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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된 것을 의지하지 말라
겔 29:1-7
1 열째 해 열째 달 열두째 날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 인자야 너는 애굽의 바로 왕과 온 애굽으로 얼굴을 향하고 예언하라
3 너는 말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애굽의 바로 왕이여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가운데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
4 내가 갈고리로 네 아가미를 꿰고 너의 강의 고기가 네 비늘에 붙게 하고 네 비늘에 붙은 강의 모든 고기와 함께 너를 너의 강들 가운데에서 끌어내고
5 너와 너의 강의 모든 고기를 들에 던지리니 네가 지면에 떨어지고 다시는 거두거나 모으지 못할 것은 내가 너를 들짐승과 공중의 새의 먹이로 주었음이라
6 애굽의 모든 주민이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애굽은 본래 이스라엘 족속에게 갈대 지팡이라
7 그들이 너를 손으로 잡은즉 네가 부러져서 그들의 모든 어깨를 찢었고 그들이 너를 의지한즉 네가 부러져서 그들의 모든 허리가 흔들리게 하였느니라
겔 29:1-7 / [창조주를 자처한 죄] 우리가 포로로 끌려간 지 ㄱ) 제 10년 10월 12일에 여호와께서 내게 또 말씀하셨다. (ㄱ. BC 587년 1월) 2) `너 사람아, 애굽 왕 바로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바로와 애굽 땅에 내릴 내 심판을 선고하여라. 3) 너는 이렇게 전하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다. 너는 이제 내 벌을 받게 되었다! 네가 교만에 가득 차서 삼각주의 모든 강은 네 것이고 그것을 창조한 자가 바로 너라고 떵떵거리며 못하는 말이 없다마는 너야말로 나일강의 지류들 속을 기어 다니는 한 마리 덩치 큰 악어에 불과하다! 4) 그러니 내가 갈고리에 미끼를 달아 네 아가미를 꿰어 붙잡고 강에 사는 모든 물고기들이 네 비늘에 달라붙게 만들겠다. 그런 다음 너를 네 물고기들과 함께 나일강의 한복판에서 공중으로 높이 들어 올려서 5) 뜨거운 모래벌판으로 내던지겠다. 그러면 그들과 함께 시체조차 거두어 묻어 줄 사람 하나 없는 허허벌판에 쓰러져 죽을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사막의 들짐승들과 공중의 새들에게 너를 먹이로 넘겨주면 6) 그제서야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애굽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깨닫게 될 것이다. 애굽아, 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제까지 허망한 희망을 품게 하였다! 그들은 갈대 지팡이 같은 네게 속아만 살아왔다. 7) 너는 그들이 손으로 붙잡자 갑자기 부러져 오히려 그들의 온 팔을 찢어 놓았고 단단하다 여기고 의지하자 부러져 허리까지 다치게 하였다.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고 헛된 것을 의지하면 불순종하는 그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주변 사람들과 의지하려는 그 대상까지 벌 받게 됨을 깨닫게 합니다.
얼굴을 향하고(1-2) 에스겔이 남 유다 왕 여호야긴과 함께 2차 포로로 잡혀온 후 시드기야 왕이 유다 왕으로 즉위한(주전 597년) 10년째 되는 10월 12일에 에스겔에게 애굽을 향한 여호와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에스겔에게 애굽 쪽으로 얼굴을 향하게 하고 말씀을 예언하라 하셨습니다. 애굽 왕 바로의 교만을 책망하시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녀들을 눈동자처럼 지켜 보호해 주신다는 것은(신 32:10) 여호와께서 지속적으로 그에게 시선을 향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대적하고 악을 행하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눈길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다니엘과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을 동시에 바라보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어디서든 하나님의 눈길을 의식하고 살아야 합니다.
교만을 대적하시는 여호와(3-5) 여호와께서 대적이란 용어를 사용하신 것은 애굽과 바로 왕을 대적하신다는 것이고, 바로 왕을 조종하고 있는 사탄은 바로 왕의 교만을 대적한다는 것입니다. 애굽 왕의 교만을 나일 강에서 물고기들에게 위협적으로 군림하고 있는 악어(히브리어 타님)로 비유하면서 모든 것을 자신이 만들었다고 모든 것에 주인행세를 하려는 애굽 왕을 책망하십니다. 애굽은 도와줄 힘도 없으면서 유다에게서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챙기고 유다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데 일조했습니다. 그로 인해 애굽을 의지하는 나라들이 화를 입게 될 것입니다. 결국 애굽은 들 짐승과 새의 먹이로 던져지리라 하셨습니다.
