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햏들 안녕하시지라.
쇟이오. 흙오이를 찾아 헤메는 쇟.
지금의 사태와 국제관계를 보다보니
쇟 누군가가 자꾸 떠오르는건 어찌할수가 없었소.
면암최익현.
간단하게 네이버에서 퍼온 걸 올려놓겠소.
최익현 [崔益鉉, 1833.12.5 ~ 1906.11.17]
조선 후기의 지사. 1868년 경복궁 중건과 당백전 발행에 따르는 재정의 파탄 등을 들어 흥선대원군의 실정(失政)을 상소하여 관직을 삭탈당했다. 이후 일본과의 통상조약과 단발령에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항일의병운동의 전개를 촉구하며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모았다. 그러나 순창에서 패하여 쓰시마섬에 유배되었다.
[출처] 최익현 [崔益鉉 ] | 네이버 백과사전
역사좀 배웠다 하는 햏들은 기억할것이오.
대마도에 유배되어 일본것을 먹지않겠다 하며 굶어죽는 지식인.
쇟은 이 사람에 대해 이렇게만 기억하고 있었소.
고전을 번역하시는 아빠햏께서 몇년전 쯤에 면암집이라는 최익현의 책을 번역하시다가
눈물흘리시는걸 본적이 있었소.
야사 중엔
최익현이 명성황후가 그렇게 돌아가신 후
이렇게 치욕스러운 일이 없다 하여
고종에게 내가 선비의 대표로 목을 내놓을 테니
조선의 대표로 고종이 목을 내놓읍시다. 라고 하였다는 일화가 있소.
그러나 고종은 ...흐음.
고종도 ....불쌍한 사람.
아버지는 그 후로 고종황제와 명성황후, 대원군을 비판하셨소.
그들은 동정받을 가치조차 없다고 말이오.
쇟은 그때 이해할 수가 없었소.
그래도 그들만의 잘못은 아니지않나.
시대가 그런것을 어떻게 하나.
그런데 쇟.
요즘의 국제관계와 우리나라 돌아가는 걸 보니
그때와 조금도 다르지않을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소.
역사는 돌고도는 것이니 말이오 .
그래서 쇟 면암집을 읽기 시작했소.
책은 대형서점에 재고가 없더이다.
주문했소.
최익현에 대한 책 자체가 별로 없었소.
위인전조차도 없더이다.
어쩔수없이 면암집이었소.
쇟 자료가 부족하고 쇟 지식도 부족하고 그래서 정보의 바다 인터넷과
아빠햏께 조금은 자문을 구해가며 이 글 쓰오.
아빠햏과 공유하는건 아니오.
물어보면서 정보수집하는 단계요.
조금은 스압일것이오.
천천히 읽어주시오.
면암집은 총 40권으로 되어있소.
부록은 뺐소.
그 중 상소문중 몇가지만 발췌해서 올리오. 너무 기니까 쇟이 조금 손봐서 올리겟소.
한국고전번역원 DB가 출처라오.
햏들의 객관적인 판단을 위해 쇟의 감상은 맨 밑에 남기겠송.
수옥헌(漱玉軒)에서 아뢰는 차자(箚子) 갑진년(1904, 광무 8) 12월 2일
(중간중간 편집하겠소. 상소문은 너무 기니께생략한 부분은 ....로 처리하겠송.)
.........
아아, 저 민회(民會)라 말하는 것은 여러 불평하는 무리들을 모아 결탁하고 잘못을 꾸민 것이 이미 하루가 아닙니다.
밖으로는 강한 이웃 나라의 세력을 끼고, 안으로는 조정의 정사에 사단을 핑계하여, 임금의 엄한 명령도 모르고, 정부의 대관도 모릅니다.
죄수를 마음대로 빼앗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욕지거리를 하며, 심지어는 대궐 문 앞에 모여서 우는 변고까지 있습니다.
아아, 기강이 끊어지고 명분이 없어졌는데, 나라가 어떻게 나라가 되며 사람이 어떻게 사람이 되겠습니까.
이 백성들은 모두 선왕들께서 덮어 키운 적자(赤子)들이며, 예의를 지키던 유민(遺民)입니다.
처음부터 화란을 즐기며 기뻐하는 성품을 지닌 사람들이 아니며, 또한 임금을 존대하고 윗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렇게 하루아침에 성질이 변하고
마음을 바꾸기를 이토록 극단에 이르게 된 것입니까.
아아, 이 어찌 한심스럽고 통곡스러운 일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
대체로 저 난민(亂民)의 무리는 패악(悖惡)하다고 하면 패악하고,
역도(逆徒)라고 하면 역도입니다.
그 죄상을 논한다면 마땅히 처벌해야 하니, 무슨 의심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어찌 정부에서 행하는 짓이 화란을 자초하게 된 까닭을 생각하지 않습니까.
폐하께서 생각하여 보소서.
요사이 정부에 있는 사람들이 과연 모두 어떠한 사람들입니까?
비록 마음과 몸을 다 바쳐서 죽은 뒤에야 그만두는
제갈량(諸葛亮)과 같이 할 사람은 없더라도,
그래도 마음에 국가를 두어 임금과 더불어 기쁨과 슬픔을 같이할 수 있는 사람은 있습니까?
비록 면전에서 잘못을 말하고 조정에서 간쟁하여 과실을 고치고 잃어버린 것을 수습하기를 급암(汲黯)과 같은 사람은 없어도,
말을 듣기 좋게 하고 얼굴빛을 꾸며서 임금의 뜻에 영합하지 않는 사람은 있습니까?
비록 환관ㆍ궁첩들의 성명을 알지 못하기를 왕소(王素)가 말한 것과 같이 하는 사람은 없어도, 그래도 다소 지조를 지켜 몸을 조심하고 수치를 아는 사람은 있습니까?
조금이라도 이와 같지 못하다면, 필경 모두
권력을 탐하고 권세를 좋아하여 아첨하고 간사를 부리는 무리일 뿐입니다.
필시 모두 나라를 좀먹고 백성들을 해치며 이득을 도모하고 재물을 모으는 무리들입니다.
필시 모두 예의가 없고 염치를 버리며 자리 얻기를 근심하다가 자리를 얻고 나서는 잃을까 근심하는 무리들뿐입니다.
필경 모두 임금을 팔아먹고 나라를 팔아먹으며 적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무리들뿐입니다.
이와 같은 무리들이 차지하고 앉아 수십여 년을 들락날락하였으니,
나라가 어떻게 병들지 않고 백성이 어떻게 피폐하지 않으며
인심이 어떻게 이탈되지 않고 화란이 어떻게 겹쳐 닥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은 진실로 우매하고 고루하여 낱낱이 들어 일일이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관직에 있으면서 탐하고 비루하여 사정(私情)을 따르고 공(公)을 무시하며, 무뢰배들과 결탁하여 뇌물을 가지고 협잡하는 자는 베어야 하고, 관찰사나 수령이 되어 탐심을 부리고 착취하여 민생들을 어육이 되게 한 자도 베어야 합니다.
오로지 취렴(聚斂)을 일삼아 아래 백성들의 것을 덜어다가 윗사람을 유익하게 하고 백성들의 원망을 몰아 위로 돌아가게 하는 자는 베어야 하고, 사술(邪術)을 믿고 좌도(左道)를 믿어 군상을 현혹시키는 자는 베어야 합니다.
적국이나 외국 사람을 끼고서 임금을 협박한 자는 베어야 하고, 계권(契券 문서)을 만들거나 조약을 만들어 국권과 토지를 남에게 준 자는 베어야 합니다. 강상(綱常)을 없애 버리며 인륜을 무너뜨리고, 말할 적에는 반드시 성인들을 헐뜯는 자도 베어야 합니다.
옛 법도를 싫어하여 박대하고 외국 풍속을 좋아하여 사모하며, 신기한 것을 좋아하고 기묘한 것을 숭상하는 자도 베어야 합니다.
그리고서 현명한 인재를 가려 정부의 일을 맡기되, 온 나라에 덕망이 있어 뭇사람들에게 신임 받는 사람을 선택하여 정부의 우두머리에 두고,
다음으로 재주 있고 지혜로운 선비를 선발하여 보좌하도록 하며 전적으로 책임지고 성과를 책임 지워서, 소인들이 이간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잡다하게 진출된 별입시(別入侍 사삿일로 임금을 뵙는 것)를 없애고 참람하게 임명된 승후관(承候官)들을 도태하여 엄숙하고 맑은 기가 대궐 안에 퍼지도록 하소서.
그렇게 한 연후에 대간(臺諫)을 복구하여 곧은 말을 구해 들이고, 경연을 열어 인군의 덕을 보익하며, 차함(借啣)을 막아 공기(公器)를 존중하고 청탁을 근절하여 사정의 길을 막으소서. 계책을 비밀히 하여 누설됨을 방지하고, 기강을 진작시켜서 퇴폐와 태만을 경각시킨다면, 조정의 규모가 확립될 것입니다. 조정의 규모가 확립되어야 백성들이 비로소 위를 믿고 호응하게 되어 정사와 명령이 시행되지 않는 병폐가 없어지는 것이니, 이는 현명한 인재를 선택하는 것이 민심을 수습하는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다음으로 취렴을 금하여 백성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국가에서 내장원(內藏院)을 설치한 이래로 그 해독이 백성에게 파급되었고 화가 팔방에 끼쳤으니, 나라를 세운 이래로 없던 일입니다.
관부로 예속된 사유지는 당연히 돌려주어야 하고, 갑절로 징수하던 도조(賭租)는 당연히 요량해서 감해야 하며, 각 항구와 저자의 명분 없는 잡세는 마땅히 폐지해야 합니다. 각도의 봉세관(捧稅官) 및 위원(委員)과 각색으로 파견된 관원 따위는 마땅히 소환되어야 하며, 관찰사나 수령들 가운데 재물로써 벼슬을 얻은 자는 마땅히 파면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미루어서 궁궐ㆍ사찰과 경향의 토목 공사도 마땅히 정지해야 하고, 무당ㆍ소경ㆍ승니(僧尼)로서 산천에 기도하러 간 사람을 마땅히 폐지하여 쫓아 보내야 할 것입니다. 또 그 밖에 법도 없는 상을 주거나 절제 없는 음식도 모두 마땅히 삭감해야 하고, 군졸의 복장이 다른 나라 직물과 복제를 쓴 것은 모두 우리나라의 직물과 복제로 바꾸어야 됩니다.
또 다음은 신의를 닦아 이웃 나라와 외교하는 것입니다. 신은 국내 일도 알지 못하는데, 어찌 나라 밖의 일을 알겠습니까? 다만 보건대, 국가에서 자주(自主)를 주장한 이후부터 변고가 잇달아 일어나고 환란이 헤아릴 수 없는데, 단지 위태로움만 보이고 안정됨은 보이지 않으며, 협박과 모욕만 보이고 그 체모가 존대받음은 보이지 않습니다. 신은 알 수 없습니다마는, 우리의 신의는 잘못이 없는데 저들이 약한 것을 무시하는 마음으로 우리를 형편없이 대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우리에게 신의가 없기 때문에 저들도 우리를 신의로 대하지 않는 것입니까?
단지 오늘날 온 나라 재원과 이권이 저들에게 탈취당한 것만 가지고 말한다면 금ㆍ은ㆍ구리ㆍ쇠가 나오는 탄광과 인삼ㆍ삼림ㆍ철도ㆍ어업의 이권으로부터 베ㆍ비단ㆍ기구 등속에 이르기까지 크기와 부피를 막론하고 모든 국가의 재정을 보충하고 민생의 생활에 기여할 수 있는 것들이 모두 저들의 손아귀로 돌아가 남은 이권이라고는 없습니다.
그러고도 부족하여 각부(各部)에 고문(顧問)을 두고 오로지 온 나라의 세납(稅納)과 정사 및 법령을 관장하게 하였으니, 조정을 그들에게 주어 버린 것입니다. 토지ㆍ가사(家舍)를 마음대로 점유하고 산림과 천택(川澤)을 뜻대로 청구하며 심지어 남산을 파헤치는 데 이르렀으니, 토지를 내주어 버린 것이며, 역부(役夫)를 강제로 모집하고 사람의 생명을 경솔하게 죽여서, 우리 백성을 초개와 노예처럼 대하는데, 우리는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니, 백성들을 내주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모두 우리 역적들이 중간에 들어 협력하고 농간부린 것입니다. 저들이 욕심내면서도 말하지 못한 것과 이미 말은 했으나 반드시 얻지 못한 것이, 모두 우리의 역적들 손에서 이루어져 저들의 뜻과 같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들이 무엇을 기탄하고 무엇을 애석하게 여겨 저절로 굴러 오는 먹을 것을 마다하겠습니까?
