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서해성은 고 김근태 영전에 ‘민주주의는 그에게 빚을 졌다’고 단연히 고백했다.
‘숨소리 하나하나 괴로움조차 그에게 빚지지 않고는 어제를 지나올 수 없었’던 시대에 대한 뒤늦은 참회록이다.
그래서 ‘내일 새벽 서울역을 떠나는 기차바퀴소리’도 저항을 조직하던 ‘함성’도 민주주의에 목말랐던 ‘광장’도 고인을 떠나보내는 ‘이 슬픔마저’도 온전히 산자들의 ‘빚’으로 남았다.
그런데도 이 나라의 민주주의 시계는 목하 거꾸로 가고 있다.
도덕적 해이가 부른 채무불이행의 후과를 단단히 체득하고 있는 중이다.
때문에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것은 김근태가 아니라 민주주의’라는 시인의 지적은 부분적으로만 성립한다.
민주주의의 파수꾼인 국민 거개가 파킨슨병을 앓고 있어서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누군가는 정치적 선동으로 일축하고 또 누군가는 일종의 정치적 수사(修辭)라고 선을 긋는다.
정말 그럴까? 아니, 그것은 숱한 역사적 경험칙에서 증명된 보편타당한 명제다.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도 그 산증인 중 하나다. 4․19혁명, 부마항쟁, 5․18 광주민중항쟁, 6월 항쟁 등이 그 생생한 민낯들이다.
마산에서 부산에서 광주에서 서울에서 인천에서 대전에서 그리고 저 멀리 제주에서도 그랬다.
김주열과 전태일, 윤상원과 광주민중들, 박종철, 이한열, 또 무리지어 광장과 거리를 넘나들었던 ‘등 푸른 고등어’떼들이 그 주인공이다.
그중에서도 고 김근태는 광기와 폭압의 시대를 견디게 만들어준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어둠과 질곡의 시대를 밝혔던 단연 빛나는 별이었다. 오염과 타락을 부끄럽게 여기게 한 소금이었고 새 시대를 준비하는 마중물이었다. 많은 이들이 그를 ‘민주주의의 대부’이자 ‘정신적인 대통령’이라 불렀던 이유다.
어쨌든 우리는, 우리의 민주주의는 그에게서 그렇게 많은 빚을 졌다.
시인 고은에 따르면 ‘그는 70년대에는 물 위에 떠오르지 않았다 / 인천 어딘가 / 후덥지근한 이 공장 저 공장에 스며들어가 … 평생 노동자와 일치하리라고 결심’했던 ‘호모 파베르’였다.
그런 고인을 수면 밖으로 불러낸 것은 다름 아닌 ‘5․18 광주’였다. 광주의 진실과 대면한 고인은 도저히 침묵하고만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금세 깨달았다. 그것은 내면의 양심이 촉발시킨 ‘정언명령’이었다.
그리고 1983년 9월30일 경찰들의 삼엄한 감시 속에 민주․민중․민족통일을 기치로 내건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이 창립됐다.
고인은 이날 민청련운동이 시급한 이유로 “80년 5월 광주시민대학살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광주에서 피의 학살이 자행된 지 3년만의 일이다. 그간 한국의 민주주의는 광주학살 이후 ‘두 눈이 가리고 혀는 잘리어 귀마저 막혀버린’ 질식사 직전의 임종상황이었다.
고인은 이듬해 5월 민청련 의장자격으로 ‘망월동묘지’를 참배했다.
군사독재의 위세가 워낙 서슬 퍼랬지만 우회로를 거치지 않고 정면 돌파하는 정공법을 선택했다.
고인은 5월19일 ‘아, 5월이여! 광주여! 영원한 민주화의 불꽃이여! - 광주는 죽지 않았다’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고인은 성명에서 “80년 5월의, 독재를 타도하려 했던 ‘민주’는, 외세를 배격하고 통일을 외치던 ‘민족’은, 경제적 평등을 실현하려 했던 ‘민중’은 5월 광주의 기억 속에 아직도 생생히 살아 있다”며 “80년 5월 광주에서부터 이 땅의 민주화 운동은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선포했다.
고인은 이 때문에 남영동에서 큰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부인 인재근 의원은 지난 11월19일 광주극장에서 열린 ‘남영동 1985’시사회 자리에 참석해 고인이 겪었던 후일담을 전했다.
인 의원은 “나중에 고인에게 들으니 고문을 받을 때 ‘니가 뭔데 처음으로 전두환 신군부에 대항해 민청련을 만들고 망월동 묘지를 참배했느냐’며 호되게 당했다”고 밝혔다.
결국 고인은 ‘민청련 운동’으로 군사독재 정권에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된다.
그리고 1985년 8월24일 서울대 민주화 추진위원회 배후조종 혐의로 연행됐다.
군사독재정권이 고인을 1984년 서울대에서 발생한 ‘민추위 사건(깃발사건)’의 배후주동자로 몰아간 것이다.