갈대 지팡이(6-7) 남 유다 왕 시드기야는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2년 동안 포위당하여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시드기야 왕은 거짓 예언과 여론에 이끌려 애굽에 도움을 청합니다. 사람이 망하는 순간에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애굽을 향하여 '애굽은 본래 이스라엘 족속에게는 갈대 지팡이'에 불과하다고 하셨습니다. 유다가 "너를 손으로 잡은즉 네가 부러져서 그들의 모든 어깨를 찢었고 그들이 너를 의지한 즉 네가 부러져서 그들의 모든 허리가 흔들리게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완전히 바닥으로 쓰러지게 될 것을 말씀합니다.
적용: 여호와의 복된 시선을 계속 받을 수 있도록 순종의 삶을 살아가길 바라며 우리가 대단하게 여겼던 세상은 내게 갈대 지팡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기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 1:9)
우리의 행복은 환경이 아니라 환경에 대한 반응(response)입니다. 일상에서 기도하기 어려운 것은 세상의 환경에서 영적인 반응보다 세상반응이 더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도 환경을 보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고, 모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늘 주님의 손을 잡고 걷는 것처럼 한 손을 모으고 걸었다고 합니다.
< 설 교 >
애굽이 받을 하나님의 심판
겔 29:1-21 / 손재호 목사
우리는 25-28장 말씀을 통해서 예루살렘 주변 이방 나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살펴봤습니다. 29-32장 말씀은 계속되는 이방 나라들에 대한 심판으로 애굽과 애굽 왕이 받을 심판에 관한 말씀입니다. 애굽과 애굽 왕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이제까지 살펴본 예루살렘 주변 이방 나라들과 그 왕이 받는 심판과는 그 양적인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애굽과 애굽 왕의 심판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왜 이렇게 많은 분량으로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그 뜻이 무엇일까요? 애굽은 온 세상을 대표하는 나라로 볼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온 세상의 대표라 할 수 있는 바벨론의 멸망에 대하여 상세하게 다루듯이 에스겔서에서 애굽의 심판은 온 세상이 하나님께 받을 심판의 특징들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29-32장에 걸쳐서 말씀하시는 애굽과 애굽 왕이 받을 심판에 대한 전체적인 개략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라는 말로 시작되는 단락이 일곱 개입니다. 29:1-16절은 나일 강의 악어인 바로가 죽임을 당할 것과 그 나라가 약하여 질 것을 말씀하고 있고, 29:17-21절에서는 애굽은 느부갓네살의 보상이 될 것을 말씀하고 있고, 30:1-19절은 여호와의 날에 애굽이 심판을 당할 것을 말씀하고 있고, 30:20-26절은 느부갓네살이 바로의 팔을 꺾어 버릴 것을 말씀하고 있으며, 31:1-18절은 거대한 나무로 비유되는 바로 왕이 찍어 버려짐을 말씀하고 있으며, 32:1-16절은 애굽이라는 괴물의 멸망에 대해서 말씀하고, 32:17-32절은 애굽과 그 군대가 스올 곧 지옥으로 내려가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는 에스겔서 29장 말씀을 통해서 애굽이 받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보는 가운데 이 말씀을 통해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계시가 무엇인지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제 십년 시월 십 이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라고 합니다. 여기서 ‘제 십년 시월 십 이일’이라는 날짜는 에스겔서 1:2절에서 본대로 여호야긴이 사로잡혀 온 것을 기준으로 봅니다. 이때 여호와의 말씀이 에스겔에게 임하였습니다. 그러면 에스겔에게 임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2-3절을 보면 “인자야! 너는 애굽 왕 바로와 온 애굽으로 낯을 향하고 쳐서 예언하라. 너는 말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애굽 왕 바로야!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중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내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로 하여금 애굽의 바로 왕과 온 애굽으로 얼굴을 향하고 그들에 대해서 예언하라고 합니다. 그 예언의 첫 말씀은 3절에서 보는 대로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입니다. 애굽이 하나님의 대적이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두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교만이며,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의 의지가 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의지가 되는 양 속인 것입니다. 이로인해 하나님께서 바로 왕과 애굽에 대해 심판하십니다.
오늘 본문 3절을 다시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애굽의 대적이 되신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바로 왕의 ‘교만’ 때문이라고 합니다. 애굽은 나일 강의 범람으로 인해 비옥한 토지가 형성되어 고대에 아주 부강한 나라였습니다. 지금도 세계 4대 불가사의에 속한다는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는 강력한 왕권과 국력이 없이는 만들 수 없는 건축물들 입니다. 이런 나라의 왕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자기의 강들 가운데 누운 큰 악어라고 합니다. 여기서 ‘악어’라는 말은 성경에서 다양하게 말합니다. 뱀, 용, 라합, 리워야단 등으로 말해지는 바다의 괴물로 표현합니다(욥 41:1, 사 47:1, 51:9).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를 대항하는 흑암과 혼동의 세력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애굽의 바로 왕이 바로 지금 그러하다는 말씀입니다.