궐 밖에서 명(命)을 기다리는 소 [두 번째 소] 갑진년(1904, 광무 8) 12월 24일
(상소문을 올리고 나서 직언을 가장함으로서 관직을 얻으려 한다는 말을 듣고 올리는 소)
다만 삼가 오늘의 국가 형편을 보건대, 신이 폐하를 버리고 어디로 가겠습니까? 폐하의 좌우에 있는 근신들은 아첨하고 말만 잘하는 무리입니다. 버젓이 앞에서 비위를 맞추며 속으로 기만(欺慢)하는 마음을 품고 백방으로 임금과 나라를 팔아먹는 짓을 하고 있습니다. 폐하의 조정에는 소인들이 모두 속으로 간사한 무리와 굳게 결탁하고, 밖으로는 강한 외적을 믿고서 권세를 도둑질하고 봉록(俸祿)을 취득하려는 계교를 행합니다. 그나마 조금 체면이 남아 있는 자는 몸을 아끼고 일을 피하며 뒤로 물러나서 ‘우리 임금은 할 수 없다.’는 마음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폐하의 백성들은 화란(禍亂)을 즐기는 무리들이 소란을 떨며 길에서 횡행하면서 망측한 말을 함부로 하여 도적을 인도하는 일을 조금도 꺼려하지 않습니다.
폐하의 이웃 나라는 여우처럼 아첨하고 원숭이처럼 속이며 맹약을 지키지 않고 오로지 남의 나라를 합병할 술책만 행하여 정법(政法)의 권한을 잡고 우리의 손발을 묶으며 우리의 입에 재갈을 물리니, 앞으로 또한 무슨 화변을 만들지 모르겠습니다.
아아, 주상의 외로움이 이와 같고 나라의 위태로움이 이와 같습니다. 신은 비록 몸을 희생하여 폐하의 은덕에 만의 하나라도 보답은 못할지언정 어찌 차마 폐하를 버리고 가겠습니까. 더구나 폐하께서는 이때에 신을 불러 놓고 어찌 다시 신을 보내려고 합니까. 신이 대궐 밑에서 명을 기다린 지 이미 한 달이 돼 갑니다. 전에 아뢴 여러 조목은 이미 ‘곧은 말로 공효를 얻으려 했다.’는 꾸중을 입었으니, 신은 마땅히 입을 다물며 붓을 던지고 하느님의 조화가 어찌 될 것인지 기다릴 뿐입니다. 어찌 다른 말로써 거듭 모독하는 죄를 범하겠습니까. 오직 지극히 애통한 마음에 중용을 선택할 겨를이 없었고 서둘러 호소하느라 절차를 가리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신은 지극히 마음이 아프고 서둘러 호소하려니, 어느 겨를에 마음을 중용에 두고 목소리를 절제할 수 있겠습니까.
예로부터 나라를 잃는 것은, 권신(權臣)이 참절해서 잃는 것이 있고 적국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잃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말과 글로써 문서와 조약을 만들어 온 나라를 적국에게 주거나, 단 한 번의 교전도 없이 화살 하나도 쏘지 아니하고 나라를 잃었다는 것은 듣지 못했습니다. 요사이 화폐를 개혁한 것으로 말하면 참으로 그럴듯하기도 하나, 장차 어떻게 개혁할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만약 먼저 외국에서 차관을 들여온다면 반드시 담보물이 있어야 될 것이니, 담보물은 필경 토지로 해야 할 것입니다. 토지로 한다면 폐하께서 선왕에게 전수받은 강토와 인민을 하루아침에 모두 남에게 주시려는 것입니까? 또한 신은 차관을 들여다가 어디에 사용할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아마도 악화(惡貨)를 수거하여 교환하는 데 사용하리라 여겨집니다. 그러나 폐하께서는 3백만 원이나 1천만 원으로 악화(惡貨)를 모두 교환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교환을 시작하여 계속할 자금이 없게 되면 하루도 못 되어 혼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가령 자금이 넉넉하다고 해도 교환하는 문을 열어 놓으면 내외 국인을 막론하고 간사하고 교활한 무리가 악화를 위조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아무도 보증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처음부터 교환할 자금이 없는데 말할 것이 있습니까?
그러니 다소를 불문하고 차관을 하는 날이 나라가 망하는 날입니다.
그러나 요사이 들으니 계약이 이미 성립되었다고 하니, 신은 이에 더욱 애통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직 돈을 차관하지 아니하였다면, 신은 원컨대 즉시 그 계약을 돌려주고서 재정을 절약하여 국력이 좀 펴진 뒤에 의논함이 옳을 것입니다. 저들이 만약 해약하였다고 우리에게 문책하면 비록 두어 달 이자를 헛되이 주더라도 차라리 살을 베어서 배를 채우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진실로 재앙의 유래를 찾아보면 모두가 의부(依附)라는 두 글자가 병이 된 것입니다.
갑오년(1894, 고종31) 이후로 여러 흉악한 무리 중에 친로파와 친일파로 지목된 자는 온 세상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인이 어찌 항심이 있겠습니까.
혹은 아침에는 친로파였다가 저녁에는 친일파가 되고 혹은 아침에는 친일파였다가 저녁에는 친로를 하는 자가 모두 그들입니다. 또 이들은 한편으로는 친로도 하고 한편으로는 친일도 하여 세력을 따라다니면서 이익만 취하려고 계교할 뿐입니다.
외국인도 그들의 형편없는 것을 미워하기 때문에 그때그때 조종하여 항상 술책으로써 처사하여 그 중간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친로당이나 친일당을 물론하고 모두 그들의 술책에 말려들었는데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결론적으로 모두 매국 행위로 귀결되는 것은 같습니다.
근일에 친로당이 친일당에게 득죄한 자를 예로 들더라도 지금은 모두 팔을 뽐내고 큰소리치며 거리낌 없으니, 이는 어찌하여 그러냐 하면 모두 조(趙) 나라 곽개(郭開) 같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옛날의 곽개는 남에게 뇌물을 받아서 나라를 바쳤는데, 지금의 곽개는 남에게 뇌물을 주고 나라까지 바쳤으니, 아아,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폐하께서는 모르시고 그런 자를 등용하셨습니까? 아니면 알면서 저들의 압제에 못 이겨 부득이해서 하신 것입니까? 만약 모르셨다면 어찌 그 일로써 관찰하지 않으셨으며, 만약 알고 계셨다면 그자가 비록 외세를 가졌다고 해도 또한 폐하의 신하인데 무엇을 꺼려서 바로 벌을 주지 못하십니까?
궐 밖에서 명(命)을 기다리는 소 [세 번째 소] 갑진년(1904, 광무 8) 12월 28일
<고종이 아무런 답변이 없자 최익현이 다시 올린 세번째 상소문>
.........
또한 폐하께서 까닭 없이 신을 부르고 한마디 말도 시행하지 않았으며, 또한 까닭 없이 신을 물리치고 환란을 같이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폐하께서 애당초 신을 일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기신 것이고 애써 부르신 이유는 허례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신이 만약 오지 않았으면 모르지만 이미 왔으니 어찌 차마 국가가 망하려는 것을 보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이미 말을 했으니 차마 임금이 위태롭게 되는 것을 보고도 버리고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신은 이미 물러가야 할 의리가 없고 말씀드린 것도 모두 국가의 대계(大計)에 관한 일이기에 신은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해서 그만둘 수는 없습니다.
이제 삼가 옛사람의 조서를 봉환(封還)하는 예(例)에 따라서 이달 25일에 내리신 비지에 삼가 짧은 상소를 환납(還納)합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다시 신의 상소를 상세히 살피시고, 이어 신이 명령에 복종하지 않은 죄를 다스려서 신하된 자의 경계가 되게 하소서.
신은 황공하여 죄를 기다리는 마음을 금할 수 없사오며,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궐 밖에서 명(命)을 기다리는 소 [네 번째 소] 을사년(1905, 광무 9) 1월 26일
(고종이 최익현을 경기 관찰사로 보낸다는 답변을 받고 올린 네번째 상소문)
삼가 아룁니다. 해가 가고 봄이 되어 삼양(三陽)의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효혜전(孝惠殿)의 연상(練祥)과 의효전(懿孝殿)의 졸곡(卒哭)을 어느덧 지냈으니, 삼가 생각건대, 성상의 마음은 얼마나 간절하시겠습니까.
생각건대, 신은 이달 1일에 회계원(會計院) 낭신(郞臣)이 내사(內賜)한 돈과 쌀을 전해 준 것을 받았으니, 땅에 엎드려 감격하며 진실로 겨를 없이 절하고 받아야 됩니다. 다만 생각건대, 국내에 춥고 배고픈 자가 신 한 사람뿐이 아닙니다. 또 신은 여러 번 폐하의 큰 은혜를 입고도 아직 티끌만 한 보답도 못했으니, 어찌 다시 하찮은 살림살이로 폐하의 걱정이 되게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미 사자를 시켜서 반납하였으니 곧 아시게 될 것입니다.
삼가 근일에 내리신 은명(恩命)을 보건대, 신을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로 삼는다고 하니 신은 이제야 더욱 폐하께서 국가의 흥망에는 관심이 없고 신을 조금도 용납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처음에는 은근하게 신을 부르셨고 많은 것을 신에게 바라셨는데, 오늘에 행한 바를 살펴보면 전혀 폐하의 본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필경 간사한 소인들의 참언이 있어서 폐하께서 신을 불신하게 한 듯합니다. 신은 비록 보잘것없으나 어찌 차마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나이로 일개 관찰사를 하려고 왔겠습니까.
........
아, 하늘이여.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사람들은 모두 말하기를 ‘이제는 국세가 기울었으니, 비록 후회를 해도 이미 고칠 수는 없다.’고 하나, 신은 홀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진실로 자발하여 폐하의 마음에서 크게 분발하여 마치 환도(環刀)를 가지고 책상을 자르며 일어나서, 먼저 나라를 팔고 정사를 어지럽힌 5, 6명의 역적을 잡아 시중에서 찢어 죽이소서. 또한 좌우에 벌여 있는 진귀한 물품을 가져다 모두 깨뜨려서 천하에 사심이 없음을 보이소서.
.......
이와 같이 하였는데 저 이웃의 적국이 그래도 나라를 합병할 술책을 행하며 악행을 펴려고 한다면, 우리는 진실로 세계 열국과 동맹 조약을 맺고 국제 공법을 통용해야 할 것입니다. 어찌 각국에 통첩해서 회합하여 담판하면 세계의 공론을 구하지 못하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스스로 하지 않고 여전히 무능한 태도만 취한다면, 저 이웃의 적국은 우리를 주머니 속의 물건처럼 여길 것이며, 각국에서도 당연하게 여겨 공분(公憤)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세상에 제 환공(齊桓公)과 같이 위(衛) 나라ㆍ형(邢) 나라를 보존한 의로운 자를 어떻게 만날 수 있겠습니까.
왜인에게 구축(驅逐)을 당하여 돌아가기를 고하는 소 을사년(1905, 광무 9) 3월 15일
(직간으로 인해 체포되어 올리는 상소문.)
-
삼가 아룁니다. 신이 망녕되이 시국의 일을 거론하다가 일본 사람을 크게 거슬러 잡힌 지 여러 날이 되었는데 불행히 죽지도 않고 압송을 당하니, 국가와 자신을 모욕하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신은 비록 초개(草芥) 같은 몸이오나 작위(爵位)는 일국의 중신이고 나이는 기로소(耆老所)의 늙은이입니다. 설사 신의 말이 저들에게 거슬린 것이 있어도 마땅히 이론으로 바로잡고, 위세만을 펴서 이웃 나라의 체면을 잃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작위와 나이를 염두에 두지도 않고 방자한 생각을 품고 마음대로 언동을 하며 예의가 없으니, 참으로 꾸짖을 것도 없는 오랑캐이므로 말할 가치도 없습니다. 하지만 당당한 우리 대한제국은 토지가 좁지 아니하며 인민도 적지 않습니다. 인(仁)을 힘쓰고 선(善)을 행하면 스스로 크게 될 수 있고 신(信)을 지키고 의(義)를 밝히면 자립(自立)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시들고 약해서 스스로 주권을 상실하여 저들이 기탄없이 이와 같이 하는데 이르렀으니, 국가의 세력에 통곡할 만한 것이 어찌 다만 이 일뿐이겠습니까?
신은 이러나저러나 죽고 싶었으나 죽지 못하였으니, 이제부터 마땅히 폐하와 생사 간에 작별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 신이 처음 왔을 때 어찌 이런 일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폐하에게 신의 말을 듣게 해서 화란을 막지 못하였으니, 또한 마땅히 형벌을 받아야 할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세상의 변고겠지만 일인에게 축출되어 떠날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아, 신하로서 임금이 있어도 섬길 수 없고 나라가 망해도 구할 수 없으니, 천하 후세에서 불충한 신하를 논할 적에는 신을 첫째로 꼽을 것이오니, 어찌 통탄하지 않겠습니까.
그러하나 신이 떠난 뒤에는 다시 한 사람도 폐하를 위하여 보전할 계획을 말할 자가 없을 것입니다. 비록 망국의 화가 있어도 국가를 위해서 죽으려는 자도 없을 것이며, 신도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이 다시는 폐하를 위해서 돌아오지 못할 것입니다.
삼가 빌건대, 폐하께서는 국사를 희롱 삼아 하지 마시고 속히 신이 전후로 아뢴 것을 취하여 유의하소서. 그리하여 소인들에게 마음대로 나쁜 짓을 못하게 하면, 종묘사직의 다행이고 백성들의 행복이 될 것입니다.
