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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0: 4. 사도의 이름 (3)
마 10: 4. 사도의 이름 - 가나나인 시몬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 가나안인 시몬과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자라. )
1] 가나안인 시몬(Simin *, 시몬 호 카나나이오스)
'가나안인'은 아람어로서 헬라식 표기는 '젤로테스'(*)이다. 이 둘은 모두 '열심가, 열심당원'이라는 의미이다.
* 눅 6: 15 - 마태와 도마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셀롯이라 하는 시몬과
* 행 1: 13 -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그는 제자로 부름을 받기 전. 유대 민족의 전통과 종교를 강력히 지지하던 국수주의적인 정치 단체인 셀롯당(열심당)의 일원이었다. 셀롯당은 가다라 출신 유다가 A. D. 6년 구레뇨 총독의 국세 조사에 저항하기 위해 조직한 과격 집단으로서, 예루살렘 패망의 불씨를 당긴 유대 전쟁(Jewish War)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 예수 당시에는 그 활동이 대단치는 않았던 것 같다.
(1) 이름
열두 사도 가운데는 잘 알려진 시몬 베드로와 잘 알려지지 않은 셀롯 시몬 - 두 사람의 시몬이 있었다. 열광자의 이름은 사도들의 네 가지 명단 가운데 언급되어 있다.(마 10: 4. 막 3: 18. 눅 6: 15. 행 1: 15). 어느 전설은 그가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하다가 예수를 좇으라는 부름을 받았다고 전한다.
신약성경에는 셀롯 시몬의 개인적인 역사가 없을 뿐 아니라 열두 사도의 거의 끝머리에 기록되어 있다. 특별한 재능이 있든 없든 그의 이름은 그가 열광적이며 성급하고 열렬하고 감동적임을 나타내 주고 있다.
(2) 시몬은 열광자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와 마지막으로 강력한 지파로 등장한 셀롯(열심당) 등 예수 시대에는 여러 파가 있었다. 시몬은 "열광적"을 의미하는 카나나이오스(Kananaios)라고 한다. 사실상 카나나이오스는 열심당에 대한 아람어인데 이는 누가가 고쳐서 "시몬"이라고 부른 단언이다(눅 6: 15).
가나안 인이라고 잘못 쓰인 단어는 지리적인 의미를 지니며 옳게 쓰인 카나나이스라는 단어는 "정치적인 명칭"이다. 시몬은 유대의 극단주의자이다.
① 셀롯(열심당)의 기원
주전 167년 예루살렘 근처에서 살던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났던 늙은 제사장 맛다디아에게는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유대의 종교적, 정치적인 독립을 쟁취하려는 싸움에서 그의 아버지를 도왔다. 그 후 "대장장이"로 알려진 장남인 유다 막카베오가 지도자로 계승되었으나 로마군의 정복으로 막카베 시대는 막을 내렸다.
② 로마 제국 시대(해롯 왕)
외교적인 방법으로 준 평화 상태를 유지했으나 헤롯이 죽자 팔레스타인 중에 갈릴리 태생 유다가 궁궐을 습격하고 병기고를 부수어 자기를 따르는 자들을 무장시켜 유혈 폭동을 일으켰다. 얼마 안 되어 유대 총독으로 새로 임명된 퀴리노는 인구조사를 하겠다고 하자 이를 계기로 다시 유다에 의해 전국적인 폭동이 일어났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유혈참극 속에서 유다는 살해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셀롯이라고 알려진 파가 생겨났다.
③ 바라바
외국의 세력에는 단호하게 대항하는 혁명주의자의 이름을 가진 셀롯은 자기들의 이상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투쟁할 때 무모하고도 냉혹하게 모든 이익을 포기해 버렸다. 이들은 살인과 폭동죄로 복역하다가 예수님 대신으로 석방된 셀롯 사람 바라바의 착상이었다.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포위되었을 때 셀롯인들은 유화정책을 쓰는 사람이라고 지목되는 사람은 모두 살해하면서 실질적인 내란을 일으켰다. 셀롯인들은 포위, 공격하는 로마군에게 장기간 대적하여 그들의 분노를 격화시켰다.