3b절을 보면 “내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왕이 하나님의 대적이 되는 이유입니다. 9절에도 보면 “애굽 땅이 사막과 황무지가 되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네가 스스로 이르기를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만들었다 하도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네가 스스로 이르기를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계를 바로는 자신이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 바로 왕은 나일 강의 한 마리 악어일 뿐입니다. 욥기 41장을 보면 악어를 아무도 다룰 수 없는 강력한 피조물로 말하면서 욥에게 “네가 능히 낚시로 악어를 낚을 수 있겠느냐. 노끈으로 그 혀를 맬 수 있겠느냐. 줄로 그 코를 꿸 수 있겠느냐. 갈고리로 그 아가미를 꿸 수 있겠느냐”고 합니다(1-2).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악어를 어떻게 다루십니까? 오늘 본문 4-5절을 보면 “내가 갈고리로 네 아가미를 꿰고 네 강의 고기로 네 비늘에 붙게 하고 네 비늘에 붙은 강의 모든 고기와 함께 너를 네 강들 중에서 끌어내고 너와 네 강의 모든 고기를 들에 던지리니 네가 지면에 떨어지고 다시는 거두거나 모음을 입지 못할 것은 내가 너를 들짐승과 공중의 새의 식물로 주었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갈고리로 네 아가미를 꿰고 너의 강의 고기가 네 비늘에 붙게 하고 네 비늘에 붙은 강의 모든 고기와 함께 너를 너의 강들 가운데서 끌어내고 너와 너의 강의 모든 고기를 들에 던질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지면에 떨어져서 다시는 거두거나 모으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들짐승과 공중의 새의 먹이로 주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악어는 바로 왕이며, 그에 딸린 고기들은 애굽의 백성들 입니다. 애굽이 이렇게 심판을 받는 것은 애굽의 교만 때문입니다. 이 교만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왕을 통하여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7-20절을 보면 “제 이십 칠년 정월 초 일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그 군대로 두로를 치게 할 때에 크게 수고하여 각 머리털이 무지러졌고 각 어깨가 벗어졌으나 그와 군대가 그 수고한 보수를 두로에서 얻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애굽 땅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붙이리니 그가 그 무리를 옮겨가며 물건을 노략하며 빼앗아 갈 것이라. 이것이 그 군대의 보수가 되리라. 그들의 수고는 나를 위하여 함인즉 그 보수로 내가 애굽 땅을 그에게 주었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제 이십 칠년 정월 초 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에스겔에게 임합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두로를 칠 때에 크게 수고하였으나 얻은 것이 별로 없다고 합니다. 머리털이 무지러지고 어깨가 벗어졌으나 그에 대한 대가는 변변찮았다고 합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바벨론 왕이 두로를 치기 위하여 13년을 수고하였다고 합니다. 두로가 섬에 위치하여 있으니 이를 공격하기 위하여 바다에 둑을 만들어가면서 싸워야 하는데 막상 공격하고 보니 성안의 보물들은 이미 다른 곳으로 다 빼돌려버린 후라고 합니다. 그러니 두로 왕에게서 얻지 못한 수익을 애굽에서 얻도록 하신다고 합니다.
두로 왕이 여호와의 심판을 받는 것은 역시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에스겔서 28:1-9절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너는 두로 왕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말하기를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중심에 앉았다 하도다. 네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 체할지라도 너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어늘. 네가 다니엘보다 지혜로와서 은밀한 것을 깨닫지 못할 것이 없다하고 네 지혜와 총명으로 재물을 얻었으며 금, 은을 곳간에 저축하였으며 네 큰 지혜와 장사함으로 재물을 더하고 그 재물로 인하여 네 마음이 교만하였도다.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네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 체하였으니 그런즉 내가 외인 곧 열국의 강포한 자를 거느리고 와서 너를 치리니 그들이 칼을 빼어 네 지혜의 아름다운 것을 치며 네 영화를 더럽히며 또 너를 구덩이에 빠뜨려서 너로 바다 가운데서 살륙을 당한 자의 죽음 같이 바다 중심에서 죽게 할지라. 너를 살륙하는 자 앞에서 네가 그래도 말하기를 내가 하나님이라 하겠느냐. 너를 치는 자의 수중에서 사람 뿐이요, 신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지난 번에 보았습니다만 다시 보는 이유는 우리가 다 두로 왕과 바로 왕과 같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늘 생각하는 소원대로 이루어졌다면 다들 두로 왕과 바로 왕과 같은 자리에 있을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래서 하는 말이 “나는 신이라. 이 모든 것을 내가 만들었다”고 하고 있을 사람들이 아닙니까? 우리는 아주 작은 일을 성취하여도 ‘이것은 내가 이루었다, 내 것이다’라고 합니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교회에서도, 우리는 이렇게 되고 싶은 사람들 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들을 심판하십니다. “너를 죽이는 자 앞에서도 내가 하나님이라고 말하겠느냐”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죽으면서도 자기 자신의 신 됨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죄악된 우리 인간들 입니다. 그 이유는 선악과를 따 먹을 때에 “너도 하나님처럼 되리라”는 유혹이 이미 다 들어있는 인간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아이들을 보면 좀 독한 아이들은 부모님으로부터 매를 맞으면서도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존심을 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신은 인간의 자존심을 지키라고 합니다. 나는 아무공로 없으니 거저 불쌍히 여겨달라는 말은 죽어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짜 신들의 특징입니다.