신이 대궐을 지나면서 차마 바로 하직을 할 수 없기에 황송함을 무릅쓰고 이 글을 써서 고충을 호소합니다. 아아, 40년 된 군신의 의가 여기에서 끝난 것입니다. 신은 대궐을 바라보고 통곡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기에,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오적(五賊)을 토죄하기를 청하는 소 을사년(1905, 광무 9) 11월 3일
(이건 편집없이 올리겠소. 이 소는 편집하면 안된다 생각했소)
삼가 아룁니다. 아, 통탄스럽습니다. 난신적자(亂臣賊子)가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어찌 금번에 외국과 조약을 맺을 때 함부로 도장을 찍은 외부 대신 박제순(朴齊純), 내부 대신 이지용(李址鎔), 군부 대신 이근택(李根澤), 학부 대신 이완용(李完用), 농상공부 대신 권중현(權重顯) 같은 자가 있겠습니까?
당초에 일본 사신이 새로운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서 왔을 때, 우리 정부에서 그 이유를 모르지 않았습니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온 나라에 통고하여 민중에게 반드시 죽겠다는 의리를 보이지 않았고, 마침내 회의하는 자리를 한밤중에 사람들이 모를 때에 베풀었으니, 그들의 거조를 살펴보면 나라를 팔아먹는 일이 이미 7, 8분은 성공한 것입니다. 폐하께서 회의석에 친림하시어 비록 협박을 당했더라도 천위(天威)를 진동시키기를 손권(孫權)이 책상을 자르듯이 하시고, 참정과 여러 대신이 죽음으로써 통척(痛斥)하기를 선정 김상헌(金尙憲)이 조약문을 찢어 버리고 ‘목이 떨어져도 조약은 할 수 없다.’고 한 것처럼 하였다면, 저들이 비록 병력으로 협박하였어도 우리에게 어떻게 하겠습니까.
또한 하물며 각국 사관의 이목이 방관(傍觀)하고 우리나라 인사들이 떨쳐 궐기한다면 저들이 더욱이 어떻게 모두 죽일 수 있겠습니까? 설사 그들이 포악함을 버리지 아니하고 감히 대포를 갖고 달려들더라도 머리를 굽히고 마음을 낮추며 치욕을 당하면서 망하기보다는 어찌 한 번 기력을 분발하여 부자와 군신이 성을 등지고 한 번 싸워서 국가를 위해 같이 죽기를 북지왕 심(北地王諶)의 말과 같이 못하겠습니까? 돌아보건대, 먼저 계획도 정하지 않고 겁에 질려 떨기만 하였으니, 비록 폐하께서 윤허하지 않아도 마침내는 나약하고 졸렬한 태도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비록 참정이 굳게 거절하였어도 겨우 가(可) 자만 쓰지 않았을 뿐이었으니, 이것이 결국 왜적이 감히 협박을 하는 까닭이고 박제순 등 역적들이 감히 마음대로 허락한 이유입니다.
그리고 박제순 이하 여러 역적은 본래 왜적의 앞잡이로서 매국을 수완으로 여겨 기탄없이 하면서 조금도 부끄러운 줄 모르니, 진실로 능지처참해도 오히려 그 죄가 남을 것입니다. 한규설(韓圭卨)은 정부의 장관이 되어서 일의 시초도 생각하지 못했고, 더욱이 부하도 바로잡지 못하였으니, 어찌 직무를 감당치 못한 죄를 면하겠습니까. 또 왜놈들은 조금 강한 것을 믿고 의기가 양양하여 이웃 나라를 위협하여 원망을 사는 것을 잘하는 일로 여기며, 맹약을 파기함을 장기로 여깁니다. 그러므로 국교하는 대의를 생각하지 않으며 각국의 공론도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남의 나라를 빼앗으려는 욕심을 채우려고 방자하게 거리낌이 없습니다. 세상에 만약 제 환공ㆍ진 문공(晉文公) 같은 임금이 있다면 이 같은 자를 어찌 버려두고 죽이지 않겠습니까?
그러하나 이 일은 실로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이 여러 해 계획을 세워서 이룩한 것이니, 그 형세는 여기에서 그칠 뿐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들이 마관조약(馬關條約)을 체결하고 일본과 러시아가 선전포고한 이후에 이르러서 우리의 독립과 영토를 보전한다고 몇 번이나 말하였지만, 그것은 우리나라의 이익을 빼앗아 차지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걸핏하면 한ㆍ일 양국의 교의를 더욱 친밀하게 하였다고 말한 것은 몇 번이었습니까? 그들이 속이며 우롱하고 이와 같이 헤아릴 수 없는 짓을 하니 지금 저들이 황실을 보전하겠다고 하는 말을 폐하께서는 과연 깊이 믿으십니까? 지금까지 임금의 지위가 아직 바뀌지 않았고 백성도 아직 망하지 않았으며 각국 공사도 아직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계약서가 다행히 폐하의 인준과 참정의 인가를 받은 것이 아니니, 저들이 갖고 있는 것은 역적들이 억지로 만든 헛된 조약에 불과합니다.
마땅히 속히 박제순 이하 다섯 역적의 목을 베어 매국한 죄를 바로잡고, 외무부의 관리를 가려 세워서 일본 공사관에 빨리 조회하여 맹약을 강요한 거짓 문서를 없애야 합니다. 또한 급히 각국의 공사관에 통보해서 모두 모여 담판하여 일본이 강세를 믿고 약국을 위협한 죄를 성토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폐하의 마음과 인민의 소원을 천하 각국에 널리 알게 하여 천하 각국 사람들에게 우리 임금과 백성의 본심을 알게 하면, 분발하여 궐기하는 공이 있어서 없어질 것이 전환하여 보존되고 죽을 것은 되돌려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만약 그대로 겁내서 움츠리고만 있다면 겁내는 자는 망하는 길뿐입니다. 이제 이미 망했으니 다시 어찌 두렵고 꺼릴 바가 있습니까. 가령 이로 인해서 그들의 미움을 더 사게 된다면, 폐하께서는 명 의종(明毅宗)의 순국(殉國)한 대의를 홀로 듣지 못하였습니까? 또 폐하께서는 박제순 이하 여러 역적들의 죄를 어떻게 보십니까? 을미년(1895, 고종32)에 일어난 시역(弑逆)은 진실로 만고의 대역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다섯 역적들은 죄가 도리어 부모와 임금을 죽인 것보다 심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이 대역적들을 오히려 모두 용서해서 천지간에 살게 하셨습니다. 저들이 비록 외세를 빌려 임금을 위협하고 있으나, 오히려 그들도 우리의 신자(臣子)입니다. 폐하께서는 어찌 차마 역적들과 같은 하늘 밑에서 살면서 아직까지 처분을 내리지 못하십니까. 지금 만약 한 번 호령을 내리면 만백성의 다 같은 원수라는 뜻으로써 사법관의 처형을 기다리기도 전에 역적들의 시체를 길거리에서 불태울 것입니다.
신은 금년 봄에 고난을 당한 후로 부끄럽고 분해서 죽고 싶었으며, 가을에 이르러서는 앓고 있던 병이 더해서 가물가물 숨을 쉬며 죽을 듯이 지금까지 왔습니다. 그러다가 홀연히 망극한 소식을 듣고는 혼을 잃고 담이 떨어져 일어나려다가 다시 쓰러지니, 다시는 조정에 나아가 대의의 소원을 모두 펼 수 없기에 감히 억지로 정신을 모아 피맺힌 정성을 바치며 북쪽을 바라보니, 눈물만 비 오듯 흘릴 뿐입니다.
삼가 빌건대, 폐하께서는 죽어 가는 신의 말을 버리지 마시고, ‘국적(國賊)을 토죄하고 거짓 조약을 돌려받으라.’는 신의 청을 빨리 행하여 국가가 망하려는 것을 다시 보존하소서. 신은 통곡하며 죽고 싶은 심정을 견디지 못하여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주D-001]손권(孫權)이 …… 자르듯이 : 중국 삼국 시대에 토로 장군(討虜將軍)을 지낸 손권이 조조를 공격하려고 계획을 세울 때, 조조의 위세에 눌려 조조를 맞이하자고 의견이 나오니, 손권이 칼을 빼어 책상을 자르며 “여러 장수나 관리 중에 조조를 맞이하자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이 책상처럼 될 것이다.” 하였다. 《通鑑節要 卷22 後漢紀》
[주D-002]북지왕 심(北地王諶)의 …… 같이 : 북지왕은 삼국 촉(蜀)의 후주(後主) 유선(劉禪)의 아들 유심(劉諶)이다. 그는 촉이 위(魏)에 항복할 때 “항복보다는 부자 군신이 성을 등지고 한번 싸우다 죽을지언정 어찌 항복하겠는가.” 하고 적극 싸우기를 주장하다가 임금이 듣지 않자 먼저 처자를 죽이고 자살했다. 《通鑑節要 卷25》 《三國志 蜀書3》
[주D-003]마관조약(馬關條約) : ‘시모노세키 조약[下關條約]’이라고도 하니, 동학 농민 전쟁으로 조선에 원병한 청국과 일본이 전쟁을 일으켜 만주까지 확전이 되었고 중국이 연패하자 청국의 이홍장(李鴻章)과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체결한 조약이다.
[주D-004]명 의종(明毅宗)의 …… 대의를 : 의종은 명의 마지막 황제로 이자성(李自成)의 난에 만세산(萬歲山)에서 자결했다. 《明史 卷24 莊烈帝》
오적(五賊)을 토죄하기를 청하는 소 [두 번째 소] 을사년(1905, 광무 9) 11월 14일
(을사조약을 맺은걸 알고 올린 상소문이오.편집없이 그대로 올리오)
삼가 아룁니다. 신이 어제 지방관에게 성상의 비답을 받드니, 참작하여 헤아리겠다고 전유하셨는데, 신이 봉독하고 의혹이 있었습니다. 생각건대, 참작하여 헤아리겠다는 것은 의심하며 결정하지 못하겠다는 말씀이니, 그것은 그자들을 죄를 주느냐 안 주느냐 하는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박제순ㆍ이지용ㆍ이근택ㆍ이완용ㆍ권중현 등 다섯 역적이 위로는 사직을 안정시키려고 순직한다는 성교(聖敎)를 무시하고 아래로는 참정으로서 강경하게 거절하는 의논도 없이 제멋대로 조종(祖宗)이 전해 준 강토와 인민을 밤중에 쪽지 한 장으로 적국에 넘겨주었습니다. 이는 옛날 곽개(郭開)와 진회(秦檜)도 하지 않던 일을 박제순 등이 하였으니, 그들의 죄는 비록 다섯 수레로 갈기갈기 찢고 십족(十族)을 멸해도 오히려 천인(天人)의 분노를 풀 수가 없을 터인데, 그 무슨 의심할 것이 있어서 성교가 이처럼 더디십니까?
얼마 지난 뒤에 대소 신료에게 들으니, 주먹을 불끈 쥐고 소리를 지르며 역적의 목을 베어야 한다는 사람이 연장(聯章)으로 여러 번 번독하게 하였고, 대신으로 보국(輔國)의 재상과 미관의 하품에 있는 병졸과 마부들까지 죽음으로써 간하는 자가 잇달았다 하니, 하늘의 뜻을 돌이키지 못할까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신은 목을 늘이고 주목하면서 폐하께서 노한 위엄을 보이기를 바랐는데 오래도록 소식이 없었습니다. 신은 또 의심하건대, 폐하께서 여러 역적을 죽여야 된다는 것을 모르지 않지만 온 나라의 여론이 크게 일어나기를 기다려 인민들과 함께 죽이려는 것이며, 결코 역적들을 애호해서 차마 못 죽이는 것이 아니며, 그들이 믿고 있는 외세가 두려워 감히 죽이지 못하는 것도 아닌 줄로 알고 있습니다. 더구나 어찌 천지ㆍ조종ㆍ귀신ㆍ초목ㆍ내외 국민들도 모두 이 역적을 다 같이 원수로 아는데, 폐하께서만 원수로 여기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어느덧 날이 가고 달이 가서 수십 일이 지났건만 역적들을 죽였다는 말을 듣지 못했을 뿐 아니라, 도리어 역적들을 정부의 장관으로 임명하였다고 들었습니다. 더욱이 여러 신하들을 권유해서 화친하게 한다고 하니, 신은 이제 어이가 없어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며 목이 메어 슬퍼할 뿐입니다. 아, 통탄스럽습니다. 폐하께서는 정말로 역적들이 죽을죄가 없다고 여기십니까? 정말로 역적들을 감싸고 아껴서 그들을 승진시키고 화친을 시키는 것입니까? 정말로 폐하의 큰 원수로 여기지 않아 천지ㆍ조종ㆍ귀신ㆍ초목ㆍ내외 국민의 바라는 바를 돌보지 않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역적이며 원수인 줄은 알아도 그들이 끼고 있는 세력이 두려워서 감히 죽이지 못하는 것입니까? 설령 그들의 배경이 정말로 두려울지라도 이런 마당에 폐하께서 두려워할 바는 과연 무엇입니까? 폐하가 오늘날 나라가 있습니까? 국토가 있습니까? 인민이 있습니까? 지금 나라도 땅도 백성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폐하께서는 바로 진(晉) 나라 회제(懷帝)ㆍ민제(愍帝)와 송(宋) 나라 휘종(徽宗)ㆍ흠종(欽宗)처럼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데 불과한 것입니다. 저 역적들은 진실로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자들이니, 폐하께서 비록 더할 수 없는 큰 벼슬과 많은 녹을 줄지라도 저들이 어찌 일본의 큰 훈신이 되는 것을 버리려고 하겠습니까? 그것은 폐하를 이익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역적을 죽여도 나라는 없어지고 역적을 죽이지 않아도 나라가 망하는 것을 면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역적을 죽여서 천지ㆍ조종ㆍ귀신ㆍ초목ㆍ내외 국민의 소망이나 통쾌하게 풀어 줄 뿐입니다. 폐하가 두려워하실 게 과연 무엇입니까? 또 소문을 들으니, 저들이 말하는 이른바 통감(統監)이라는 자가 곧 나오는데 장차 경복궁(景福宮)을 내준다고 하니, 경복궁은 선왕들께서 5백 년 동안 계시던 곳입니다. 그런데도 내어 준다면 폐하께서는 나라도 없고 땅도 없고 백성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 집마저 잃는 것입니다. 아, 통탄스럽습니다. 폐하께서 40년 동안 인군이었는데, 어떻게 집마저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까?
