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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봉
정도전의 초상화.
혁명은 무엇으로 완성되는가. 무력에 의해 혁명은 일단 성공하지만, 그 성공이 곧 혁명의 완성은 아니다. 혁명이 주장한 이데올로기가 사회
구성원의 대뇌에 온전히 장착되고, 그 이데올로기에 따라 사고하고 행동하는 인간이 다수 출현했을 때 비로소 혁명은 완성된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을 통해 혁명의 이데올로기를 인간의 대뇌에 장착할 것인가? 현대에는 교육과 미디어가 그 수단이지만 과거에도 같은 방법을
사용했을까? 고려를 엎고 조선을 세웠던 혁명가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무엇으로 혁명을 완성하려고 했던가. 이 문제를 풀어보자.
‘서적포 설치하는 시’로 동료들에 도움 청해
정도전의 문집 ‘삼봉집(三峰集)’에 ‘서적포를 설치하는 시(置書籍鋪詩)’란 흔하지 않은 제목의 시가 있다. 시 앞에 서문이 붙어 있는데,
이게 읽어볼 만하다.
-대저 선비가 아무리 학문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해도 서적을 얻지 못한다면 또한 어떻게 하겠는가. 우리 동방은 서적이 적어 배우는
사람들이 모두 독서의 범위가 넓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긴다. 나 또한 이 사실을 아프게 생각한 것이 오래다. 나의 간절한 바람인즉 ‘서적포’를
설치하고 동활자(鑄字)를 만들어서, 무릇 경(經)·사(史)·자(子)·서(書)·제가(諸家)·시(詩)·문(文)과 의학(醫學)·병(兵)·율(律)의
서적까지 깡그리 인쇄해내어 학문에 뜻을 둔 사람들이 모두 그 서적을 구해 읽어 학문의 시기를 놓치는 한탄을 면했으면 하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모두 사문(斯文)을 일으키는 일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아 모쪼록 이 일에 공감해주기를 바란다. -
서문에 이어 시가 실려 있다.
‘물어보자, 어떤 물건이 사람에게 지식을 더해줄까?
타고난 자질이 좋지 않으면, 문장을 통해 이루어지는 법.
한스럽게도 우리나라에는 서적이 적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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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의 사당인 경기 평택 문헌사에 보관돼 있는 ‘삼봉집’ 목판.
책을 읽었다 한들 열 상자가 되는 사람도 없다네.
늘그막에 못 본 책을 얻는다 해도
읽고 나서 덮으면 이내 까먹어버린다오.
다짐해 바라노니 부디 서적포를 설치하여
후학에게 책을 널리 읽게 하고 무궁토록 전했으면
그대 보라, 저 오랑캐가 윤리를 해치는 것을,
그들의 책 시렁과 동량(棟樑)을 꽉 채웠네.
저들은 성(盛)하고 우리는 쇠했다 탄식할 것 있으랴?
본디 우리들이 뜻이 강하지 못한 것을.
여러분께 청하노니 서적 인쇄 비용을 도우시어
모쪼록 사도(斯道)가 더욱 빛을 발하게 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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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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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심경 본문.
서적포를 설치하고 서적을 많이 인쇄해 보급할 수 있도록 가까운 동료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내용이다. 대단히 흥미로운 것은 동활자를 만들어서
책을 인쇄하자는 제안이다. 동활자란 바로 금속활자다.
고려의 금속활자는 구텐베르크의 활자보다 2세기나 앞서 발명돼 ‘세계 최초’란 타이틀을 갖는다. 한국인은 이를 자랑스럽게 여기지만, 자랑의
이면에는 서구와 근대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다. 사실 중요한 것은 ‘최초’가 아니라, 그것으로 무엇을 했는가에 있을 것이다.
목판은 제작과 보관이 어렵다. 또한 쉽게 닳는 단점이 있다. 거기다 목판은 단 1종의 인쇄물밖에 얻을 수 없다. 그러나 금속활자는 마모되지
않고 대량의 인쇄물을 생산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활자의 가동성(可動性)은 많은 종수의 책을 생산한다. 금속활자에는 대량의 인쇄물, 그리고
일부에게 독점된 지식을 해방시키는 근대의 이미지가 투영돼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려, 그리고 조선의 금속활자도 이 이미지대로 사용됐을까. 한국의 금속활자는 대량의 인쇄물이 아니라, 오로지 다종(多種)의
인쇄물을 짧은 시간에 얻는 데 목적이 있었다. 세종은 이렇게 말했다(세종 13년 2월28일).
“좌전(左傳)은 학자들이 마땅히 보아야 할 서적이다. 주자로 인쇄한다면 널리 반포하지 못할 것이니 ‘목판’에 새겨 간행하라.”(세종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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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숭덕비.
대량의 부수는 금속활자본이 아니라 목판본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짧은 시간 안에 여러 종류의 인쇄물을 얻는 것이 고려의 금속활자를 탄생시킨
압력이었을 것이다.
‘고금상정예문(古今詳定禮文)’이 강화도에서 만들어졌다는 데 주목해보자. 고려는 강화도로 천도하면서 개경의 책을 제대로 가져올 수 없었다.
따라서 많은 종수의 책이 필요했고, 그것이 금속활자를 탄생시킨 배경으로 추측할 수 있다. 절에서 금속활자가 만들어진 것도 그렇다.
정도전이 ‘서적포를 설치하는 시’를 쓴 해는 1390~1392년으로 짐작된다. 1377년 청주 흥덕사(興德寺)에서 ‘직지심경’이
인쇄됐으니, 정도전이 살던 시대에는 금속활자의 사용이 드물지 않았던 것이다. 혁명가의 예리한 안목은 이 금속활자의 무궁한 이용 가능성을 포착했던
것이다.
신흥사대부들에게도 불교 여전히 남아 있어
정도전이 금속활자로 책을 인쇄하기 위해 설치하자고 제안했던 서적포는 정도전이 처음 언급한 이름이 아니다. 서적포는 국자감(國子監)의
인쇄기관이었다. 고려 숙종 6년(1101) 3월 비서감(秘書監)의 목판을 국자감에 이관해 인쇄를 담당하도록 했는데 국자감이 요즘 말로 하자면
국립대학이니 서적포는 대학의 출판부쯤 된다. 특히 ‘포’는 가게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서적포는 학생들에게 서적을 인쇄해서 파는 곳이 아니었을까
짐작하지만, ‘고려사’에는 더 이상의 사료가 없기 때문에 무어라 단언하기 어렵다. 다만 서적포를 설치하자는 정도전의 말로 보건대, 서적포는
아마도 없어졌거나 유명무실한 상태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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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텐베르크(왼쪽)와 그가 발명한 금속활자로 간행된 ‘구텐베르크 성경’.