④ 사해의 서쪽 해변에 있는 난공불락의 요새
마사다에는 천여 명의 셀롯인들이 최후까지 로마군에 항쟁하다가 지도자의 불을 뿜는 열변에 호응하여 남편은 아내와 자식들을 죽이고 자신의 목숨도 끊었다. 그들은 광적인 애국자이며 자유 투사였고 로마 제국의 점령에 항거하는 과격파였다.
셀롯 시몬의 종족들은 외국의 세금부과에 반대하여 투쟁했으며 자신들의 의견을 고무하고 실현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음모를 꾸미고 종교적인 열성이란 이름을 빌어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는 난폭한 테러를 자행하였다. 시몬은 그와 똑같은 주의, 주장을 가진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정치적인 모험은 가끔 더 큰 위험을 불러오기도 했을 것이다.
(3) 변화된 시몬
아주 열광적인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유용하게 될 수도 있다. 시몬은 주님에 의하여 변화되었다. 극과 극은 만나는 것인가? 유유상종인가?
① 시몬이 온유하신 예수님에게 어떻게 하여 이끌렸을까?
ⓐ 예수님은 대단한 열성을 가진 분이셨다.
자신의 안락을 돌보지 않고 희생적으로 아버지의 일을 행하였다. 너무도 힘겹게 일했기 때문에 어느 날 격노한 폭풍우 속에 있는 배에서 잠이 든 때도 있었다. 예수님는 생활하면서 최종 목적을 위하여 온 정력을 쏟으셨다. 예수님은 어떠한 방해와 역경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았고 꺼지지 않는 정열을 가지셨다.
ⓑ 예수님은 시몬이 꿈꾸고 있는 것보다도 더 신성한 왕국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계셨다.
시몬의 시대에는 가난한 자는 마음대로 강도질을 하고 과부는 재산을 사취당하고 일꾼들은 낮은 품삯과 불법적인 세금에 시달렸다. 이스라엘 백성이 더 이상 핍박을 받지 않을 살기 좋은 시대에 대하여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 시몬은 귀를 기울였다.
ⓒ 시몬은 직접 기적을 보았다.
그는 휴머니스트였기에 병자를 고치고 수천 명을 먹이며 물이 포도주로 변하게 하며 죽은 자를 살리는 등 예수께서 성취하시는 기적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 이전에 시몬은 예수님의 이러한 능력을 본 일이 없다.
ⓓ 시몬은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았다.
그는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을 통렬하게 꾸짖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 예수께서 이방인의 단을 폐하고 환전상을 쫓아내 성전을 정결케 하시는 것을 시몬은 목격했다. 시몬은 부패하여 민족에게 도무지 희망을 줄 수 없는 유대교에 대한 이 조치를 로마 제국에 대항하는 의거라고 잘못 이해한 것 같다.
ⓔ 시몬은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인자임을 밝히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요 3: 13)
유대의 선지자들은 하늘의 인자가 이 땅에 내려와 사악한 무리들을 멸하고 신성한 왕국에서 공의를 펴 영원히 다스린다고 예언했다. 시몬은 자신이 바라는 대로 언제인가 로마군을 팔레스타인에서 몰아낼 혁명을 위한 능력을 가진 개혁자를 예수 안에서 발견했다. 메시아가 이 땅에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이미 임하였다는 풍문이 널리 퍼져 있었다. 승천하시는 그날까지도 사도들은 예수께서 이스라엘에 세울 정치적인 왕국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았음에서도 볼 수 있다.
② 예수께서는 왜 시몬을 원하셨을까?
사도 가운데 셀롯인이 등장함으로써 정치적으로 의심을 받는 예수님의 사역에 오점을 남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시몬을 택하신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로 보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백성들의 여론에 좌지우지되지 않았다. 주님께서는 시몬에게 주의를 환기하게 했고 격렬한 시몬의 마음을 가라앉히셨다.