또 한 가지 폐하의 하신 바를 알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민영환(閔泳煥)ㆍ조병세(趙秉世)ㆍ홍만식(洪萬植) 등은 원로대신이거나 측근 중신이거나 시골에 묻힌 사람인데 생명을 홍모(鴻毛)같이 가볍게 버렸고, 이상철(李相哲)ㆍ김봉학(金奉學) 등은 비록 미관말직이거나 역부의 병졸인데도 마침내 망국의 부끄러움을 알고 하루아침에 목숨을 끊었으니, 그 충성과 대의는 일월(日月)처럼 빛나는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참으로 그들을 포상하시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이미 죽은 사람들을 충신이라고 한다면 죽은 이들이 죽은 까닭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역적을 토죄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임금께 간해도 듣지 않으시니, 차마 삼천리 강토와 수천만 백성이 멸망하는 것을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저 다섯 역적의 역적짓을 폐하께서도 부정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아아, 곽공(郭公)이 선악을 번연히 구별하면서도 나라를 망쳤는데, 폐하에서 이를 다시 볼 줄 생각했겠습니까? 아아, 오늘은 바로 임금과 신하와 백성이 함께 멸망하는 때입니다. 비유하건대, 장차 숨이 끊어지려는 사람과 같아서 백약이 무효인데, 한 가닥 희망으로 독삼탕(獨蔘湯)을 써서 한을 풀어 주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죽는 줄 분명히 알면서도 후세에 한을 남기게 되었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역적을 토죄하여 죽이고 조약을 해제하는 길만이 이제 마지막으로 쓸 독삼탕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폐하께서 너무 두려워하여 드리는 말씀이지만 실은 천지의 바른 법이니, 그만둘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한(漢) 나라와 당(唐) 나라를 중흥한 임금들도 이미 시행했던 일이온데, 지금 폐하는 또 무엇을 의심하십니까?
신이 또 소문을 들으니, 폐하께서 여러 신하들에게 권유하여 역적들과 화해하라고 하였는데, 폐하의 본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중간에서 주선하는 사람들의 소행이라 하는데, 과연 그런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들은 도리어 박제순ㆍ이지용의 무리보다 더한 역적이니, 마땅히 그들을 빨리 처단하여 간사한 술책을 꺾어야 합니다. 그나마도 하지 못한다면 폐하께서 조정의 모든 신하들을 역적이 되라고 가르치고 금하지 않는 것이니, 신은 삼가 폐하를 위해 통분하기 그지없습니다.
신이 즉시 대궐에 나아가 머리를 깨고 폐하 앞에서 죽어야 할 일이오나, 큰 병으로 몸져누워 움직이지 못합니다. 다만 소장으로써 여러 번 성청을 번거롭게 하였으니, 신의 불충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삼가 빌건대, 폐하께서는 먼저 신의 죄를 다스려서 신하의 충절을 독려하소서.
신은 애통함이 절박함을 견디지 못하여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주D-001]진회(秦檜) : 송 흠종(宋欽宗) 때 사람으로 금(金) 나라와 적극 화의를 주장하고, 악비(岳飛)를 모함하여 죽이는 등 현량한 사람을 많이 죽였다. 《宋史 卷473 秦檜列傳》
[주D-002]회제(懷帝) …… 흠종(欽宗) : 모두 나라를 지키지 못하거나 시해당한 임금이다. 진 회제(晉懷帝)는 영가(永嘉) 7년(313) 유총(劉聰)에게 죽었으며, 진 민제(晉愍帝) 역시 뒤를 이어 즉위하여 건흥(建興) 4년(316) 유총에게 시해당했다. 《晉書 卷5 懷帝ㆍ愍帝紀》 송 휘종(宋徽宗)과 흠종(欽宗)은 송 나라 8, 9대 황제로 건염(建炎) 원년 금(金)에 사로잡혀 북으로 갔다. 《宋史 卷22 徽宗本紀4, 卷23 欽宗本紀》
의병을 일으켜 역적을 토죄할 것을 건의하는 소 병오년(1906, 광무 10) 윤4월 11일
삼가 아룁니다. 작년 10월 21일의 변을 어찌 차마 말하겠습니까.
안팎 도적들이 합세하여 임금을 협박하고 강제로 조약을 꾸며 침탈을 강행하니, 이제 나라가 있다는 것은 허울에 지나지 않고 폐하가 계시는 것도 허위(虛位)에 불과합니다. 종묘와 사직을 보전할 길이 없고 민생은 어육(魚肉)이 될 날만 있을 뿐입니다. 예로부터 남의 나라를 멸망시키고 남의 땅을 빼앗는 자가 한정 없이 많았어도 저 왜놈들같이 교활하고 흉악한 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 군신들이 바야흐로 천하에 성명하기를 ‘동양 평화’라 하고 ‘교의 익친(交誼益親)’이라 하여 만국의 이목을 기만하려 하니, 그 계책도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역적들은 그들의 앞잡이가 되어 우롱을 달게 받으면서도 말하기를, ‘일본에 외교권을 잠시 빌려 주고 우리가 부강하게 되면 다시 찾는다.’ 합니다. 아아, 저 왜놈들은 어차피 마음과 행실이 짐승 같은 오랑캐이니 실로 인도(人道)로써 책망할 바도 못 되지만, 우리의 역적들은 국가와 무슨 원수를 졌기에 기어이 나라를 망치고자 하여 이렇게 차마 못할 일을 하고 있습니까?
이제 저 왜놈들은 마침내 인종마저 바꿀 독한 꾀를 써서 이민(移民)의 조례(條例)를 만들어 불일내로 시행한다고 합니다. 이 지경이 되었는데 역적들은 또한 무슨 말로 그 죄를 피할 수 있겠습니까? 이때를 당해서 진실로 인성(人性)을 가진 자라면 누구나 죽기를 원하지 않을 자가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신처럼 늙은 것은 하루를 더 살면 하루의 욕이 더하게 되고, 이틀을 더 살면 이틀의 욕이 더할 것이니, 어찌 구차스럽게 몸을 아껴 한 번 죽어 나라에 보답하기를 민영환ㆍ조병세ㆍ홍만식ㆍ송병선(宋秉璿) 등과 같이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신이 삼가 생각건대, 옛날 신하로 나라가 망하려고 할 때를 당하여 떠난 사람이 있으니, 은(殷) 나라의 미자(微子)입니다. 죽은 사람은 명 나라 태학사 범경문(范景文) 등 40여 인이 그들이요, 나라를 회복하는 데 뜻을 두어 의병을 일으켜 역적을 토벌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이도 있으니, 한(漢) 나라 적의(翟義)와 송(宋)의 문천상(文天祥)이 그들입니다. 신은 불행히도 오늘까지 살아서 눈으로 이러한 변고를 보고 이미 떠나야 할 만한 곳과 의리가 없으니, 대궐에 나아가서 소를 올리고 폐하 앞에서 머리를 깨고 스스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할 일을 못하실 것이 분명하다면 빈말만 번거롭게 드리는 것이니, 한갓 형식적인 글로 귀결될 뿐입니다. 또한 인심이 그래도 국가를 잊지 않음을 보니, 혼자만 구렁에 목매어 죽는 것도 경솔한 데 가까운 것입니다. 이 때문에 억지로 참고 살아 있으면서 몇 사람의 동지와 더불어 적의(翟義)와 문천상(文天祥) 같은 거사를 모의한 지 벌써 3, 4개월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은 본래 재능과 지혜가 없는 데다가 더욱이 노병으로 죽음이 가까우니 모의를 하는 즈음에 방해만 되는 것이 10에 8, 9이기 때문에 지연되어 하는 일 없이 세월만 보내다가 이제야 계획이 조금 정해져서 사람들이 점차 모입니다.
마침내 이달 12일에 전 낙안 군수(樂安郡守) 신 임병찬(林炳瓚)을 보내서 먼저 창의(倡義)하는 깃발을 세우고 동지를 독려하며 차례로 서울로 올라가서 서면으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등 여러 왜놈들을 부르고 각국 공사ㆍ영사와 우리 정부의 여러 대신을 회동(會同)시켜서 담판을 크게 벌여 작년 10월의 강제 조약을 돌려받아 찢어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각부에 있는 고문관을 파면하여 돌려보내고, 우리의 국권을 침탈하며 민생을 해롭게 한 여러 가지 강제로 맺은 조약을 모두 만국 공론에 부쳐야 합니다. 그리하여 버릴 만하면 버리고 고칠 만하면 고쳐서 반드시 나라의 자주권을 찾고 생민(生民)의 종자를 바꾸는 화를 면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신의 소원입니다. 진실로 힘과 세력을 헤아리지 않고 민중을 멋대로 선동하여 중과부적의 오랑캐와 목숨을 다투려 함은 아닙니다.
그러나 만약 하늘이 내린 재앙을 뉘우치지 않아 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만 저들에게 짓밟히게 된다면, 신도 마땅히 달게 죽음을 받아 사나운 귀신이 되어 원수인 오랑캐를 쓸어 없앨 것이며 맹세코 놈들과 더불어 같은 하늘 아래에 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저들의 노예가 됨을 즐거워하며 대의를 세운 우리를 원수처럼 보는 자들이 다투어 서로 의병을 비도라 일컫고 떠들며 헐뜯는데, 신은 진실로 그런 일 따위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신은 하늘을 바라보고 대궐을 그려 보니, 목이 메인 심정을 금할 수 없기에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주D-001]적의(翟義)와 …… 문천상(文天祥) : 적의는 전한(前漢) 말기 사람으로 왕망(王莽)이 섭정을 하자 의거하여 왕망을 토벌, 유신(劉信)을 천자로 세웠다. 《漢書 卷84 翟義傳》 문천상은 남송 공종(恭宗) 때 좌승상(左丞相)으로 원(元) 나라의 침입군과 싸우다 패해 사로잡혀 굽히지 않다가 처형당했다. 《宋史 卷418 文天祥列傳》
치 일본정부 대신서 (致 日本政府 大臣書)
(항일의병운동을 떠나며 일본정부에 보내는 글)
오호라, 충국애인은 성이요, 수신명의는 도라,
사람에게 이 성이 없으면 죽는 것이요, 나라에 이 도가 없으면 망하는 것이니,
이것은 완고한 노생의 상담이 아니라,
아무리 개화경쟁의 열국이라도 이를 버리고는 자립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일찍이 병자년(고종13)에 귀국 사신 구로다가 와서 통상을 요청하였을 때,
본인은 이를 항척한 일이 있었거니와, 본인도 그 당시에 교린 수호가 좋은 일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이 아니고,
귀국이 반복무상하다는 사실을 본인만은 알고 있었기에
미리 걱정하여 그런 주장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천하의 대세가 이미 옛날과는 다르고, 서양의 영향이 심해져서 독력으로 막을 수 없는
즉, 한·일·청 3국이 서로 긴밀한 의존관계를 갖게 되어야 전 동양의 대국을 보전할 수 있다는 것은
지자가 아니라도 알 만한 일이오, 본인도 또한 그것을 깊이 소망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반드시 귀국을 신뢰할 수 있다고 해서가 아니라,
내 의견만을 내세워 양국의 화친을 일부러 손상하기를 원치 않아,
그 뒤로 첩거 20년,
시사에 관해서는 절구불언으로 지내왔던 것이다.
그러나, 근년 귀국의 소위를 보고서야
비로소 본인의 의견이 어긋남이 없음을 알게 되었고,
또한 귀국이 지금은 비록 강대하나,
종당에는 반드시 망하고
동양의 화가 그칠 사이가 없으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선 귀국이 신의를 저버린 죄를 말한 다음에,
귀국이 필망하고 동양의 화가 그칠 때가 없으리라는 이유를 말해 보련다.