정도전이 ‘서적포를 설치하는 시’를 썼을 때 국자감은 이미 성균관으로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고려의 성균관에 모종의 변화가 일어난 것은
1300년경 성리학이 수용된 이후다. 안향(安珦, 1243~1306)은 1290년경 베이징에 있을 때 처음 성리학을 접하고 주자의 서적을 베껴
가지고 온 사람이다.
그는 귀국한 뒤 퇴락한 성균관을 재건하고 성리학을 보급하는 데 열중했다. 안향 이후 성균관은 성리학이란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보급하는 기지로
변신했던 것이다.
성균관은 공민왕 10년(1361) 홍건적의 2차 침입 때 소실되고, 16년(1367)에 다시 지어진다. 새 성균관을 이끈 주역은
누구였던가? 겸대사성(兼大司成)은 이색(李穡), 박사(博士) 겸 대사성은 정몽주, 교관(敎官)은
김구용(金九容)·박상충(朴尙衷)·박의중(朴宜中)·이숭인(李崇仁) 등이었다. 이들은 이른바 신흥사대부들의 핵심이다. 이들은 성리학을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였다.
정도전 역시 공민왕 19년(1370)에 성균박사에 임명돼 위의 인물들과 함께 성리학에 대한 담토(談討)를 자주 가졌고 새로운 사상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켰다. 성균관은 어느새 사회개혁의 기지가 돼 있었고, 곧 혁명의 기지로 변신할 참이었던 것이다.
사대부들에게 성리학은 매력 있는 사유였다. 그것은 장대하고도 치밀한,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분야를 아우른다. 우주의 생성에서
인간의 마음까지 그리고 정치, 경제, 문학, 역사, 인간 일상에서의 소소한 행위 규범들까지 모든 것을 망라하는 이 거대한 사유에 비견될 것은
아마도 마르크스주의밖에 없으리라. 뿐인가? 성리학은 종교를 대신한다. 곧 불교를 대체할 수 있었다. 정도전이 혁명을 꿈꾸었던 것은 다름 아닌
고려 사회를 유지하는 한 축인 불교를 완전히 대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을 것이다.
정도전이 ‘서적포를 설치하는 시’를 쓸 무렵 고려는 이미 회생 불능의 상태에 빠져 있었고, 새로운 왕조의 창건은 거의 기정사실이 돼
있었다. 그러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성리학으로 철저히 무장해야 할 신흥사대부 내부에도 불교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혁명가 정도전은
불교를 비판하는 논설 ‘불씨잡변(佛氏雜辨)’을 쓸 정도로 철저하게 불교와 결별했다. 아울러 그는 동료들의 사상적 분열이 걱정스러웠다. 그는
동료이자 정적(政敵)이었던 정몽주(鄭夢周, 1337~1392)에게 편지를 쓴다.
-근자에 오가는 말을 듣자니, “달가(達可·정몽주의 자)가 ‘능엄경’을 보고 있으니 흡사 부처에게 아첨하는 사람처럼 보인다”고 합디다.
나는 “능엄경을 보지 않고서야 불교의 삿됨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달가가 능엄경을 보는 것은 불교의 병통을 알아내어 고치자는 것이지, 불교를
좋아하여 정진하자는 것이 아닐세”라고 하였습니다. 얼마 뒤 나는 혼잣말로 “나는 달가가 부처에게 아첨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증할 수 있다.
…달가는 사람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고 있어 그의 행동은 사도(斯道)의 흥폐(興廢)와 관계되는 바이니, 자중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게다가 백성들이란 무식하고 어리석어 유혹을 쉽게 받는 반면 깨우쳐주기는 어렵습니다. 모쪼록 달가는 생각해보소서.-
공손한 어조지만, 정몽주가 능엄경을 읽는 것이 성리학의 전파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불경을 읽지 말 것을
요구하고 있다.
정몽주가 누구인가. 이 시기에 성리학을 가장 완벽하게 이해했다는 인물이 아닌가. 그런데 불경을 읽고 있었다는 것이다. 정몽주뿐만 아니라
다른 신흥사대부들 역시 불교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지 못하고 있었다. 신라 이래 1000년 동안 인간의 심성을 지배하던 불교가 어떻게 그렇게
쉽사리 사라질 것인가.
정도전의 ‘서적포를 설치하는 시’는 불교의 제거를 내포하고 있다.
‘그대 보라, 저 오랑캐가 윤리를 해치는 것을/ 그들의 책이 시렁과 동량(棟樑)을 꽉 채웠네/ 저들은 성(盛)하고 우리는 쇠했다 탄식할 것
있으랴?/ 본디 우리들이 뜻이 강하지 못한 것을.’
윤리를 해치는 오랑캐란 불교다. 그가 생각한 서적포는 불교를 제거하고 성리학을 보급하는 의도를 갖는 것이었다.
자신은 뜻 못 이뤘지만 혁명 완성 발판 다진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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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관 |
●1981년 부산대 국어교육과 졸업 ●1992년 성균관대 대학원 한문학과 박사과정 졸업 문학박사 ●저서 : ‘조선후기
여항문학 연구(1997)’‘조선시대 문학예술의 생성공간(1999)’ ‘조선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나오다(2001)'’‘조선의 뒷골목
풍경(2003)’ | |
혁명가 정도전은 인간의 대뇌에서 불교를 제거하고 성리학을 설치할 것을 꿈꾸었다. 그 수단으로 빠른 시간 안에 더 많은 종수의 책을 발행할
수 있는 금속활자를 떠올렸던 것이다. 그때까지 금속활자는 주로 불경을 인쇄하고 있었으니, 정도전은 적의 무기로 적을 공략하는 전략을 선택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도전은 조선의 금속활자를 보지 못하고 죽었다. 정도전을 죽인 태종 이방원은 계미자(癸未字)를 만들었고, 세종은 그것을 개량하여
갑인자(甲寅字)를 제작해 막대한 종수의 서적을 봇물처럼 쏟아내었다. 그 책으로 성리학에 의해 사고하고 움직이는 사대부가 만들어졌고, 이들이
조선을 500년 동안 지배했다. 정도전 자신은 금속활자를 만들지 못했지만, 그의 구상은 그대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혁명은 무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도전이 생각했던 금속활자로 완성되었던 것이다. (끝)
[조선의 인물, 조선의 책|태종과
계미자] |
정적의 목 자르고, 머리는
빌리다 |
정도전 제거한 뒤 금속활자
아이디어는 수용 … 유교적 사대부 탄생의 기원 |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
hkmk@pusan.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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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헌릉(獻陵).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쌍봉릉(雙封陵)으로 왼쪽이 태종 능이다.
