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강.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까지 (창 11:10-12:5)
창 11:10-12:5= “셈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셈은 일백세 곧 홍수 후 이년에 아르박삿을 낳았고 11 아르박삿을 낳은 후에 오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2 아르박삿은 삼십 오세에 셀라를 낳았고 13 셀라를 낳은 후에 사백 삼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4 셀라는 삼십 세에 에벨을 낳았고 15 에벨을 낳은 후에 사백 삼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6 에벨은 삼십 사세에 벨렉을 낳았고 17 벨렉을 낳은 후에 사백 삼십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8 벨렉은 삼십 세에 르우를 낳았고 19 르우를 낳은 후에 이백 구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0 르우는 삼십 이세에 스룩을 낳았고 221 스룩을 낳은 후에 이백 칠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2 스룩은 삼십 세에 나홀을 낳았고 23 나홀을 낳은 후에 이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4 나홀은 이십 구세에 데라를 낳았고 25 데라를 낳은 후에 일백 십구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6 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27 데라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28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본토 갈대아 우르에서 죽었더라 29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비며 또 이스가의 아비더라 30 사래는 잉태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31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32 데라는 이백 오세를 향수하고 하란에서 죽었더라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5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오늘 본문의 제목이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까지 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으로 하란에서 가나안까지입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을 거쳐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이르렀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여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이렇게 간섭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러면 뭔가 감이 잡히는 게 있지요?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이렇게 간섭하신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도 아브라함 처럼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으로 빼내서 하란에서 다시 가나안으로 인도 하신다는 말입니다.
이러면 갈대아 우르와 하란과 가나안은 다 영적인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신약식으로 말하면 세상에서 교회로 나와서 천국으로 인도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영적으로 말하면 갈대아 우르는 세상을 뜻하고 하란은 교회를 말하고 가나안은 천국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세상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 세상에서 빼내심을 입고 그 빼내심을 입은 자들은 또 어디를 거쳐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으로 나왔다가 가나안까지 가는 여정은 구원 받은 성도의 신앙의 여정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 시대 죄악이 관영함을 통해 홍수로 심판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에게 창세기 1장의 내용과 같이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는 사명을 줬습니다.
홍수 이후에 살아난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말해주고 싶은 것은 너희들이 이 홍수 속에서 살아난 것은 너희의 잘남이 아니라 정결한 제물의 희생을 통해서라는 것을 오고 오는 세대에게 알리라는 것입니다.
저주의 비를 방주가 대신 받았잖아요. 그 저주의 비를 대신 받은 방주가 홍수 후에는 정결한 짐승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정결한 짐승의 제사를 가지고 노안 언약을 세우신 것입니다. 이 노아 언약이 바로 창세전 언약을 모티브로 하고 있어요.
에베소서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을 해주셨는데 어떻게 구원을 하느냐 하면 흠 없는 아들인 예수의 죽음으로 하셨어요. 그래서 예수가 죽어서 죄에서 구원 해 것을 오고 오는 세대 속에 전하여서 모든 이로 하여금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아들의 죽음을 이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을 좀 알리라는 겁니다. 애들아! 너희들이 지금 이 땅에 살고 있는 것이 누구 덕에 살고 있는 줄 아느냐? 흠 없는 그 제물의 희생 덕이니라! 우리들은 비가 그친 이후에 무지개를 보면서 아, 아름답다 이렇게는 볼 줄을 압니다. 하지만 그 무지개가 노아의 언약이라는 건 잊고 살잖아요.
하나님은 무지개를 통해서도 우리에게 계시를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노아 시대 떴던 무지개가 지금도 뜨고 있다는 것은 노아에게 맺은 언약이 지금도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세상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흠 없는 제물의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너희들의 죄를 용서해주겠다는 것 때문에 이 땅이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 사실을 알아요.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는 다른 것 없습니다. 신자들이 불신자들보다 더 착하게 살고 사람이 좋다는 그런 게 아닙니다. 오히려 객관적으로 보면 기독교인들이 더 영악스럽고 못됐지 차라리 절에 다니는 사람이 훨씬 낫습니다.
가장 인간적인 사람들은 저기 지리산 청학동에 가면 있습니다. 그 분들은 지극히 윤리적이고 도덕적이고 착한 사람들입니다. 법 없이도 살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예수쟁이는 얼마나 영악스러운가요. 이 땅에서 누릴 것 다 누리고 그리고는 죽어서도 천국에 가겠다고 하잖아요.
세상 사람들이 보면 얼마나 밉겠어요. 저 인간들은 살아서도 자기 누릴 것 다 누리면서 하는 말이 죽어서도 예수 안 믿는 너희들은 지옥 가지만 예수 믿는 우리는 천당 간다고 하잖아요. 그게 우리 모습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들 자괴감에 빠져 자학은 하지 마세요. 내가 그런 인간이라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신자는 내가 그런 인간이구나! 내가 바로 죄인이구나를 아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불신자는 그것을 모릅니다. 자기가 죄인인줄 몰라요. 이게 죄에요.
신자는 이런 악당이 살고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구나를 아는 자들입니다. 내가 살고 있는 것은 예수님이 피 흘려주셔서 살고 있는 그것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인간들은 다 똑같아요. 근데 예수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구분하세요.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천국으로 데려 가시고 예수 바깥에 있는 자는 지옥으로 데려 가요.
하나님께서 바라보는 세계가 있어요. (그림 설명) 위로 하나님 나라가 있고, 아래는 이 세상 역사가 있습니다.
성경은 세상은 죄 아래 가두어졌다고 합니다. 이 세상은 죄라는 항아리 속에 다 들어 있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서 달나라에서 지구를 보면 이 지구 자체가 죄 덩어리라는 거에요.