그러면 성도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루시겠습니까? 두로 왕과 바로 왕 같은 경우는 자신들이 신이라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심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알리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기 백성은 지난 시간에도 봤습니다만 심판을 통한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심판을 행하십니다. 성도는 이 심판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자신이 신이 아님을 확인 당하며 살게 됩니다. 우리는 날마다 신으로서 살고 싶은데 매사가 나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럴 때에 자신이 신이 아님을 확인 당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애가 3:26-33절을 보면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사람이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메우셨음이라. 입을 티끌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지로다. 때리는 자에게 뺨을 향하여 수욕으로 배불릴지어다. 이는 주께서 영원토록 버리지 않으실 것임이며,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고 예레미야 선지자가 슬피 노래한 내용입니다. 예레미야는 땅의 티끌에 입을 대라고 합니다. 혹시 그에게 소망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이 땅의 티끌임을 아는 자에게 구원의 소망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6-7절을 보면 “애굽의 모든 거민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애굽은 본래 이스라엘 족속에게 갈대 지팡이라. 그들이 너를 손으로 잡은즉 네가 부러져서 그들의 모든 어깨를 찢었고 그들이 너를 의지한즉 네가 부러져서 그들의 모든 허리로 흔들리게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애굽은 본래 이스라엘 족속에게 갈대 지팡이라고 합니다. 갈대는 지팡이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이 애굽을 지팡이로 여긴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지팡이는 여호와만이 이스라엘의 지팡이가 되어야 합니다.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여 위골된 환도 뼈로 인하여 평생 지팡이를 짚고 살아야 했습니다. 환도 뼈가 위골된 것은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살려야 한다는 야곱의 신되고자 함을 하나님께서 치신 것입니다. 그래서 절름발이가 된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이 그들의 의지가 되는 지팡이가 아니라 눈에 보이는 강대국, 자신들이 430년이나 노예로 살던 애굽을 지팡이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애굽을 의지하지 말라고 열 가지 재앙을 쏟아 부으시고 홍해를 건너 출애굽하게 하였건만 틈만 나면 애굽을 의지했기에 이스라엘은 본래부터 애굽을 의지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갈대는 지팡이가 될 수 없기에 그것을 의지하기 위해 잡으면 부러져서 모든 어깨를 찢고 그들의 허리가 흔들리게 되는 연약한 갈대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예루살렘에서 애굽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에스겔은 바벨론 포로지에서도 애굽을 의지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애굽이 바벨론을 이기면 자신들이 해방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평소에 애굽은 이스라엘의 의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의지는 되지 않았습니다. 약한 나라가 강대국과 동맹을 맺을 때에 강대국이 자기나라의 유익이 되는 선에서 약한 나라를 돕습니다. 만약 약한 나라를 돕다가 자기 나라가 위태로워지거나 손해가 되면 언제든지 동맹을 깨어버리는 것입니다.