정도전이 만들자고 했던 서적포의 행방은 어찌 되었던가? 조선을 건국한 혁명의 실력자가 한 말이니, 공언(空言)은 아니었을 것이다.
‘고려사절요’에는 공양왕 4년(1393) 정월에 “처음 서적원(書籍院)을 설치하여 주자(鑄字)와 서적 인쇄를 관장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에는 고려의 관직에 대해 서술한 부분이 있는데 “공양왕 3년 서적점(書籍店)을 폐지하고 4년에 서적원을
두었다. 주자를 관장한다”는 기록이 있다. 서적점을 폐지하고 만든 것이 서적원이었던 것이다.
그럼 서적점이란 무엇인가? ‘고려사’에 의하면 서적점은 문종 때 처음 설치됐다. 그 뒤 충선왕 때 한림원에 합쳤다가 다시 분리됐고, 공양왕
3년에 폐지됐다가 4년에 서적원으로 부활한 것이다. 서적점과 서적원이 어떻게 다른지, 왜 바뀌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고려사’의 기록이 워낙
빈약하기 때문이다.
1392년 1월 서적원이 설치되고, 6개월 뒤인 7월에 조선이 건국됐다. 1392년 1월은 고려에 속하지만, 국가의 권력은 이미
혁명세력에게 넘어간 시기였다. 1392년 7월28일, 조선으로 말하자면 태조 원년 7월28일 서적원은 조선의 관제(官制)로 그대로 이관된다.
서적포가 아닌 서적원이지만, 금속활자와 인쇄를 관장하는 정식 관청이 새 국가에 설치된 것이니, 정도전의 구상이 더욱 구체화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태종 이전에는 목활자로 책 만들어
서적원에서는 실제로 책을 찍었다. 1395년 서적원에서 찍은 책인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의 중간본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대명률직해’는 명나라의 형법인 ‘대명률’에 이두로 구결을 소상히 달아 원문의 이해를 편리하게 한 책이다. 이 책에 정도전이 관여한다.
김지(金祗)가 쓴 발문에 의하면, 원래 조준(趙浚)의 명으로 고사경(高士 )과 김지가 이두로 구결을 달자 정도전과 당성(唐誠)이 윤문을 한 뒤
서적원에 인쇄를 맡긴다.
문제는 인쇄수단이다. 발문에 의하면 백주지사 서찬(徐贊)이 조각(造刻)한 글자로 인쇄했다는 것이다. 이 활자는 금속활자가 아니라 목활자다.
목활자라니! 서적원은 주자를 관장한다 했지만, 실제 보유한 것은 목활자였던 것이다. 목활자는 활자를 제작하기 쉽고, 또 가동성(可動性)이
있지만, 견고성은 훨씬 떨어진다. 이것은 목판인쇄와 금속활자 인쇄의 중간과정이다. 아직 금속활자는 만들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금속활자의 역사에 이제 다른 한 사람이 등장한다. 태종이다. 정도전이 아니라 정도전을 죽였던 정적(政敵) 태종이 금속활자를 만들었던
것이다. 1398년 8월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두 사람은 충돌하고 정도전은 태종에 의해 제거된다. ‘태조실록’ 7년 8월26일조는
정도전의 최후를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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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헌릉의 정자각(왼쪽)과 신도비각. ② 개성의 선죽교. 태종 이방원은 조영규를
시켜 이곳에서 정몽주를 살해함으로써 정세를 급반전시켰다.
정도전은 칼을 던지고 문밖에 나와 말했다.
“제발 죽이지 마시오. 한 마디만 하고 죽겠습니다.”
소근(小斤) 등이 끌어내어 정안군(靖安君, 太宗)의 말 앞으로 갔다. 그리고 정도전이 다시 말했다.
“예전에 공이 나를 살린 적이 있었으니, 이번에도 살려주소서.”
정안군이 대답했다.
“네가 조선의 봉화백(奉化伯)이 되었음에도 만족하지 못한단 말이냐? 어떻게 이다지도 악한 짓을 한단 말이냐?”
이어 그의 목을 치게 했다.
정도전이 말한 ‘예전’은 태조 원년인 1392년을 뜻한다. 이해 3월 이성계가 낙마(落馬)로 중상을 입자 정몽주는 김진양(金震陽),
서견(徐甄) 등으로 하여금 공양왕에게 상소를 올리게 해 이성계의 제거를 시도한다. 그리고 혁명파의 전위였던 정도전을 보주(甫州, 醴泉)로 귀양
보낸다. 혁명파의 위기를 타개한 것은 이방원, 곧 태종이었다. 이방원은 조영규(趙英珪)를 시켜 정몽주를 타살함으로써 일거에 대세를 만회한다.
정도전은 귀양에서 돌아와 공양왕을 폐위하고 이성계를 왕위에 올린다. 정도전이 예전에 나를 살려주었다고 한 말은 바로 1392년 이방원의 활약을
가리킨다.
태종이 정몽주 세력을 제거함으로써 정도전은 혁명의 주역으로 복귀하지만, 그가 태종과 갈라선 것도 이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기세등등한
혁명의 실세 태종에게 정도전이 호의를 가졌을 리 만무하다. 그는 태조의 계비였던 강비(康妃)와 함께 태종을 경원시해 태종을 개국공신과 세자
책봉에서 탈락시킨다. 거기에 더해 정도전은 1398년 요동 정벌을 추진하면서 사병(私兵)을 혁파하려 했다. 태종의 사병도 물론 그 대상이 됐다.
두 사람은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던 바, 그것이 바로 제1차 왕자의 난이었던 것이다.
‘양촌집’에 주자소 관련 내용 상세히 담겨
위에서 인용한 ‘태조실록’은 정도전이 태종에게 목숨을 구걸한 것으로 그리고 있지만, 그것이 사실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므로. 어쨌거나 나는 어느 쪽도 옹호할 생각이 없다. 권력투쟁은 부모 형제도, 자식도 없는 비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태종은 아버지 이성계가
살아 있을 때 형제 방석(芳碩), 방간(芳幹)을 죽였다. 그뿐인가. 태종의 손자 세조는 왕위에 오르기 위해 형제와 조카를 살육하지 않았던가.
정도전을 죽이고 2년 뒤인 1400년 10월 태종은 왕이 됐다. 그리고 3년 뒤인 1403년 2월 주자소(鑄字所)를 설치했다. 서적원이
과업으로 내걸었던 금속활자의 제작, 곧 ‘주자’를 전면에 내세우는 관청이 설립된 것이다. 그리고 서적원이란 이름은 태조 원년인 1392년
7월28일 ‘실록’에 한 번 이름을 보이고는 공식 기록에서 사라져버린다. 정도전의 제거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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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미자로 찍은 각종 서적.
