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이렇게 자존감을 잃게 만드는 때도 있군요.
노벨상 수상자인 일리야 프리고진의 '혼돈으로부터의 질서'를 읽고난 느낌이 그랬습니다.
분명히 모국어로 쓰여 있긴 한데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는 책을 읽을 때의 그 난감함이란...
제가 기억하는 지난 십수년간 독토 모임 중 ‘공간의 시학’(가스통 바슐라르) 이후로 가장 비명소리가 많이 터져나온 책이었던 것 같군요.
하지만 독토 회원들의 내공이 장난이 아니네요. 피자 한판만으로도 족할 정도로 자리가 헐빈할 것이란 예상과 달리 두자리 숫자가 참석하셨네요.
과학논문을 옮긴 것 같았다, 각 chapter를 책 한권 분량으로 써야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며 너무 어려운 책이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었는데요.
316쪽에 나오는 「ℋ양量」이란 기호를 어떻게 읽어야 되느냐는 논란부터, 화학시계, 소산구조 등 쉽게 와 닿지 않는 용어들 때문에 곳곳에 장애물에 부딪치네요.
이 세상은 단순하며 시간적으로 가역적인 근본 법칙들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다는 것이 고전 과학의 기계론적 세계관이었다면, 열역학 법칙으로 대변되는 현대과학에서는 비가역성과 무질서가 보편적으로 통용된다는 것으로 과학의 개념적 변천이 이루어졌지요...
열역학 제2법칙에 따라 폐쇄된 시스템의 엔트로피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증가되고 결국 평형상태에 도달하게 되고 종말을 고할 수 밖에 없게 될 것 같은데요..(기자가 잘못 이해한 건지 모르겠지만).
프리고진의 이론은, 우주의 일부분이 기계와 같이 작동하고 있다 해도 이는 닫혀진 계들이며, 이러한 닫힌 계들은 물리적인 우주의 작은 부분을 이루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현상들은 그 주위환경과 에너지, 물질, 정보를 서로 교환하는 열려진 계들이고요.
그리고 모든 계들은 끊임없이 요동치고 있는 종속적인 계들을 포함하고 있는데요.
요동이 현존하는 계를 평형에서 멀리 떨어진 상태로 보내면서 이 계의 구조를 위협하게 되면 이 계는 분기점에 도달하게 되고 이 때 우연이 이 상태의 계를 건드려 새로운 경로를 밟게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일단 경로가 선택되면 다음 분기점에 도달할 때까지는 다시 결정론이 지배하게 되고요. 우연과 필연이 대립적인 것들이 아니라 운명 속에서 각각 동반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뭐 대강 이런 저자의 이론 골격을 토대로 토론들이 이어진 것 같았는데요..
시간의 비가역성에 관한 문제,
‘과학철학’이란 것이 과연 과학자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논의,
과학이 가치 중립적인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한 논의들도 뜨겁게 이어졌습니다.
이 책과 관련된 심도있는 논의내용은 내공 10단 회원들의 정리글을 기대하고요,
다음달은 여름 방학으로 쉬어가고 9월의 책은 ‘안나카레니나’(이명현 옮김, 열린책들)입니다.
부실한 기사를 올린 것에 대한 사죄의 뜻으로 장마철에 어울리는 하이쿠 한 편 올립니다.
五月雨に鶴の足短くなれり
芭蕉
장맛비 내려
학의 다리가
짧아졌어라
- 바쇼 -
#부산독서아카데미 #부산독서 #독서토론회 #혼돈으로부터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