예수님은 사도를 선택하는 데에 타산적이고 세속적인 지혜는 무시한 것 같다. 예수님는 조용한 태도를 갖거나 피동적으로 순종하는 무리들을 일률적으로 사도로 택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각양각색을 망라한 소규모의 집합체가 되기를 원하셨다. 시몬은 위험스러운 것을 맡는 자격을 지닌 사람이었을 것이다.
ⓐ 시몬은 반대자와 화해했다.
마태와 시몬은 서로 협력할 수 있었을까? 마태는 세리로서 로마 제국에 팔렸던 사람이고 시몬은 로마를 증오한 사람이었다. 시몬은 열렬한 애국자였으나 마태는 매국노였다. 마태는 로마 제국의 도구였으나 시몬은 압제자의 적이었다. 이들은 서로 다른 여건에서 만났기 때문에 분명히 마태는 시몬이 속해 있는 셀롯인들의 암살대상자 명단 위쪽에 자리 잡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두 사람 사이의 깊은 바다에 다리를 놓으셨다. 개인적인 증오심은 예수님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에 의하여 극복되었다. 이들이 조그마한 단체 속에서 화평하게 살 수 있다면 복음은 사람들 사이의 모든 불화를 치유할 능력을 갖춘 것이다. 시몬과 마태의 화해는 복음의 화해 능력을 증명해 주었다. 예수님은 인간과 화해하시고 인간들은 서로 화목하였다.
ⓑ 시몬은 열성적으로 헌신했다.
열광 그 자체는 나빠질 게 없다. 그러나 열광적으로 정열을 좇는 목적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열정은 이성을 제약하는 수가 많으며 진리를 보지 못하게 막는 수도 적지 않다. 때로는 사람의 편견이 열광적인 색채를 띠게 되면 편견을 더욱 깊게 만들기도 한다. 지식이 없는 열광은 그릇된 교리나 이단, 심지어는 종교재판에까지 공격적으로 돌진하게 만든다.
잘못된 열광은 상대편이 진실하게 되는 사이에도 자기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할 수 있다. 열광적으로 파괴적인 방법을 썼을지도 모를 시몬도 아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를 만난 시몬의 열광은 자제되고 정화되어 바른 방향으로 흘렀다.
만일 족쇄를 벗어난 그의 열정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된다면 그는 얼마나 훌륭한 영적인 군사가 되겠는가? 주님은 강건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원하셨다. 비록 셀롯인은 아니었지만 다른 사도들은 셀롯 시몬의 의견에 동정했을 것이다. 시몬의 열정은 사도들 전체에 불을 댕겼다. 그의 열정은 쉽게 옮겨졌으며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을 자극했을 것이다. 한 사람의 열정적인 사랑은 다른 사람을 불붙게 한다.
ⓒ 시몬의 미움은 사랑으로 변했다.
십자가를 위하여 칼을 포기한 시몬은 계속 예수님을 좇았다. 십자가의 처형이 있던 전날 밤에 그는 다락방에 주께서 열 명의 제자 앞에 나타나신 첫 부활절에도 참석하였다. 주님의 변화시키는 능력을 통하여 시몬의 정치적인 야심은 온화한 포부로 바뀌어 부드러워졌다.
호전적인 기질은 전도 활동의 동기로 변하였다. 왕국에 대한 의견은 유대를 위한 편협한 애국심으로부터 온 세상을 위한 정열로 성장했다. 생명을 위하여 압제 정권과 큰 싸움을 할 것이 아니라, 죄 사함을 통하여 자유를 위해 싸워야 한다고 깨달았다. 주님을 만나고부터 시몬은 주님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하여 정열을 쏟았다. 시몬은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온화하게 변했다. 증오로 시작한 사람이 사랑으로 일생을 마쳤다.
