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064
12월6일[대림 제1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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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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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mRedQxeZQoA
[성 골롬반외방선교회 양창우 요셉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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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제발 눈을 뜨길>
시각장애로 평생 고생해왔던 눈먼 이들의 고통을 눈여겨보시고 지체 없이 치유의 손길을 건네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제 지난 삶이 떠올랐습니다.
저도 한때 눈먼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보아도 보지 못했습니다. 내면이나 영혼, 진심을 보지 못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이 전부인양 속단하고 잣대질하고 평가했습니다.
솔직히 저는 진리에 눈이 멀어있었습니다. 영적인 삶에도 눈이 멀어있었습니다. 사실 중요한 것은 작은 것에 있다는 영원불변의 상식에도 눈이 멀어있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은 양이 아니라 질(質)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도 눈이 멀어있었습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우정이요 사랑이란 것에도 눈이 멀어있었습니다.
때로 재물에 눈이 멀다보니 재물을 하느님 위에 두게 되더군요. 자리에 눈이 멀다보니 여기 굽신 저기 눈치 정말 인간이 치사하게 되더군요. 인기에 눈이 멀게 되다보니 이중인격자가 따로 없었습니다.
눈먼 이들을 치유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오늘 그분께서 우리를 향해 진정으로 바라시는 치유는 어떤 것이겠는가에 대해서 묵상해봅니다.
저를 포함해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눈이 멀어 있습니다. 올라가면 즉시 내려와야 한 그 자리, 그게 뭐 그리 대단한 것이라고 있는 창피 없는 창피 다 당하면서 그리도 악착같이 버티는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정말이지 간절히 염원합니다. 지금 우리 모두가 손가락질하는 그들도 원래는 하느님께서 주신 이성과 영혼을 지닌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눈을 뜨시기 바랍니다.
부디 권력욕으로부터 눈을 뜨시길 기도합니다. 장차관이며 수석이며 위원장이며 뭐 대단한 것 같지만 사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갖은 권모술수를 다 동원해서 박박 긁어모은 산더미 같은 재물, 그거 다 쓰고 가지도 못하고 강제추징 당하고 마치 오물 뒤집어쓰듯 욕이란 욕은 다 얻어 들을 텐데... 왜 그리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지...
그래서 더욱 정말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 멀쩡한 분들 하루빨리 재물에 먼 눈을 뜨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늘 내 발밑을 내려다봅니다. 아직도 많은 것들에 눈이 멀어있습니다. 아직도 정작 봐야할 것들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니 얼마나 많은 상처와 고통을 이웃에게 끼치는지조차도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해 외쳐야겠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마태오 복음 9장 2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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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agKp-9axC_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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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예감을 전혀 가질 필요가 없게 하는 믿음이 있다>
왜 슬픈 예감은 절대 틀리지 않는 걸까요? 왜 부정적인 예측은 항상 현실이 될까요? 이런 가사의 노래도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경험을 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대부분의 부정적인 이해가 현실이 되어 눈 앞에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엊그제 현 대통령이 한밤중에 계엄선포를 하였습니다. 군대가 국회를 난입하여 무언가를 장악하고 방해하려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는 하루 만에 감정적으로 시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다행인 것은 국회의원들이 당일 회의를 위해 대부분 서울에 머물고 있어서 신속하게 과반수 이상 모일 수 있었다는 데 있습니다.
국회에 통보하지 않고 계엄을 선포해 소위 반국가 세력을 척결하려 하였다면 이는 내란죄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내란죄의 수장과 깊이 관련된 이들에 대해서는 사형이나 무기징역과 같은 벌에 처합니다. 앞으로 어찌 될지는 모르겠지만, 윤 대통령은 왜 자기 운명을 이렇게 재촉하는 것일까요?
그가 사는 세상은 무언가 두려움의 세상입니다. 자신과 가족을 음해하려는 종북세력이 넘쳐나는 환경에 놓인 것입니다. 거의 망상에 가깝습니다. 이렇게 올바른 상황의 판단이 안 될 때 생기는 감정이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은 내가 잃을 게 많다는 잘못된 믿음과 나의 것을 빼앗으려 하는 이들이 많다는 잘못된 두 믿음의 결합으로 나타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두려워하면 두려운 일이 생기고,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분이 들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행복한 삶을 위해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법칙 하나만 뽑으라 하면 저는 이것을 뽑고 싶습니다. 이 원칙은 우주의 법칙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이 법칙을 믿지 않습니다.
