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부족한 한 가지]
1. 부자와 천국개념
'부자(富者)'란 국어사전에
'재물이 많아 살림이 넉넉한 사람'이라고 나오는데
이 말은 일단 물질적인 스트레스를
가난한 사람보다 훨씬 덜 받는 사람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10:25에,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고 쓰여있습니다.
그럼 부자는 천국에 못가는 거냐,
또 크리스챤은 돈을 많이 벌어도 안 되는 거냐
이런 반문이 들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같은 의문을 품었습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막10:27)
이 얘기는 구원의 주체가
'하나님 아버지'라는 것을 명백히 밝히신 것입니다.
구원의 시작과 그 과정, 결말 모두가
'하나님(adonai)'이 주체라는 것이지요.
인간들이 자주 오해하고 실수하는 것 중 하나가
늘 자기쪽에서부터 문제를 풀려고 하는 습성입니다.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아~,그러니까 예수가 내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었단 말이죠?
그럼 내가 그것을 인정하고 믿기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 아닙니까?"
분명히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구원을 베푸신 분이 '하나님'이란 걸
자꾸 까먹습니다.
신앙이 좋다는 걸
내가 하나님을 잘 믿는 걸로만 알고 있다는 것이지요.
내가 하나님을 잘 믿어야 하는 건 맞는데
그 믿음의 주체가 '나'여서 문제가 됩니다.
예민한 부분이라 설명하기가 참 애매합니다만
하여튼 이 주체와 객체에 대한 분명한 구별과
신앙이 가능해지는 순서를 잘 기억해둬야 합니다.
부자(富者) 얘기하다가 뜬금없이 구원문제를 꺼내서
이게 도대체 무슨 상관인가 싶으시겠지만
아주 많이, 대단히 깊이 연관이 있습니다.
2. 한 부자 청년의 고민
여기에 한 청년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막10:17),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마19:16)
이 질문에 예수님은 십계명의 내용을 언급하시며
이것들을 잘 지킬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마19:17)
그랬더니 이 청년의 대답이 걸작입니다.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마19:20)
이 말은 다시 풀면 요렇게 됩니다.
"그 정도는 다 지키고 있는데
뭐가 더 부족하다는 말씀이신지요?"
예수님은 이 청년이 부자라는 걸 이미 알았습니다.
그래서 지켜야 할 내용들을 언급하신 것인데
계명들을 다 지킨다고 하니까
친절하게도 바로 이렇게 대답해주십니다.
마가복음 10장,
21절: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돈을 의지하는 청년,
그러나 그는 자신이 성경말씀대로 사는
믿음 좋은 신앙인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 청년이 돈을 의지하고 있고
그 돈이 근거가 되어 계명들을 지키는 걸 아셨기에
직접 본론을 꺼내놓으신 겁니다.
돈이 없어도 그게 가능하겠느냐는 것이죠.
돈 뿐아니라 건강,지식,지위,권력,명예 등
그 어떤 것도 신앙의 근거가 되면 안 되는데
그를 지탱하는 가장 큰 원인이 돈이라는 걸
그 청년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듯합니다.
예수님은 그 청년에게
가진 재산을 다 나누어주지 않으면
지옥에 가게 될거라고 협박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라고 친절하게 권유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19:21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한 가지만 더 하면 완전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천국에 가느냐 못가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천국에서의 삶에 대한 미래와 소망에 대한
문제라는 뜻입니다.
이것에 대한 힌트가 이겁니다.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이 구절을 어디선가 본 것 같지 않은가요?
마태복음 6장에 나옵니다.
19절: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20절: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21절: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인간은 죄를 지은 아담 이후에
이마에 땀이 흘러야만,
즉 일을 해야만 생명을 유지하게끔 돼있습니다.
당연히 생명을 유지하려면 돈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돈이 목표가 되는 '생각'입니다.
또 이 돈을 의지하는 '마음자세'입니다.
매일 내리는 만나를 먹지 않고 살 수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만나의 유통기한은 단 하루였습니다.
어느 누구도 24시간 이상 보관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는가 하면
믿음이란 것은 목숨과 연결되어야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간절해지고
훈련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먹을 것 말고 내일 것까지 저장해두면
내일은 하나님이 굳이 필요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40년 동안이나 이 훈련을 했는데도
이스라엘 백성은 종착지인 가나안 땅에 이르러
들어가서 살아도 될 만한 곳인지
정탐꾼을 조직해서 하나님을 떠보는
차마 못할 짓을 저지르고야 맙니다.