떡 파는 집을 떡집이라고 하고, 술 파는 집을 술 집이라고 하지요. 이와 같이 죄인들이 사는 곳을 죄의 세상이라고 해요. 지구가 바로 죄인들이 사는 죄의 집이에요. 모든 지구인들은 죄인으로서 죄라는 항아리 속에 가두어져 살고 있는 겁니다.
항아리 속에 가두어진 인간은 차별이 없습니다. 너나 나나 다 똑같습니다. 기독교인이든 불교 신자든지 무당이든 다 똑같습니다. 다를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근데 하나님이 죄인들이 사는 곳을 천지로 만들었어요. 한 항아리인데 그 속에 천지가 있어요.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그 중에서 구별을 하세요. 예수 믿는 자와 예수 안 믿는 자로 말입니다. 예수 믿는 자는 천국 백성이라 하고 예수를 인 믿는 자들을 지옥 백성이라고 분류를 하세요.
왜? 그런가 하면 창세전에 이렇게 언약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죄라는 단지 속에 가두어진 사람들 속에서 ‘얼마’를 구원하시기로 작정을 하신 것입니다. 작정이 된 자들을 죄에서 빼내는 것입니다. 이걸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을 통하여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은혜로 빼내심을 입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 것이지 우리가 그들보다 나아서 구원받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만약에 그 사람들보다 나아서 구원을 받았다면 천국에 가서도 완장을 차고 다닐 겁니다. 나는 괜찮고 너는 못났잖아 가 됩니다. 그러면 천국은 조폭집단이지 은혜의 나라가 아닙니다.
천국은 인간의 조건으로 차별하지 않습니다. 그 천국의 모습이 이 땅에서는 교회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저와 여러분은 다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의 피를 바르고 들어 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는 잘난 자와 못난 자가 없는 것입니다. 다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입은 자들이 모인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 형편으로 기죽지 마세요. 잘 산다고 뻐기지 말고 못 산다고 기죽지 마세요. 그건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라는 옷을 입고 들어 왔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는 세상에서의 잘나고 못난 세상적인 지위고하가 아무런 상관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죄라는 항아리 속에 가두어진 자들인데 하나님께서 그 은혜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는 것을 깨닫고 감사하야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여러분들이 세상에 나가서 어깨에 전도 띠를 띠고 주 예수를 믿으라고 외치며 수많은 사람을 전도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물론 그런 것도 해야 해요. 하지만, 그것이 신앙의 본질은 아니란 말입니다.
신앙은 범사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가정생활도 충실히 하세요. 저는 여러분들이 집안 일 팽개치고 어깨에 띠를 띠고 나가서 주 예수를 믿으라고 외치는 것 원치 않습니다. 그건 신앙을 극단화 한 광신자들이나 하는 짓이에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어떤 멘탈의 붕괴가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집단 최면이 아니란 말입니다. 범사 속에서 나라는 인간이 이런 추악한 존재인데 이런 죄인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그저 놀랍구나 를 아는 것입니다
세상에~! 나 같은 자가 천국에 간데,,,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어! 라고 감탄을 하세요. 그 놀라운 구원 때문에 감사가 나오고 이웃에게도 자비를 베풀기도 하고 내 남편이나 아내에게 다정하게 대하고 그러는 것이지요.
우리가 항상 알아야 하는 것은 사람들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하게 되면 자꾸 내가 누구인가를 놓쳐 버린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는 놓쳐 버리고 내가 어떤 일을 했다는 것을 의(義)로 삼아서 나옵니다. 자기가 한 것을 근거로 들고 나오기 때문에 나는 죄인이라는 실존은 사라져 버리고 자기 업적을 가지고 자랑거리로 삼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는 항상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 난 누구입니까?”
Who am I ?
도대체 “내가 누구냐?” 를 물어야 합니다. 내 자신을 말씀 앞에 비춰봤을 때 난 마땅히 저주받아 죽어야 할 자이구나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둥이를 닫아야 해요.
내가 저 이방인들보다 나은 게 아무것도 없는 자이구나! 그럼에도 내가 지금 용서받고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서 하나님의 은혜는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고 무엇을 근거로 해서 주어졌는데 그 근거가 바로 흠 없는 제물의 희생 때문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노아 시대는 흠없는 제물을 잡아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지만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의 피를 보시고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겁니다. 예수 때문에 우리가 용서받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자꾸 죄에서 빼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빼내 놓고 알려 주는 겁니다. 죄가 갈대아 우르이고 알려주는 곳이 교회인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으로 빼낸 것은 우리를 세상에서 교회로 빼낸 것과 같아요.
지난 시간에 살펴 본 내용에서 바벨탑을 쌓은 동네가 어디이던가요? 시날 평지이지요. 바벨탑을 쌓을 때 세상의 모습이 어땠나요? 그 때는 구음이 하나고 언어가 하나여서 모두가 한통속이었습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 보세요.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고 있을 때 그 아비의 수치를 드러낸 자식에겐 저주를 하고 아비의 수치를 가려준 자에겐 축복을 했습니다. 분명히 노아가 자기 자식들에게 저주와 축복을 했습니다.
그럼 노아의 자식 속에서도 저주의 백성이 있고, 축복의 백성이 있는 것입니다. 노아의 방주에서 나온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덮어줌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저주의 백성과 축복의 백성으로 갈라졌습니까? 은혜를 아는 자와 모르는 자로 갈라진 것입니다.
저주의 비가 뿌려질 때 방주가 그들을 감싸서 살려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홍수를 내린 것은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였잖아요? 그러면 그것은 그냥 농사 지으라는 비가 아니고 저주의 비란 말입니다.