이사야 36:6-7절을 보면 “보라. 네가 애굽을 의뢰하도다. 그것은 상한 갈대지팡이와 일반이라.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손에 찔려 들어가리니 애굽 왕 바로는 그 의뢰하는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 혹시 네가 내게 이르기를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의뢰하노라 하리라 마는 그는 그의 산당과 제단을 히스기야가 제하여 버리고 유다와 예루살렘에 명하기를 너희는 이 제단 앞에서만 경배하라 하던 그 신이 아니냐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히스기야 왕 때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공격하였습니다. 이때 산헤립의 군대장관인 랍사게가 한 말입니다. 히스기야가 항복을 하지 않으니 애굽 왕 바로를 믿고서 항복하지 않는다면 헛일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애굽이 상한 갈대지팡이 일 뿐이라고 합니다. 성한 갈대도 지팡이가 되지 못하는데 상한 갈대라면 더더욱 의지가 되지 못합니다. 이때 히스기야와 이사야는 갈대지팡이를 의지하지 않고 여호와의 전에 나아가 기도하였습니다. 그 결과 여호와를 모독한 앗수르의 군대 18만 5천명은 하룻밤 사이에 다 시체가 되고 왕이 혼자 도망가서 그들의 신에 경배하다가 자신의 아들에게 죽임을 당하였습니다(왕하 19:29-37; 사 37:36:38). 그러므로 하나님의 대적이 된 애굽은 그들의 교만과 이스라엘의 의지가 되었기에 심판을 당한 것입니다. 애굽은 이스라엘의 의지가 되지도 못하면서도 이스라엘의 의지가 되는 것처럼 정책적으로 후원을 약속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 아니라 북쪽의 세력인 앗수르와 바벨론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지 정말 이스라엘을 위한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8-15절을 보면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칼로 네게 임하게 하여 네게서 사람과 짐승을 끊은즉 애굽 땅이 사막과 황무지가 되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네가 스스로 이르기를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만들었다 하도다. 그러므로 내가 너와 네 강들을 쳐서 애굽 땅 믹돌에서부터 수에네 곧 구스 지경까지 황무한 황무지 곧 사막이 되게 하리니 그 가운데로 사람의 발도 지나가지 아니하며 짐승의 발도 지나가지 아니하고 거접하는 사람이 없이 사십년이 지날지라. 내가 애굽 땅으로 황무한 열국 같이 황무하게 하며 애굽 성읍도 사막이 된 열국의 성읍 같이 사십년 동안 황무하게 하고 애굽 사람들은 각국 가운데로 흩으며 열방 가운데로 헤치리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십년 끝에 내가 만민 중에 흩은 애굽 사람을 다시 모아 내되 애굽의 사로잡힌 자들을 돌이켜 바드로스 땅 곧 그 고토로 돌아가게 할 것이라. 그들이 거기서 미약한 나라가 되되 나라 중에 지극히 미약한 나라가 되어 다시는 열국 위에 스스로 높이지 못하리니 내가 그들을 감하여 다시는 열국을 다스리지 못하게 할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을 심판하십니다. 애굽 땅이 사막과 황무지가 되게 하심으로 이렇게 하시는 분이 여호와인줄 알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애굽은 강의 상류와 하류에 이르기까지 사막이 되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애굽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나일 강의 혜택으로 큰 제국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왕이 자기가 강을 만들었기에 자기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로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당합니다. 그런데 완전히 멸망하지는 않고 40년 동안 심판하시고 조금 회복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아주 미약한 나라가 되게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16절을 보면 “그들이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의 의뢰가 되지 못할 것이요, 이스라엘 족속은 돌이켜 그들을 바라보지 아니하므로 그 죄악이 기억나게 되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나를 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고 했습니다. 애굽의 심판은 그들의 교만에도 있었지만 이스라엘의 의지가 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심판하시고 미약한 나라가 되게 하셨습니다. 지금도 애굽은 미약한 나라들 중에 하나입니다. 나일 강 유역 외에는 거의 사막입니다. 강수량이 카이로 남부에 일 년에 2-5미리 정도인데 이것도 몇 년에 가끔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저와 여러분들은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갑니까? 우리가 의지하는 것들이 하나님의 약속 곧 그 약속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는다면 분명히 다른 것을 의지하고 살아갈 것입니다. 예수님을 의지하는 일에는 나의 자랑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나는 그를 죽인 죄인 중의 괴수로 드러나고 오직 그의 대속의 공로만 의지하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긍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받기에 자신의 신 됨의 자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수님을 믿는 자리에 있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대적의 자리에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대적의 자리에 있음을 알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로 그 죄악을 회개하며, 우리의 영원한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멸망의 자식들이 되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의 축복에 참예하는 복된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갈대 지팡이를 의지하지 마라
겔 29:1~7
1. 지팡이(短杖)는 원래 병약자나 노약자가 약한 몸을 의지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것입니다.
지팡이 중에 눈에 잘 띄게 흰색을 칠한 ‘흰 지팡이’가 있는데 시각장애인이 길을 걸을 때 이 지팡이를 사용한다면 이는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보행할 수 있음을 과시하는 표지입니다.
시각 장애인에게 있어 ‘흰 지팡이’는 촉각을 연장하는 도구로 지면의 변화와 장애물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안테나이며, 귀나 코와 같은 감각기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팡이는 때로는 신분이 높은 사람이 권위의 상징으로 또는 호신용으로도 이용되기도 했었습니다.