당시 민추위는 ‘깃발’이라는 제목의 유인물을 제작해 배포했는데 그 핵심주장이 ‘노학연대(勞學連帶)’였다.
그때 군사정권은 학생운동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자칫 노동운동으로 비화될 것을 두려워해 일명 ‘서울대 간첩단 사건’을 조작했다. 이 사건으로 고인 등 관련자 26명이 국가보안법 혐의로 구속되고 3명은 불구속 입건, 17명이 수배됐다.
19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이 물고문으로 사망한 것도 이 사건의 연장선상에 있다.
박종철이 선배인 박종운을 하숙집에 재워줬다는 이유만으로 연행해 행방을 추궁하는 과정에서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한동안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말이 회자됐다.
그 후 고인은 9월4일부터 26일까지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끌려가 고문기술자 이근안에게 23일 동안 수차례의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했다. 고인은 이 사건으로 1987년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을 수상했다.
1988년에는 독일의 함부르크 자유 재단이 그를 ‘세계의 양심수’로 선정했다.
1988년 출옥한 고인은 이듬해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의 집행위원장을 맡아 민주화 운동을 이끌다가 95년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로 정치대열에 합류했다.
그리고 마침내 97년 김대중의 수평적 정권교체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15대 국회부터 17대까지 국회의원직을 세 차례 수행하면서 원내대표와 당의장 등 중책을 맡아 국민경선제를 관철시키는 등 정치혁신에도 힘썼다. 또 따뜻한 시장경제와 양극화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은 현재 ‘경제민주화’라는 시대정신으로 구체화 되고 있다.
고인은 2002년 16대 대통령선거 후보로 당내 경선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때 동교동계 권노갑에게 ‘정치자금’을 수수했다고 양심고백을 했지만 정치권은 ‘바보 김근태’라며 한껏 조롱했다.
유권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 정치인의 진정어린 ‘참회의 고백성사’를 한낱 술자리 안줏거리로 삼았을 뿐이다.
광주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정치권에 몸담은 지 8년째였던 고인이 직면했던 ‘현실계’는 여전히 ‘이성적 믿음’과 ‘현실적 추구’가 불일치하는 ‘모순계’였다.
그 세계는 ‘원칙과 상식’이 외면 받는 ‘야만의 세상’이었으며 ‘꿈과 희망’이 왕따 당하는 정의와 진실, 희망이 시들어버린 ‘실낙원’에 다름 아니었다.
그래서 고인은 현실정치계를 향해 더 이상 ‘위선과 동거’하지 말라고 충고한 뒤 아름다운 퇴장을 선택했다.
그 과정에서 ‘광주의 벽’은 고인에게 너무 잔인하고 뼈아팠다. 광주의 일부인사들이 고인을 찾아가 ‘후보단일화’ 압박을 촉구하고 나선 것이다. 결국 고인은 ‘역사적 동지’이자 ‘기회의 땅’으로 여겼던 광주의 싸늘함에 희망을 접고 ‘막다른 선택’을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고인은 후보사퇴 후 광주를 제일 먼저 찾았다.
고인은 “쓸쓸하고 외로워져 그리움 때문에 갑자기 광주가 보고 싶어졌다”며 “광주는 지난 시기 우리의 희망이었던 만큼 여기서 미래를 향해 다시 시작하겠다”고 말했다.
결국 고인의 고백은 민주당 국민경선 판세를 완전히 뒤바뀌게 한 계기가 됐다.
이인제 대세론이 유탄을 맞고 휘청거리는 동안 노무현은 ‘3․16 광주 선택’을 발판삼아 전국으로 ‘노풍’을 확산시켜 나갈 수 있었다.
고인에게 광주는 과연 어떤 곳이었을까? 고인은 언젠가 언론인터뷰에서 “광주는 허전함에 대해 고백하고 토로하는 도시”라고 했다.
고인은 “권위주의 정권시절 광주가 했던 것처럼 다시 광주가 희망을 열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가지고 있다”며 “정권교체는 이뤘지만 벌써 허전하지 않은가. 이제 다시 제2의 민주화 운동을 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또 언젠가는 “광주를 잊어버린 사람들은 용서할 수 없다”라고도 했다.
고인은 마지막으로 “2012년을 점령하라!”고 유언을 남겼다. “운 좋게 내년 2012년에 두 번의 기회가 있다. 최선을 다해 참여하자. 오로지 참여하는 사람들만이 권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권력이 세상의 방향을 정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그런데 이미 한번은 야권의 성찰하지 않는 ‘오만함’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제 기회는 단 한번뿐이다.
고인에 대한 부채를 갚는 방법도 딱 하나 뿐이다. 2012년을 점령하는 것이다.
인재근 의원은 “고인은 광주를 너무 사랑했다”며 “민주주의와 광주를 사랑했던 정치인 김근태를 기억해 달라”고 주문했다.
이제 고인의 염원에 광주가 화답해야 할 차례다.
## 비록 정권교체에는 실패했지만 광주가 보여준 높은 정치의식과 시민의식 앞에 최대의 경의와 존경을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