그 저주의 비를 방주가 대신 맞아줬어요. 방자 바깥은 다 죽어 가는데 노아의 식구들은 그 방주 안에서 평화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방주가 그 저주의 비를 홀로 다 맞은 것입니다. 방주 때문에 살아났습니다.
그러면 훙수 속에서 살아난 자들은 어떤 사고를 가져야 합니까? 우리도 마땅히 저 홍수 속에 엄몰되어 죽어야 하는데 이 방주 덕분에 살아났구나 를 알아야 하는 거잖아요.
그 방주 덕분에 살아난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노아가 나오자 마자 제일 먼저 한 것이 정결한 제물을 잡아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정결한 제물이 죽으면서 그들에게 얘기를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살아난 것은 이렇게 흠 없는 제물의 죽음으로 인해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방주였지만 그 방주가 신약으로 와서 의인화돼서 나타난 것이 예수입니다. 그런데 노아의 자식들 중 함은 그걸 모르고 있는 겁니다. 내가 은혜로 살아났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노아가 포도주에 취하여서 하체를 발가벗고 수치를 드러내는 사건을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세트를 마련해 놓으신 것입니다. 일종의 노아의 아들들은 시험을 치는 거에요. 발가벗은 노아의 모습을 보고 어떻게 대처 하는지를 보는 겁니다. 근데 노아의 아들들이 두 가지 다른 양상을 보이는 겁니다. 발가벗은 수치를 드러내는 자와 덮어주는 자로 갈라지는 겁니다.
노아의 자식들 속에서 두 부류가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가안과 아벨처럼 말이에요. 하나는 덮어주고 하나는 수치를 조롱하더란 말이지요. 노아가 술이 깨고 나서는 자식들을 불러서 나의 수치를 가려준 것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셈과 야벳이 대답을 합니다.
그러자 노아는 셈을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셈의 하나님을 찬송하더란 말이지요. 노아는 하나님께서 셈에게 은혜를 줘서 덮어주게 해주셨구나를 알고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한 것입니다. 반면에 함은 저주를 해 버립니다. 함은 그 덮어줌의 은혜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로 왔습니다. 그러면 이 교회 안에 온 것에 대해 항상 깨달아야 하는 것은 나 같은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의 용서를 받고 왔구나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안다면 계속해서 우리 속에 은혜가 나와야 합니다. 덮어줌이 나와야 한단 말입니다. 이해와 용서와 화해, 이런 것들이 나와야 합니다. 그게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용서를 받은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분명히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의 결집체인데 교회 안에 왔음에도 그 은혜 안에서도 인간의 조건으로 잘잘못을 지적하고 따지면서 파당을 세운다면 그건 은혜를 잊고 법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노아의 자식들의 사건들을 통해서 무엇을 배우고 깨달아야 하는가 하면 왜? 성경에 이런 노아의 후손의 아름답지 못한 이야기들을 기록해 놓았는지를 봐야 합니다.
이런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속 고발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넌 누구냐?’ 그럼 우리는 이런 말씀 앞에 나도 마땅히 저주받아야 할 자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받고 있습니다 를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함의 족속이나 셈의 족속이나 이 노아의 아들들이 하나가 되어 버렸습니다. 시날 평지에서 하나가 되어서 바벨탑을 쌓는 일을 합니다. 분명히 흩어져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야 함에도 흩어짐을 면하고자 합니다.
왜? 이런 일을 하는가 하면, 홍수 속에서 하나님의 저주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인간 쪽에서 저주를 피하는 식으로 일을 하려고 꾀를 쓴 것입니다.
그것이 바벨탑 사건입니다. 그 바벨탑을 쌓을 때 세 가지 명제가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힘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자!” “우리 이름을 내자!” “우리가 흩어짐을 면하자!” 입니다. 즉 인간들이 독자적으로 살 궁리를 한 것입니다.
여러분 물어봅시다. 노아 식구가 홍수 속에서 살아난 것이 자기들 독자적인 힘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났지요?
그런데 은혜로 살아난 자들이 똘똘 뭉쳐서 독자적으로 힘을 모아 자기들끼리 구원의 길을 모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함의 후손 속에 섞여 있는 셈의 후손들을 빼내는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이게 구원입니다.
오늘 본문에 잘 보면 갈대아 우르가 나오는데 갈대아 우르는 바벨론의 옛 이름입니다. 아브라함을 그 바벨론에서 하란으로 빼냅니다.
(그림 설명) 가나안 - 하란 - 갈대아 우르(바벨론)
지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바벨론에서 하란으로 빼내고 하란에서 다시 가나안으로 빼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가나안은 약속의 땅으로서 천국을 상징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가나안은 천국의 모형입니다.
이 그림을 역사로 한 번 봅시다. 창세기를 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이스라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이 역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구약과 신약으로 갈라집니다. 그리고 계시록에 가면 천국이 나옵니다.
이 과정을 우리는 다 겪으며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 아래(갈대아 우르)에서 태어나서 교회(하란)라는 곳으로 빼내심을 입습니다. 그리고 천국(가나안)으로 돌아갑니다.
그 그림과 같습니다. 갈대아 우르는 인간들의 죄악이 관영한 이 세상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7장 18장에 보면 광의적인 면에서 이 세상을 바벨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8장 4절에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구원을 받으라”고 하지요?
광의적인 의미에서는 바벨론은 이 세상을 상징하지만 성경의 이야기는 세상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그 바벨론이 마지막 종말 때 타락된 교회를 상징하고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벨론을 일컬어 음녀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음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수의 신부로서 정결을 지키고 세속과 물들지 않고 살아야 하는데 지금은 교회가 전부 세상이 되고 있단 말입니다.
