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으로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은 “이생의 자랑”입니다. 이생의 자랑이란, 현실의 모든 향락을 좇아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자랑하려는 속성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부와 명예, 지식이나 권세, 외모에 대해 칭찬을 받으면 기분이 좋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시선을 즐거워합니다. 자신에게 자랑할 만한 것이 없으면 부모나 배우자, 자녀들, 친척들에 관한 자랑거리라도 찾아내지요. 유명한 사람이나 권세자와 친분이 있다는 것을 은근히 내세우기도 합니다.
이렇게 자기를 내세우며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니 결국 여러 가지 육의 것들을 취해 나갑니다. 남을 모함하고 거짓말을 해서라도 권세와 명예를 얻으려 하지요. 사람 앞에 자랑할 만한 사치를 누리려고 분에 넘는 지출을 하기도 하고 불의한 재물에 손을 대기도 합니다.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렸던 솔로몬 왕도 전도서 1장 2~3절에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영적인 시각으로 보면 이생의 자랑은 아무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시편 103편 15절에 “인생은 그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했지요. 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자랑거리를 가져도 영원히 누릴 수 있는 것은 없고 참된 가치와 생명을 얻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자기를 높이려는 마음 때문에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며 결국 사망의 길로 가는 경우도 많지요.
예를 들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를 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말렉의 모든 사람은 물론 육축까지 다 멸하라 하셨지요.
그런데 사울은 자기 욕심을 좇아 좋은 육축을 살려서 가져왔습니다. 또 자기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아말렉의 왕을 포로로 잡아 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사무엘을 보내어 이 일에 대해 엄히 책망하시지요.
하나님을 거역한 대가로 사울을 버리고 다른 사람을 왕으로 세우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사울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사울은 사무엘의 옷자락이 찢어질 정도로 그를 붙잡고 매달렸습니다. 자기 죄를 인정하기도 하고 매달려서 애원하기는 하는데 그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참된 회개가 아니지요.
사무엘상 15장 30절에 “사울이 가로되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의 앞과 이스라엘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했습니다.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 같지만 회개하고 돌이키려는 마음은 전혀 아닙니다.
“비록 내가 잘못은 했지만 그건 덮어 두고 일단 백성들 앞에서는 왕으로서 위신이 설 수 있도록 나와 동행해 달라”는 말이지요.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안다면 이럴 때 자존심과 체면을 세워서는 안 됩니다.
철저히 하나님 앞에 낮아져야 할 상황에서 사울은 오히려 자신을 높여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버림 받고 외면당하는 것보다 백성들에게 무시당하는 것을 더 두려워하고 있지요. 얼마나 미련하고 어리석은 일입니까?
이생의 자랑을 좇는 사람은 이렇게 영적인 소경이 되기가 쉽지요. 그러니 세상의 육을 좇아 자신을 드러내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자랑하라’고 하신 말씀도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0장 17절에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했지요. 주 안에서 자랑하는 사람은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합니다. 우리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믿음으로 무엇이나 할 수 있게 도와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자랑하지요. 이 자랑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자랑입니다.
또 듣는 사람에게 믿음과 소망을 심어 주는 자랑이지요. 간증하는 것도 주 안에서의 자랑입니다. “예전에는 이렇게 병들고 연약했는데 이제 주님의 은혜로 강건해졌습니다.” “나는 지혜와 능력이 없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더니 도와주셔서 사업터에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섬기고 성실히 행했더니 직장에서 동료와 상사로부터 사랑받고 빠르게 승진했습니다.”
“전에는 공부를 잘 못했는데 하나님께서 집중력과 지혜를 주셔서 성적이 오르고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전에는 내가 이렇게 악한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을 믿고 새롭게 변화되었습니다.” “가정불화로 파탄 직전에 있었는데 이제 주 안에서 행복한 가정이 되었습니다” 이런 간증들이 다 주 안에서의 자랑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 30절에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했습니다. 비록 자신은 약하여 할 수 없는 일도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음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 안에서 자랑을 하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자랑할 것을 더 많이 주시지요.
로마서 15장 17~18절에 보면 사도 바울의 자랑에 대해 나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스스로 죄인 중의 괴수요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면에서는 지극히 담대하여 성령의 능력을 자랑하는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자신을 통해 나타난 성령의 능력과 표적과 기사에 대해서는 담대하게 자랑했지요. 그 자랑을 통해 살아 계신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확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간증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경우가 있지요. 세상의 부귀영화를 자랑하는 것만 이생의 자랑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인정받고 드러나려 하는 자랑도 이생의 자랑에 해당합니다.