병자 강화도 조약에는 그 제 1관에,
"조선국은 자주의 나라이니 일본국으로 더불어 평등의 권리를 보유한다.
차후 양국이 화친의 실을 표하고자 하며,
모름지기 피차 동등의 예로 상대하고, 혹시라도 침월 시혐함이 없을 것이다.
마땅히 우선 종전의 친선이 저해된 사실과, 제예규는 일체 제폐하고 관유홍도
의 법을 확충하는 데 힘써 영원히 서로 평안한 것을 기대한다"고 하였고,
또 제 2관에는
"이 조약은 양국 정부가 결코 변혁함이 없이 영원히 신준한다"고 하였다.
또 을미년(고종32)에 청국 이홍장과 귀국 이토 히로부미가 체결한 하관 조약에는
"조선국의 독립 자주는 양국이 명확히 인정하여 추호도 친월함이 없을 것"이라는 1관이 들어 있고,
갑진년(광무8)의 일·아 선전서에도 "한·청 양국이 평화를 유지하도록........."
운운의 문귀가 있고,
또 귀국이 아라사에 대하여 국제법을 위반하여 열국에 통첩한 판명서에도
"원래의 한국의 독립을 공고히 하여,
그 토지와 주권을 보지케 하는 것이 전쟁의 목적이라"하였고,
또 귀국이 구주에 사절을 보내어, 러·일전쟁의 기인을 설명하는 데도
"한국의 독립을 공고히 한다"고 한 바가 있다.
이로써 보면 전후 30년 간에 귀국의 군신이 우리나라에 신서하고,
천하에 성명한 것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우리의 토지와 인민을 침략치 않고,
우리의 독립과 자주를 해치지 않는다는 것을 담보로 하지 않은 것이 있었는가.
무릇 천하 만국의 그 어느 나라도 또한 한·일 양국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어서 상보상지하고,
서로 침해하지 않기로 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는 나라가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국이 우리나라에 대하여 흉포한 짓을 자행하는 일이 날이 갈수록 심하여지고,
신의를 저버리는 일이 무소부지의 지경에 이르렀으니,
여기에 그 증거를 제시하기로 하겠다.
갑신년(고종 21) 다께조에 신이치로의 난에
우리 황상을 강제로 파천케 하고 우리 재상을 죽였으니, 첫째 죄요,
갑오년(고종 31) 오오토리의 난에
우리 궁궐을 분탈하고, 우리 재물을 겁탈하고, 우리 전장을 훼기하고,
명목은 우리나라를 독립케 한다면서 후일 강탈의 기초가 시작되었으니, 둘째 죄요,
을미년(고종 32) 미우라의 변에
우리 국모를 시해하여, 천만고에 없는 반역을 저지르고도 엄폐를 일삼고,
도망친 적도를 하나도 박송한 적이 없으니,
그 대역무도는 그저 신의를 저버렸다는 정도가 아니라, 셋째 죄요,
하야시·하세가와가 우리나라에 내주할 새
그 협박, 겁탈은 손꼽을 수도 없거니와,
그 중 큰 것만을 들더라도 각처의 철도 부설이 그것이요,
경의철도는 처음부터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자의로 놓아버렸으며,
어획·벌채·삼포·광산·항해 등의 이권을 비롯한
무릇 일국의 재원을 남김없이 망라하여 빼앗아갔으니, 넷째 죄요,
군사상 필요라는 이름으로 토지를 강점하고, 인민을 침학하고,
묘를 파고, 집을 부순 것이 부지기수요,
정부에 권고한다는 이름으로
우리 정부에 소인을 천거하고,
수관을 강청하여 회뢰가 공행하고 추문이 낭자하니, 다섯째 죄요,
철도 부설이다, 토지 수용이다, 군법 시행이다 하는 것을 용병시에는 혹 군용에 빙자하여 실시할 수도 있겠거니와,
이제는 용병(러일 전쟁)은 끝났건만,
철도는 환부할 생각도 아니하고, 토지는 여전히 점탈한 채요,
군법은 여전히 시행 중이라 하니, 여섯째 죄요,
우리의 적자 이지용을 꾀어 의정서를 강제로 맺게 하고,
우리 국권을 퇴폐케 해놓고도
대한의 독립과 영토를 보전하는 듯이 말하는 것은
논외로 하더라도, 일곱째 죄요,
우리나라의 식자층이 전후하여 상소를 하는 것은
모두 내 군왕을 위해 발언을 하고, 내 나라에 충성을 하는 것인데,
이를 포박 구류해서 액살( 殺)이 되어도 놓아주지 않아,
충언과 공론을 틀어막는 것은
우리 국세가 혹시 다시 떨치지 않을까 두려워해서일 것이니, 여덟째 죄요,
동학잔당이나 토비 같은 추민들을 꾀어
「일진회」란 이름을 붙여서 그 원행을 조장하고,
또 선언서를 만들게 해서 이것을 민론이라고 자칭케 하는가 하면,
한편으로 국민에 의무로 「보안회」나「유약소」같은 데서 논의가 일어나면,
이것은 치안 방해라 하여
백방으로 저지하고
체포·구속을 하니, 아홉째 죄요,
인부를 강제 모집하여 동물처럼 채찍질로 몰아세우고,
조금만 뜻이 안 맞으면
풀 베어내듯 사람을 배고,
또 우민을 유집하여 멕시코에 암매를 해서,
우리 백성의 형제들이 그곳에서 원한을 품어도 통보도 못 하고,
학대를 당해 죽어도 돌아오지 못 하게 만들었으니, 열째 죄요,
전신·우체의 양사를 빼앗아
제 마음대로 통신기관을 장악하였으니, 열한째 죄요,
각부에 고문관을 강제로 배치하여,
누워서 후봉을 먹으면서 우리를 망하게 하고 우리를 전복하는 일을 전담하고 있어,
그 중에도 군경을 감축하고 재정을 전담하는 것은 그 가장 심한 예이니, 열둘째 죄요,
차관을 강제로 시키기 한두 번이 아니오,
재정 정리라는 미명 아래, 신화라 해서 색질과 경중 이외에 구화와 다를 것도 없는 것을
명칭만 바꾸고 수량을 많게 하여
몇 배의 이를 자취하는 대신 일국의 재정을 고갈케 하였으며,
또 통용도 안 되는 지편을 억지로 원위화라는 이름지었으며,
또 허영만의 차관으로 고리를 미리 받고, 허영만의 고빙으로 후봉을 미리 주어,
우리의 정형을 빨아 공각만을 남기려고 애쓰고 있으니, 열세째 죄요,
작년(을사) 10월 21일 밤에는
이토·하야시·하세가와 등이 군병을 이끌고 입궐하여
조약을 강제로 체결케 할 새
우리 정부를 위협하여
호명으로 일일이 가부를 묻는 인장을 빼앗아 마음대로 찍어 놓고는,
우리 외교권을 가져가고 통감을 두어
우리 독립 자주의 권을 일조에 실거케 하였으니, 열넷째 죄요,
처음에는 외교의 감독만을 한다더니, 마지막에는 일국의 내정까지 전관하여
그 소속 관청은 날로 많아져서,
우리는 손도 흔들지 못하게 하고,
걸핏하면 마음대로 위혁을 일삼으니, 열다섯째 죄요,
근자에는 또 이민조례를 만들어 강제로 승인을 요청하여,
인종을 바꾸려는 독모를 꾀하고 있으니, 열여섯째 죄다.
오호라, 이것은 일본의 죄과에서도 큰 것만을 든 것일 뿐이다.
그러나 우선 이 수십 개 항의 죄목만으로 보더라도,
이것을 강화·마관 등의 조약과 서상한 선전·변명 등의
여러 문서에 비추어 본다면,
이랬다 저랬다 남을 속인 것이 과연 얼마만한가.
이래도 우리 수십만 한인의
인심에 과연 유감이 없겠는가.
그래도 동양의 대세로 말미암아, 귀국이 아라사와 싸울 새
우리나라의 인사는 귀국의 군대를 환영하여 두려운 마음을 갖지 않았거늘,
귀국이 전승하고 돌아올 새,
더욱 흉포를 마음대로 하여 우리나라 인민으로 하여금,
어육의 참변을 거듭 겪게 하였으니,
반대로 아라사가 전승하고 동양이 망했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우리나라의 화가 오늘보다 더 했을 것인가.
지금 우리나라 백성들은 사람마다 다 죽고 망하여 살 길이 없음을 알고 있는 터인즉,
이것은 이미 죽어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머리를 숙이고 마음을 낮게 먹어,
핍박과 강압을 받아도 면할 길이 없는 지경에서 헤맬 바에는
차라리 주먹이나 한번 불끈 쥐고
소리나 한번 크게 쳐볼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노연(전국시대 제의 지사, 노중련)은 일개 선비나,
진을 높혀 제진(帝秦)이라 하는 것을 부끄러워했고,
소진은 일개 설객이나, "계구(닭머리)가 될지언정 우후(소꼬리)되기"
(즉, 세력이 강하다고 그 밑에 붙기)를 부끄러워하였거늘,
하물며 우리 3천리 민중은 선왕선현의 예의를 복습한 후예라,
어찌 원수나라 밑에 노예가 되기를 달갑게 생각하여
하루를 더 살겠다고 빌 까닭이 있겠는가.
또한 아라사가 귀국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일이요,
아라사가 조만간에 동쪽으로 찌르고 나오리라는 것은 부녀자도 알고 있는 터이다.
이 때를 당하여 동양 3국이 정립하여 전력을 모아 이에 대처하여도 지탱하지
못할까 두려운 지경인데,
황차 3국이 서로 시혐원노하여 한 방에서 원수가 된 꼴이 된데다가,
더구나 서양 열국이
어찌 귀국(일본)처럼 경천하게 자기 편(아시아 주변국)을 사랑할 줄 모르고
귀국의 조량을 일임해 둘 것이겠는가.
이와 같고 보니, 귀국의 멸망은 발돋움하여 기다릴 만한 일이요,
동양이 함께 망하는 화도 또한 불일(불시)에 올 것이다.
그러기에 본인은 말하기를,
귀국이 비록 강해도 종당에는 반드시 망할 것이요,
동양의 화도 그칠 때가 없으리라 한 것이다.
진실로 귀국을 위한 계책이 있다면
모든 일을 거연히 근본으로 돌이켜 생각함만 같지 못할 따름이요,
근본으로 돌아가는 길은 신을 지키고 의를 밝힘만 같지 못할 따름이다.
신의를 지키고 밝히려면 어떻게 하면 될 것인가.
곧 본인의 이 글을 귀국 황제에게 상주하여
이상에 열거한 16개 항의 대죄를 모두 깨끗이 회개하여,
통감을 철수케 하고 고문관과 사령관을 소환하고
새로이 충신의 인사를 (일본) 공사로 보내고,
다시 이를 각 국에 사죄하여
우리 독립 자주의 권을 침해하지 않게 하고,
양국으로 하여금 과연 영원히 서로 안온케 한다면,
귀국도 전안의 복을 누릴 것이요,
동양의 대국도 또한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이렇게 하지 못하겠다 한다면,
무릇 복은 선에서, 화는 음에서 오는 것은 천도가 소연한 바라,
지금 귀국의 소위는
제·송이 흔들려 넘어진 것과 다를 것이 얼마나 있겠는가.
본인은 작년 봄에 욕을 당하였을 때(주-최익현이 연락 상소한다 하여
일군 사령부에 구속되었다가 포천 구제에 연금된 사실)
불행히도 죽지 못하고,
또 작년 10월 21일의 변(을사조약)을 보게 되니,
의는 원수나라의 노예가 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로되,
구차히 천지지간에 생을 이어온 꼴이 되었으나,
이제 수십 동지와 함께 동사를 약결하고
바삐 상경하여 이토·하세가와 등을 역방하고,
나의 소신을 남김없이 설파한 뒤에 죽기로 마음 먹었다.
그에 앞서 나의 심간을 피력,
이 글을 지어 귀 영사관에 부쳐 귀 정부에 전달되게 하고자 한다.
이 글은 대개, 우리나라를 위한 계책만이 아니라
먼저 귀국을 위한 계책이요,
또한 동양 전국을 위한 계책이니 조양하기를 바란다
================================================
일본군이 오지않고
관군이 의병을 막자
최익현은 일본군을 막고자 의병을 일으켰는데
관군또한 조선인인데 어찌 싸우느냐 하여
싸우지 않고 무기를 내려놓았소.
결국
거병은 실패로 끝났고 최익현은 대마도로 유배되었소..
햏들이 알다시피 최익현은 왜놈의 것은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하였소.
그리고 이 상소문을 마지막으로 보내고 단식끝에 순국하셨소.
유소(遺疏) 병오년(1906, 광무 10) 7월 11일 ○ 정미년(1907, 융희 1) 3월 7일에 올리다
죽음을 앞둔 신 최익현(崔益鉉)은 일본 대마도(對馬島) 경비대 안에서 서쪽을 향하여 두 번 절하고 황제 폐하께 말씀을 올립니다.