지금은 세상과 교회의 경계가 무너져 버렸습니다. 뭐가 교회고 뭐가 세상인지 몰라요! 교회에서 증거되는 말씀이 하늘의 말인지 땅의 말인지 없어져 버렸어요.
하나님 말씀이 그냥 윤리 도덕이 되어 버리고, 신앙이 착하게 사는 것이 되어 버리고, 가치관이 이 땅의 기복주의로 흐르고 있어요.
이건 세상도 얼마든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 요한계시록 17장 18장에는 타락된 교회를 일컬어 음녀라고 하고 그 음녀를 일컬어 귀신의 처소라고 합니다. 각 종 더러운 영들이 모여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지금 세상이 되어 버리고 세상이 교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여러분 잘 보세요. 지금 이 시대 교회가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가?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것들 속에는 모두가 세상의 가치가 그대로 들어와 있어요. 교회라고 하면 너무 광범위하니까 실감이 안나나 본데,
교회를 그냥 여러분 스스로라고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 스스로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 뭡니까? 이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최고의 가치가 뭡니까? ‘돈’이잖아요.
우린 결국 돈 때문에 교회에 오는 겁니다. 예수가 좋아서가 아니고 돈이 필요해서 예수를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음녀라니까요.
우린 철저하게 이것이 까발림 당하고 고발되어야 합니다. 내가 음녀 맞네. 성경에서 말하는 그 나쁜 놈이 바로 나였구나…
그래서 제가 늘 그러잖아요. 이런 말씀 앞에서 우리는 예수를 죽일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맞아… 나는 예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끊임없이 이용하는 거야… 그걸 우리는 철저하게 고발당하여야 해요.
다시 본문을 설명합니다. 지금 셈의 후손들이 함의 후손들과 같이 바벨론에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셈의 후손 인 아브라함을 함의 후손이 살고 있는 바벨론에서 하란으로 빼냈습니다. 이 이동 경로를 잘 생각해 보세요. 바벨론에서 하란으로 빼내고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빼냅니다.
10절을 다시 보세요.
‘셈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하고 나옵니다.
그 셈의 후예가 누구에요? 복의 자손이지요. 그런데 참 재밌는 것이 있으니까 잘 보세요.
셈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하면서 셈은 아르박삿을 낳고, 아르박삿은 셀라를 낳고, 셀라는 에벨을 낳고, 에벨은 벨렉을 낳고, 벨렉은 르우를 낳고, 르우는 스룩을 낳고, 스룩은 나홀을 낳고, 나홀은 데라를 낳고, 데라는 아브람을 낳고, 아브람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여기 까지가 열 두 대입니다.
12대로 끝이 납니다. 이건 열 두 지파를 상징하는 겁니다. 아브라함에게서 이삭이 나오고, 이삭에서서 야곱이 나오고, 야곱을 통해서 12 아들이 나오고, 12 아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이 생겨버리죠?
이해되세요?
왜 12 입니까? 하늘의 숫자가 3이고, 땅의 숫자가 4입니다. 이것을 곱하면 12가 됩니다. 이는 하늘에 언약이 이 땅에서 12 지파로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이 12 지파가 신약으로 오면 12 제자가 세운 교회로 나타납니다.
열 두 지파는 온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총칭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7장에 보면 열 두 지파에 각자 일만 이천 명씩 인치지요? 열 두 지파에서 일만 이천 명이 인쳐진 것이 십사만 사천입니다.
신00 이단에서는 그 십사만 사천을 숫자적으로 해석해서 십사만 사천만 구원받는다고 해요. 아니에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신00에서 나온 분이 그러는데 그들은 지금 십이만 이천 명 정도 채워졌다고 합니다. 이제 거의 다 채워서 한 이만명만 채우면 된다고 합니다. 몇 명 남지 않았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찾아 가고 그러잖아요.
통칭적으로 열 두 지파나 십 사만 사천이라고 하는 것은 온 세계에 흩어진 자기 백성들을 상징적으로 얘기하는 것입니다. 아니 그 넓은 천국에 가서 십 사만 사천 명만 있으면 어떻게 해요? 한 사람당 수만 평씩 줘도 그 넓은데 혼자 살면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사람은 사람끼리 알콩달콩 모여 살아야 재미가 있지요.
하나님께서는 지금 자기 백성들을 성경을 통해서 어떻게 다뤄가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저주의 도시인 바벨론에서 셈의 후손을 하란으로 빼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가나안으로 빼냅니다. 그런데 참 재밌는 것이 바벨론이 갈대아 우르인데 이 갈대아 우르의 뜻이 의미심장한데 ‘약탈자’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강도들이 사는 곳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보면 나오지요? 강도를 만나서 거반 죽게 되지요? 그 강도를 만난 자가 우리에요.
우리가 강도를 만나서 거반 죽게 됐는데 예수님께서 사마리안인과 같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오셔서 예수님의 모든 돈을 들여 치료를 시켜줬습니다. 내가 강도를 만났기 때문에 나를 치유해준 그 사마리아인이 곧 예수님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바로 약탈자들이 사는 갈대아 우르와 같은 곳이에요. 근데 이게 종말에는 교회로 나타나요. 예수님께서 오셔서 예루살렘 성전을 보고 뭐라고 그러셨어요? 강도의 굴혈이라고 하지요?
강도가 뭡니까? 힘으로 남의 것을 빼앗는 자들입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에 전부 그런 강도들만 모여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행한 것으로 거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강도의 소굴입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는 성경이 말하는 교회가 아니에요! 교회만 성경적인 교회가 아닌게 아니고 신자도 성경적인 신자가 아니에요. 우리가 성경이 말하는 신자가 아니에요. 우린 성전에 와서 돈 뜯어가는 강도에요.
