만이었다.그리고 우리는 다시 만났다.
문영애씨도 어느날 보니 한국의 무슨 대학교 교수라는 사람과 결혼했다고 연락이 왔다.
그리고 영등포역 4번출구앞에서 국제결혼사업을 한다는 것이었다.
가서 보니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이 소장은 늘 이것이 좋다.저것이 좋다하면서 다단계 사업에 빠져있으면서 나에게 권유해서
"이 나이에 내가 무엇을 위해서 그런 일을 하겠느냐"고 사양했다.
이소장은 다시 식당에서 알바를 하면서 우고스라는 다단계일도 하고 있다.
틈만 나면 "우리 고사장님.대한민국에서 국제결혼 최고.나의 은인.
내가 돈벌면 사모님하고 유럽여행 시켜드릴께요"하면서 고마와한다.
그럴 때면 "이소장은 내걱정 말고,그냥 막 걸리 만원어치만 사면돼"한다.
그리고 여러번 막걸리를 샀다.
너무도 선량한 이소장.
2013년 초 내가 왕십리에서 가맹점 사업을 하기위해 강변역에 있는 리젠트 오피스텔을 구입해서 이사왔을 때
"사장님 건강하게 오래사세요"하면서 불개미를 사와서 중국산 고량주에 1개월간 숙성해서 먹었다.
그런데 출근길에 4월30일 인후염으로 쓰러젔는데 알고보니.이 소장이 준 불개미 상한 것이 독약이 된 것이었다
의식불명으르 강동경희대 병원에 입원했다가 일주일만에 깨어난 후 20여일만에 퇴원했다.
나는 그후 2013년 8월 31일자로 회사를 접었다.
창업한지 만 13년만이었다.수 많은 진기록과 일화를 남기고서,
아들 융이는 3년간 방황하다가 2014년 아버지에게서 배운 서류수속 일만 가지고 조그마한 사업체를 이어가고 있는 데
월수입이 500~600만원쯤 된다고 한다..
연주의 두아이들,딸 수아는 숙명 여대가정학과에 합격하여 2017년 봄에 입학예정이고
아들 대한이는 서강대 북한학과에 합격하여 2017년 봄에 입학을 기다리고 있다.
다행히 탈북 새터민들 자녀에게는 국가에서 대학 등록금을 무료로 지원해준다고 한다.
그 예뻤던 얼굴 32세에 만났던 연주는 48세 중년이 되어 양천구에서 회사에 다니면서 평온하게 살고 있다.
내가 "내각시 연주는 예쁘니까 늙지 말아야 한다"고 했더니
한 친구도 연주에게 "언니는 예쁘니까 늙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고 해서 우리는 한바탕 웃었다.
세월의 흐름을 누가 막으랴?
이젠 모두가 흘러간 옛일.서로가 마음속으로만 추억으로 간직하고,각자 자신의 일에 충실하고 건강에 유의 하자고 했다.
헤어져 걸어가는 그녀의 뒷 모습이 쓸쓸하게만 보였다.15년여의 인연이 끝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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