고대 사회에 있어서는 일반인의 보행용 외에 왕이나 신의 존엄성과 위력의 상징으로 때때로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양을 치던 지팡이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지팡이로 사용되기도 해서 소위 “하나님의 지팡이”로 불려지기도 했습니다. 모세는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해방시키라는 소명을 받았습니다.(출3:10-11)
모세는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며 사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가 정녕 너와 함께 하리라”(출3:12)며 순종을 요구하셨습니다. 모세는 “만일 그들이 나를 믿지 않으며 내 말도 듣지 않고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지 않았다고 말하면 어떻게 합니까?”며 또 거절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네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모세가 “지팡이입니다”고 대답하자 “그것을 땅이 던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그것을 땅에 던졌더니 뱀이 되었습니다. 모세가 그 앞에서 피하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네 손을 내밀어 저 뱀의 꼬리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손을 내밀어 그 뱀을 잡으니 다시 그것이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모세가 요구했던 하나님의 나타나심, 하나님의 능력을 믿을 수 있도록 증거해 주셨습니다.
하찮은 지팡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쓰시면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는 것임을 보여주시고 믿도록 하신 것입니다. 뱀은 애굽 왕 바로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뱀의 꼬리를 잡으니 다시 지팡이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바로를 제압하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신 광야를 떠나 르비딤이라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백성들이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또 다시 백성들은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며 모세에게 따지며 죽일 듯이 대들었습니다.
광야 생활에서 참으로 어려운 문제에 부딪치게 되면 서로 힘과 마음을 합하여 하나님 앞에 무릎을 끓고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책임을 지도자 모세에게 전가시키고 다투고 돌을 던져 죽일 기세였습니다. 모세는 이런 상황에서 문제를 해결할 다른 방도가 없어서 하나님께 나아가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얼마 아니면 내게 돌질 하겠나이다.”(출17:4)라고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응답하셨습니다. “너는 백성들 앞으로 가거라. 네가 갈 때는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 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거라. 내가 시내 산 바위 위에서 네 앞에 서겠다. 너는 그 지팡이로 바위를 치라. 그러면 바위에서 물이 나와 백성이 마실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나일강을 쳐 피로 변하게 했던 그 지팡이로 반석을 쳤습니다. 그러자 물이 터져 백성들과 가축들이 모두 충분히 해갈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모세는 하나님의 소명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할 때 하나님 말씀대로 지팡이를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과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자신의 지팡이가 비록 광야에서 양을 칠 때 사용했던 것이지만 이렇게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팡이”라고 불렀습니다. 광야 여정 중 아말렉이 공격해왔을 때 모세는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겠노라.”(출17:8-16)며 여호수아에게 병력을 동원하여 나가 아말렉과 싸우라고 명령했습니다.
과연 모세는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아론과 훌을 데리고 산꼭대기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손을 들고 있는 동안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겼습니다. 모세의 팔이 피곤해지자 아론과 훌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를 그 위에 앉히고 해가 질 때까지 그들이 양쪽에 서서 하나는 이 팔을, 하나는 저 팔을 붙들어 그 손이 내려오지 않게 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여호수아는 아말렉군을 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전쟁의 승패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은> 모세의 손에 달려 있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행하실 때 인간의 힘이나 지혜, 능력 등을 의존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자신의 지혜와 능력과 권능으로 성취하십니다.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은 항상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사시기 바랍니다.
2. 오늘 본문 말씀은 “갈대 지팡이”를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교만한 애굽의 통치자 바로를 나일 강둑에 서식하는 큰 악어로 비유하면서 이 악어를 하나님께서 갈고리로 아가미를 꿰고 그 악어의 비늘에 달라붙은 강의 모든 물고기와 함께 끌어내 멀리 허허벌판 사막에 던져 들짐승과 공중의 새에게 먹이로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겔 29:4-5 / 내가 갈고리로 네 아가미를 꿰고 네 강의 고기로 네 비늘에 붙게 하고 네 비늘에 붙은 강의 모든 고기와 함께 너를 네 강들 중에서 끌어내고 너와 네 강의 모든 고기를 들에 던지리니 네가 지면에 떨어지고 다시는 거두거나 모음을 입지 못할 것은 내가 너를 들짐승과 공중의 새의 식물로 주었음이라
이렇게 하나님의 심판으로 나일 강 큰 악어의 운명이 될 애굽을 의지하는 행위는 마치 “갈대 지팡이”를 의지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갈대’는 나일 강둑에서 자생하는 풀로 지팡이로 결코 사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일 강의 갈대는 모두 속이 비어 있어서 그것을 부러뜨리면 날카로운 갈대 껍질이 지나는 사람의 어깨를 상하게 하고, 만일 갈대에 몸을 기대게 되면, 물론 기대기도 어렵지만 기댄 사람의 허리를 상하게 하기 때문에 의지할만한 ‘지팡이’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본문 7절에 이렇게 기록한 것입니다.