가령, 축복받은 간증을 하면서, “내가 이렇게 잘 행했다, 내 믿음이 이렇게 크다”고 알아주기 원하는 표현들이 드러납니다. 혹은 은혜로운 말씀들을 듣고 전하면서 “내가 이렇게 영적인 것을 많이 안다”고 인정받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지요.
이럴 때 겉으로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을 위해 말하는 것 같으니 자랑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그 속마음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쉬지 않고 기도하며 근신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점검한다면 이런 것도 성령으로 깨우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은 무익한 이생의 자랑을 다 벗어 버리시기 바랍니다. 겸비하고 섬기며 희생하는 마음,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 상대가 인정받고 칭찬받는 것을 보면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는 마음,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기 원하며 나는 무익한 종이라 고백할 수 있는 낮아진 마음을 이루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에덴동산에 살던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것은 뱀의 미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장 6절에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했지요.
사람으로 하여금 세상을 취하게 하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이 한 구절 안에 다 표현되어 있습니다. ‘먹음직’ 하다는 것은 육신의 정욕을, ‘보암직’ 하다는 것은 안목의 정욕을 나타내지요.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다”는 것은 그 지혜로 하나님처럼 높아지겠다는 것이니 이생의 자랑을 나타냅니다.
원래 하와에게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따 먹으려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자유 의지 가운데 뱀의 미혹을 받아들이자 선악과를 먹고 싶은 마음이 들었고 결국 행동으로 따 먹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렇게 죄악이 좋아 보이고 사랑스럽게 느껴져서 범죄하게 하는 원동력이 바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입니다. 사람이 세상과 세상 정욕을 계속 누리려고 할 때는 그것이 너무나 달고 좋게 느껴지고 버리기가 아깝습니다. 이 시간, 혹시 그런 분이 있다면 그것이 정말로 아깝고 좋은 것인지 진지하게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단은 사람을 미혹할 때 직접적으로 하지 않고 이생의 자랑을 자극합니다. 가령, “거짓말을 해라.” 하며 직접적으로 미혹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말을 살짝 했을 때, 자신이 드러나고
칭찬받으며 인정받아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을 던져 줍니다.
“이것만 잠깐 숨기면 인정받을 수 있어.” “이것만 눈감아 주면 큰 유익이 돼. 하나님 나라에 쓰면 되잖아.” “이것만 슬쩍 부풀려서 보고하면 칭찬받고 높아져서 더 큰 일을 할 수
있어.” 이런 마음이 바로 이생의 자랑입니다. 이것을 원수 마귀도 알기 때문에 살짝 자극하면 넘어가서 거짓말이라는 죄에 빠지는 것입니다.
판단 정죄도 마찬가지입니다. “판단해!”라고 직접적으로 미혹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람의 마음을 잘 알고 분별한다는 것을 상대가 느끼면 나를 더 신령한 사람으로 보고 높여줄
거야.” 합니다. 즉 높임 받기를 원하는 마음이지요. 이런 마음 때문에 상대 외모를 보고 쉽게 판단하는 것입니다.
변개함도 그렇습니다. “변개하라. 배신하라.”고 직접 미혹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 정했던 것에서 조금만 바꾸면 더 좋은 열매를 내서 인정받을 수 있고 하나님께서도 너를 더 높여
쓰시지 않겠어?” 하지요. 그러면 여기에 넘어가 변개하고 배신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생의 자랑을 버리지 않으면 이런 것에 넘어지는 경우가 생깁니다.
정욕을 취하는 것이 아무리 좋게 느껴진들 순간의 쾌락에 불과합니다. 참된 기쁨과 만족이 없지요. 육을 취하는 만큼 믿음이 성장하지도 못하고 더 좋은 천국을 소망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담대하지 못하니 축복을 구할 수도 없고 어떤 문제가 생겨도 하나님께 의지할 수가 없지요.
여러분이 세상을 끊고 육을 벗기만 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가득 차고 은혜와 능력이 충만해집니다. 무엇보다 마음을 영으로 채운 만큼 더 좋은 천국의 영광이 여러분에게 주어지고요.
헛되고 썩어질 세상 것에 집착하지 말고 속히 다 벗어 버리기를 부탁드립니다.
'요한일서 설교말씀 중 발췌'
글쓴이: 아빠품안에
첫댓글 아멘
아멘~~~~~!!!!!!!!!!
아멘..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