‘태종실록’ 3년 2월13일조는 새로 주자소를 설치한 사실을 알리고 있는데 그 이유로 임금이 서적이 적어 유생들이 널리 볼 수 없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라 밝히고 있다. 그리고 예문관 대제학 이직(李稷), 총제 민무질(閔無疾), 지신사 박석명(朴錫命), 우대언 이응(李膺) 등에게
일을 맡겼다. 한데 이 중요한 사건에 대한 ‘실록’의 기록은 너무 소략하다. 권근(權近)의 문집 ‘양촌집(陽村集)’에 도리어 풍부한 자료가
있다. 권근은 주자소의 활자 제작을 기념해 ‘주자발(鑄字跋)’이란 글을 쓴다. 첫머리는 이러하다.
[ 영락(永樂) 원년(태종 3, 1403) 봄 2월 전하께서 좌우 신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대저 나라를 다스리고자 한다면, 반드시 전적(典籍)을 널리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뒤에야 이치를 캐보고 마음을 바로잡아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결과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동방은 해외(海外)에 있어 중국의 서적이 드물게
전해지고, 판각(板刻)한 책은 쉽게 훼손된다. 게다가 천하의 책들을 판각으로는 다 출판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내가 구리를 녹여 활자를 만들고
책을 얻으면 얻는 족족 반드시 인쇄하여 책을 널리 보급하고자 하니, 정말 무궁한 이익이 될 것이다. 이 사업에 드는 비용을 백성에게서 거두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내가 종친·훈신들 중에서 뜻이 있는 사람과 같이 그 비용을 댄다면, 아마도 성공할 수 있으리라.” ]
목판인쇄보다 금속활자가 마모성이 없어 빠른 시간 안에 더욱 많은 종수의 책을 인쇄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책이야말로 유교의 정치이념을
담보할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는 논리, 이것은 어디서 들어본 소리가 아닌가. 태종은 자신의 정적 정도전의 생각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활자를 처음 제작하는 데 막대한 비용이 들었음을 물론이다. ‘주자발’에 의하면 태종은 자신의 개인 주머니, 즉 내탕고를 털었다고 한다.
정도전은 ‘치서적포시(置書籍鋪詩)’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비용을 댈 것을 권유했지만, 정작 비용을 내어 활자를 만든 사람은 자신의 목을 자른
태종이었던 것이다.
태종이 주자소를 설치하라 명령한 그 달 19일부터 ‘시경’ ‘서경’ ‘좌전(左傳)’의 글자를 본으로 삼아 몇 달 안에 수십 만 자의 활자를
제작했다. 권근의 ‘주자발’이 11월1일 쓰여진 것으로 보아 9개월 만에 활자가 완성되었던 것이다.
이 활자를 학계에서는 계미(癸未)에 만들어진 활자라 해서 계미자라 부른다. 계미자로 ‘대학연의(大學衍義)’‘십칠사(十七史)’ 등의 책이
인쇄됐다. ‘주자발’을 썼던 권근 역시 자신의 저술 ‘예경천견록’을 주자소에서 인쇄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계미자는 실제로 책을 토해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훗날 신권 강화의 시초 평가 ‘역사의 아이러니’
드디어 ‘태종실록’ 10년 2월7일 단 1줄의 글! “비로소 주자소에 명하여 서적을 인쇄해 팔게 했다.” 주자소에서 어떻게 서적을
판매했는지는 밝혀진 바 없지만, 어쨌든 이 활자가 사대부를 향한 지식의 보급을 겨냥했음을 명백히 보여주는 자료다. 나는 주자소에서 책을 인쇄해
팔라는 이 명령으로부터 조선이란 국가가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발명과 다름없는 일대 문화적
사건이었던 것이다. 시작이 어려웠지 이후 주자소의 활자는 개량에 개량을 거듭하면서 책을 쏟아냈다. 또 주자소에서 찍는 책이란 유교국가 조선의
지배층인 양반을 만들어내는 책이었다. 유교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는 책들은 60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한반도에 사는 인간들의 사고와 행동을
결정지었던 것이다.
금속활자로 책을 찍자는 것은 정도전의 아이디어였다. 태종은 정도전을 죽였지만 그의 아이디어를 채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권근은
‘주자발’에서 태종에게 영광을 돌렸다.
[ 삼가 생각하옵건대, 우리 전하께옵서는 명철한 자질에 밝은 문덕(文德)을 지니시어 만기(萬機)를 다스리시는 여가에 경사(經史)에 마음을
두시어 늘 부지런히 공부하심으로써 정치의 근원을 깊이 연구하시고, 문명한 세상을 만드는 데 마음을 두시어 도덕과 교화를 널리 전파하고자 정성을
다해 이 활자를 주조하셨습니다. 이 활자로 서적을 두루 찍으면 수만 권을 인쇄할 수 있고, 만세(萬世)에까지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사려가 깊고 머시니, 그 왕교(王敎)의 전해짐과 성수(聖壽)의 영원함도 마땅히 이 책들과 아울러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더 굳어질 것입니다. ]
정도전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다.
태종은 정도전의 목을 자르고 그의 아이디어를 빌려 주자소를 만들었다. 역사학에서는 정도전이 신권(臣權)의 강화를, 태종이 왕권(王權)의
강화를 추진했다고 평가한다. 제1차 왕자의 난은 신권과 왕권의 충돌이었던 것이고, 왕권이 승리했던 것이다. 하지만 왕권의 승리는 순간이었다.
태조에서 성종에 이르는 기간까지 왕권은 때로 위세를 떨쳤지만, 연산군 이후로는 그만이었다. 신권은 왕 연산군을 축출하고 중종으로 갈아치웠다.
이후 왕권이 신권을 능가하는 일은 없었다.
신권이 승리한 기원은 언제인가? 태종이 정도전의 생각을 빌려 주자소를 만들어 책을 찍기 시작한 그 순간이 바로 기원의 시간이었다. 태종이
금속활자로 찍어낸 그 책은 바로 유교적 정치이념으로 의식화된 사대부를 탄생시켰던 것이다. 그 이념이란 국가는 왕의 의지가 아닌 사대부의 의지에
의해 지배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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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인물, 조선의 책|타고난 독서가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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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먹을 때도, 아플 때도
‘언제나 책 곁에’ |
신하들이 몸 걱정하며 독서
만류했을 정도 … 과학·문학·농학·음악까지 방대한 지식 쌓아 |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 hkmk@pu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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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기념관에
전시 중인 세종대왕 어진(御眞, 아래)과 왕자시절의 독서도.