(4) 시몬의 순교
시몬은 소아시아, 북아프리카, 흑해 지역과 바벨론 등지에서 복음을 전한 것 같다. 어떤 이야기는 그가 페르시아에서 폭도들에게 살해당했다고 한다. 시몬의 상징은 성경에 누운 물고기이다. 이것은 고기를 낚는 어부가 말씀을 전파하여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된 것을 가리킨다. 이는 오순절 후에 시몬이 그 어떤 제자보다 열심히 복음을 전하며 철저하게 살았는지를 보여 준다. 시몬은 우리의 냉담함과 영적인 불구 됨을 꾸짖는다. 우리에게는 기도가 필요하다.
2] 가룟 유다(*, 유다스 호 이스카리오테스) 곧 예수를 판자라.
가룟 유다(Judas Iscariot)의 아비는 '가룟 시몬'(Simon Iscariot)이다.
* 요 6: 71 -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 요 13: 26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가룟'이라는 이름에 대해 여러 학설이 소개되고 있다.
Ⓐ '케리옷 출신 사람'(man of Kerioth)이라고 보고, 남쪽 유다의 한 지역인 가룟이라는 동네에서 그가 살았던 것으로 추정한다.
Ⓑ 가룟은 열심 당원들의 운동(movement)과 유사한 운동을 의미하는 데 사용된 라틴어인 '시카리우스'(sicarius)의 음역이라는 설명이 있다.
Ⓒ 가룟은 '여리고의 사람'(man of Jericho)을 뜻한다는 설이 있는데, 이러한 설명은 헬라어와 와전(訛傳)을 근거로 한 설명이다.
Ⓓ 가룟은 '거짓'(falsehood). '배신'(betrayal)을 뜻하는 아람어의 음역이라는 설이 있다(C. C. Torrey).
Ⓔ '가룟 유다'는 그의 직업을 말해주는 '염색공 유다'(Judas of the dyer)라는 견해가 있다(A. Ehrman).
Ⓕ 다섯 번째 견해를 수정하여 '머리가 빨간 유다'(Judas the redhead)를 가리킨다고 설명한다(Albright).
이 중 두 번째 견해가 일반적이기는 하나 첫 번째와 여섯 번째 견해도 주의를 기울일만하다. 이 유다는 열두 제자 중 회계를 맡고 있었으나 지나친 물욕으로 인해 정직하지 못하였다.
* 요 12: 6 -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둑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 요 13: 29 -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가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그 결과 그는 스승인 예수를 완악한 대제사장들의 손에 넘겨주는 배신자가 되고 말았다. 가룟 유다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택하신 특별한 은혜를 받았던 자이었고 열두 사도의 명단에 들어 있지만, ‘예수를 판 자’라는 역사상 가장 부끄러운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사람은 시작보다 결말이 중요하다. 시작은 미미하나 결말이 빛난 자가 있고, 시작은 대단해 보이나 결말이 부끄러운 자도 있다.
뜻 : 찬양받다, '가룟'은 ‘케리옷의 사람’이란 뜻(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그리욧”으로 나와 있다).
(1)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판 제자.
* 마 26: 14-16 – 14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16 그가 그때부터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찾더라.
* 마 27: 5 -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2) 그 이름은 제자 중에 언제나 맨 끝에 적혀 있다. (마 10: 4. 막 3: 19. 눅 6: 16).
(3) 회계를 맡아 보았다. (요 12: 6. 13: 29).
(4)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여인을 책망하였다. (요 12: 4).
(5)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친 일도 있다. (마 10: 1. 눅 9: 1).
가룟 유다는 가룟 시몬의 아들이며 (요 6: 7) 주께서 택한 열두 사도 중에 한 사람이다. 가룟 유다는 복음서에 나오는 인물 중에 가장 불가사의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의 이름의 뜻과 배경, 성품 그리고 예수님을 배반한 동기와 죽은 방법 등 모든 것들이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가룟이라는 이름에는 다양한 설명들이 제시되어왔다. 즉 "그리욧 사람" "암살자" "가짜, 거짓말쟁이, 위선자" 등의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설명되었다. 이 가운데 일반적인 설명은 두 가지이다. 첫째, "그롯 사람"이란 견해로 열두 사도 중에 열한 사도가 갈릴리지방 사람인 데 반해 유일하게 가룟 유다만이 유다 지방의 사람이라는 것을 근거로 삼고 있다.
