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노음악·힙합 붐과 함께 디스크자키들이 자신만의 역동적인
리듬을 만들어내며 순회공연 등서 가수 못지 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사진]Ken Ishii
몰아치는 비바람도 토요일 밤 도쿄(東京)의 젭 클럽으로 몰려드는 수천 명의 열성 테크노 팬을 막지 못했다. 디스크자키(DJ) 돌풍의 주역 Ken Ishii(30)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무대 위에 올라서자 관중의 환호가 터져나왔다. 테크노 음악이 클럽 전체에 쩌렁쩌렁 울려퍼지는 가운데 초대형 전광판에 DJ의 이름이 새겨졌다. 녹색 티셔츠에 검은색 진 차림의 호리호리한 Ken Ishii는 턱수염을 부드럽게 쓸어내린 뒤 비트 머신·신시사이저·리믹스 기계를 작동시켰다. 그 기계들에는 LP판·컴퓨터 합성음·사람 목소리에서 따온 전자음악 샘플이 담겨 있었다. Ken Ishii는 이 짤막한 음악들을 반복하고 덧입혀 리듬감있는 사운드를 합성해냈다. 그 엄청난 사운드에 사람은 물론 젭 클럽 안의 모든 것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2천5백 명의 팬들이 모두 비트에 압도돼 무아지경에 빠진 채 광란 상태에서 춤을 췄다. 혼다 미치요(26)는 몸을 흔들면서 “많은 사운드가 동시에 느껴진다. 별천지에 온 것 같다”고 소리쳤다.
일본의 음반업계는 오랫동안 낯 간지러운 10대 취향의 가수들이 지배해왔다. 천편일률적인 일본 그룹들은 서구 시장에서 관심을 끌 정도의 개성과 독창성이 결여돼 있다. 몇 년 전 야마하와 아카이 같은 일본 회사들은 유럽과 미국의 힙합 뮤지션들에게 정교한 디지털 샘플링 기계와 턴테이블을 판매해 획기적인 음악 장르의 탄생을 도왔다. 그런 음악 장르는 서구를 휩쓸었지만 일본에서는 그리 주목을 끌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일본에서도 서구 테크노 음악과 힙합의 영향으로 DJ들이 인기 스타로 부상하면서 역동적인 첨단 클럽 문화가 형성되고 있다. 일본의 유명 DJ들은 거액의 계약금을 받고 화려한 쇼에 출연하며 순회공연 스케줄이 밀려 있고 많은 팬들이 따르는 최고 인기 연예인이 됐다. Ken Ishii의 최신곡 ‘Flatspin’은 일본 음악 차트에서 10위권 내에 진입했다. 그의 동료 테크노 DJ 그룹 Denki Groove와 일본 최고의 힙합 전사 DJ 크러시(38)가 올해 발매한 음반들 역시 같은 성과를 거뒀다. 광고회사 레오 버네트의 와타나베 히데키는 “요즘 일본에서는 DJ가 가장 큰 동경의 대상”이라고 말했다. 또 런던·베를린·뉴욕처럼 유행을 선도하는 서구 도시에서도 일본의 유명 DJ들이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들의 독창적 사운드 때문이다.
일본 DJ들은 나이트클럽 이외의 장소에서도 신비로운 존재가 되고 있다. 이 새로운 인기 스타들은 일본의 집단중심 문화에 회의를 품기 시작한 일본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의미에서의 반항심과 개성을 길러주는 본보기가 되고 있다. 젊은이들은 이제 본질적으로 다른 소리들을 취합해 우레 같은 소리를 합성해내는 방법을 가르치는 ‘DJ 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경쟁한다. 사용자의 ‘연주 수준’을 테스트하는 DJ 시뮬레이션 기계도 일본 전역에 보급돼 있다.