조선은 왕국이다. 내가 시방 조선시대에 살고 있다고 하자. 상것 혹은 노비인 나에게 왕이란 무엇인가. 세금이라는 명목으로 나의 수확물과
노동력을 탈취하지만, 왕은 나에게 무엇을 해준단 말인가. 왕의 얼굴을 본 적도 없고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라,
전근대사회에서의 왕이란 냉정하게 말해 이유 없는 수탈의 거룩한 이름일 뿐이다. 그럼에도 왕에 대한 침착한 평가는 없다. 과거 지배자에 대한
평가의 부재가 오늘날 정치인들에 대한 엄정한 평가의 부재를 낳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왕의 소업(所業)은 정치다. 왕은 오로지 그 소업을 얼마나 충실히 실천했는가에 따라 평가될 뿐이다. 유교국가의 왕은 공자의 인정(仁政)과
맹자의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내건다. 인정과 왕도정치는 백성을 위한 정치다. 하지만 그것은 이상일 뿐이다. 아름답고 거룩하지만, 쉽게 현실이
되지는 않는다. 조선의 왕 가운데 단 한 사람만이 그런 이상을 실현하려 했다. 바로 세종이다. 나머지 왕들은 꿈조차 꾸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수탈자였을 뿐이다.
책 너무 많이 읽자 태종이 책 감추라고 지시
‘세종실록’ 32년 2월17일조는 세종이 영응대군(永膺大君)의 집에서 사망한 기사를 싣고 있다. 이 기사는 세종을 이렇게 평가한다.
- 예(禮)를 갖추어 신하를 부렸고, 간언(諫言)을 어기는 법이 없었으며, 사대(事大)를 정성으로 했고, 교린(交隣)을 신의 있게 하였다.
인륜에 밝았고 만사를 잘 살폈으며, 남쪽과 북녘에서 찾아와 복속하고 사방 국경이 편안하여 백성들이 삶을 즐거워한 것이 무릇 30여 년이었다.
성덕(聖德)이 높고도 높은지라 무어라 이름을 붙일 수가 없어 당시 사람들이 ‘해동(海東)의 요순(堯舜)’이라 불렀다. -
왕이 죽으면 사관은 상투적 미사여구로 그의 생애를 찬양한다. 세종에 대한 이 찬양 역시 같은 것일까. 아닐 것이다. 세종의 집권기는
조선왕조 500년 동안 가장 번성하고 안정된 시대였다. 아버지 태종의 힘으로 왕권은 확고했고, 뒷날의 당쟁과 같은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도
없었다. 명(明)과의 관계도 순조로웠으며 조선 조정에는 야인(野人, 여진족)과 일본, 그리고 유구(琉球, 현재의 일본 오키나와제도에 존재했던
국가) 등이 내조(來朝)했다. 야인과 대마도를 정벌할 만큼 무력도 있었다. 시대는 새로운 문화를 건설하는 활기에 넘쳤고, 백성들의 생활도 안정돼
있었던 것이다. 그를 ‘해동의 요순’이라 일컫는 것은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
과연 무엇이 세종을 성군(聖君)으로 만들었던가. 기사를 좀더 읽어보자.
- 왕위에 오르자 사경이면 옷을 입고 날이 훤히 밝으면 조회를 받았으며 그 다음 정무(政務)를 보았다. 이어 윤대(輪對)를 행하고,
경연(經筵)에 나아갔는데, 한 번도 게으른 적이 없었다. -
사경은 밤 1시에서 3시 사이다. 새벽이 아니라 한밤중이다. 한밤중에 일어나 날이 밝을 때까지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 등 하루 일과를
준비했다. 동이 트면 신하들의 출근 인사를 받고 중요한 정무를 처리한다. 이어 각 관청의 관원들이 돌아가면서 올리는 보고(輪對)를 받은 뒤
경연에 나아간다. 경연은 신하들과 경전과 역사를 읽으면서 정치를 논하는 자리다. 바쁜 일과다. 이런 일과에서 나태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니 세종은
어지간히 성실하고 부지런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 스스로 “손을 거두고 한가롭게 앉아 있을 때는 없다”(‘세종실록’ 5년 12월23일)고 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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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의 각종 유물ㆍ유적을 보관ㆍ전시 중인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의 세종대왕 기념관 전경과 세종성왕
기념탑.
이 부지런함 중에서 더욱 특별한 부지런함이 있다. 위 기사의 서두를 읽어본다.
-상(上, 세종)은 총명하고 슬기롭고 어질고 효성스럽고 결단력이 있었다. 즉위하기 전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여 싫은 줄을 몰랐으며, 손에서
책이 떠난 적이 없었다. 한번은 여러 달 몸이 편치 않았으나 독서를 멈추지 않았다. 태종께서 걱정하시어 책을 거두어 감추게 하였는데, 그래도 책
한 권이 남아 있는지라 그 책을 날마다 쉬지 않고 읽고 외우니 본디 타고나신 성품이 그와 같았던 것이다. -
여러 달 병을 앓는 중에도 독서만은 그만두지 않았다 하니, 아버지 태종이 책을 거두어 감춘 것도 이해가 간다. 한데 어쩌다 남은 책 한
권(다른 기록에 의하면 구양수와 소동파의 편지글을 모은 ‘구소수간(歐蘇手簡)’이란 책이다)을 읽고 외었다 하니, 그는 타고난 독서가(讀書家)임이
분명하다.
독서 때문에 눈병 걸리고도 책 읽기 계속
오로지 책에 몰입한 독서가 세종은 “즉위하고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아 수라를 들 때에도 반드시 책을 좌우에 펼쳐놓았고, 한밤중까지 책에
빠져 도무지 싫은 기색이 없었다”(‘세종실록’ 5년 12월23일)고 한다. 밥을 먹을 때도 밥상 좌우에 책을 펼쳐놓고 읽었다고 하니, 독서광도
이런 독서광이 없다. 오죽했으면 태종이 “과거를 준비하는 선비는 그럴 수 있지만, 임금이 되어 어찌 이토록 고생스레 책을 읽는단 말이냐?” 하고
거듭 책 읽기를 금지했을까?(‘세종실록’ 3년 11월7일) 하지만 태종의 충고도 금지도 소용없었음은 물론이다. 독서가에게 책은 마약보다 더한
중독성이 있다. 책에 굶주려본 사람은 세종의 심정을 알 것이다.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이고, 사대부들은 내심 임금의 스승을 자처한다. 당신은 권력을 쥐고 있지만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은 우리에게 배워야
한다는 것이 사대부들의 생각이었다. 임금을 공부하게 하는 곳, 사대부가 임금을 가르치는 곳이 바로 경연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을 훑어보면 임금은 경연을 빼먹고, 신하는 임금에게 경연에 나오라고 강권하는 풍경이 흔히 보인다. 자발적으로 경연에 몰두한
왕은 드물다. 하지만 세종은 예외다. 그는 즉위 초부터 경연에 부지런했다. 즉위한 지 1년이 지나 경연에서 ‘대학연의(大學衍義)’의 강론을
끝내자 그는 “읽기는 다 읽었으나, 또 읽고 싶다”고 했다(‘세종실록’ 1년 3월6일). 이 지루한 책을 다시 읽고 싶다니! 이 발언은 오직
세종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세종의 책 읽기는 어딘가 과도하게 여겨진다. 그 과도함은 마침내 신체에 이상을 일으킨다. 세종은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의 편찬을
대제학 윤회(尹淮) 등에게 명하고 그 원고를 날마다 가져오게 하여 자신이 직접 교정을 보았다. 그는 어느 날 윤회에게 이렇게 말한다.