둘째는 가장 가능성 있는 견해로는 가룟이라는 말이 "가짜, 거짓말쟁이, 위선자"를 뜻하는 "세케르"라는 아람어의 어근에서 나온 것으로 이 말이 당시 아람어를 사용하던 기독교인들이 예수의 배반자를 부를 때 사용한 별명이었다는 견해이다.
막 3: 14. 요 6: 70을 미루어 보면 예수님은 복음을 전도할 사도를 신중히 선택하심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요 6: 64를 보면 유다를 택한 것은 매우 곤혹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 요 6: 64 -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이것은 예수가 속죄적 죽음을 하기 위해 하나님의 계획에 의식적으로 복종한 것이라고 하여 이를 설명하려고 하는 바도 있지만 공관복음은 다른 해결을 요구하고 있다.
예수께서 유다를 제자로 선택하신 것은 그를 유망하게 보고 또 그의 성격을 통찰하고 크게 쓰여질 가능성을 갖고 있음을 발견하여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를 받아들이고 그에게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또 이 무리 안에 배신자가 있으며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여하튼 그의 성격을 생각하여 볼 때 아마 그리스도의 왕국이 건설될 때 지상에 있어서 어떤 이득을 얻게 되리라고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가룟 유다는 예수의 제자단의 회계일을 보면서 일행의 전대를 맡았다. 그래서 그는 자기 호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부정을 했다.
베다니의 마리아 집에서 그녀가 예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표시로서 지극히 비싸고 순수한 나도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부었을 때 제자들 특히 유다는[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서 주지 아니하였으냐]라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그의 본심은 그 돈으로 자신의 주머니를 채우러는 생각이었다.
이에 예수께서 부드럽게 충고한즉 그는 오히려 분격하여 제사장들에게 가서 예수를 팔아넘길 것을 제의했다. 제사장들은 이에 동의하여 은 30개를 지불 했다. 그것은 당시 노예 한 사람의 시세인데 약 9 달러 50센트에 달한다고 한다.
이때부터 유다는 예수를 넘겨주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유월절 만찬 석상에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릴 때가 다가오는 것을 알고 유다에게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말씀했다. 마귀가 그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라고 예수께서 조용히 말씀했을 때 제자들은 모두 근심하면서 저마다 [내니이까?] 라고 반문하였다. 베드로는 예수의 품에 기대어 누워있는 요한에게 머릿짓을 하며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고 졸랐다. 그러자 예수께서는[나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요 13: 26)라고 말씀했다.
그것은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라고 한 성경 말씀의 성취였다 (요 13: 18. 시 41: 9) 그리고 예수께서는 한 조각을 찍어서 유다에게 주었다. 유다가 그것을 받자마자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갔다. 뻔뻔스럽게도 유다는 시치미를 뚝 떼고 [랍비여 내니이까]라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네가 말하였도다]라고 말씀하셨다(마 26: 21-25)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요 13: 27).
제자들까지도 예수께서 왜 유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는지 아무도 몰랐다. (요 13: 28) 어떤 자는 유다가 돈 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쓸 물건을 사라고 하시는 것으로 혹 무엇을 나누어주라고 하시는 줄로 생각하였다. 이에 유다는 곧 나가서 제사장들에게 달려갔다. (요 13: 28-30)
최후의 만찬이 끝나자 예수께서는 열한 제자와 같이 겟세마네 동산으로 갔다. (마 26: 36). 기도가 끝났을 때 가룟 유다의 선도 아래 검과 몽둥이를 들고 왔다. 야밤이기 때문에 누가 예수인지 알리는 신호로서 유다는 예수에게 입을 맞추었다. 이리하여 예수께서는 체포되었다. (마 28: 47-50)
유다가 예수를 배신한 동기가 무엇인지 명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그러나 초대 교회가 사도 중의 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삼아 그토록 악명높고 수치스러운 일화를 인위적으로 지어냈을 리는 없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의 이름은 더욱더 더럽혀져 제4 복음서는 그를 사탄이나, 적그리스도와 동일시하고 있는 정도이다.