아마 윤 대통령이 많이 갖지 못했을 때는 그만큼 두려움도 적었을 것입니다. 감사원장, 서울 지검장 탄핵 결의가 있는 날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이는 대통령 관저와 김건희 여사와 직결되는 사항이었습니다. 사실 예산안에 대한 것은 거의 700조에 가까운데 심의에서 4~5조 조정안에 관련된 것이라 결정적인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설사 이유가 된다고 해도 국회에서 예산안 심의 하는 것을 가지고 대통령이 계엄령을 발포할 사유는 되지 못합니다. 실제로는 자기 사람들을 보호하려는 의지가 컸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사람은 자기가 지킬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죽음 앞에서 사람은 무엇을 가질 수 있을까요? 그때는 아무것도 가질 능력이 없는 존재임을 스스로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지킬 수 없고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음을 아는 게 믿음입니다. 이번 계엄은 대다수 전문가가 볼 때 국가 혼란 상태는 아니었다는 결론이 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믿는 대로 되어라!”하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믿으라는 말씀일까요? 오늘 두 소경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눈을 뜨게 할 능력이 있는 분임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을 어디까지 믿어야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지고 두려운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나를 고칠 수 있는 분은 나를 창조한 분일 수밖에 없습니다.
높은 곳에 흔들다리를 만들고 유리로 아래가 보이게 하는 관광지가 많습니다. 많은 이들이 두려움에 떨면서도 결국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라 믿고 즐깁니다. 놀이기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가끔 사고도 나지만, 교통사고 날 확률보다 적기 때문에 그런 것을 즐깁니다. 그렇게 믿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을 만든 이가 바로 인간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녀도 탈 수 있는 놀이기구를 위험하게 만들 리 없습니다. 결국 자기 자신과 온 세상의 창조자를 믿기 전까지는 완전히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두려우면 두려운 일이 일어납니다. 물론 긍정적인 믿음으로 성공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두려움은 우리 생명과 관련되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믿어야 합니다. 무엇을? 바로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창조자이시기 때문에 망가지면 고치실 수 있고 죽으면 다시 살리실 수 있는 분임을 믿는 것입니다. 그분의 능력을 믿을수록 우리는 평화를 얻고 그 평화가 우리를 선하게 만들고 온유하게 하며 결국엔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창조자를 믿어서 손해 볼 게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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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포트워스 신부님, 안식년 중인 동창 신부님과 엘파소엘 다녀왔습니다. 10시 15분 비행기였는데 기상 악화로 2시간 지연되었습니다. 덕분에 공항에서 걸을 수 있었고, 음악회 프로그램에 들어갈 인사말을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때로는 늦는 것도 도움이 될 때가 있습니다. 후배 신부님은 엘파소의 명소인 ‘화이트 샌드’로 안내해 주었습니다. 2시간 늦었기에 화이트 샌드에서 석양을 볼 수 있었습니다. 때로는 늦는 것이 도움이 될 때가 있습니다. 사제관에 도착하니 교우분들이 맛있는 저녁을 준비해 주었습니다. 엘파소는 주일에 30명 정도 나오는 공동체입니다. 15가정 정도 된다고 합니다. 제가 있는 달라스는 주일에 800명 정도 나오는 본당입니다.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하느님의 축복과 하느님의 사랑은 같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공동체의 크기에 비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공동체의 믿음에 따라서 주어집니다. 공동체가 믿음으로 서로 이해하고, 사랑으로 서로 나누며, 희망으로 기쁘게 살아간다면 그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2박3일 짧은 일정이었지만 형제들이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예전에 ‘시골 쥐와 서울 쥐’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시골에서 평화롭게 살던 시골 쥐는 어느 날 친구인 서울 쥐를 초대합니다. 시골 쥐는 자신이 먹는 소박한 음식을 서울 쥐에게 대접합니다. 하지만 서울 쥐는 음식을 보며 비웃으며 말합니다. ‘이런 초라한 음식을 먹고 산다니, 내게 오면 훨씬 더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어!’ 서울 쥐는 시골 쥐를 도시로 초대합니다. 도시에는 화려하고 맛있는 음식들이 가득했지만, 문제는 위험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려던 두 쥐는 고양이가 갑자기 나타나 도망쳐야 했고, 사람들에게도 쫓기기 일쑤였습니다. 