삼가 아룁니다. 신이 금년 윤4월에 의거(義擧)를 시작한 처음에 대략 상소로 아뢰었는데, 그 상소가 진달되었는지의 여부를 모르겠습니다. 신이 거사를 잘못하여 마침내 체포되는 욕을 당하여 7월 8일에 일본 대마도로 압송되어 현재 경비대 안에 수감되었습니다. 스스로 분간하면, 필경 살아서 돌아갈 희망은 없습니다. 지금 이놈들이 처음에 강제로 신의 머리를 깎으려 하였고, 끝에서 다시 교활한 수단으로 달래며 말을 하니, 놈들의 심사를 측량할 수 없으니 반드시 죽이고야 말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신이 여기에 온 뒤로 한 술의 밥이나 한 모금 물도 모두 적의 손에서 나왔으므로, 설령 적이 신을 죽이지 않아도 신이 차마 구복(口腹) 때문에 자신을 더럽힐 수는 없습니다. 드디어 식사를 거절하고 옛사람의 ‘자신을 깨끗이 하여 선왕(先王)에게 부끄러움이 없다.’는 의리를 따르려고 결심하였습니다. 신의 나이 74세이니 지금 죽은들 무엇이 애석하겠습니까. 다만 역적을 치지 못하고 원수를 없애지 못하였으며 국권을 회복하지 못하고 강토를 도로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4천 년 화하(華夏)의 정도(正道)가 흙탕에 빠지는 것을 붙들지 못하고, 삼천리 강토에 있는 선왕의 백성이 어육이 되는 것을 구원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신이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신이 삼가 헤아리건대, 왜놈은 멀어도 4, 5년 사이에 반드시 망할 징조가 있는데, 우리가 대응할 방법을 다하지 못할까 걱정입니다. 이제 청국과 러시아 두 나라가 밤낮으로 이놈들에게 이를 갈고 있고, 영국과 미국 여러 나라도 이놈들과 반드시 잘 지내는 것만은 아니니, 조만간 틀림없이 서로 공격할 것입니다. 또한 전쟁을 치르면 백성이 곤궁하고 재물이 바닥나서 민중이 그 윗사람을 원망할 것입니다. 밖으로 틈을 엿보는 적이 있고 안으로 위를 원망하는 백성이 있으면 그들이 망하는 것은 발을 들고 기다릴 수 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폐하께서는 국사(國事)를 다스릴 수 없다고 하지 마시고 마음을 분발하여 성지를 넓게 세워서 퇴폐함을 진작하소서. 답습하는 습관을 진작하고 참을 수 없는 것은 참지 말며, 믿을 만하지 않은 것은 믿지 마소서. 헛된 위엄에 지나치게 겁내지 말고, 아첨하는 말을 솔깃하여 듣지 말며, 더욱 자주하는 정신을 굳게 지키고 의뢰심을 영원히 끊고 와신상담하는 뜻을 새겨 자수(自修)하는 방법을 다하소서. 그리하여 영재와 준걸을 불러들이고 군인과 백성을 어루만지며 양성하여 사방 형편을 관찰하고 중용을 취하여 일을 하신다면, 이 나라 백성은 진실로 임금을 높이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것이며, 선왕의 5백 년 성덕과 지선의 혜택이 마음에 젖어들 것이니, 어찌 폐하를 위해 죽을힘을 다해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지 않겠습니까? 그 동기는 다만 폐하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폐하께서는 신이 죽음을 앞두고 하는 말이라 해서 조금이라도 소홀히 하지 않으신다면, 신은 지하에서 또한 두 손을 모아 기다릴 것입니다.
신은 죽음에 임해서 정신이 어지러우니, 하고 싶은 말을 일일이 진달할 수 없어서 이것만 써서 신과 함께 갇힌 전 군수 신 임병찬(林炳瓚)에게 부탁하고 죽으면서, 그에게 때를 기다려 올리게 하였습니다. 삼가 빌건대, 폐하께서는 어여삐 여기시어 살펴 주소서.
신은 울면서 영결하는 심정으로 삼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아룁니다.
부(附) 임병찬(林炳瓚) 소
삼가 아룁니다. 신은 본시 못생기고 어리석어 가장 낮은 자리에 있으나, 오직 임금을 섬기고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만은 천성에서 나옵니다. 이에 신의 스승 고 찬정 최익현(崔益鉉)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한 사실은 작년 윤4월 신의 스승이 올린 상소와 신의 상소에 이미 대략 아뢰었습니다. 그 원소(原疏)가 상달되었는지 여부는 신이 알지 못하오나, 지금 신이 만번 죽다가 남은 병든 몸으로 살아서 고국에 돌아왔으니, 마땅히 산중에 묻혀서 종적을 감추고 감히 다시 나와 사람을 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스승의 유소(遺疏)를 부탁받았기에 폐하께 진달하지 않을 수 없고 유소의 글 뜻에는 상당한 곡절이 있으니, 또한 마땅히 사정을 진술한 연후에 국민의 의혹을 풀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의 스승이 의병을 일으킬 때 신이 불초한 줄 모르고 함께 나라의 치욕을 씻자고 약조하니, 신은 처음에 자신의 재능도 요량하지 못하고 망녕스럽게 이를 허락하였습니다. 순창(淳昌)에 이르러 전주(全州)ㆍ남원(南原)의 두 관병(官兵)을 만났는데, 신의 스승과 신이 ‘원수는 왜놈인데, 어찌 우리 병정끼리 서로 죽일 수가 있느냐?’ 하고 달려가서 서로 공격하지 말자고 깨우쳤는데 두 관병은 모두 듣지 않고 총탄을 난사하여 마침내 의사(義士) 정시해(鄭時海)를 신의 스승이 앉아 있는 앞에서 죽였습니다.
그리하여 의병은 모두 흩어지고 오직 신 임병찬(林炳瓚)과 유생 고석진(高石鎭)ㆍ최제학(崔濟學)ㆍ김기술(金箕述)ㆍ나기덕(羅基德)ㆍ문달환(文達煥)ㆍ양재해(梁在海)ㆍ임현주(林顯周)ㆍ조우식(趙愚植)ㆍ이용길(李容吉)ㆍ조영선(趙泳善)ㆍ유해용(柳海瑢) 등 12인이 남아서 함께 신의 스승을 지키며 한사코 좌우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병(日兵)이 와서 스승 이하 13인을 잡아 모두 경성에 있는 일본군 사령부(日本軍司令部)에 가두었고, 4개월이 지나 7월 8일에 스승과 신을 왜놈의 대마도로 압송하여 경비대라는 데에 구속하고 나머지 11명의 동지는 차례로 다 돌려보냈습니다.
스승과 신이 거기에 도착하니, 홍주(洪州)의 의사(義士) 9명이 먼저 그곳에 감금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왜놈의 장수가 처음 스승을 보고 바로 갓을 벗기고 머리를 깎으려고 스승을 협박하였습니다. 스승은 처음 잡힐 때부터 적들을 꾸짖었는데 그때는 더욱 꾸짖어 마지않고 신을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차라리 목을 끊고 죽을지언정 머리를 깎고 살 수는 없다. 내 뜻은 이미 결정되었다.’ 하고 마침내 밥을 물리치고 먹지 아니하고 손수 유소(遺疏)를 짓고 신에게 주면서 ‘내가 죽은 후에 마땅히 이것을 우리 임금께 올리라.’고 하였습니다.
조금 있다가 왜놈의 대장이 부하를 데리고 와서 사과하기를 ‘이것은 통역하는 사람이 잘못 전한 것이다.’ 하고, 이어서 간절히 밥 먹기를 빌고 권하니, 스승은 말하기를 ‘비록 그래도 나의 의리로는 너희들 밥은 먹을 수 없다.’ 하고 고집을 꺾지 않으셨습니다. 그놈들은 ‘음식 값은 모두 대한(大韓)에서 보내온 것이니 일본 음식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이때에 신과 같이 갇혀 있던 여러 의사들이 모두 고사(故事)를 인용하여 만단으로 말씀드려 식사하기를 권하였습니다. 그리하여 3일 만에 비로소 식사는 하였으나, 이로부터 기력이 소모되고 온몸이 수척해져 날이 갈수록 여위었고, 풍증(風症)마저 합병하였는데, 마침내 11월 17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 슬프고 원통합니다. 스승은 나라가 망하는 것을 참지 못해서 80 고령으로 의거를 시작하였고 만리 이국 땅에서 마침내 문천상(文天祥)의 죽음과 같은 의리로 마쳤습니다. 하늘이여 하늘이여, 어찌 차마 이럴 수가 있습니까.
지금 스승의 상소문 속에 ‘식사를 거절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겠습니다.’라는 말이 있는데, 스승이 그날 바로 돌아가지 못한 곡절은 이상과 같습니다. 신이 만약 상소의 내용과 차이가 있다고 숨기고 아뢰지 않는다면 죽은 스승이 최후까지 충의로 마친 뜻을 밝힐 방법이 없어 염려되었고, 또 상소를 바치면서 연유를 자세히 아뢰지 않으면 백성들로 하여금 스승의 죽음에 의심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신이 울면서 상소를 받들면서 그 연유를 자세히 아뢰지 않을 수 없는 까닭입니다.
그 상소본은 본래 신의 스승이 입으로 부르고 신이 받아 썼기 때문에 서례(書例)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또한 그곳에서는 우리나라 종이가 없어 다만 행장 속에 있던 종이쪽에 쓴 것인데, 지금이라도 신이 다른 종이에 옮겨 쓰지 못함은 스승의 구본(舊本)을 보존하려는 까닭입니다.
아아, 애석합니다. 신은 스승과 함께 죽지 못하고 뜻밖에 옛날 모습으로 다시 서울 길을 밟으니, 들리고 보이는 것이 모두 슬프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실로 구차하게 살아 있음이 다행인 줄을 모르겠으며, 목메어 우는 심정을 견디지 못하며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
최익현의 나이 74세.
임병찬의 나이 56세.
스승과 제자가 함께 유배되었고 왜놈의 것을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는 명을 이어받아
임병찬은 스승의 글을 왜놈의 종이에 쓰지않았소.
우리나라엔 참 보수가 많소.
이회창도 보수라고 그러고 정통보수니 뭐니 조갑제옹도 그렇고 말이오..
그런데 말이오.
그들이 이렇게 나라가 위태로울때
본인의 목숨도 버려가면서 굶어죽을지 쇟은 그게 되게 의문이오.
친미, 친일..
친일파만 나쁜게 아니라 본인의 나라를 걱정하지않고 본인의 이득에 맞춰서
친한나라 구분하는 그런 사람들이 나쁜거 아니오?
100년 전 일어났던 일이
지금 반복해서 일어나는것 같아서
쇟 너무 무섭고 참 이상하오.
74세의 유학의 대가였던 지성인은 굶어죽었소.
지금의 4대강을 찬성하는 지성인들은 자신의 신념에 어느정도 결백한지 쇟은 그것이 궁금하오. 다시 말해 보수가 나쁘다는게 아니오.
진보가 나쁘다는건 더더욱 아니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라에 이득권만 챙기려는 조금 안다싶은 자들이 나쁘다는 것이오.
쇟의 긴 글을 읽어주어서 감사하오.
출처는 모두 고전번역원 DB였소.,
꼴꼴햏이 말씀하신 소는 바로 이것이오.
도끼를 가지고[持斧] 궁궐에 엎드려 화의(和議)를 배척하는 소 병자년(1876, 고종13) 1월 22일
삼가 아룁니다. 선정(先正) 문열공(文烈公) 신 조헌(趙憲)이 일을 말한 것으로써 길주(吉州)로 귀양을 가는데, 영동역(嶺東驛)에서 왜인(倭人)들의 사단이 크게 우려되는 것이 있음을 듣고 다시 피끓는 소를 진달(陳達)하기를 ‘형(荊) 땅 사람이 세 번 발꿈치가 잘리는 형벌에도 응징되지 않은 것은 가지고 있는 것이 옥(玉)이기 때문이요, 장준(張浚)이 귀양살이에서 열 번이나 상소를 쉬지 않고 올린 것은 원하는 바가 충성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생각건대, 조헌이 동서로 당(黨)이 나뉘었을 때와 풍신수길(豐臣秀吉)이 화친을 청하던 날을 당해서 깊은 근심과 원대한 염려를 갖고 충성을 다하고 말을 끝까지 하다가 온 조정이 원수같이 미워함을 자초하여 죄를 짓게 되어 유배를 가서 역졸(驛卒)의 일을 행하는 데 이르렀습니다. 조헌은 의당 그 일에 징계를 받았으니 입을 다물고 붓을 달아매고 월 나라 사람이 진 나라 사람 보듯이 했어야 하는데, 도리어 의리를 다하고 충성을 바치는 마음이 한결같이 변하지 않았으니, 백세 후에 그의 상소를 읽고 그 시대를 논하면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하며 눈물을 뿌리게 합니다.
지금 신의 이름이 죄적(罪籍)에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번에 삼가 성자께서 신이 다른 마음이 없음을 살피시고 특별히 관대하게 처분하여 안치(安置)시켰다가 고향으로 돌려보내 편하게 있으면서 늙은 아비를 공양(供養)하도록 하였으니, 귀양살이와 비교하면 일의 본체에 있어 차등이 있습니다.