DJ들의 주요 ‘악기’인 턴테이블은 기타보다 잘 팔린다. 도쿄에 있는 10대들의 구역 시부야(澁谷)는 세계에서 단위 면적당 재래식 음반점이 가장 밀집된 곳이다. 그중 DJ의 음악 도구인 LP판을 판매하는 곳이 60개소가 넘는다. 일본은 지난해 미국 음반 판매량의 약 4배인 8백20만 장의 음반을 수입했다. 덕분에 도쿄는 귀한 리듬 앤드 블루스·디스코 및 힙합 음반의 세계적인 보고가 됐다. 일본 랩가수 제브라는 “원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얻을 수 있는 DJ의 디즈니랜드”라고 묘사했다. 대기업들도 DJ 열풍에 편승하기 시작했다. 각종 DJ 파티를 후원하는 하이네켄은 DJ의 미적 감각을 흉내낸 맥주 광고 포스터를 제작했다. 일본에서 독립음반 제작자로 활동중인 주디스 허드는 “DJ가 사회를 변화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해외의 유행에 따라 음반업계의 거물들이 밴드를 조직하고 길러내는 전통적 일본 대중가요와는 달리 DJ 붐은 일반인들이 주도하고 있다. DJ들은 음반 계약과 대형 쇼·라디오 방송을 마다하고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연예계에서 위상을 높여갔다. 그들은 1990년대 초 작은 클럽에서 연주하면서 아웃사이더의 길을 걸었다. 일본 연예계의 신성 DJ 혼다(35)는 스타덤에 오르기 전 요리사로 일했다. 시즈오카(靜岡)에 있는 한 나이트클럽의 뒷방에서 지내던 그에게 어느날 큰 전환점이 찾아왔다. 전속 DJ와 싸우고 난 그 나이트클럽의 주인이 혼다에게 DJ직을 제안한 것이다. 지난해 12월 31일 그는 나고야(名古屋)에서 열린 성대한 밀레니엄 파티의 주역이었다. 2만 명의 힙합 팬들이 그의 공연을 보러 몰려들었다. 인기 테크노 그룹 Denki Groove를 공동 결성한 이시노 닥큐(石野卓球)와 다키 피에르는 둘 다 평범한 배경을 지녔다. 다키는 직업을 전전하다가 언더그라운드 뮤지션으로 명성을 쌓았다. 이시노는 삽화가가 되고 싶어했다. 그러다가 그들은 만났고 음악을 만들기 시작해 세계적으로 추종받기에 이르렀다. 지난 9월 덴키 그루브는 요코하마(橫濱)의 24시간 테크노 콘서트인 와이어 00에서 최고 인기 뮤지션이 됐다.
DJ들이 틀을 깨기 전에는 일본 음악이 서구 시장에서 관심을 끈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가장 기본적인 문제는 언어였다. 그러나 클럽 음악의 경우는 가사보다 비트가 중요하다. DJ 혼다가 1995년 처음 앨범 녹음을 시작했을 때 도쿄 소니 뮤직 측은 미국에서의 앨범 발매와 관련해 그에게 충고를 했다. 혼다는 “그들이 ‘영어 학원부터 다니라’길래 ‘나는 책을 쓰는 게 아니라 음악을 만든다’고 응수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대신 그는 브레이크댄싱 그룹 록 스테디 크루의 뉴욕 브롱크스 출신 유명 멤버 크레이지 레그스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레그스는 내게 영어를 못해도 좋은 비트를 만들어낼 수 있다며 힘을 줬다.” 그후 그의 ‘h II’ 앨범 중 싱글 2곡은 빌보드 차트 1백위권 안에 진입했다. 미국 팬들은 혼다의 도쿄 쿨재즈를 좋아한다. 한편 도쿄의 10대들은 그가 ‘드 라 솔’과 KRS-원 같은 미국 주요 힙합 그룹들과 함께 작업한다는 사실에 큰 감명을 받고 있다.
Ken Ishii는 일본의 DJ들이 새 음악 장르의 덕을 보고 있다고 말한다. “로큰롤과 솔 음악은 서구에서 오랜 전통을 지닌 까닭에 우리는 감히 도전장을 내밀 수 없다. 그러나 테크노와 하우스 음악의 경우는 20년 전 모두가 동일한 선상에서 출발했다.” 샘플러 사용법을 배우는 일은 장기간 기타 수업을 받는 일보다 훨씬 더 쉽다. 또 일본인들은 각종 전자 기기에 익숙하다. 일본의 비디오게임 회사들은 오랫동안 전자음악을 활용해왔다. DJ들은 비디오게임 사운드의 일부를 골라내 클럽 음악의 감각에 맞게 합성시켰다.
Ken Ishii의 테크노 음악은 일본에 앞서 유럽에서 인정받았다. Ken Ishii가 1993년 벨기에의 무명 음반사 R&S와 계약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유럽 전역의 클럽에서 그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1995년 그는 MTV 유럽 시상식에서 테크노곡 ‘엑스트라’로 국제 뮤직 비디오상을 받았다. 세계 최대의 테크노 축제인 베를린의 러브 퍼레이드에도 초청됐다. 1995년 그의 재능을 알아본 소니 뮤직은 그와 계약을 맺었다. 지난해 한국의 일본문화 수입개방 조치 후 Ken Ishii가 가장 먼저 서울에서 공연했다. 일본에는 몇 년 전 태풍이 부는데도 후지(富士)산 기슭까지 그의 콘서트를 찾아갈 정도로 그의 열성팬이 많다.
