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Choices
한겨레
팔로우
에너지 위기 속 탈핵 결심한 독일…“이젠 안심”-“다른 나라가 비웃어”
노지원별 스토리 • 10시간 전
낮 12시, 광활한 포도밭 한가운데에 있는 독일의 마지막 원자력발전소 ‘네카르베스트하임 2호기’에서는 수증기가 희미하게 피어올랐다. 불씨가 사라진 재에서 마지막 연기가 피어오르는 듯했다. 전날만 해도 발전소는 거대한 수증기를 내뿜었다.
15일(현지시각) 공식적으로 가동이 중단된 독일 남서부 바덴 뷔르템베르크주에 있는 원자력발전소 네카르베스트하임 2호기에서 수증기가 희미하게 피어오르고 있다. 네카르베스트하임/노지원 특파원© 제공: 한겨레
2023년 4월15일(현지시각) 0시를 기해 독일 남서부 바덴 뷔르템베르크주에 있는 네카르베스트하임 2를 비롯한 독일 내 원자력발전소 3기가 모두 멈춰 섰다.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이날 발전소 앞 주차장에는 500명 넘는 시민과 반핵 활동가가 모였다. 독일이 마침내 ‘탈핵’을 이룬 날을 다 함께 기념하기 위해서다. 이날 시위는 축제에 가까웠다. 경찰차 서너 대는 건너편에서 차를 대고 기다릴 뿐이었다. “이제 안심이 된다”며 사람들은 밝게 웃었다. 서로 먹을 것, 마실 것을 나누고 사진을 찍었다. 환경단체가 설치한 무대에서는 밴드의 공연이 이어졌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돗자리에 앉힌 뒤 함께 점심을 먹었다.
15일(현지시각) 오후 독일 남서부 바덴 뷔르템베르크주에 있는 원자력발전소 네카르베스트하임 2호기 앞 주차장에서 원전 가동 중단을 기념하는 시위가 열렸다. 축제 분위기가 났던 이날 시위에서 시민과 활동가들이 박수를 지며 환호하고 있다. 네카르베스트하임/노지원 특파원© 제공: 한겨레
삼 남매를 데리고 슈투트가르트에서 수잔(42)은 “역사적인 날에 일부가 되고 싶었다”며 “안심이 되긴 하지만 여전히 폴란드, 프랑스 등 주변 나라에서 새 원자로를 짓는 점이 우려스럽다.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핵폐기물 이야기가 나오자 밝던 낯빛이 금세 어두워졌다. “핵 쓰레기는 아주 오랜 기간 남습니다. 어떻게 핵발전이 녹색 에너지인가요?”
15일(현지시각) 오후 독일 남서부 바덴 뷔르템베르크주에 있는 원자력발전소 네카르베스트하임 2호기 앞 주차장에서 원전 가동 중단을 기념하는 시위가 열렸다. 한 활동가가 아이들과 함께 핵 발전소에 연결돼 있던 모형 전기코드를 뽑아 태양광 패널로 옮겨 꽂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네카르베스트하임/노지원 특파원© 제공: 한겨레
“5, 4, 3, 2, 1.” 무대에 오른 활동가들은 원자력발전소에 연결돼 있던 모형 전기 코드를 뽑아버렸다. 어른은 아이들과 함께 코드를 태양광 패널로 옮겨 꽂았다.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독일의 탈핵을 기념하는 시위는 이곳뿐 아니라 마지막 남은 원전인 엠슬란트, 이사르 2호기가 있는 링엔과 뮌헨, 그리고 수도 베를린에서도 열렸다. 이날 가동 중단된 원전 3기는 향후 해체될 예정이다.
독일의 탈핵 선언과 원전 가동 영구 중단 약속은 지난해 유럽을 덮친 에너지 위기 앞에서 한때 흔들리는 듯 했다. 1976년부터 약 50년 동안 반핵 운동을 해 온 독일 최대 환경단체 분트(BUND) 활동가 고트프리트 메이슈틸마는 “독일은 원전 없이도 충분한 전기를 생산할 수 있다. 심지어 올해 석 달 동안 풍력 발전으로 만든 전기를 원전이 많은 나라 프랑스에 팔았다”고 지적했다.
이날 시위에 탈핵에 찬성하는 이들만 모인 건 아니었다. “46년 동안 이산화탄소(CO2) 배출이 없는 저렴한 전기를 제공해줘서 감사하다. 다른 나라는 우리를 비웃고 있다”고 튀빙겐에서 온 줄리안은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앞으로 10∼15년 동안 재생에너지가 충분하지 않을 것”이라며 “원전을 닫으면 더 많은 양의 석탄을 태워야 하는데, 기후뿐 아니라 일반 사람들의 건강에도 악영향을 미친다”라고 말했다. 그는 모든 이들이 원전 폐쇄를 원하는 건 아니라는 점을 알리고 싶어 나왔다고 했다.
지난해 2월 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면침공으로 시작된 전쟁으로 겨울을 앞둔 유럽에 ‘에너지 위기’라는 태풍이 몰아쳤다. 독일은 지난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전까지 천연가스 소비량의 절반 이상(55%)을 러시아에서 수입했고, 러시아는 서방이 경제 제재를 하자 독일을 포함한 유럽 가스 공급을 중단했다. 세계 에너지 가격이 급등했고, 독일 시민들은 적어도 두 배 이상 오른 에너지 요금 청구서를 받아들고 충격에 빠졌다. 정부도 고민에 빠졌다. 1980년 반핵 운동을 동력 삼아 창당한 녹색당이 포함된 독일 ‘신호등’ 연정이 고심 끝에 원전 세 곳을 이달 중순까지 예비전력원으로 남겨뒀던 이유다. 이 밖에도 독일 정부는 미국과 중동 등에서 천연가스를 수입하기 위해 액화천연가스(LNG) 터미널을 4곳을 추가 건설하기로 했다.
1969년 첫 상업용 원전 가동 이후 54년 만에 독일 내 모든 원자력발전소가 폐쇄되며 비로소 탈핵이 완성된 듯하지만, 핵발전이 남긴 유산을 청산하기까지는 갈 길이 멀다. 원전 해체 작업을 안전히 마치고,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최종 저장소를 찾는 일 등 과제도 여전히 남아있다.
스테피 렘케 독일 연방 환경·자연보호·원자력 안전·소비자 보호부 장관은 13일 “탈원전은 우리나라를 더 안전하게 만들지만, 원전이 남긴 유산을 없애는 수십 년의 도전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라며 “핵 (폐기물) 저장 시설에 대한 해결책을 계속 연구하고 재생에너지 확대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라고 했다. 독일 내 원자로에서 2만7000㎥ 규모의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이 발생했고, 콘라드 저장소에도 약 30만㎥ 규모의 중저준위 방사성 폐기물이 있다. 독일은 2030년까지 독일 내 사용 전력의 80%를 재생에너지로 생산할 계획이다.
계속 읽기
AdChoices
한겨레 기사 더 보기
시간만 흘려보내는 노동시간 개편… 여당 ‘정책 주도권’은 어디에?
“증오 해법은 가진 자가 과도한 혜택 내려놓는 것이죠”
4월17일 궂긴 소식
한겨레 방문
추천 콘텐츠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