지금 적국(賊國)의 배가 바다에 들어와 성상께서 근심하는 때를 당하니, 신은 구구한 마음이 더욱 간절합니다. 비록 성상의 좌우에 있는 여러 대부들이 모두 죽여야 한다고 하는 처지에 있으나, 어찌 차마 입을 다물어 우리 성명을 저버리고 또 본마음을 저버려 선정(先正)의 죄인이 되겠습니까.
신은 적선(賊船) 소식을 듣고 생각하기를, 조정에서 마땅히 정한 공론이 있어 신속하게 흉한 무리들을 쓸어내되 시일을 끌지 않으리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소식을 탐지한 지 며칠이 지났는데 오히려 들리는 말이 없었고, 심지어 외부에서 떠드는 말에 첫번에도 ‘뜻이 화친을 청하는 데 있다.’ 하고 다음에도 ‘뜻이 화친을 청하는 데 있다.’고 하니, 많은 사람들이 똑같이 분하게 여기며 사방이 어수선합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이 말이 실로 근거가 있는 말입니까? 아니면 안으로 정사를 다스리고 밖으로 외적을 막는 데 있어 본래부터 정한 계책이 있지만 단지 민간에게 와전된 말입니까?
만일 와전되었다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어찌 매우 다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사실이라면 적을 위하는 처지가 되고 국가를 위한 계책이 아닙니다. 이 말이 시행된다면 전하의 일은 잘못될 것입니다.
정자(程子)와 주자(朱子)는 아성(亞聖)입니다. 그들의 말은 믿을 수 있으니, 의당 오늘날 군자들의 소견보다도 나을 것입니다. 정자는 강화(講和)를 중화(中華)를 어지럽히는 길이라 하였고, 주자는 ‘강화하는 계책이 결행되면 삼강이 무너지고 만사가 망치게 될 것이니 이는 큰 환란의 근본이다.’ 하였습니다. 정자와 주자의 교훈으로써 오늘날 일을 헤아려 본다면 적과 강화함은 반드시 난리와 멸망을 부르는 까닭이 되니 만에 하나도 다행할 것이 없습니다.
대략 세어 보아도 다섯 가지 폐단이 있으므로 신은 청컨대 죽음을 무릅쓰고 조목조목 열거하겠습니다.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도(道)에서 찾아보소서.
신은 삼가 듣건대, 강화가 저들이 애걸하여 나왔다면 강(强)함이 우리에게 있어서 우리가 저들을 제압할 수 있으니, 그러한 강화는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강화가 우리의 약점을 보여서 나왔다면 이는 주도권이 저들에게 있어서 그들이 도리어 우리를 제압할 것이니, 그런 강화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신은 감히 모르겠습니다만, 이번의 강화가 저들의 애걸에서 나온 것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약점을 보여서 나온 것입니까?
우리가 편하게 지내느라 방비가 없고 두렵고 겁이 나서 강화를 청하니 목전에 닥친 일을 우선 종식시키려는 계책을 세우는 것을 사람들이 모두 보고 있으니, 비록 속이려고 하지만 될 수 없습니다. 저들은 방비가 없고 약점을 보이는 실지를 알고 있는데 우리와 강화를 맺는다면, 향후에 한없는 욕심을 무엇으로 채워 주겠습니까?
우리의 물건은 한계가 있지만 저들의 요구는 끝이 없을 텐데, 한 번이라도 부응하지 못하면 사나운 노기(怒氣)가 뒤따르며 침략하며 유린하여 앞에 세웠던 공로를 모두 버리게 될 것이니, 이는 강화가 난리와 멸망을 부르는 까닭이 되는 첫째 이유입니다.
어느 날 강화를 맺고 나면 적들이 욕심내는 것은 물화(物貨)를 교역(交易)하는 데에 있습니다. 저들의 물화는 대부분 지나치게 사치하고 특이한 노리개이니, 손에서 생산되어 한이 없습니다. 우리의 물화는 대부분 백성들의 생명이 달린 것으로 땅에서 생산되니,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한계가 있는 진액(津液)과 고유(膏腴)는 백성들의 생명이 달린 것을 갖고서 한없이 사치하고 기괴한 노리개와 바꾸니, 마음을 좀먹고 풍속을 해치는 것인데, 해마다 반드시 거만(巨萬)으로써 헤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수년 후에는 동토(東土) 수천 리에 황량한 땅과 쓰러진 집들이 있게 되니, 다시 지탱하여 보존하지 못하여 나라는 반드시 뒤따라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강화가 난리와 멸망을 부르는 까닭의 둘째 이유입니다.
저들이 비록 왜인(倭人)의 이름을 칭탁하였으나 실은 양적(洋賊)입니다. 이 일이 한 번 이루어지면 사학(邪學)의 서책과 천주(天主)의 초상이 교역하는 속에 뒤섞여 들어오게 되고 조금 지나면 전도사(傳道師)와 신자가 전수를 받아 온 나라에 두루 가득할 것입니다. 포도청에서 기찰하여 체포하고 처벌하려 한다면 저들이 사납게 노하고 게다가 강화한 지난 맹세가 허사로 돌아갈 것입니다. 내버려 두고 불문에 부치게 되면 조금 지나서는 집집마다 사학(邪學)을 하고 사람마다 사학을 하게 되니, 아들은 아비를 아비로 여기지 않고 신하는 인군을 인군으로 여기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의상(衣裳 예의를 뜻함)은 시궁창에 빠지고 인류는 변하여 금수(禽獸)가 될 것입니다. 이는 강화가 난리와 멸망을 부르는 까닭의 셋째 이유입니다.
강화가 이루어진 뒤에는 저들은 육지로 내려와 서로 왕래하고 혹은 집을 짓고 강토에서 살려고 할 것인데, 우리가 이미 강화하였으므로 거절할 말이 없습니다. 거절할 수 없어서 내버려 두면 재물이나 비단과 부녀(婦女)들의 양탈(攘奪)을 하고 싶은 대로 할 것이니, 누가 그것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저들은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는 짐승으로 조금만 뜻에 맞지 않으면 사람을 죽이거나 잡아 넘기는 데 기탄이 없습니다. 열부(烈婦)나 효자가 애통스러워 하늘에 호소하며 복수하여 주기를 구하지만 위에 있는 사람들은 강화를 깨뜨릴까 두려워 감히 송사를 처리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따위는 온종일 말하여도 모두 열거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도리가 깨끗하게 없어져 백성들이 하루도 살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이는 강화가 난리와 멸망을 부르는 까닭의 넷째 이유입니다.
이 말을 주창하는 사람들이 걸핏하면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의 남한산성 일을 끌어다가 말하기를, ‘병자년에 강화한 뒤에 피차가 서로 좋게 지내어 삼천리 강토가 오늘에 이르도록 반석 같은 안정을 보존하였으니, 오늘날 그들과 강화를 맺어 우호하는 것이 어찌 유독 옳지 않다고 하는가.’ 하는데, 신은 이들의 말이 아동들의 소견과 다름이 없다고 여깁니다.
병자년의 강화는 크게 의리를 해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의를 아는 사람은 천지 사이에 행세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므로 문정공(文正公) 신 김상헌(金尙憲)과 충정공(忠正公) 신 홍익한(洪翼漢) 등이 배척을 주창하여 여러 번 죽는다 해도 고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청 나라 사람들의 뜻은 중국의 황제가 되어 사해(四海)를 무마(撫摩)하는 데에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대략이라도 중국의 패주(覇主)들을 모방하고 인의(仁義)에 근사한 짓을 가장하였으니, 이는 다만 이적(夷狄)일 뿐입니다. 이적들도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도리(道理)가 어떠함은 물을 것이 없고 작은 것으로 큰 것을 섬기기만 하면 피차가 모두 사이가 좋아져서 지금까지 왔습니다. 비록 그들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이 있더라도 관대하게 받아들이는 아량이 있어 침해하거나 학대하는 염려가 없었습니다.
저 외적(外賊)들로 말하면, 재화와 여색만 알고 다시 조금도 사람의 도리가 없으니, 진실로 금수일 뿐입니다. 사람과 금수가 강화를 맺어 우호를 이루어 같이 떼 지어 있으면서 근심과 염려가 없기를 보장한다는 것을, 신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는 강화가 난리와 멸망을 부르는 까닭이 되는 다섯째 이유입니다.
잠시 대강 거론해도 이렇게 다섯 가지 폐단이 있으니 다소라도 방향을 아는 자라면 잘못된 계책임을 분간할 것입니다. 하물며 강화한 뒤에는 빙자하여 말하기를, ‘피차간에 영구히 좋게 되어 연해(沿海)에 경계할 것이 없고, 백성들의 생업이 안정되어 사교(邪敎)가 들어오지 않을 것이며, 비록 맞지 않는 일이 생기더라도 걱정거리가 일어나지 않을 것을 보장한다.’ 합니다.
그러나 신의 우매한 뜻에는 크게 그렇지 않은 것이 있으니, 훗날 중국에서 《춘추(春秋)》ㆍ《강목(綱目)》의 붓을 든 사람이 크게 그 사실을 기록하기를, ‘어느 해 어느 달에 서양 사람이 조선에 들어와 어느 곳에서 맹약(盟約)하였다.’고 한다면, 이는 기자(箕子)의 옛 강토이며 대명(大明)의 동쪽 울타리로서 태조대왕(太祖大王) 이래로 중국 문물(文物)로 오랑캐를 변화시켜 예절을 제정하고 음악을 만들어서 인륜을 크게 펴던 나라가 하루아침에 노린내 나는 서양으로 들어가고 마는 것입니다.
어찌 이것뿐이겠습니까. 전부터 나라의 권세를 쥐고 국론(國論)을 주도하면서 강화하자는 의논을 주창하기를 진회(秦檜)와 손근(孫近)의 무리와 같은 자들이, 대부분 자신이 편안하게 있는 것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보전하고 처자를 보호할 사사로운 계책으로서 이렇게 형편없는 짓을 행합니다. 그리하여 군부(君父)로 하여금 홀로 나쁜 명성을 천하 만세에 전하게 합니다.
아아, 신하가 임금을 섬기려면 마땅히 선을 아뢰고 악을 방지하여 요순(堯舜)과 같은 경지에 들어가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도리어 혼란하여 멸망할 방법으로써 임금을 만 길의 함정에 빠지게 하니, 천하에 지극히 불인(不仁)한 사람이 아니라면 어찌 차마 이런 짓을 행하며, 천하에 지극히 불충한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감히 이런 짓을 하겠습니까. 신은 마음이 아파 차라리 죽을지언정 동료의 신하가 하나라도 혹시 이런 무리의 행동이 있을까 차마 듣지 못하겠습니다.
이에 삼가 생각건대, 우리 순묘(純廟 순조(純祖)를 가리킴) 신유년에 서양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몰래 들어와 우리 백성들을 속이고 유인하여 사학(邪學)에 오염되는 사람이 날로 많아지니, 순조대왕께서 깊이 근심하고 멀리까지 염려하여 불끈 노하시어 조사하여 잡고 처벌하기를 조금도 가차 없이 하셨습니다. 우리 헌종대왕(憲宗大王)께서는 선을 계승하고 잘 계술하여 무릇 조사에 걸려든 것은 모두 죄를 밝혀 죽였으니, 종자로 하여금 나라 안에 심어지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륜이 위에서 밝아지고 소민(小民)들이 아래에서 화목하게 되니, 자식은 어버이를 저버리지 않고 신하는 인군을 뒤로 여기지 않아서 예의염치가 견고하게 유지되었습니다. 나라의 형세는 편안히 안정되고, 나라의 운수는 상서롭고 길어져서 오늘에 이르도록 아름답게 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위대한 성인들의 법전이 자손들에게 남겨진 것입니다. 이것은 전하의 가법(家法)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지난 병인년에 전하께서 처음 정사하실 때에 호오(好惡)를 엄정히 하셨습니다. 적신(賊臣) 남종삼(南鍾三)이 일찍이 조정을 떠보더니 이상한 함선(艦船)이 바다 위에 출몰하게 되자, 이에 완고하고 우둔한 이익을 즐기고 염치가 없는 무리들이 강화하고 교역하자는 말을 주창하게 되었는데, 이업(李鄴)이 금로(金虜)를 장황하게 말한 것처럼 심하였습니다.
이러한 무리가 번성하여 조금이라도 그 계책에 빠졌더라면 나라에 반드시 사람이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성명께서 척화(斥和)에 뜻을 두고 있는 데 힘입어 동돈녕 신 기정진(奇正鎭)과 신의 스승 고 참판 신 이항로(李恒老)가 노성한 덕망으로 앞장서서 밝은 식견과 원대한 생각으로 피맺힌 상소를 올려 강화를 옳지 못하다고 극력 말하니, 전하께서 성실하게 그 말을 받아들여 금석같이 지키셨습니다.