그러나 이런 유다에 대한 적개심이 유다가 예수를 배반한 사건 자체의 사실성을 왜곡시켰다고는 보기 어렵다. 앞에서도 약간 언급 하였지만, 유다는 아마 단순히 욕심이 많고 부정직하여 사사로운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여 예수를 배반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흉악한 반역으로 얻게 되는 돈이 하찮은 소액이라 의아(疑訝)하다. 이런 점에서 예수를 배반한 동기를 전적으로 이런식으로 생각하기에는 조금 무리인 것으로도 여겨진다. 오히려 유다 자신이 예수님에 대하여 많은 기대를 한 것에 대한 실망과 거짓 예언자들과 거짓 메시야를 공격하는 유대교의율법 및 제도에 대한 집착으로 그러한 행동을 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이튿날 아침 어느 정도 냉정해진 유다는 예수께서 정죄 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는 것, 자기가 죄 없는 사람의 피를 판 것을 알고 후회하면서 제사장과 장로들에게 가서 은 30개를 돌려주면서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라고 말했다. 그의 양심은 제자들의 양심처럼 마비되어 있지 않았다.
제사장들은 그에게 말했다.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리라] 그래서 유다는 은을 성소에 던져놓고 나가서 목매어 죽었다. 제사장들은 [피값]을 성전 재정에 넣는 것을 싫어하여 그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산다.
이 밭은 [피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마 27: 3-5). 사도행전에서는 이 부분을 상당히 다르게 언급하고 있다.
* 행 1: 18-19 – 18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19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리어져 그들의 말로는 그 밭을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사도행전에 따르면 유다 자신이 그 밭을 샀으며, 그의 몸이 곤두박질하여 (혹 부풀어 올라?)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왔다고 한다. 유다의 비참한 죽음은 초기 기독교 설교자들과 저자들에 의하여 수없이 인용되곤 하였다. 그리고 또 유다의 죽음이 더욱 무섭게 보이게 하려고 소름이 끼치는 종류의 설명을 덧붙이기도 했다.
유다의 죽음에 관한 신약의 두 기사는 유다가 배신행위의 결과로 횡사를 당했다는 것과 예루살렘에 있는 작은 땅을 샀으나 배신행위의 결과로 인하여 [피밭]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것은 서로 일치한다. 구약시편 109편을 보면 유다의 죽음에 대한 것이 예시되어 있다.
이것은 원리 작자와 동시대에 된 일에 대하여 노래한 것이었으나 사실은 가룟 유다에게서 이루어진 예언이었던 것이다.
* 시 109: 8 - 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
* 행 1: 20 -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그리고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만이 멸망했다.
* 요 17: 12 -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이 두 장을 살펴보면 그는 하나님에게 강요되어 멸망의 자식이 된 것이 하나님의 긍휼을 거부해서였으며 그리고 그것을 구하지도 않아서 멸망했음을 알 수 있다.
3] 예수님의 선택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항상 그의 협력자를 사람 가운데서 주권적으로 택하시고 그와 더불어 일을 해나가셨다. 예수께서도 인류의 메시야로서의 사역을 완수키 위해 신실한 협력자가 필요하였다. 이에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협력자가 바로 본문에 기록된 열두 사도이다.
우리는 열두 제자를 선택하신 예수님의 선택에 대해서 살펴봄으로 우리를 택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한번 깨닫는 시간을 갖도록 하자.
(1) 예수께서 먼저 그들을 선택하셨다.