만나로는 부족하다 아우성을 쳐서 메추라기를 주시고
한낮의 불볕더위를 구름으로 가려주시고
밤의 추위를 불로 뎁혀주셨으며
40년간 옷이 해어지지 않게 해주셨을 뿐아니라
마실 물이 없다 하면 반석에서도 물이 나게 하셨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들을 망각했던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다르냐!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내일 먹고 살 돈을 모으느라 바쁘고
평생 먹고 살 돈을 모으느라 바쁩니다.
꼭 죽기 위해 일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만 해결되면
하나님을 잘 믿을 거라고 인간들은 부르짖지만
40년을 한결같이 기적을 베풀었어도
하나님이 낸 테스트에 통과하지 못한 사실을 보면
죄인인 인간은 영혼이나 천국에 관심도 없고
하나님을 주님으로 섬기는 것도 싫어하는 존재임에
틀림없습니다.
진짜 우정은 친구가 어려운 처지에 놓일 때 증명되듯
참된 신앙은 내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을 때
비로소 드러납니다.
3. 억울해 보이는 환난과 연단
하나님은 욥을 통해 신자의 궁극적 목적이 무엇이며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보여주십니다.
타락한 천사인 사탄을 통해 욥을 연단시키시는데
겉으론 욥이 이런 일을 당할 이유가 없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욥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굉장히 좋게 쓰여있기 있기 때문입니다.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욥1:1)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욥을 무서우리만큼
혹독하게 다루시는데
이 환난의 시작과 과정을 통과한 욥의 최후고백은
신앙의 후배인 우리들에게 의아함을 안겨줍니다.
욥기 42장,
1절: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2절: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3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4절: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5절: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절: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욥이 믿음이 온전한 사람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일부러 환난을 당하게 하신 결과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믿음의 깊이가
훨씬 좋아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욥도 구원받은 한 영혼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구원의 수준이 깊지는 않은 까닭에
환난을 통해 구원의 완성을 향해 일보 전진이
이루어지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깊고 놀라운
사랑이 있었음을 읽어내야 합니다.
신앙의 대전제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곤 '내일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라고 고백하며 사는 겁니다.
그러나 이 정답이 나에게서 제대로 성취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인고의 세월이 필요한지 모릅니다.
우리는 단순히 고난이 너무 괴롭고 아프니까
나쁜 것이라는 생각을 품기 쉽습니다.
그래서 나를 괴롭게 하는 인간과 사탄을 미워하는데
사실 그들은 단지 하나님의 소도구일 뿐입니다.
아직 나에게 부족한 한 가지 때문에
하나님은 아직도 나를 살려두시고
그것을 성취하시려고 고생을 자청하십니다.
하나님이 하나님답게 보이는 것은
굳이 그 완전하심을 입증하실 필요가 없는데도
손해를 감수하시고 오히려 기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초두에 보이는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구절이 마음에 꽂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아야 합니다.
하나님 마음에 쏙 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나에게 행복을 보장하는 통로요
신자의 궁극적 목표인 구원의 완성을 향해
한 발자국 전진하는 근거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생각이 곧 하나님의 생각이 되며
그 생각대로 살아지는 삶을 살기 위해
애쓰는 우리가 됩시다.
온전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더 깊은 신앙으로 나아가
물질이 주는 안락과 행복이 아닌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감사를 맛보며
그것을 더욱 풍성케 하도록 하나님나라를 바라보는
우리가 됩시다.
할렐루야!^___^♡
첫댓글 아멘. 은혜로운말씀 감사합니다^^
아멘.
아멘..
아멘.너무 은혜되는 말씀입니다.
아멘. 믿음의 부요함으로 하나님의나라를 누리기를 원합니다. 마라나타 ❤
귀한 글 감사 합니다
저도 그런 삶을 살수있도록 ......
깊은 묵상에서 나온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저도 자주 걸리는 부분입니다. 물질의 미혹에 넘어지지 않도록 내 마음 깊은곳 까지 성령님께서 관여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아멘!
아멘..아멘..이런 말씀들이 한국교회 강단 이곳저곳에서
우렁차게 선포되어지길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