다시 얘기합니다. 교회라고 하니까 내가 다니는 우리 교회, 이런 의미가 아니고 여러분이 교회입니다! 내가 강도입니다!
우리는 눈만 뜨면 예수를 이용해서 입신양명을 꿈꿉니다. 저도 마찬가지에요. 저는 강도 중의 괴수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두지 않으신단 말입니다.
그래서 빼내는 것입니다. 약탈자들이 우글거리는 곳에서 하란으로 빼냅니다. 하란이라는 곳은 ‘티끌’ ‘마른 땅’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들 때 흙으로 만드시는데 그 흙이라는 것은 원래 티끌이라는 것입니다. 아담이 ‘티끌’이요 ‘먼지’라는 말입니다. 이런 티끌 같은 자들이 약탈자들이 사는 동네에서 강도짓을 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교회라는 하란으로 빼내어 너는 발바닥에 먼지 같은 자라고 우리 실존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잘 보세요. 바벨론, 갈대아 우르를 세상이라고 하면 하란은 교회를 상징하고 가나안은 천국을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세상이라는 강도들이 사는 곳에 있다가 하란으로 빼냄을 입었어요. 강도들이 사는 곳에 있었다는 말은 내가 강도라는 얘기지요.
이 강도가 하란으로 들어 왔습니다. 교회로 왔어요. 교회라는 하란에 와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실존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너는 강도였느니라’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율법 앞에 낱낱이 발가벗김 당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인간이었구나…’ 이런 인간을 하나님께서 가나안으로 끌고 가십니다.
가나안이라는 말도 재밌는 것이 ‘낮은 곳’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강도 같은 저와 여러분들을 하나님께서 교회로 빼내시고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완전히 나를 죽은 자로 만들어서 결국 나를 낮은 긍휼의 자리로 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천국은 긍휼의 자리입니다. 스스로 왕처럼 살고 싶어하는 자들이 스스로 낮은 그 긍휼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은 불가능해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긍휼의 자리로 나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을 간섭해 가는 그 과정이 바로 우리가 구원을 받는 그 과정인 것입니다.
지금 보세요. 셈의 후손을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으로 빼내고 가나안까지 끌고 가는 이 여정이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어서 구원받는 과정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셈의 후손인 아브람을 갈대아 우르에서 빼내서 하란에 잠시 정착케 했습니다. 아브람의 아비가 하란에서 무슨 장사를 했습니까? 우상 장사를 했지요.
이 ‘하란’이라는 동네가 ‘달을 신(神)으로 섬기는 동네’였습니다. 달은 해와 반대의 개념으로서 해는 하나님을 상징하고 달은 피조물을 상징해요. 달을 섬긴다는 것은 우상을 섬긴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출애굽기에서 십계명을 주실 때 두 번째 계명이 너희를 위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인간들이 만드는 신의 형상 중에 일월성신이 많습니다.
구약에도 보면 그런 것들을 섬기는 얘기가 많이 나옵니다. 일월성신은 창조가 아닌 피조물입니다. 그러니까 일월성신을 섬긴다는 것은 피조물이 피조물을 섬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눈에 보이는 신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에게 보이지 않는 신은 없습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신은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보이지 않는 신을 있는 것으로 만든 것이 형상인 것입니다. 인간은 보이지 않는 신이 믿어지지 않으니까 뭔가 자꾸 만들어서 섬기는 것입니다.
지금은 교회에서 무엇을 섬기고 있습니까? 지금 이 앞에 십자가가 있는데 여기에 의미를 둡니다. 여러분들은 안 그러시겠지만 과거에 할머니들을 보면 기도를 해도 앞에 와서 이 십자가를 붙잡고 기도를 합니다.
그러면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인간의 본능 속에 형상 신앙을 추구하자는 본성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인간들 속에 있는 우상성이 해와 달과 별과 같은 것을 섬기는 것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암튼 하란에서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가 우상 장사를 하면서 달 신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데라, 사라, 밀가 이런 것들이 전부 달 신의 이름들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예수님을 일컬어 ‘의의 태양’이라고 합니다. 해를 하나님이라고 상징해서 창조주가 되면 달은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피조물을 섬기는 것이 우상입니다. 그러면 그 달은 우리 자신을 상징합니다. 인간이 우상을 섬기는데 무엇 때문에 섬깁니까?
우상이 좋아서 섬깁니까? 아니면 나를 위해서 섬깁니까? 나를 위해서지요.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할 때도 여러분을 위해서 예수를 믿으면 그 예수가 곧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우상은 내가 점치러 가고 무당 푸닥거리 하거나 아니면 절에 가서 비는 것이 우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이나 예수를 나를 위해서 믿으면 그것이 우상인 것입니다. 예수 우상입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말합니다.
‘전 예수 믿습니다’ 맞아요, 예수 믿겠지요! 그런데 무엇을 위해서 예수를 믿습니까?
왜 예수를 믿습니까?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결국 자기를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앞에 나와서도 끊임없이 땅의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는 기도의 내용을 적어 보세요. 무얼 구하는 있는가? 전부 땅에 것이에요. 우리의 요구사항을 내어 놓잖아요.
예수님께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했는데 우리는 그것을 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먹고 마실 것을 구하지요.
인간은 태생적으로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아요. 우리는 하나님이 싫다니까요? 이거 인정합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필요를 위해서 우리를 만들었습니다. 근데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삶에 이용하고자 해요. 그러니 우리가 우상 장수 데라이지요. 이 데라가 하란에서 죽어야 해요. 교회에서 우상을 섬기는 나의 옛 사람이 죽어야 해요.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우리를 만들었는데 죄가 들어와서 이것이 전도되어 버렸습니다. 나를 위해서 신이 있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내가 필요치 않으면 신을 찾지 않습니다.