결국 시골 쥐는 말합니다. ‘나는 이렇게 위험천만한 삶을 살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기보다는, 안전하고 평화로운 내 삶으로 돌아가고 싶다.’ 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면서 기쁘게 사는 것이 현명한 삶의 태도입니다. 물질적 풍요와 화려함은 겉보기에 매력적일 수 있지만, 그것이 안전과 평화를 희생한다면 그 가치는 줄어듭니다. 꼭 남의 삶을 부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의 상황 속에서 행복을 찾는 것이 진정한 만족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부유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대처할 줄 아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간다면 어느 곳에서도 위로와 평화를 찾을 수 있습니다. 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간다면 어느 곳에서도 불평과 불만이 넘쳐날 겁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날에는 귀먹은 이들도 책에 적힌 말을 듣고,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 겸손한 이들은 주님 안에서 기쁨에 기쁨을 더하고, 사람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안에서 즐거워하리라.” 저는 그날이 시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기다리기도 했고, 그래서 떠나려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날은 저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날은 시간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날은 어떠한 처지에서도 감사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날은 언제나 기뻐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날은 늘 기도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불평하고, 지금 원망하고, 지금 비관하면 언제나 제가 머무르는 곳은 가시방석입니다. 그러나 지금 감사하고, 지금 기뻐하고, 지금 기도하면 제가 머무르는 곳은 언제나 꽃자리입니다. 넉넉한 마음과 진중한 마음으로 신자들과 함께하는 신부님들에게 그날은 늘 ‘꽃자리’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눈이 먼 소경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비록 앞을 볼 수 없었지만, 소경은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앞을 볼 수 없었지만, 소경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신다는 예수님의 소문입니다. 아픈 이를 치유해 주신다는 소문입니다. 죄인들을 따뜻하게 품어주신다는 소문입니다. 그래서 앞을 볼 수 없었지만, 소경은 주님께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눈이 먼 것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갈망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록 눈이 멀었을지라도 하느님의 사랑을 보았던 소경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감사할 수 있다면, 기뻐할 수 있다면, 기도할 수 있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영적인 마음을 환하게 열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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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9,27-31: 두 소경의 눈을 보게 하시다
소경 두 사람이 예수님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하고 청하였다. 예수께서는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하셨을 때, 그들은 “예, 주님!”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치유해 주셨다.(27-30절)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데리고 가까운 집으로 가신다. 그리고 본 이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고쳐 주시며 아무에게도 일 일을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신다. 군중들에게서 칭송을 받는 것을 경계하시고 그렇게 하라고 하신다. 두 사람은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듣기만 하고도 믿음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자신들의 눈으로 이 기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은 곧바로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들은 그때 일어난 일을 알리지 말라는 지시를 들었지만, 그 일을 알렸다. 이 소경들의 치유 기적은 하나의 표징으로서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앞에 “빛”을 필요로 함을 가르쳐주고 있다. 두 눈먼 사람들은 믿음이 없음을 나타낸다. 그들은 아직 참된 빛, 곧 율법과 예언서가 예고한 하느님의 외아들을 볼 수 없었다. 이 두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자마자 시력을 되찾았다.