일본 DJ들은 일본의 보수적인 문화를 꼬집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Denki Groove는 일본의 대기업 선호사상과 물질 만능주의를 비판해왔다. 그들의 곡 ‘나쁜 점퍼’는 ‘동네 가게에서 산 점퍼를 입으니 멋져 보이네’라는 가사를 반복하면서 일본의 국수주의적 광고들을 조롱한다. 또 공장 기계음을 배경음으로 한 ‘리아크숑’에서는 ‘오늘 일본 젊은이들이 모두 이곳에 모였다’는 가사가 나온다. 그들은 이 가사를 통해 젊은이들이 개성을 찾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Ken Ishii는 “자신의 인생이니 자신답게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재능있는 DJ들은 직업의식이 투철하다. DJ 크러시라는 별명을 지닌 이시이 히데아키는 한때 폭주족이었지만 이제는 힙합에서 영감을 얻는다. 그러나 그는 허풍이나 떠는 반항아가 아니다. 무대에 올라 턴테이블 앞에 서면 그는 관중이 존재한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릴 정도로 집중력을 발휘한다. 그는 색인카드를 넘기듯 LP판을 재빨리 넘기다 자신이 찾던 판을 발견하면 조심스럽게 턴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부드럽게 음반 바늘을 내려놓는다. 힙합 잡지 블래스트의 편집자 시라이시 유이치로는 크러시를 禪의 대가에 비유한다.
시라이시는 “일본 비트는 ‘마’(間)가 있다”고 말했다. ‘마’는 일본 전통 예술, 특히 음악에서 쓰이는 용어로 연주 중간중간 발생하는 중요한 휴지기를 가리킨다. 일본인들은 ‘마’를 사용해 전체 비트를 돋보이게 한다. 크러시는 “무는 有만큼이나 중요하다”고 말했다. “내 음악은 록의 정원이다. 개별적인 사운드는 물론 비트 간의 공백까지도 그 정원의 구성 요소가 된다.” 그와 함께 작업하는 뮤지션들을 살펴보면 그의 인기를 가늠해볼 수 있다. 그는 포크 록 가수 k.d.랭은 물론 뉴욕 출신의 랩가수 메소드 맨 및 레드맨과도 공동 작업했다.
일본 10대들은 음악에 맞춰 춤추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직접 음악을 만들고 싶어한다. 도쿄의 도호(東放)학원에는 87명의 학생이 1년간의 DJ과정에 1인당 8천 달러를 수강료로 내고 음반 구입에 매달 수백 달러씩을 쓴다. 수강생들은 실제 DJ들이 가르치는 ‘샘플링 I·II’, ‘DJ 테크닉과 기초’ 같은 과목들을 듣는다. 이 학원 강사인 다카하시 가쓰즈오에 따르면 “지원자 수가 너무 많아 다 받아줄 수 없을 정도”다. 수강생 다케시마 신지(18)는 가업인 배관 일을 물려받지 않겠다고 아버지에게 말한 후에야 올해 DJ 학원에 등록할 수 있었다. 그의 목표는 DJ수업을 해 작은 클럽과 파티에서 연주하는 것이다.
일본의 모든 청소년들이 DJ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도쿄에서는 재능있는 젊은이를 선발하기 위한 DJ 콘테스트가 정기적으로 개최된다. 아마추어 DJ들은 많은 LP판을 구비한 맨해튼 레코즈의 6개 체인을 부지런히 들락거린다. 맨해튼 레코즈의 매니저 시미즈 다케미치는 “우리는 미국과 유럽에서 중고 레코드를 찾아 헤맨다”고 말한다. 턴테이블이 없는 사람들은 DJ 아케이드 게임이 필수다. 일본의 아케이드 게임기 메이커 고나미는 비트매니어라는 DJ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큰 돈을 벌었다. 이용자가 힙합·트랜스·테크노 중 하나를 선택하고 단추를 누르면 비트가 시작된다. ‘스크래칭’ 기술을 과시하려면 턴테이블을 앞뒤로 밀면 된다. 그러면 오락기가 이용자의 리믹싱 기술을 측정한다. 고나미는 3년간 비트매니어 기기 2만5천 대를 판매했다. 아케이드 게임 업계에서는 1천 대 이상 팔리면 성공으로 간주된다.
DJ 문화가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유명 DJ들은 이제 부유한 사업가로 변신했다. 혼다는 뉴욕의 소호와 도쿄, 그리고 자신의 고향 삿포로(札幌)에 의류점을 소유하고 있다. 레저산업과 제조업체들도 마케팅 전략에 DJ를 이용한다. 스포츠 시계 업체 G 쇼크社는 턴테이블 옆에 그들의 시계가 놓인 잡지 광고를 내보내고 있다. 담배 회사 필립 모리스社는 DJ를 중심으로 한 테마 광고를 연달아 내놓고 있다. 문제는 맥주·시계·담배 광고로 결국 음악 자체가 지닌 반항정신이 약화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우려는 아직 현실화되지 않았다. 문화 평론가인 도널드 리치 도쿄 템플大 교수는 “일본 청소년들은 정부와 대기업을 신뢰하지 않지만 DJ는 믿는다”고 평했다.
언젠가 반발에 부닥치게 되더라도 일본의 DJ들은 뚜렷한 족적을 남길 것이다. 일본의 젊은 예술가들이 독자적인 창작활동을 펼치기가 훨씬 편해졌다. 그리고 일본의 음반사들은 단정치 못한 평상복 차림에 헤드폰을 착용한 채 음악에 빠져 있는 청소년들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적어도 현재로서는 그런 청소년이 음악계를 지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