이러므로 10년 동안을 양적(洋賊)들이 우리를 보고 탐내어 비록 마음을 고치지는 않았으나 또한 감히 서둘러 그 뜻을 펴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조정의 문무(文武) 대신들은 진실로 마땅히 조종(祖宗)들의 뜻을 잘 체득하여 전하의 아름다운 방침을 받들어 따라야 하고, 결코 눈앞의 편안함에 빠져 전하의 총명을 그르쳐 이적들과 강화하고 교역(交易)하여 스스로 멸망의 화를 취하면 안 됩니다.
전하께서 두 성왕(聖王 순조(純祖) 헌종(憲宗))의 대통을 계승하셨으니 두 성왕의 법도를 지키지 않고 예로부터 강화를 주장하여 나라를 망친 자들의 꾀를 따라서야 되겠습니까.
아아, 사해(四海)의 안에 있는 중국 온 땅덩이가 요ㆍ순(堯舜)과 문ㆍ무(文武)의 옛 강토인데, 2백 년 이래로 머리를 깎고 의관을 없애어 오랑캐로 변화했으니, 사람의 마음을 가진 자라면 마음이 덜컥 내려앉고 가슴을 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다시 유유상종(類類相從)으로 해외(海外)의 오랑캐들이 기괴한 형상을 한 이상한 종족들이 모두 중국에 발을 들여놓았는데, 오래되니 예사로 여겨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드디어 양호(洋胡)끼리 충돌하여 가는 곳마다 상대가 없게 되니, 온 사해(四海) 안팎의 사람들이 대부분 두려워하고 순종하여 창귀(倀鬼)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유독 우리나라 한 지역만이 조종들의 위엄과 영기에 힘입어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바른 천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비유하건대, 박괘(剝卦) 상구효(上九爻)의 석과(碩果)의 형상과 같으나, 만약 이 한 지역의 백성들마저 금수의 지경에 들여 보내, 순전한 곤괘(坤卦)의 양(陽)이 없는 세상이 된다면, 이 어찌 백성을 사랑하는 군자(君子)가 차마 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온 나라 신민들이 양호(洋胡)에게 제재를 받게 되면 얼마 못 가서 예의를 버리고 사교(邪敎)에 빠져 들어 천리와 인륜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게 된다면 전하께서 무엇에 의지하여 믿고서 신민들의 위에 있으면서 임금의 자리를 보존하려고 하십니까? 설령 베개를 높이 하여 편안히 잠을 자고, 다른 걱정과 화가 없다 하더라도 전하께서는 무슨 면목으로 두 성왕의 사당에 들어가며, 천하 후세에는 또한 전하를 어떤 임금이라고 하겠습니까?
이는 사리(事理)의 시비라 앞날의 효능과 피해가 불을 보듯 분명하니, 우매하거나 지혜로운 사람이 모두 알고, 거리의 아이들 하졸(下卒)ㆍ농부ㆍ촌로(村老)들도 한심하여 속이 타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 유독 성명하신 전하께서 깨닫지 못하시니, 신은 삼가 의혹됩니다.
전하의 뜻은, ‘저들은 왜인(倭人)이며 양호가 아니다. 저들이 말함은 옛날의 호의를 닦는 것이고 다른 것이 없다면, 왜와 더불어 옛날 호의를 닦는 것이 또한 도의(道義)에 무슨 해가 있겠는가.’입니다. 그러나 신의 우매한 소견으로는 크게 옳지 못합니다.
설령 저 사람들이 참으로 왜인이지 양호가 아니라 하더라도, 왜인들의 실정과 자취가 예와 지금이 현저하게 다르니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옛날의 왜인들은 이웃 나라였으나 지금의 왜인들은 구적(寇賊)이니, 이웃 나라와는 강화할 수 있지만 구적과는 강화할 수 없습니다.
왜인들이 구적임을 과연 무엇으로 진실로 아는가 하면, 그들은 양적(洋賊)들의 앞잡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필경 양적의 앞잡이가 된 것을 또 무엇으로 분명하게 볼 수 있는가 하면, 왜(倭)와 양(洋) 두 무리들이 심리(心理)가 서로 통하여, 중국을 횡행한 지 오래되었기 때문입니다.
연전에 북쪽에서 온 총리사(摠理司)의 글에 ‘프랑스[法國]ㆍ미국 두 나라가 왜인과 같이 나온다.’는 말이 있었고, 지난해에 동래(東萊)의 훈도(訓導)들이 전하는 말에, ‘왜인들이 영사(靈祠)를 세우겠다고 청하고, 이상한 복색의 사람들을 금하지 말도록 하기 바란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지금 온 왜인들은 서양 옷을 입었고 서양 대포를 사용하며 서양 배를 탔으니, 이는 모두 서양과 왜가 한 몸이 되었다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또한 더구나 지난달 북경에서 온 자문(咨文)은 오로지 이번 왜선(倭船)이 오는 것을 위한 것인데, 그 속에 ‘병인년에 패하여 돌아갔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병인년에 패하여 돌아간 것이 서양이고 왜가 아니었다면, 양이 바로 왜요, 왜가 바로 서양임을 한마디로 결정할 수 있으니, 저들이 말한 ‘왜인이지 서양 사람이 아니다.’는 것을 또한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이러므로 우매한 신은 단연코 말하기를, ‘설령 저들이 참으로 왜인이고 서양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분명히 양적(洋賊)의 앞잡이요 지난날의 왜인은 아니다.’고 말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왜와 옛 우호를 맺는 것이, 갑자기 들으면 아무런 해가 없을 것 같으나, 왜와 더불어 옛 우호를 맺는 날은 바로 서양과 강화를 체결하는 날이 됩니다.
서양과 화친을 맺음이 필연코 혼란과 멸망을 불러들인다는 것은 이미 위에서 진달한 바와 같다면 어떻게 해야 좋겠습니까? 다만 저들이 ‘왜인이지 서양인이 아니다.’ 하고, 우리나라 사람들로 저들에게 속임을 당한 자들이 또한 모두 ‘왜인이지 서양 사람이 아니다.’ 하니, 지금 우선 시험 삼아 왜와 서로 접하는 한가지 일로써 전하를 위하여 진달하겠습니다.
왜와 서로 접하는 데 또한 방법이 있으니, 대관(大官)이 처음 나가 볼 때 마땅히 그들에게 선언하기를, ‘양적(洋賊)들의 짐승 같은 행동으로 사람을 현혹시키는 것을, 천지 부모의 앞에서 말한다면 이는 바로 용납되지 못할 적자(賊子)요, 중화 성왕(聖王)의 세상으로 말한다면 이는 반드시 죽여야 할 난신(亂臣)이다. 천하 만고에 사람으로 이름이 붙었다면 누구나 다 토죄(討罪)할 수 있고, 조금이라도 무리가 되어 돕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바로 사람의 천성을 거스린 자다. 귀국이 공자(孔子)와 주자(朱子)를 높이고 믿으며 예의를 돈독하게 숭상하여 우리나라에 신임을 받은 지 오래이다. 그런데 지금은 도리어 저들에게 유인되고 위협을 받아서 앞잡이 노릇하기를 달게 여기니, 깊이 귀국을 위하여 대신 부끄럽게 여긴다. 《춘추(春秋)》의 법에, 난신적자(亂臣賊子)는 먼저 그 무리를 다스렸으니, 왕자(王者)가 나타난다면 귀국이 양적(洋賊)보다 먼저 죄를 받을 것이니, 귀국은 시급히 도모하여야 된다. 우리나라가 비록 별로 무용(武勇)하지는 않으나 서양을 배척하는 한 가지 일은, 이미 조종(祖宗) 이래로 전해 받은 고칠 수 없는 가법(家法)이다. 지금 귀국과 옛 우호를 맺지 못하는 것이 어찌 다만 서계(書契 문서)의 호칭(號稱)이 외람되고 해괴한 것뿐이겠는가. 음양의 큰 방향이 이렇게 서로 반대되면, 오직 서로 의논하지 못할 뿐 아니라 장차 성토(聲討)하는 데도 겨를이 없을 것이다.
귀국이 지금 이후로 만약 번복하여 통절하게 고치고 엄하게 양적(洋賊)과 절교하여, 좋고 싫어함이 바르게 되어 신명(神明)에게 질정할 수 있게 되면, 옛날처럼 전일의 우호를 체결한 이웃 나라가 될 것이며 다시 난적(亂賊)의 무리가 아닐 것이다. 이러한 연후에 비로소 우리나라에게 우호를 체결하자는 말을 강정(講定)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바로 마땅히 즉일로 배를 돌려야 되며, 오랫동안 우리 강토에 머물러서 스스로 패망을 부르지 말라.’고 해야 합니다.
위와 같이 선언한 후에 그들이 대하는 바에 따라 의리로 처리하면 명분이 바르고 말이 순조로워 천하 만세에 할 말이 있을 것입니다. 어찌하여 계책이 이에서 나오지 않고 그들에게 속임을 당하여, 우호를 체결하자고 핑계를 대고 헛되이 수백 년 이래로 보장(保障)된 중요한 땅을 버려서 적당(賊黨)들에게 잠시라도 그사이에 점거하게 하겠습니까.
신은 견마(犬馬)의 정성과 규곽(葵藿 해바라기)의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죄를 진 여생(餘生)으로 앞뒤를 돌보지 않고, 감히 고려 때의 우탁(禹倬)과 선정(先正) 조헌(趙憲)의 옛일과 같이 도끼를 가지고 대궐 문에 엎드려 천일(天日) 아래에 호소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조금이나마 불쌍하게 살펴 주시어 시급히 큰 계책을 정하시고, 현명한 사람을 임용하고 유능한 사람을 써서 오로지 정사를 닦고 외적을 물리치는 데 뜻을 두소서. 조신(朝臣)으로 하나라도 강화를 주장하여 나라를 팔아넘기고 금수를 몰아 사람을 먹게 하는 계책을 세우면 통절하게 엄중한 책망을 내려 큰 죄를 주시고 결단코 관대히 용서하지 않기를, 손 토로(孫討虜)가 책상을 부순 용기와 같이 하소서. 그러하면 비록 벙어리ㆍ소경ㆍ절름발이라도 기운이 백배나 생겨 모두 전하를 위하여 한 번 죽기를 원할 것이며, 소소한 흉한 무리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소탕할 기회가 있게 될 것입니다.
이는 오직 우리 삼천리 백성을 전부 살리고 우리 5백 년 종사(宗社)를 보존하고 안정시키는 큰 다행이 될 뿐만 아닙니다. 천하의 대의가 전하로 말미암아 신장될 수 있고 만세의 사도(斯道)가 전하로 말미암아 침체되지 않을 것이니, 공덕(功德)의 성대함이 우뚝하게 우(禹)와 맹자(孟子)로 함께 높고 위대할 것입니다. 어찌 매우 다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신은 당장 강토 안의 사람들이 금수로 몰락함을 보게 될 것이니, 진실로 부끄러운 얼굴로 구차하게 살며 같이 짝이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바라건대 이 도끼로 신에게 죽음을 내려 주시어 지하에 돌아가 두 성왕(聖王)을 모시게 하여 주신다면 또한 조정의 큰 은혜이겠습니다.
형편없으나 신은 애통하고 박절함이 지극함을 견디지 못하여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서울로 압송되는 최익현선생. 이 이후 대마도로 귀양가서
왜의것은 먹을 수 없다 하여 굶어서 돌아가셨소.
혹자는 본인의 이익을 위하여 서원철폐를 주장하며 위정척사를 주장하였다 하고
유교체제를 끝까지 주장하였다고 최익현을 말하오.
그러나
최익현 자신이 상소문에서 밝혔듯
내 나라의 자주에 의해 바뀌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 의해 바뀌는 것이기에
그 저의가 음흉하다 하여 반대한다 하였소.
FTA또한 명분은 보기엔 굉장히 간단하고 명료하고 아주 좋지 않소?
하아...
74세의 노인이 목숨을 버려가면서 나라를 위했고
돈받고 사람들 때리는
어버이연합,용역, 한나라당, 개독,보수라 말하는 시민단체,
권력독점한 변호인단과 다른 점이오.
쇟은 이런 사람을 원하고 이런 분이라면 쇟도 기꺼이 보수가 될 수 있소.
그때 개방을 주장하였던 자가 이완용.
친러파였다가 친일이 된자.
뼈속까지 친미친일이었다는 이명박과 다를바가 없는.
그 자라는 것을 볼때 쇟은
지금의 현실에 최익현 선생이 있었다면
도끼를 들고 나가 시청앞에서 시위를 하셨을거라 생각하오.
스크랩을 언제나 금지해왔으나
이 글 스크랩허용하오.
다만 어디로 퍼가는지 알려주셔야 하오.
-----------
이거 제대로 패러디해서 토요일 시청앞으로 나갈겁니다.
첫댓글 현제 우리가 일컽는 이 시대에 보수세력은 약간 야매에 순전 양아치입니다~
도대체 자기 입 채울줄만알지 철학이라는게 도통 없습니다..
자존심도 없는 쓰래기들입니다~
약간 아니고 그냥 야매요 ㅠㅠ....
그냥 야매라고하면 국가 기밀 누설죄에 해당됩니다~
에이 주어가 없자나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