소경들의 되찾은 시력은 우리가 항상 청해야 할 신앙의 빛을 의미한다. 우리 자신을 보면 그것을 만들어내지도 못하면서 너무나 쉽게 그 빛을 잃어버리고 잃어버린 줄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 빛은 우리가 청하고 받아들일 자세만 되어 있다면 하늘로부터 끊임없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놀라운 선물이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우리 인간의 역사 내에 오심의 신비를 거행하고 있다. 예수님의 이 ‘오심’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빛이 필요한 것이며, 이 신비를 이해할 수 있는 내적인 “빛=밝음”은 신앙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이 소경들의 치유 사화는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시고 우리 가운데 임하시는 그 신비를 이해하고 또한 우리의 삶 속에 그것을 체험할 수 있으려면 이 소경들이 예수님께 가지고 있었던 큰 믿음의 “빛”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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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복음에 나오는 눈먼 두 사람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고쳐 주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예, 주님!”(마태 9,28) 이들은 그저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습니다. 복음은 눈먼 두 사람의 행동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눈먼 사람 둘이 따라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직역: 울부짖었다). 예수님께서 집 안으로 들어가시자 그 눈먼 이들이 그분께 다가왔다.”(9,27-28) 눈먼 두 사람은 ‘따라갔고’, ‘외쳤고’, ‘다가갔습니다.’
참된 믿음은 예수님을 ‘따라가게’ 하고, 그분께 ‘울부짖게’ 하며, 그분 곁으로 가까이 ‘다가가게’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에서 나오는 이런 행동을 보일 때, 다른 것이 아닌 바로 그 믿음의 힘으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은총을 나누어 주십니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9,29)
만일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도하지 않고 있다면, 성체 앞에 다가가 예수님께 울부짖으며 은총을 청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꿈적도 하지 않고 있다면, 하느님께서 고해성사를 통하여 우리의 모든 죄를 없애 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고해소로 향하지 않고 있다면, 여러분은 ‘죽은 믿음’, ‘아무 힘도 드러내지 못하는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불행한 신앙인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복음에 나오는 눈먼 두 사람처럼 우리의 믿음이 예수님께 다가가 필요한 은총을 청하는 힘을 드러내면 좋겠습니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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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어둠 속에 있음을 인정하고 고백해야만 빛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는데 눈먼 사람 둘이 따라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집 안으로 들어가시자 그 눈먼 이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예, 주님!’ 하고 대답하였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이르셨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이 일을 알지 못하게 조심하여라.’ 하고 단단히 이르셨다. 그러나 그들은 나가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그 지방에 두루 퍼뜨렸다."(마태 9,27-31)
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빛’이신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대림 시기는 내 안의 어둠이 무엇인지를, 또는 나를 억압하고 있는 어둠이 무엇인지를 성찰하고 회개하면서,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잘 맞아들이고, 그래서 어둠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시기입니다.
여기서 ‘눈먼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어둠 속에서 살던 인간들을 상징하고,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을 고쳐 주신 일은,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알려 주시고 인도하시는 것을 상징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인간들은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채로 방황하는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 인간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
“빛이 너희 가운데에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빛이 너희 곁에 있는 동안에 걸어가거라. 그래서 어둠이 너희를 덮치지 못하게 하여라. 어둠 속을 걸어가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빛이 너희 곁에 있는 동안에 그 빛을 믿어, 빛의 자녀가 되어라."(요한 12,35-36)
2) 요한복음 9장에 있는,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고쳐 주신 이야기’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우리는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이제 밤이 올 터인데 그때에는 아무도 일하지 못한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고 그에게 이르셨다. ‘실로암’은 ‘파견된 이’ 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그가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요한 9,1-7)
<이 이야기에 나오는 ‘눈먼 사람’은 예수님을 몰랐고, 몰랐으니까 예수님에 대한 믿음도 없었고, 믿음이 없었으니 예수님께 간청하지도 않았습니다.(요한 9,36) 따라서 예수님께서 그 사람의 눈을 고쳐 주신 일은, 그의 믿음을 보고 하신 일이 아니라, 그냥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입니다. 눈먼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눈을 뜬 다음, 그리고 눈을 뜨게 해 주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된 다음입니다.(요한 9,38) 먼저 믿고 간청해야만 은총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자비와 은총이 먼저 있고, 그것을 깨달은 사람이 믿음으로 응답하게 됩니다.>
3) 요한복음 9장의 이야기의 끝에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있던 몇몇 바리사이가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 ‘우리도 눈먼 자라는 말은 아니겠지요?’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39-41)
산상 설교에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마태 6,22-23) 자기가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 빛을 찾게 되고,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4) 그러나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빛을 찾지 않고, 그냥 어둠 속에서 살아갑니다. “나는 지금 잘하고 있다. 나에게는 죄가 없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회개하지 않고, 누군가가 그에게 회개하라고 말하면, 화부터 냅니다.