절에 아무나 가는 것 아니에요. 내가 필요할 때 가지요. 대구의 팔공산 갓 바위에는 아쉬움이 많은 사람이 갑니다. 아쉽지 않은 사람은 절대 가지 않아요. 그게 인간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신은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는 하나의 소모품입니다. 내가 필요하면 찾아가서 비는 겁니다. 내 힘으론 안 되니까 신의 힘을 빌어서 내 욕망을 채우는 것입니다. 인간들에게 신은 자기 안의 욕망이 투사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그게 지금 교회 안에 그대로 잠식되어 들어와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예수! 예수! 하고 부르지만 그 예수도 내 소원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수단적 예수이지 예수가 좋아서 예수 믿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우상성을 교회 안에서 자꾸 드러나게 하십니다. 고발당하게 하십니다.
나로 하여금 결국 가나안, 낮은 자리, 긍휼의 자리로 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교회에서 우리로 하여금 맨 밑바닥인 내 자리를 찾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저주 받아야 할 자임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못 박게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같이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먹으려는 개 같은 모습으로 ‘내가 개가 맞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그 긍휼의 자리로 나아가게 하시는 겁니다. 그런 모습을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은혜나 긍휼, 자비라는 것을 말은 하는데 실제를 보면 그와 반대의 개념으로 살고 있습니다. 데라는 하란에서 우상을 섬겼는데 그 우상이 결국 자기 자신이 우상인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결국 자기 몸뚱이가 우상입니다. 여러분들이 전혀 동의되지 않는 얼굴이신데…
하나님의 백성의 이름이 뭐에요?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의 뜻이 신과 싸우는 자에요. 즉 우상과 싸우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는 야곱이 하나님을 우상처럼 숭배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야곱과 씨름을 하는 너는 하나님조차도 이겨서 자기 욕심을 이루고자 하는 우상숭배자라고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야곱의 일생을 보면 우상숭배 사상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야곱이 엄마 뱃 속에서부터 하나님의 백성으로 점지되어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야곱이 하는 짓거리가 뭐였습니까?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기 욕망 채우는 일들을 했잖아요. 외삼촌 집에 가서도 사기 쳐서 이십 년 만에 거부가 돼서 돌아옵니다. 금의환향인 것입니다.
야곱이 생각하기는 ‘축! 야곱, 재벌이 되어서 귀향하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에서를 보내서 야곱을 죽이려 드니까 하나님께서 야곱을 스스로의 꾀에 빠지도록 하여서 이십 년 동안 모은 모든 것을 강 저쪽으로 보내 버리고 야곱만 이 쪽에 남게 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그를 죽이는 일을 하십니다. 환도뼈를 쳐서 죽이시는 것입니다. 너는 지금까지 하나님을 이용했지! 라고 보이시는 겁니다.
야곱의 이름이 ‘약탈자’ 입니다. 야곱의 팥죽 한 그릇으로 형의 장자권을 뺏어 버리는 그런 모습들이 결국 인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야곱을 얍복강에서 깨트려 버리고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꿔주십니다. 그 이스라엘의 이름이 ‘신과 싸우는 자’인데 결국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싸우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용사를 치는 여호와로 나타납니다. 그 용사가 블레셋이나 미디안 군대가 아니라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 앞에 그들이 공격 대상이요 징벌 대상입니다.
지금 현재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징벌 대상입니다. 왜요? 우리 안에 약탈자의 근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이용해서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고자 하는 부귀영화를 누리고 입신양명을 꿈꾸는 죄가 준 못된 것이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우리에게 다가 오셔서 우리를 깨뜨리시는 겁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날마다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고 했던 겁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신 것은 우리 안에 그 특유의 야곱적 기질과 싸우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육신의 소욕을 깨트리기 위해서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요만큼이라도 싸워주시니 우린 이만큼이라도 있는 겁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간섭하지 않으시면 우리도 끝없이 자기 욕망을 추구하는 것으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뜻대로 안 살아지도록 자꾸 태클을 거시는 겁니다. 이게 복이에요.
때로는 집 안에 우환이 생기기도 하고 자식이 말을 안 듣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자꾸 발생을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인간은 힘을 가지면 하나님을 떠나기 때문입니다.
그럼 지금 이 시대 인간들의 힘이 뭡니까? 돈이잖아요. 돈을 가지면 여러분은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내가 돈만 가지고 있으면 백화점엘 가도 무조건 사장님이고 사모님입니다. 돈만 가지면 갑과 을의 자리가 달라집니다. 돈 가진 사람이 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영원한 갑이 되고 싶은 겁니다. 돈 없으면 을이 되는 거에요. 이게 자본주의 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인간이 돈을 마다하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우리는 결국 내가 갑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조차도 수단으로 이용해 돈을 얻고자 하는 죄인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내가 하나님을 이용하는 우상 숭배자라는 것이 드러난다고 해서 나를 잘라내지 않으십니다. 계속해서 그런 내가 고발당하게 하시고 그렇게 고발당할 때 우리는 긍휼의 자리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도움을 구하게 됩니다.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그것이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지요. 신자들만 그런 자리로 갑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부터 내가 돈도 초월해서 있는 것도 다 팔아야지…이러지 마세요. 있는 것 팔아서 어디에 갖다 바치고 그러지 마세요. 그런다고 해서 여러분이 나아지는 것 아닙니다.