- “근래 이 책을 읽고 책 읽는 것이 유익한 것인 줄 더욱 알게 됐다. 날마다 더욱더 총명해지고 잠이 아주 줄어들었다.” -
이 지독한 독서가는 한밤중까지 책을 읽고는 독서의 유익함을 절실히 깨달았다고 한다. 거기다 또 잠이 줄어들며 머리가 더욱더 총명해졌다고
한다. 제왕이 학문을 도외시해도 문제가 되지만, 세종처럼 잠을 줄여가면서 학문에 몰두해도 문제가 된다. 윤회 등은 걱정이 됐다.
- “밤에 잔글씨를 보시고 눈병이 나실까 걱정이 됩니다.”
“경들의 말이 옳소. 내 조금 쉬리다.”(‘세종실록’ 16년 12월11일) -
하지만 말뿐이고 세종은 쉬지 않았다. 윤회의 걱정처럼 눈에 병이 났고, 그 눈병은 당뇨병과 등의 부종(浮腫), 임질 등과 함께 말년의 그를
괴롭혔다. 급기야 즉위 24년에는 눈병의 고통이 너무 심해 세자에게 정무를 맡기고 싶다는 말을 내뱉을 정도였다. 이때 자신의 눈병이 10년 묵은
병이라 말하고 있으니, 거슬러 올라가면 윤회가 눈병이 날까 두렵다면서 쉴 것을 권한 것이 거의 10년 전이었다. 눈병은 이미 그때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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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현전 학사들의 연구와 토론 장면을 그린 ‘집현전 학사도’.
눈병을 초래할 정도로 읽어댄 이 독서왕의 지식은 참으로 넓고 깊었다. 세종은 알려진 바와 같이 문학과 역사, 유학은 물론이고 언어학,
음악학, 천문학, 농학, 기계학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높은 수준의 지식을 쌓고 있었다. 조선 후기가 되면 극소수 일부 양반을 제외하고는 오직
중인들의 학문이 되었던 수학 역시 그의 관심 대상이었다. 그는 수학책 ‘계몽산(啓蒙算)’을 공부했고 정인지(鄭麟趾)는 질문에 대비하여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세종은 이렇게 말했다.
“산수(算數)는 임금에게는 필요가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성인께서 제정한 것이기에 나는 알고 싶다.”(‘세종실록’ 12년 10월23일)
제왕의 수학공부라! 국가 재정을 파악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해해주고 싶지만, 사실은 그의 수학공부는 마르지 않는 지식욕 때문이었을 것이다.
수학·중국어 등 분야 구분 없이 읽어
이뿐이 아니다. 세종은 중국어를 배우는 데도 열심이었다. 그는 주자소(鑄字所)에서 중국어로 번역한 책을 인쇄하게 하고, 중국어에 능한
신하에게 읽게 했다. 신하가 읽는 중국어를 한 번 듣고 완전히 기억하고는 “내가 중국어로 번역한 책을 배우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명나라 사신과 만났을 때 중국어를 알면 대답할 말을 빨리 생각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고 했다(‘세종실록’ 5년 12월23일). 또 중국과의
외교에 필요한 중국어의 습득을 위해 베이징(北京)과 랴오둥(遼東)의 학교에 젊은이들을 유학시키려 했다. 중국의 거절로 없던 일이 됐지만, 의주의
젊은이들에게 랴오둥으로 오가는 기회를 자주 주어 중국어를 익히게 하자고 아이디어를 냈으니, 이 젊은 왕의 생각은 정말 크고도 넓었던
것이다.(‘세종실록’ 15년 12월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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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23년(1441) 세계 최초로 발명된 측우기.
다시 글의 첫머리에 인용했던, 세종이 죽던 날의 ‘실록’을 보자.
- 또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고, 문사(文士)를 선발해서 고문(顧問)에 대비하게 하였고, 경전과 역사책을 읽을 때면 즐거운 나머지 싫은
줄을 몰랐다. 희귀한 서적과 옛사람의 글을 한 번 보면 잊지 아니하였고, 거기서 증빙할 근거와 원용할 자료를 찾아내어 훌륭한 정치를 하고자 하는
데 정신을 쏟는 것이 시종여일했다. 그 결과 문(文)·무(武)의 정치가 모두 잘 이루어졌고, 예(禮)·악(樂)의 문화가 함께 일어났다.
종률(鍾律)과 역상(曆象)의 법은 우리 동방에서는 예전에는 알지 못하던 것으로, 모두 상(上)께서 직접 발명한 것이다.(‘세종실록’ 32년
2월17일) -
주지하다시피 조선의 문화란 모두 세종 때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 문화의 대부분은 세종의 두뇌에서 나왔다. 세종은 조선의 법과 제도,
문화를 창조했다. 나는 세종의 그 능력은 타고난 두뇌와 성실성에도 있겠지만, 절대 다수는 그의 쉼 없는 독서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쉼 없는
독서로 축적된 그의 굉박(宏博) 정심(精深)한 지식이 바로 조선의 법과 제도, 문화를 창조해낸 근거였다. 아마도 세종처럼 독서에 몰두했던 왕은
18세기 후반의 정조(正祖)밖에 없으리라. 하지만 정조는 사대부의 권력이 더할 수 없이 커져버린 18세기 후반에 임금이 됐다. 그에 비해 확고한
왕권 위에서 문화 창조를 주도했던 세종은 얼마나 행복했던가.
세종은 유교가 내세운 이상적인 정치에 가까이 가려고 노력했던 사람이다. 나는 세종을 민족주의 코드로 읽기 전에 굉박한 독서인과 자신의
소업에 충실했던 한 인간으로 보고 싶다. 지금 이 세상에는 정녕 세종과 같은 정치인은
없는가. (끝) | |
[조선의 인물, 조선의 책|세종과
금속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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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 개량 통해 책
대량생산 시대 ‘활짝’ |
즉위 후 첫 정책사업으로
추진 … 하루 인쇄량 10장 미만에서 40장으로 급격히 늘어 |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
hkmk@pusan.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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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기념관에 전시 중인 주자소도(鑄字所圖).