회개는 죄인이 합니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고백하는 사람이 회개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첫 복음은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입니다.(마태 4,17) 그 선포는 ‘모든 사람’을 향해서 하신 선포입니다. <‘모든 사람’이 전부 다 회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죄가 없으니 회개할 필요가 없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이고, 복음을 거부함으로써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메시아의 나라에, 즉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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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 9장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8─9장에 열 개의 기적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배치하여 예수님을 ‘치유하시는 메시아’로 그리고 있습니다. 앞선 5─7장에서는 긴 설교문을 구성하여 ‘가르치시는 메시아’의 모습을 강조하였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의 관점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사도’로 선발하여 파견하시기에 앞서 당신의 메시아적 신원을 밝히고 계십니다.
회당장의 집에서 그의 딸을 살려 주신(마태 9,18-26 참조) 예수님께서는 길 위에서 눈먼 사람 둘을 만나십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눈을 뜨게 해 주십사 간청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다윗의 자손’이라는 표현은 마태오 복음의 첫째 구절에서 언급된 이래 여기에서 처음 사용되는 호칭으로 메시아로서 예수님의 정체성을 확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의 기대처럼 원수들을 무력으로 정복하는 전사나 강력한 정치 지도자의 모습으로 당신의 메시아적 권위를 행사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정체성은 자기희생(8,17 참조)을 동반한 온유와 겸손(11,29; 21,1-11 참조)에서 온전히 드러납니다. 마태오 복음사가가 소개하는 예수님께서는 다윗 가문 출신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실, 약속된 메시아이십니다. 눈먼 두 사람은 연민과 치유로 메시아적 권위를 행사하시는 예수님을 믿고 따랐으며, 그 믿음 때문에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믿음은 치유를 위한 조건으로 제시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치유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이들에게 믿음을 시험하는 질문을 던지십니다.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지금은 우리 각자가 예수님의 이 질문에 응답해야 하는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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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님]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이사 1,1)는 하느님께서 불어넣어 주신 영감으로 현실을 보고, 하느님께서 명하신 대로 그 현실을 말하는 예언자였습니다. 어제 독서의 묵시록 부분(이사 24―27장)에 이어, 이사야 예언서 28―33장은 불행 선언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신탁입니다. 비록 “불행하여라.”(28,1)라는 저주로 시작되지만 구원에 관한 약속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런 가운데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는 하느님의 구원에 관한 약속을 세 단계로 묘사합니다. 먼저 레바논의 분명한 변화를 언급한 뒤, 사람의 시각과 청각에서도 변화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마지막 단계에서 이사야는 악의 종말을 선언합니다.
이처럼 이사야가 이미 그날이 올 것이라고 말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로서 당신께서 지니신 변화의 힘을 사람들이 과연 신뢰하는지를 확인하고자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자비를 베풀어 달라’ 하고 외친 눈먼 두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부르며 메시아이심을 고백한 눈먼 이들은 “예, 주님!”이라고 응답합니다.
그렇습니다. 치유의 기적에 꼭 필요한 것은 하느님과 그분의 힘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성탄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이 대림 시기에 “임마누엘”(마태 1,23)께 드릴 찬미는 눈먼 두 사람의 신앙 고백을 넘어 화답송의 시편과 같아야 합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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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기대를 충족시켜주고 싶은 사랑의 마음>
+찬미예수님
평소 SF영화를 좋아하는 저는 마블시리즈의 열렬한 팬입니다. 마블시리즈라고 하면 잘 모르는 분들이 계실 텐데 스파이더맨, 아이언맨, 헐크 등의 캐릭터 이름은 제법 익숙하실 것 같습니다.
이런 공상 과학류의 영화를 좋아하기에 저는 외국에서 공부를 할 때에도 영화관에 가서 직접 이룰 시청하며 스트레스를 풀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영화는 우리 본당의 초등학생 아이들 역시 좋아합니다. 악당을 물리치고 정의를 실현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평범한 사람들이 특수한 능력을 갖게 된다는 점에서 아이들에게 매우 매력적인 듯 합니다.