괜히 순간적으로 어떤 집단 최면에 빠져 저질렀다가 나중에 제정신 돌아와서 후회하지 마시고 여러분들이 가지고 계시면서 난 예수보다 돈이 좋구나 하는 것을 아시란 말입니다. 여러분이 부부간에 살면서 부부가 좋아서 사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남편이 돈을 벌어줄 때 남편이지 돈을 벌어주지 못하면 남편이 아니라 웬수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벌어다 주지 못하는 남편은 죄인이고 죽일 놈이에요. 돈 갖다 줄 때 남편이지 돈 안 갖다 주면 구박 덩어리에요. 여러분들이 그렇게 살고 있잖아요. 안 그런가요? 뭘 안 그런 척 하세요. 민망하게.
어저께 모 방송에서 하는 인문학자들의 강의를 봤습니다. 거기에서 한 철학자가 자본주의의 허구에 대해서 말하는데 이런 얘기를 합니다. 청중 속에 남편이 삼성 그룹에 다니는 한 여자 분이 있었습니다.
아내에게 남편을 사랑하냐고 물으니 ‘네’라고 답합니다. 그런데 이 남편이 회사에서 짤리고 실직자가 돼서 돈도 못 벌어 주어도 사랑할 거냐고 물으니 아니라는 겁니다. 그 때는 짐이라고 합니다. 이건 여자뿐만이 아닙니다. 남자도 마찬가지에요.
결국 인간은 내가 갖고 싶은 것을 내 힘으로는 안 되니까 얻고 싶은 것을 타자를 통해서 얻고 싶은 것입니다. 그게 지금 이 시대의 결혼 풍속입니다. 그 욕구가 충족이 되어야 살아지는 것입니다.
그 철학 교수가 이야기하는 것이 1997년 IMF가 터졌을 때 이혼율이 제일 높았다는 겁니다. 원인을 분석해보니 결국 돈이라는 것입니다. 돈 없으니까 이혼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이게 자본주의입니다. 이런 자본주의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 수 있느냐 말입니다. 믿음?
믿음으로 살 것 같아요? 못살아요. 신앙생활 잘한다고 해서 밥 안 먹고 이슬 먹고 살지 않습니다.
여전히 우리 몸뚱이는 떡을 원합니다. 아무리 예수를 잘 믿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떡 안 주면 몸은 반란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몸을 이기지 못해요. 이게 데라가 살던 하란에서의 모습입니다. 결국 인간은 몸뚱이가 우상이고 내가 곧 우상입니다. 이해되세요?
하나님은 이 우상을 깨뜨리러 오셨습니다. 그것도 자기 백성에게만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나 라는 존재가 우상 덩어리구나, 하나님과 원수 된 자라는 것을 깨닫고 자각하고 나서 이런 원수가 살고 있다는 것이 결국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긍휼하심이라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그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긍휼하심이 거저 준 것이 아니고 나를 위해 대신 죽어 주신 분이 있단 말입니다. 그 대신 죽어주신 그 분 때문에 지금 용서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자들은 비록 내가 세상 사람보다 더 악한 모습으로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내가 뻔뻔스럽게 하나님 앞에 나와 ‘아버지’ 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그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이 우리를 덮어 주고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제발 여러분들 교회 밖에 나가서 세상 사람들 욕하지 마세요. 그 분들보다 여러분들이 더 나쁜 사람들입니다. 그래도 그런 사람들의 자각 속에는 착하게 살아야 좋은데 가지…하는 이런 마음이 있어서 착하게 살려고 해요.
그런데 예수쟁이들은 착하게 살으나 악하게 살으나 예수 믿어야 천국 간다는 걸 알기 때문에 아주 영악스럽게 산다니까요. 그 분들 한데 미안한 마음으로 사세요.
콩나물 오백원어치 사면서 좋은 것만 끌어 담아 오지 말고 좋은 건 다른 사람에게 팔고 흠 있는 건 내가 먹고 살께 이렇게 하세요. 그런데 우린 항상 나쁜 건 다 빼내고 좋은 거만 건져 오지요. 그게 우리 인간이라니까요.
아무리 우리가 은혜를 알아도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죄인은 정답을 알려줘도 정답을 쓸 수 없는 것이 죄인입니다. 정답대로 살 수 없기 때문에 죄인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정답이 계속해서 우리를 너는 죄인이라는 것을 고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전 여러분에게 이런 사람이 되십시요 라고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바라는 인간은 이런 것이다 라는 기준은 갖고 있자는 것입니다. 그 기준을 통해서 우리의 못난 것들이 발각되어서 그 안에서 우리는 내가 죄인 중의 괴수가 맞습니다, 이런 인간이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군요. 그것 알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이라는 것은 나로부터 구원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내 속에 내가 있다니까요. 내 속에 있는 나는 항상 나만 챙깁니다.
우리 요셉이도 보세요. 저 어린 아기도 저 조금 편하게 하면 좋아하고 조금이라도 불편하게 하면 싫어한다니까요. 그걸 누가 가르쳤겠어요? 인간의 본성이 그런 것입니다.
저 이뻐해주면 좋아라 하고 하고 싶은 거 막고 안 돼, 그러면 울어요. 그게 인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를 죄라고 고발하고 빼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린 날마다 야곱처럼 얍복강에서 씨름을 당하고 환도뼈가 부러지고 있어요.
마지막으로 하나 더 눈여겨봐야 하는 것이 10절 이후를 보세요.
10절 이후부터 셈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하면서 계속 ‘낳고…낳고… 낳고’ 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한 사람은 낳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브람입니다.