책에 몰입했던 세종은 단순히 책을 좋아하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군주였다. 서적에 관한 정책을 세우고 집행할 수 있는 권력을 갖고
있었다. 그는 군주의 권력을 이용해 책을 생산했다. 왕위에 오른 뒤 그가 처음 했던 일은 금속활자의 개량이었다.
신하들 “어렵다”고 해도 거듭 개량 명령
태종의 의지에 따라 만들어진 계미자로 책을 찍어내기는 했지만 계미자는 몇 가지 약점이 있었다. 활자 모양이 그리 아름답지 않았고, 활자
크기도 들쑥날쑥했다. 무엇보다 큰 약점은 느린 인쇄 속도였다. 조선시대의 활자 인쇄는 조판틀에 활자를 배열한 뒤 활자판에 먹을 바르고 종이를
뒤집어 찍어내는 과정으로 이뤄졌다. 한데 활자를 배열하는 기술에 문제가 있었다. 구리로 만든 조판틀에 활자를 배열하고 인쇄할 때 활자가 움직이면
인쇄가 어려워진다. 따라서 활자가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시키는 방법이 필요한데 계미자의 경우 그렇지가 못했다. 계미자는 밀랍을 녹여 붓고 거기에
활자를 심어 고정시켰던 것이다. 밀랍은 간단히 말해 ‘양초’ 성분 물질이라 생각하면 된다. 녹이기는 쉽지만, 무르고 열에 약하다. 밀랍에 의해
고정된 활자는 쉽게 흔들린다. 인쇄를 몇 장 하고 나면 활자가 삐뚤삐뚤해진다. 다시 고정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 같은 밀랍 고정방식 때문에
계미자로는 하루에 10장도 인쇄할 수가 없었다. 목판인쇄보다 나을 것이 전혀 없었다.
이쯤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고려가 강화도로 피난했을 때 금속활자로 ‘고금상정예문(古今詳定禮文)’을 인쇄한 이후 밀랍 고정방식은 한
번도 개량된 적이 없었단 말인가? 이것은 고려의 금속활자 인쇄 목적이 대량의 인쇄물을 빠른 시간 안에 얻는 데 있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조선은 더욱 많은 서적을 필요로 했다. 이 때문에 마침내 활자와 인쇄방법의 개량이 시도된다. 이때의 정황이 ‘세종실록’ 16년
7월2일조에 소상히 기록돼 있다. 세종은 이날 이천(李천)을 불러 새 활자의 주조를 명하면서 과거 한 차례 있었던 활자와 조판술의 개량을
회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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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활자가 배열된 조판틀.
- 태종께서 처음으로 주자소(鑄字所)를 두시고 큰 활자를 주조할 때 조정 신하들이 모두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지만, 태종께서 우겨 만들게
하시고, 그것으로 많은 책을 인쇄해 중외(中外)에 널리 보급했으니, 또한 위대한 일이었다. 다만 일을 처음 시작한 탓에 제조방법이 정밀하지
않았다. 예컨대 책을 찍을 때 반드시 먼저 조판틀에 밀랍을 편 다음 그 위에 활자를 심었다. 그런데 밀랍의 성질이 원래 물렁해 꽂은 활자가
고정되지 아니하므로, 몇 장을 인쇄하면 활자가 움직여 한쪽으로 쏠리는 탓에 또다시 바로잡아줘야 했기에 인쇄공들이 골치를 앓았다. 내가 이런
문제를 걱정하여 경에게 개량할 것을 명했으나 경은 또한 어렵게 여겼다.
내가 강요하자 경은 그제야 지혜를 짜내어 조판틀을 다시 만들고 활자를 다시 주조했던 바, 모두가 평평하고 방정(方正)하여 단단히 고정이
돼(竝皆平正牢固), 밀랍을 쓰지 않고도(不待用蠟) 많은 양을 인쇄해도(印出雖多), 활자가 한쪽으로 쏠리지 아니하므로(字不偏倚) 내가 아주
아름답게 여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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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활자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던 거푸집(가운데)과 거푸집을 통해 만들어진 금속활자(오른쪽). 금속활자로 인쇄한 서적들.
계미자의 인쇄 속도를 높이기 위해 세종이 활자의 개량을 명했던 바, 이천이 새 방법을 찾아냈던 것이다. 이 기술 개량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하다. 계미자는 원래 밀랍에 활자를 꽂기 위해 활자의 끝이 뾰족했다. 한데 위의 자료에 의하면, 새로 주조한 활자는 ‘평평하고 방정하다’.
이것은 활자의 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뒷날 성현(成俔)이 ‘용재총화( 齋叢話)’에서 이 활자에 대해 “끝이 송곳처럼 생겼으며 밀랍을 써서
고정시켰다”고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 자료의 ‘평평하고 방정하다’는 말은 활자의 끝이 평평하고 방정한 것이 아니라, 활자의 몸체
사면이 고르고 방정하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즉 활자 몸체의 사면이 정확하게 사각형을 이루고 또 매끈하게 가공됐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런 형태상의 개량으로 인해 밀랍을 붓기 전에 이미 조판틀과 활자 사이, 그리고 활자와 활자 사이의 공간이 줄어들어 더 단단히
고정됐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기술 개량에 따라 인쇄 속도가 빨라졌다. ‘세종실록’ 3년 3월24일조에 의하면 계미자의 인쇄는 하루에 몇 장(數紙)에 불과했다.
하지만 변계량(卞季良)의 ‘주자발(鑄字跋)’에 의하면 새 활자와 조판술로 인해 하루에 20장을 인쇄할 수 있었다고 하니, 대단한 기술 발전인
셈이다.
이 기술 개량은 세종이 주도했다. 앞의 인용 글에 의하면, 세종이 계미자의 인쇄 속도에 대한 폐단을 걱정해 이천에게 개량을 명하는데 이천이
난색을 표하자, 세종이 재차 강요해 마침내 기술 개량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세종실록’ 3년 3월24일조는 “임금이 직접 지휘하고 계획하여
이천과 남급(南汲)으로 하여금 구리판(조판틀)을 다시 주조해 글자의 모양과 꼭 맞게 만들게 했다”고 하고 있는 바, 활자와 조판틀을 개량하려는
생각과 개량 방법 역시 모두 세종의 의지와 아이디어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쨌든 이 개량 사업으로 주자소는 술을 무려 120병이나 하사받았다. 그만큼 활자 개량이 성공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활자의 제조는
경자년(1420) 겨울에 시작돼 임인년(1430) 겨울에 끝났다. 학계에서는 활자 주조가 시작된 연도를 따서 이 활자를 ‘경자자’라고 부른다.
