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 이은 부제작 심보경 제작투자 석동준 감독 박찬욱 원작 박상연 각본 김현석, 박찬욱, 정성산, 이무영 촬영 김성복 조명 임재영 편집 김상범 미술 김상만 동시녹음 김원영
출연 송강호, 이병헌, 이영애, 신하균, 김태우
제작 명필름 배급 CJ엔터테인먼트 제작연도
2000년 상영시간 109분 등급 15세 관람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북측 초소에서 총격 사건이 터진다. 젊은 북한 초소병 정우진(신하균)이 죽고 오경필 중사(송강호)가 부상을 입은 채 발견된다. 용의자는 사건 직후 남북 군사분계선 위에 쓰러져 있던 남쪽 초소병 이수혁(이병헌). 북한군에게 납치된 남한 병사가 탈출하다 발생한 사고라고 해석하는 남한과 군사 분계선을 침범한 남한군의 테러라고 주장하는 북한이 대립하자, 중립국 스위스 정보단의 한국계 소령 소피(이영애)에게 수사 임무가 맡겨진다.
판문점의 검푸른 밤. 돌연한 총성이 정적을 찢고 총탄이 북한 쪽 초소 창문에 낸 구멍으로 한 줄기 빛이 뻗어 나온다. 영화는 관객에게 청하고자 하는 바를 첫 장면에 단도직입적으로 밝힌다. 총구멍의 안쪽을 들여다 볼 것. 그래서 훈훈한 노란 불빛이 가득했던 초소 안의 진실을 탐문할 것.
소피 소령을 앞세워 미스터리 장르의 화법으로 정색하고 첫머리를 풀어가던 <공동경비구역JSA>는, 변비에 관한 교훈을 담은 대사와 남북 주인공들이 처음 대면하는 비무장지대 지뢰 시퀀스부터 서서히 코미디 쪽에 영화의 기어를 넘겨준다. 그때까지 매복해 있던 박찬욱 감독의 스타일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블록버스터를 표방했지만 <공동경비구역JSA>의 작전명은 대부분의 국내 거대 예산 영화들과 달리, 액션과 멜로가 아니라 휴먼 드라마와 코미디다.
코미디는 JSA 라는 ‘이상한’ 공간을 요약하는 말이기도 하다. 다 큰 어른들이 책상다툼 벌이는 토라진 아이들처럼 선 하나를 그어놓고 상대가 존재하지 않는 양 행동하는 광경은 서글프고도 우스꽝스러운 팬터마임이 아닐 수 없다. <…JSA>는 그 근엄한 분계선을 능멸한다. 군인들은 북으로 밤 마실을 가고 남북 초소병들의 거울 장난에 반사된 햇살마저 그 선을 ‘우습게’ 넘나든다. “워낙 무거운 소재라 유머가 없으면 1시간도 견디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우선 나부터가 못 견딘다.”고 시사회 직후 밝힌 박찬욱 감독은 코미디를 유치한 개그로 떨어뜨리지 않고 절묘한 수위를 유지하는 줄타기에 성공한다.
네 사람의 교류는 결과적으로 체제에 도전하지만 그들은 “통일의 물꼬를 트려고” 덤벼든 청년들이 아니다. 오 중사와 정 전사, 이 병장과 남 일병은 보통 남자들이 그렇듯 자리의 흥을 깨는 정치 이야기를 꺼리고 양자택일의 문제를 섣불리 제기하지도 않는다. 이 관계에서 ‘월북’'이니 ‘월남’이니 하는 단어를 입 밖에 내는 것은 배신이요 배반이다. <…JSA>는 아마도 후방에 외로운 삶을 남겨두고 공동 경비 구역까지 왔겠거니 짐작되는 남북의 병사들 사이에 짧게 피었다 꺾인 애정의 기록이다. “이 병장님 제대하면 저 어떻게 군생활 하죠?”라고 동성애적 애틋함을 담아 묻는 남 일병에게 “너 내가… 친구 소개해줄까?”라고 말하며 수혁이 데려간 곳은 북쪽 초소다. 마치 원수 집안의 연인들처럼 그들은 ‘월장’을 하고, 몰래 눈길을 교환하고, 애인 대신 북쪽의 ‘형’에게 편지를 쓴다. 사랑이 비극적으로 끝났을 때 살아남은 사람들 중 이수혁의 눈은 초점을 잃고 오경필의 눈은 한 곳에 고정된다. 실없는 농담에서 광기까지 넓은 진폭의 연기를 담담히 감당한 송강호, 이병헌 등 네 주연의 연기는 각기 출중할 뿐 아니라 스크린 위에서 다른 배우와 이룰 화음까지 상상할 줄 아는 의젓함을 갖추었다.
