最高技術은 失敗를 먹고 자란다
황우석 敎授의 줄기細胞 硏究 結果의 眞僞 與否로 온나라가 떠들썩하다.
이번 줄기細胞 事件을 지켜보면서 지난 歲月이 走馬燈처럼 腦裏를 스쳐 지나간다.
筆者가 엔지니어로서 社會에 첫발을 내디딜 當時 우리나라는 産業再建期였기 때문에 시멘트, 비료 等 化學工學 分野에서는 좋은 일자리가 많았다.
남들이 말하는 一流大學을 나온 데다 60年代 初 엔지니어로서 英語, 獨逸語 驅使能力이 있어 職場에서 빨리 成長할 수 있었다.
하지만 職場生活에 滿足 못하고 事業을 한답시고 내 專攻과는 전혀 關係 없는 스웨터 만드는 工場을 運營했다. 60年代 當時로는 꽤 큰 規模로 始作했다.
只今 돌이켜보면 망할 수밖에 없는 當然한 짓만 했던 것 같다. 結果는 부모님의 財産뿐만 아니라 親戚들 돈까지 전부 날렸다. 그 때 나이 겨우 스물여덟 살이었다. 事業 失敗 後 某 精油工場에 프로세스엔지니어로 就職했다. 그 곳에서 아스팔트 製造工程을 맡았는데 이것이 내 人生의 勝負處가 된 防水分野와 처음 맺은 因緣이었다.
그 後 技術營業 쪽으로 移動해 事業에 대한 꿈을 키워나가던 中 75年 어느 電線會社에서 獨逸서 輸入하던 아스팔트 컴파운드의 問題點을 改善하면 購買해주겠다는 約束을 받고 아스팔트 材質 開發에 매달리게 됐다.
80年 우리나라 最初로 高級아스팔트 防水시트를 구미 工場에서 生産하기 始作함으로써 本格的으로 防水業界와 因緣을 맺었다.
防水處理란 屋上이나 시멘트 外壁으로부터 물의 侵入을 遮斷하여 建物을 保護하는 技術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防水를 專門 種目으로 다루게 된 것도 오래지 않았고, 防水 專攻으로 學位를 取得한 분들도 몇 명 되지 않는다. 이제 防水의 重要性 이 認識되는 段階다.
防水가 建築에서 重要하다고 말들을 하지만 實際로는 防水工事費는 全體 建築費의 1% 未滿이기 때문에 建築主나 設計者들은 별로 深刻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建築物에서 살다보면 漏水를 經驗한다. 漏水라는 지긋지긋한 經驗을 하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런데도 막상 自己가 집을 지으려고 하면 漏水 自體보다는 工事 單價 에 더 神經을 쓰는 矛盾된 行動을 보인다. 설마 물이야 새겠나? 우선 싸게 하자는 생각이 支配的이고 防水業者들은 建築主들의 잘못된 認識을 利用하여 싼 價格을 提示하고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당장에 약간의 利益이라도 챙기는 行動을 서슴없이 한다.
이런 防水業界의 慣行속에서 事業을 해야 하는 나도 같은 部類로 取扱받았고, 돈도 벌지 못하면서 사기꾼으로 取扱받게 되었다. 事業上의 어려움을 挽回하려고 經驗이 없는 코팅防水分野로 손을 내밀었고, 그것은 더욱 큰 失敗로 되돌아왔다.
에버랜드 워터파크 防水工事를 맡아 經驗 管理能力 不足으로 많은 失手를 하게 되었고 賃金滯拂로 勞動者들에게 사흘 동안 監禁을 당하는 受侮를 겪고 血壓이 200을 오르내리면서 죽을 수도 있다는 恐怖感에도 휩싸이기도 했다.
當時 무엇보다 나를 괴롭힌 것은 徹底한 敗北感과 나도 사기꾼이 되었다는 自愧感이었다.
더욱이 시집가는 딸 婚事에 단 한 푼의 經濟的 보탬도 되지 못하는 애비의 마음이 란…. 囑望받던 엔지니어로서 당당히 出發했고, 한때는 젊은 事業家로서 부러움을 받던 時節은 지나고 가난과 疾病 그리고 비참함만 남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깨달음이 다가왔다. 自責이나 後悔는 아무런 所用이 없고 只今의 位置를 正確히 把握하고, 그것을 認識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오직 現實을 바탕으로 다시 始作해야 한다는 엄연한 事實을 보게 된 것이지만 簡單하면서도 지금껏 이해하지 못했던 事實들이 눈에 보이기 始作했다.
믿을 수 없을 程度로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周邊의 情況이 차츰 明確히 理解되기 始作했다. 오직 길은 다시 일어선다는 것, 그 外는 없었다.
機會는 失敗의 連續을 지나 努力 및 運과 함께 찾아왔다. '물이 새는 것이 防水'라는 自嘲的인 雰圍氣에서 그리고 사기꾼이라는 不名譽를 안고 사는 防水業界에서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길은 技術力과 創意力으로 正面勝負를 하는 길밖에 없었다.
왜 漏水가 생길까? 革新的인 좋은 方法은 없을까? 過去 失敗한 原因을 分析하고 解析하고 다시 綜合한 結果를 조그마한 現場에서부터 實際로 適用해 봄으로써 드디어 旣存의 方法과는 다른 새로운 防水工法(SSAP)을 開發해 特許와 建設新技術을 認定 받는 데까지 이르렀다.
어느 누구도 着眼하지 않은 特異한 發想이었고, 6年의 使用期間에 他 工法과 比較해 卓越한 效果를 보임으로써 단숨에 우리나라 防水 新技術 分野 連續 4年 首位를 차지하고 있다.
國內에서 效果를 바탕으로 世界市場에서 技術로 勝負하기 위하여 技術 勝負處를 美國으로 정하고 美國 캘리포니아에 橋頭堡를 마련한 後 示範工事에 들어갔다. 生命 工學이나 IT分野와 같이 未來 成長動力으로 꼽히는 分野도 아닌 것은 말할 必要도 없고, 우리나라에서는 아직은 學問이라고까지 부를 수도 없는 防水分野에서 世界 最高의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美國市場을 두드릴 때 周邊 사람들은 나를 돈키호테로 取扱했다.
美國사람들이 내 工法 說明을 듣고 난 後 한결같이 묻는 質問이 '어떻게 이것을 만들었는가?'이다. 이에 대해 나는 이렇게 答한다. "내 이름이 C. Y. (see why)다. 事物을 보라, 누구나 보고 試圖하면 된다. 콜럼버스가 美大陸을 發見한 것은 그의 航海技術이 最高도 아니었고 資金力도 별로였다. 그는 信念을 갖고 努力을 했고 이를 위해 누구보다 먼저 앞으로 나갔기 때문이다."
失敗는 내게 挫折과 同時에 希望을 가져다 주었다. 내 人生은 失敗 때문에 挫折하지만 希望을 갖고 다시 꿈을 꾸는 過程의 反復이다. 防水技術로서 最高의 자리에 오를 때까지 이 過程은 繼續 反復될 것이다.
이런 挫折을 딛고 技術料만으로 年間 90億원에 肉薄하는 企業體를 일궜지만 이에 自慢하지 않고 誠實하고 謙虛하게 살아갈 생각이다.
[김충엽 부일건화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