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4. 17. 큐티
레위기 3:1 ~ 11
화목제 (1) - 소와 양으로 드리는 경우
관찰 :
1) 소로 드리는 화목제에 대하여
- 1절. “사람이 만일 화목제의 제물을 예물로 드리되 소로 드리려면 수컷이나 암컷이나 흠 없는 것으로 여호와 앞에 드릴지니” => 화목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제사입니다. 그 화목을 위해서는 댓가가 지불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화목은 희생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며 구체적인 행동이 뒤따른 것이었습니다. 죄인된 인간이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고자 할 때도 구체적으로 행동이 뒤따르는 화목이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고 고백했습니다. 그렇게 사도 바울이 고백한 까닭은 하나님과의 화목이 구체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고, 그것을 기뻐했던 것입니다. 샬롬은 단순히 육체의 건강이나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것에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샬롬은 괴로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모습을 갖게 하는 실제적인 힘을 의미합니다. 번제를 드릴 때는 소나 양이나 오직 수컷으로만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화목제에는 제물이 소든 양이든 암수의 구별없이 흠 없는 것이면 무엇이나 드릴 수 있었습니다. 또한 화목제는 화목제를 드리기를 원하는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때에 드리는 자발적인 제사였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제사장이 제물의 가죽만을 취하고 나머지는 모두 불사르게 했던 번제와는 달리 화목제에 드려졌던 희생 제물의 고기는 모두 함께 나누어 먹었다는 것입니다. 즉 제물의 가슴과 우현 뒷다리는 제사장과 그의 가족들이 먹었고, 그 나머지 부분은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먹을 수 있었습니다. 이는 화목제가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 공동체가 서로 화합을 다짐하면서 드린 제사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한 화목제에는 규모가 작은 새를 드리는 규정이 없습니다. 그것은 화목제의 제물로 받아들여진 짐승은 서로 나누어 먹을 만큼 큰 것이어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의 상황에서 일상의 삶 속에서 고기를 먹는 것은 귀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기에 화목제를 드리고 남은 고기를 나누어 먹는 행위를 통해 사람들은 서로 간에 친교를 나눌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을 확인하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즐거워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일을 보다 쉽게 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화목제의 제물에는 암수의 구별을 두지 않는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 2절. “그 예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회막 문에서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 화목제에서의 예물의 머리에 안수하는 것은 예배자의 힘으로 이룰 수 없는 화목의 역할을 예물에게 맡기는 행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죄를 지은 인간이 하나님과 화목을 이룰 수 없기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화목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 3절. “그는 또 그 화목제의 제물 중에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 하나님께 드리는 대부분의 희생제물은 화제로 드려졌습니다. 왜냐하면 예물을 태울 때 피어나는 그 연기에 각각의 예물이 가지는 독특한 의미들을 실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향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4장 이후에 나오는 속죄제와 속건제에서는 예외가 됩니다. 이 예물들은 태워드리기는 했지만 화제라고 불리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예물들이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기 위한 목적보다는 사적으로 태워진다는 차이점을 지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번제를 드릴 때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제물의 모든 부분이 하나님께 드려졌습니다. 하지만 화목제에서는 희생 제물에서 하나님께 드릴 것을 구별하여 화제로 드리고 난 후에 나머지 부분을 사람들이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화목제라 하더라도 하나님께 바칠 부분을 미리 분리하는 것을 통해서 우선순위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명백하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 4절.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낼 것이요” => 히브리인들은 인간의 감정이나 생각이 ‘내장’과 ‘콩팥’과 ‘간’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두 콩팥을 드리라고 한 것은 예배자의 감정과 생각을 함께 드리라는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화목제는 맹세를 하거나 혹은 하나님의 구원과 그분의 긍휼하심을 찬양할 때 예배자의 감정이 자발적으로 우러나와서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감정이 머물러 있다고 생각되었던 내장과 콩팥이 특별히 구분되어 화제로 드려진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가 자발적으로 그 마음과 생각을 주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과의 진정한 화목이 이루어지는 것임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 5절. “아론의 자손은 그것을 제단 위의 불 위에 있는 나무 위의 번제물 위에서 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 이 번제물은 매일 아침 저녁으로 드려야 하는 의무제인 상번제 때 드려진 제물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어떤 사람이 화목제를 드리려고 할 때는 이미 단 위에 그 날 아침에 드려진 번제물이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상번제는 모든 것을 다 바치는 ‘헌신’을 상징하지만, 화목제는 ‘기쁨과 마음을 나누는 것’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상번제를 바친 뒤에 화목제를 바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헌신이 있었기에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함과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2) 양으로 드리는 화목제에 대하여