다 낳고…낳고…낳고 하는데 아브람 대(代)에 가면 낳음이 없습니다. 불임 여성이 등장합니다. 사라가 아이를 낳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과 하란에서 살 때는 낳고…낳고 했는데 아브람에 와서는 낳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빼내 놓고 그 때 자식을 주십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은 이 세상에 분깃을 안줬다는 것입니다. 신자에게는 이 땅에 유업이 없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유업은 천국에서 받는 것입니다.
이 당시에 자식은 기업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에서 자기 기업이 없습니다. 그럴 때 아브람을 가나안으로 빼내 놓고 그제서야 자식을 주십니다.
가나안에서 얻어진 자식이 결국 가나안을 유업으로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도 세상 속에 있던 자들을 교회로 빼내시고 교회 안에서 우린 이 땅엔 분깃이 없다는 것을 처절하게 가르치십니다.
우린 교회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분깃은 하늘나라에 있는 것이라는 것을 배워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이 땅에서 성공을 꿈꾸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살아가는 삶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은 여러분들이 뭔가 잘못해서 그런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이 땅의 유업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가 이 땅의 유업을 가지면 하나님을 잊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등 따습고 배가 부르면 하나님을 잊게 되어 있습니다.
자식들도 밖에 나가서 혼자 살게 한 번 해 보세요. 자기들 돈이 떨어져야 부모를 찾지 그렇지 않으면 부모를 귀찮아합니다. 안 찾아요.
성경이 우리에게 일관성 있게 주장하는 것이 인간은 결국 등 따습고 배가 부르면 하나님을 떠나더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게 사사기 역사입니다.
사사기 역사를 보세요. 먹고 배부르니까 어김없이 우상숭배가 나타납니다. 그 우상숭배가 이방 신을 섬기는 모습으로 나타났지만 결국 그 우상은 ‘나’입니다.
내 몸이 아프니까 하나님 찾고 내 몸 편하면 하나님 떠나는 것입니다. 결국 내 몸뚱이가 우상입니다. 사사기에서 대적자로 나타나는 이방민족들은 겉으로 나타난 모습이고 실제 하나님의 대적자들은 우리 자신들입니다.
이스라엘 민족 자체가 하나님의 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겐 이 땅에 것을 빼앗는 전쟁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지하는 것을 거두어 가시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왜요?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을 떠나기 때문입니다. 이걸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러는 거에요.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염려하지 말아라. 이 얘기는 하나님 알아서 먹여준다는 것입니다.
이게 믿어지면 염려가 안 되는데 이게 안 믿어지는 겁니다. 그게 이스라엘 민족의 사십 년 광야 역사입니다.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에 오니까 매일 매일 새벽마다 만나가 하늘로서 주어집니다.
이게 믿어지면 먹을 것 입을 것 염려하지 않지요. 그런데 만나를 공짜로 매일 받아먹고도 못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곡간에 양식이 쌓여 있어야 안심을 해요. 하루 하루 얻어 먹는 것은 싫어요. 언제 하나님 마음이 바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만나를 이틀 치씩 거두어 두었다가 혼이 나는 것입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지금 우리가 그렇잖아요.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우리 집사님들에게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염려하지 말아라. 공중에 나는 새를 보고 들의 백합화를 봐라 내가 다 입히고 먹이잖아 라고 하면 ‘아멘!’ 하고 대답은 잘 합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면 달라집니다. 하나님 그건 새들이고 전 직장 나가서 또 벌어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내 육신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렇게 스스로 이기지 못하니까 하나님께서 강제적으로 우리 안에 들어 오셔서 개입하기 시작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갈대아 우르에 있는 아브람을 하란으로 빼내고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빼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빼내고 나서 ‘아브람’을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으로 바꿔 주십니다. 이름을 줬다는 것은 이제부터 그 이름에 걸맞은 모습으로 간섭을 해내겠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4장에 보면 구원 얻은 무리가 나오는데 그들의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이 있습니다. 어린양의 이름이 적혀 있다는 것은 어린 양의 이름이 적힌 그들은 그들의 인생이 아닌 어린양의 인생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이마에 어린양으로 인 쳐놨으면 그 때부터 우리는 내 인생을 살아가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린양의 인생으로 살도록 계속 간섭을 해나가신다는 것입니다. 이걸 요한복음 21장에서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네가 젊어서는 네 원하는 대로 살았지만 늙어서는 띠 띄고 네가 원치 않는 길로 가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만 그런가요?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각 사람마다 그들에게 맞게 간섭을 하십니다. 어떤 사람에겐 이렇게 간섭하시고 어떤 사람에겐 또 저렇게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그 간섭당하는 것이 우리 인생이 하나 하나 차압당하고 그 차압당한 인생에 예수의 인생을 심어주시는 겁니다. 그게 신자의 인생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의 삶 속에서 여러분의 뜻대로 인생이 살아지지 않는다고 해서 저주라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간섭하고 계시는구나 를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 속에서 이 일을 하나님께서 시작하셨으면 이 하나님은 고집이 영원한 고집이기 때문에 한 번 붙잡히면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내가 도망간다 할지라도 기어코 붙잡아 오시니까 이 사실이 믿어지면 내 인생은 어차피 끝난 게임이구나!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개입하셨다면 내 인생은 반드시 가나안가지 갈 수 밖에 없는 인생이구나 를 아시기 바랍니다.
지금 창세기 11장에 나타난 것처럼 이 셈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하시면서 바벨론에서부터 하란으로 하란에서 가나안까지 이걸 하나님이 간섭해 가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과정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과정에 하나님께서 개입하고 계시다는 이 사실을 믿으시고 2014년도에도 기죽지 마시고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그 현실 속에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고 그 속에서 감사하며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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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울 산 목 양 교 회 蔚山 牧羊 ?? 원문보기 글쓴이: 정낙원
첫댓글 좋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설교 감사합니다.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