겔 29:7 / 그들이 너를 손으로 잡은즉 네가 부러져서 그들의 모든 어깨를 찢었고 그들이 너를 의지한즉 네가 부러져서 그들의 모든 허리로 흔들리게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갈대와 같은 애굽은 결코 의지할 대상이 아니며 도리어 의지한 자에게 해가 될 뿐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황폐화된 애굽이 나중에 자신의 교만을 회개하고 회복되기는 할지라도 나라들 가운데서 가장 힘없는 나라가 되어서, 다시는 다른 민족들보다 높아지지 못하도록 아주 작은 나라로 만들어버릴 것이기 때문에 애굽은 “갈대 지팡이”에 불과한 것입니다.
겔 29:14-16 / ....그들이 거기서 미약한 나라가 되되 나라 중에 지극히 미약한 나라가 되어 다시는 열국 위에 스스로 높이지 못하리니 내가 그들을 감하여 다시는 열국을 다스리지 못하게 할 것임이라 그들이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의 의뢰가 되지 못할 것이요
‘애굽’은 세상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의지하고 사는 것은 “갈대 지팡이”를 의지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6절에, “애굽은 본래 이스라엘 족속에게 갈대 지팡이었다.”고 했습니다.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갈대 지팡이”같은 애굽을 의지하지 말라고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수차례에 걸쳐 경고하셨습니다.
사 2:22 /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사 30:1 /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화 ,패역한 자식들이여, 그들이 계교를 베푸나 나로 말미암아 하지 아니하며 맹약을 맺으나 나의 신으로 말미암아 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그들이 바로의 세력 안에서 스스로 강하려 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하려 하여 애굽으로 내려 갔으되 나의 입에 묻지 아니하였으니 죄에 죄를 더하도다....
사 31:1-3 /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뢰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앙모치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거니와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신즉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 그 말을 변치 아니하시고 일어나사 악행하는 자의 집을 치시며 행악을 돕는 자를 치시리니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 손을 드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당장 눈에 부강해 보이는 애굽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그만큼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애굽’은 늘 매력적이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도착했지만 그 땅에 기근이 심해 먹고 살기가 힘들어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약속의 땅에 먹을 것이 없었을 때 애굽에는 음식이 풍부했던 것이었습니다. 애굽에 내려가 먹고 살고자 자기 아내를 두고 오빠행세하다 장차 ‘열국의 어미’(창 17:16)가 될 아내를 바로 왕에게 빼앗길 뻔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큰 민족을 이루어 복의 근원이 되게 하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바로 왕에게 큰 재앙을 내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털끝 하나 손대지 못하게 해서 되돌려 주셨습니다.(창 12:10-20) 이러한 일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게도 또 나타납니다. 일찍이 아브라함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든 적이 있는데, 이삭 때에도 그 땅에 흉년이 들어, 이삭이 애굽 땅으로 가고자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나타나셔서(창 26:1-4)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 네가 이 땅에서 살아야, 내가 너를 보살피고, 너에게 복을 주겠노라. 그리고 이 모든 땅을, 내가 너와 너의 자손에게 주겠노라. 내가 너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약속을 이루어서, 너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지게 하고, 그들에게 이 땅을 다 주겠노라. 이 세상 모든 민족이 네 씨의 덕을 입어서, 복을 받게 하겠노라. 그래서 결국 애굽으로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반면 롯은 아브라함을 떠나 독립하여 창창한 미래를 향하여 첫발을 내어 딛을 때 가장 장래성이 있어 보이는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했습니다. 그 곳을 선택한 이유는 바로 그 곳이 바로 애굽 땅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그 땅이 약속의 땅 바깥에 위치해 있을 지라도 롯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창 13:10 /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나 롯이 선택했던 소돔과 고모라는 애굽 땅과 같았을지라도 결국 유황불 심판을 받아 멸망당하고, 롯은 빈털터리가 되어 겨우 두 딸만 데리고 나와 생명을 건졌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약 1300년 전 이스라엘 사사시대에도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가나안 땅, 그 중에도 가장 풍요로운 땅 베들레헴이 흉년이 들었습니다. 이곳에 엘리멜렉과 나오미 부부가 살았는데 흉년이 들자 두 아들을 데리고 흉년을 피하기 위해 모압 지방으로 들어가 살았습니다. 흉년을 피해 들어간 모압 지방은 롯이 자기의 큰딸과의 근친상간을 통해서 얻은 맏아들(창 19:37) 모압의 후손들이 살던 곳입니다.