그에 비해 미스터리 구조는 매듭이 야무지지 못하다. 남 일병의 감정적 격발은 근거가 부실하고 후반부 추리 과정은 의도된 만큼의 박진감을 주지 못했다. 최후의 반전도 약하다. 소피와 마지막 대화를 나눈 이수혁이 다리를 절며 계단을 내려갈 즈음이면 <유주얼 서스펙트>의 '고바야시 장면'같은 기막힌 뒤집기 한판을 누구나 기대하게 되지만, 반전은 밋밋하다. 성실히 씌어진 시나리오는 적당한 복선들을 깔고 있지만, 그 혜택을 본 것은 사건의 수수께기보다 심리적 미스터리, 취조 과정에 이수혁이 무심코 입에 올린 이야기가 오 중사에게 배운 것임이 밝혀진다거나, 애인 사진과 관련된 복선은 수사를 진척시킨다기보다 관객의 마음에 파문을 더하는 구실을 한다. 미스터리 파트를 주도한 소피의 캐릭터는 불행한 과거를 지닌 총명한 여수사관이라는 설정이 전형적인데다 개인사의 설명도 축약된 터라 남성 인물들에 비해 체온이 확연히 부족하다. 두편의 다른 영화를 왕복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지나치게대범한 3부 구성 방식 탓에 소피는 내내 겉돌지만 이영애는 소피 역이 무리 아니냐는 우려를 뒤엎고 오히려 배역의 밀도가 그녀의 성실한 연기에 미치지 못함을 보여준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자료 필름이나 국가보안법 해설 시퀀스도 설명 의도가 불거지는 사족. 그러나 후자의 장면에서 따온 정사진 한컷으로 이뤄진 마지막 숏은 감점을 메우고도 남음이 있다. 여기서 카메라를 관객의 손가락이 되어 네 병사가 한 프레임 안에 잡힌 흑백 사진을 어루만진다. 관광객의 카메라에 우연히 찍힌 그들의 모습을 통해 서로를 모르던 시절에도 그들이 상대를 증오하지 않았다는 단순한 사실을 발견하는 순간, 관객은 마음의 비무장 지대에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좋은 기획 영화는 기획 이상의 무엇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그 플러스 알파를 녹록지 않은 소재에 대한 정면 승부와 영화광 감독으로 '악명'높았던 박찬욱의 재능과 감수성에서 찾은 명필름의 <...JSA>는 인디영화의 유머와 양식미를 흡수한 할리우드 주류영화를 볼 대와 비슷한 감상을 안긴다. 남은 바람이라면 박찬욱 감독이 흥행 성공의 색종이 세례 속에서 새로운 허기를 느끼고 새로운 욕심을 부려줬으면 하는 것. 그가 영화를 '잘' 만들 수 있는 연출자임을 원래 알고 있던 이들은 그가 좀더 멀리 가주길 기대하기 때문이다. 배우들의고른 호연, 영화의 넓은 시야와 긴 호흡이 일련의 올 여름 한국 공포영화들이 옆구리에 남긴 가려움증을 정확하게 해소해주는 <...JSA>는 추석 관객의 환대를 받을 게 분명하다. 애초 18세 이상 관람가 등급을 받아 "동족끼리 만나 끝말잇기 좀 했기로서니, 청소년들의 현실인식에 무슨 위해를 끼치겠냐"는 요지의 지원사격을 여론으로부터 받았던 <...JSA>는 재심결과 15세관람가 등급으로 서울지역 35개관(40개 스크린)에서 개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