마태는 세관 앞에 앉아 있다가 예수님께 택함을 받았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바다에서 고기를 잡다가 부름을 받았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택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그들을 일일히 선택하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점에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알아야 한다.
①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그의 백성이다.
선택이란 여럿 중에서 골라 뽑는 행위를 말한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으로부터 선택을 받았다는 것은 여간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사랑하는 남자로부터 아내로 선택받은 처녀가 갖는 행복감도 이런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 사람으로부터 받은 선택도 큰 기쁨을 가져다 주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기쁨은 어떠하겠는가? 온 천지의 창조주시며 주관자이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많은 사람 가운데서 바로 나를 골라서 뽑은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을만한 아무런 자격도 갖추지 못한 우리를 일일히 구별하셔서 선택하여 주신 것이다.
* 렘 1: 5-7 – 5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6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② 우리를 선택하신 하나님은 끝까지 책임을 지신다.
선택은 그 행위 자체로 끝나지 아니하고 책임의 의무까지 연결이 된다. 우리도 일단 우리가 원해서 선택한 내용에 대해서는 끝까지 책임을 지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다면 그는 우리를 영원히 보호해 주실 것이다. 사람의 책임은 책임을 지는 사람의 신실성과 주변의 환경 등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서 그 실현 여부가 확실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러나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책임은 이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자기 백성들과의 언약을 굳게 지키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택함을 받은 성도들은 언제까지나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 가운데 풍성한 삶을 살게 된다.
* 마 28: 18-20 – 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2) 예수님의 선택기준은 세속적인 것과는 다르다.
① 세속적인 선택은 외모를 중요시한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라는 속담이 있다. 보기가 좋기에 먹기는 좋을지 몰라도 보기 좋은 떡이 맛이 좋으리라는 법은 없다. 오히려 보기 좋은 떡이 맛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빛좋은 개살구라는 말도 있다.
버섯은 빛깔이 곱고 화려한 것에는 독이 있어 먹지를 못한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세속적인 안목으로 소돔과 고모라 땅을 선택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였다.
* 창 13: 10 –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우리를 멸망으로 인도하는 마귀의 유혹은 언제나 선택하기 쉬운 것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선택하고 싶은 것에 일단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시험의 근원이 틀림없이 있기 때문이다.
순간의 작은 기쁨을 얻기 위해서 영원한 행복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외모를 중시하여 선택하는 사람들이다. 세상을 택하고 그리스도를 버린 사람들이다.
② 예수님의 선택은 내용을 중요시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 그는 인간의 허위와 가식을 꿰뚫어 본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나아오는 나다나엘을 보시고 그 마음을 알아보셨다.
* 요 1: 47 –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세상은 외모를 보고 나를 배척할지 모른다. 세상 친구들은 내가 가진 것이 없으므로 나를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의 중심이 항상 여호와를 가까이하고 그만을 전심으로 위한다면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나를 알아보시고 선택해 주실 것이다. 그는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③ 예수님은 미련한 자와 약한 자를 선택하신다.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제자들은 비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다. 어쩌면 평범한 사람들의 축에도 끼지 못할 제자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자를 택하여 권능을 주시고 가르쳐서 훌륭한 사도가 되게 하셨다.
* 고전 1: 27-29 –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예수님이 택한 백성들이다. 우리는 남들처럼 강한 권세도 없다. 그렇다고 학문에 통달하지도 못했다. 재능도 없다. 그리고 무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이것은 모두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부끄럽게 하시는' 예수님의 은혜다. 그의 은혜를 입은 우리들은 그의 이름을 찬양합하자. 그리고 감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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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귀한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도 사도들처럼 순교의 반열에 들어갑시다.
💖사랑의 향기는 만리를 가고도 남습니다. 오늘도 건강과 함께
좋은 사람들과 좋은 향기로 좋은 인연 이어가는 날 되시기 기원 합니다.💖
우리도 사도들처럼 순교의 반열에 들어갑시다.
설교 감사합니다.
우리도 사도들처럼 순교의 반열에 들어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