목판 사용하던 중국보다 인쇄술 훨씬 앞서
활자와 인쇄술의 개량이 이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또 한 번의 중요한 개량이 있었다. 앞의 기록에서와 같이 세종(16년 7월2일)은
활자를 다시 만들 것을 지시한다. 지금 있는 활자를 녹여 큰 활자를 만들자는 것이다. 일을 맡은 사람은 집현전 직제학 김돈(金墩), 직전(直殿)
김빈(金 ), 호군 장영실(蔣英實), 첨지사역원사 이세형(李世衡), 사인(舍人) 정척(鄭陟), 주부 이순지(李純之) 등이었다. 그리고
‘효순사실(孝順事實)’, ‘위선음즐(爲善陰 )’, ‘논어(論語)’ 등의 자형(字形)을 땄다.
활자는 불과 2개월 만에 완성됐으니, 앞서 경자자가 2년에 걸쳐 만들어진 데에 비하면 대단히 빠른 것이었다. 그만큼 활자 주조의 기술이
축적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활자는 갑인년에 만들어져 갑인자라고 불린다. 갑인자는 큰 활자를 찍기 위해 만든 것이지만, 사실 그 가치는 활자의
크기보다 다른 데 있었다. 즉 갑인자부터 활자가 완전히 고정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성현의 ‘용재총화’에 의하면 갑인자부터 밀랍 고정방식을 버리고
대나무로 활자와 조판틀, 그리고 활자와 활자 사이의 공간을 메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활자는 움직이지 않게 됐고 인쇄 속도는 엄청나게
빨라졌다. ‘실록’에 의하면 하루에 40여 장을 인쇄할 수 있었다고 하니, 이건 대단한 진보다. 즉 계미자는 하루에 10장 미만이었고 경자자는
20장, 갑인자는 40장이었으니 속도가 무려 6, 7배나 빨라졌던 것이다. 게다가 갑인자는 글씨체가 완정(完整)하고 아름다워 이후 조선 후기까지
여러 차례 다시 만들어진다. 조선의 대표 활자인 셈이다.
세종은 이후에도 활자 개량에 깊은 관심을 쏟았다. 세종은 즉위 17년 8월24일 중국에 사신을 보내면서 중국의 금속활자 인쇄술에 대해
물어보게 한다. 12월13일 돌아온 사신단은, 중국은 옛날에는 동활자를 사용했으나 목판과 다를 것이 없고 비용은 더 많이 들기 때문에 근래에는
모두 목판을 사용한다는 답을 들었다고 보고했다. 이 시기 동아시아 삼국 중 일본은 금속활자 인쇄 자체를 아예 몰랐고, 중국은 금속활자 인쇄술을
알기는 했지만 다시 목판으로 회귀했으니 금속활자 인쇄술에 대해서는 조선이 최고 수준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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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활자 보급 이전에 주로 사용된 목활자.
세종의 금속활자는 책을 쏟아냈다. 그때 찍어낸 방대한 책의 목록은 지금도 우리를 경악하게 한다. 그뿐이랴,
금속활자가 일단 인쇄본을 만들어내면 그 인쇄본은 지방으로 전해지고, 지방에서는 그 인쇄본을 저본(底本)으로 목판을 새겨 다시 책을
인쇄해냈다. 그 결과 책 생산은 증가했고, 그 책을 읽은 사대부층이 단단히 형성됐으며, 조선은 문화적으로 성숙해졌던 것이다. 세종의 인쇄기술
개량은 실로 조선이란 국가를 공고히 한 일대 사건이었다.
하지만 인쇄술의 발전은 세종조가 처음이자 끝이었다. 갑인자 이후 세조에서 성종에 이르는 기간에 필요에 따라 다양한 금속활자들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갑인자의 수준을 넘을 수 없었다. 조판술과 인쇄기술 역시 조선조 말까지 동일했다. 세종이 창안했던 조판술은 정조(正祖) 때도 바뀐
바 없었다. 활자를 활자틀에 심고 먹을 칠하고 솜뭉치로 두드려 한 장 한 장 떼어내서 책을 묶는 방식은 조선조가 종언을 고할 때까지 조금도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
책 보급은 백성 아닌 사대부 위한 것
이뿐만이 아니었다. 활자는 모두 한자(漢字)였다. 물론 훈민정음이 창제된 뒤 만든 금속활자에는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이나
‘월인석보(月印釋譜)’를 찍은 한글 활자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이 활자는 갑인자가 그랬던 것처럼 수십 수백 종의 책을, 다시
말해 애당초 수십 수백 종의 국문서적을 인쇄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 활자는 ‘월인석보’라는 특정한 책을 인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일 뿐이었다. 이 활자가 널리 활용돼 국문서적을 쏟아내는 경우는 없었던 것이다. 훈민정음은 백성을 위해 만든 문자가 분명하지만, 세종의
머릿속에는 한글 활자를 만들어 백성들이 읽을 독서물(讀書物)을 만든다는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왜인가?
무엇보다 지배층의 머릿속에 ‘백성과 독서물’이란 관계, 즉 ‘책을 읽는 행위’와 ‘책을 읽는 백성’을 연결하는 상상력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세종조부터 본격적으로 가동된 금속활자 인쇄술은 구텐베르크의 활자가 궁극적으로 독서 대중을 만들어낸 것과 달리 오로지
사대부의 탄생에만 기여했을 뿐이다. 흔히 한국의 금속활자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보다 몇 년을 앞섰다고 자랑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활자 제작에만
초점을 맞춘 것일 뿐이다. 금속활자 외에 책을 조판하고 인쇄하는 기술, 그리고 활자가 표음문자인가, 표의문자인가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요컨대 조선의 금속활자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는 제작 배경이 전혀 달랐던 것이니, 비교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공연히 구텐베르크의 활자보다 몇
년을 앞섰다고 떠들 필요가 없다.
조선시대의 한자 활자는 20만 자 내외로 주조됐다. 적으면 10만 자, 많으면 30만 자였다. 이런 규모의 금속활자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은
국가밖에 없었다. 민간의 누구도 감히 20만 자의 활자를 만들어 책을 찍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조선 후기에 민간에서 만든 금속활자가 몇 종
있기는 했지만, 그것 역시 국가의 금속활자와 똑같은 기능을 했을 뿐이다. 오로지 사대부들에게 필요한 소수의 책을 찍었을 뿐이었다.
요컨대 조선의 금속활자도 혁명은 혁명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중세를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중세의 지배층을 탄생시키고 공고히 하는 혁명이었을
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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