(렘 48:24; 룻 1:2, 6; 2:6). 이처럼 “모압 지방”은 소돔에 살던 사람들처럼 육체의 소욕에 따라 사는 불륜의 땅입니다. 이들 롯의 후손들은 소돔과 고모라에 내린 유황불 심판 교훈을 깨닫지 못하고 우상을 숭배하며 육체의 쾌락을 쫓아 살았습니다. 모압은 한 마디로 애굽과 마찬가지로 세상의 모형입니다. 나오미는 잠시 흉년이 들었다 해서 약속의 땅 베들레헴을 떠나 이러한 모압으로 내려간 것입니다. 그들이 모압으로 내려간 결과를 룻기 1:3-5에서 이렇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 두 아들이 남았으며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아내를 취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거기 거한지 십년 즈음에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모압 ‘세상’으로 내려간 나오미는 남편을 잃고 우상숭배하는 이방 모압 여인들과 결혼시킨 두 아들마저 잃었습니다. 사실 나오미라는 이름은 ’기쁨' 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다 잃고 부끄러운 모습으로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자신을 더 이상 나오미, ‘기쁨’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합니다. 삶의 모든 기쁨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괴로움’이라는 뜻을 가진 ‘마라’라고 불러달라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을 떠났던 자신의 인생과 가정에 괴로움밖에 남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룻 1:20-21 /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나 오미라 칭하느뇨
이처럼 애굽이나 모압 등으로 나타나는 “갈대 지팡이”를 의지했던 사람들은 모두가 다 ‘가라지’나 ‘마라’ 인생이 되었습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애굽은 어려운 일을 겪게 될 때마다 언제나 쉽게 돌아가고픈 매혹적인 곳이었습니다. 롯이 눈을 들어 바라보고 선택한 소돔과 고모라처럼 물이 넉넉하여 애굽 땅과 같이 장래성과 성공에 대한 기대치가 가장 높아 보이는 곳이 바로 세상입니다. 풍요함과 안전, 그리고 성공에 대한 쉬운 길을 제공하는 곳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애굽이나 소돔과 고모라, 모압 등 세상은 갈대 지팡이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때문에 갈대 지팡이 같은 세상을 결코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갈대 지팡이”를 의지하는 자에 대한 경고와 오직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축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렘 17:5-7 /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건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거하지 않는 땅에 거하리라.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히스기야는 이스라엘 왕에 등극하여 전국에 걸쳐 모든 우상과 우상숭배의 신전들을 철저히 파괴하여 없애버렸습니다. 그리고 성전을 정결케 하여 모든 예배를 회복했습니다. 참으로 히스기야 왕은 전무후무할 정도로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나라를 통치했습니다.
왕하 18:3-6 / 히스기야가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곧 저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히스기야 왕은 더 나아가 당시 최강국 앗수르 제국에 조공을 바치고 국가 안보를 의지했던 외교관계를 깨끗이 단절해버렸습니다.
왕하 18:7 / 여호와께서 저와 함께 하시매 저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 저가 앗수르 왕을 배척하고 섬기지 아니하였고
그러자 앗수르가 예루살렘을 침공했습니다. 이에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예전처럼 비굴하게 앗수르에 공물을 바치고 타협하고자 했습니다. 이때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 10:24-26 /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시온에 거한 나의 백성들아, 앗수르 사람이 애굽을 본받아 막대기로 너를 때리며 몽둥이를 들어 너를 칠지라도 그를 두려워 말라. 내가 불구에 네게는 분을 그치고 노를 옮겨 그들을 멸하리라 하시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채찍을 들어 그를 치시되 오렙 반석에서 미디안 사람을 쳐 죽이신 것 같이 하실 것이며 막대기를 드시되 바다를 향하여 애굽에 드신 것 같이 하실 것이라.
갈대 지팡이같은 애굽을 의지했다가 오히려 막대기와 몽둥이로 맞은 것처럼 앗수르가 너희를 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채찍으로 그들을 멸하여 앗수르의 멍에를 부숴뜨리고 이스라엘에게 더 이상 짐이 되지 않도록 만들어 주리라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 말씀대로 성전에 나가 오로지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기도했습니다. 그 밤으로 하나님의 사자가 앗수르 진영을 쳐 18만 5천명 앗수르 군사를 전멸시켜버렸습니다. 아침 일찍이 이스라엘 군대가 앗수르 진영에 가보니 송장만 널부러져 있었습니다.
왕하 19:35 /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을 친지라.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히스기야 왕은 “갈대 지팡이”를 버리고 모세처럼 “하나님의 지팡이”를 잡고 성전에 나가 기도했을 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승리했습니다. 갈릴리 어부 베드로가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빈 배로 돌아와 힘없이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찾아와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눅5:5-6)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곳에 그물을 내리자 고기가 너무 많이 잡혀 그물이 찢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까지 불러 두 배에 고기를 가득 채우자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래서 지혜서 잠언은 “(잠 16:20,28:25)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 풍족하게 되는 복이 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갈대 지팡이”를 버리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믿고 의지하여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은 하나님의 축복”(렘17:7-8)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