- 6절. “만일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는 화목제의 제물이 양이면 수컷이나 암컷이나 흠 없는 것으로 드릴지며” => 하나님은 모세에게 화목제로 드리는 제물로서 소보다 작은 짐승인 양의 경우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것 역시 수컷이나 암컷의 구분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흠 없는 것을 하나님께 드릴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 7절. “만일 그의 예물로 드리는 것이 어린 양이면 그것을 여호와 앞으로 끌어다가” => 히브리어 원어상으로는 “어린 양”이 모든 양을 가리키는 포괄적인 용어였습니다. 팔레스타인의 양들은 일반적으로 넓고 긴 꼬리를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기름을 취하는 것은 염소와 같았지만, 기름진 꼬리를 취하는 것은 양에게만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 8절. “그 예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회막 앞에서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은 그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 제물을 잡는 장소를 여기서는 “회막 앞에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소를 잡을 때는 “회막 문에서” 할 것을 말씀하신 것과는 다른 표현입니다. 제물을 죽이는 곳이 여러 곳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모든 제물은 번제단의 북편에서 잡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곳을 “회막 앞에서”라고 표현한 것은 “회막의 얼굴 앞에서”라는 의미로, 제물로 바쳐진 짐승을 잡을 때 예물을 죽이는 생생한 장면을 하나님께서 친히 회막 앞에서 지켜보신다는 생동감 넘치는 표현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제물을 태워드릴 때만 나타나서 이를 흠향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바칠 예물을 준비하는 과정도 세밀히 살피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 9절 ~ 10절. “그는 그 화목제의 제물 중에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그 기름 곧 미골에서 벤 기름진 꼬리와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낼 것이요” => 광야에서의 때 뿐만이 아니라 고대 근동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짐승의 고기에서 나오는 기름을 매우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렇기에 보이지 않는 내장에 붙은 기름에 대해서는 욕심을 가지지 않을 수 있었을지라도 탐스럽 게 흔들거리는 양의 기름진 큰 꼬리를 보았을 때에는 그것까지 태워버리는 것이 아깝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 기름 곧 미골에서 벤 기름진 꼬리”란 말을 제물로 바쳐지는 양의 다양한 기름진 부위를 나열하는 가운데 가장 첫 번째로 언급하심으로써 그것 역시 아끼지 말고 반드시 당신께 바쳐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화목 제물로 바쳐지는 양의 기름에 대해 언급할 때 “그 기름”이라고 대표적으로 언급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9절 하반절과 제 10절에서 기름의 세 부적인 부위 까지 언급해 주고 있는 것은 “기름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해 매우 세심하고 구체적으로 구별해 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 11절. “제사장은 그것을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로 여호와께 드리는 음식이니라” => 고대 근동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신들이 사람들이 바친 제물을 받아먹고 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본절 “여호와께 드리는 음식”이라는 표현은 여호와께서 드시는 음식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여호와를 위하여 바쳐지는 음식”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다른 것입니다. 즉 “여호와를 위해 사람들이 희생시킨 음식”이란 뜻으로 화목제의 대상이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화목제물은 하나님께 태워드린 것 외에는 사람들이 나눠 먹음으로 사람을 위한 제물로서의 성격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2차적인 목적이고, 가장 중요한 것이 먼저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전제되는 것임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교회가 성도간의 교제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보다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진실된 교제라는 것이 분명한 것임을 화목제를 통해서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교훈입니다.
가르침 :
1) 화목제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기쁨으로 드려지는 제사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뻐받으시는 제사가 되고, 그로 인하여 제사를 드리는 이들이 제사장과 함께 제물을 먹으며 기쁨을 나누는 제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언제나 우선순위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입니다. 사람과의 친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우선이 되지 않는 화목제는 그 목적을 상실한 것이 되었습니다.
2)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감격하여 자발적으로 화목제의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과 사람들과 함께 그 기쁨을 나누고자 하는 화목제의 정신이 오늘날 드려지는 예배에도 함께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드려져야 할 것들이 우선순위로 드려져야 하고, 마음과 생각이 가장 핵심적으로 하나님께 드려져야 했습니다.
3) 화목을 위해서는 댓가가 치러져야 했습니다. 사실 인간이 치르는 댓가는 하나님이 치르신 댓가와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십자가에 못박으셨습니다. 이것과 비교할 수 있는 희생은 없습니다. 인간의 그 어떤 희생이나 수고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댓가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됨으로 사람들 간의 화목이 이뤄지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적용 :
1) 화목제는 예수님께서 화목제물로 드려진 것을 상징하기에 너무나 큰 은혜의 상징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다른 이들과 함께 그 기쁨을 나눌 수 있는 것이라는 것에 더욱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2) 화목제를 위한 하나님의 배려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서 그 모든 제사가 드려짐을 인해서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존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제 안의 악한 것들이 제거되고, 주님의 마음, 성령의 소욕을 품게 되기를 간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