그래서 어린이 미사를 할 때 가끔 영화에 등장하는 로봇 헬멧을 쓰고 나갑니다. 그리고 그 때 매우 흥미로운 아이들의 반응을 바라보게 됩니다. 일단 고학년 아이들은 헬멧을 어떻게 구했는가, 얼마를 주고 샀는가가 주된 관심사입니다.
반면 저학년 아이들, 특히 유치부 아이들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아이들은 진짜로 제가 영화의 주인공이라 생각하고 다시 한 번 변신해 달라고 조르기 일쑤입니다. 더불어, 성당에 사는데 언제 악당을 무찌르러 가느냐고 묻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신부님이 하는 행동 하나하나를 매우 신뢰하며 그대로 믿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이들이 제 입장에서는 어찌나 귀여운지 모릅니다. 그리고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차는 데, 아이들을 속였다는 장난꾸러기 같은 마음으로 그러한 마음이 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아이들에게 제가 그만큼이나 신뢰의 대상이라는 사실에 새삼 기쁨이 차오르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믿음에 관한 말씀입니다. 공관복음을 보면,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베풀기 전에 항상 믿음을 중요시하게 여기셨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하여, ‘너의 믿음이 너를 살렸다’ 라고 말씀을 하시거나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너희는 나의 힘을 믿느냐?’고 말씀하시며 사람들의 믿음을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 생활 속에서 가지게 되는 믿음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그 중 첫 번째는 부모에 대한 자녀의 믿음과 같은 절대적인 믿음입니다.
가정에서 자녀들은 부모님의 말씀을 말씀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결코 막연한 것이 아닌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입니다. 그리하여 어린 아이들일수록 부모에게 온전히 자신을 의지하면서 내맡기곤 합니다. 이를테면 무언가가 필요할 때 혹은 본인이 넘어졌을 때 즉시 엄마를 외치며 자신의 신뢰를 드러냅니다.
두 번째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에는 ‘신의’가 얼마만큼 있는가가 중요하며 쉽게 계산적인 것으로 변질되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저 사람에게 이것을 해주면 그 보답이 얼마가 주어질까를 따지게 되며 그것이 원하는 대로 돌아오지 않을 경우 상대에게 금방 실망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소경 두 사람은 예수님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외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라고 물어 보십니다. 그러자 그들은 거침없이 “예, 주님” 이라고 대답합니다.
이러한 믿음은 앞서 말씀드린 부모에 대한 자녀의 절대적인 믿음과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안에는 어떠한 계산도 없고 그저 온전한 신뢰의 자세만 있을 뿐입니다.
이처럼 주님을 향하는데 있어 우리에겐 계산이 없어야 합니다. ‘그가 누구이며 그만한 것을 해줄 능력이 있는가’를 먼저 계산하게 된다면 그것은 온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반면, 상대방의 존재 자체만으로 위로를 받게 될 때 설사 어떠한 문제가 당장 해결되지 않아도 참고 인내할 수 있으며 결국 그 믿음은 현실이 됩니다.
다시 한 번 저를 온전히 믿고 신뢰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가짜 헬멧을 뒤집어쓰고 있음에도 그것을 믿고 있는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가짜가 아닌 진짜 로봇 슈트라도 가져와 입음으로써 기대를 충족시켜주고 싶은 것이 아이들을 사랑하는 사제의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가짜가 아닌 진짜 기적을 베푸실 수 있는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실지요. 당신을 신뢰하고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이들을 바라보는 주님의 시선은, 어린 아이에게 무엇이든 해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일 것입니다. 이 안에는 어떠한 계산 없이 그저 충만한 사랑만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현실적인 고통과 어려움들을 주님께 봉헌하고 의지함에 있어 한 치의 의심도 없는 어린아이와 같은 자세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며 나는 얼마나 주님을 신뢰하고 있는지 혹은 나의 믿음에 어떠한 계산이 있지는 않았는지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간절한 눈빛으로 당신을 부디 믿어주길 지금 이순간도 바라고 계십니다.
“그들이 ‘예, 주님!’ 하고 대답하였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이르셨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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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언제나 한결같은 사람이 정상일까요? 아니면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 정상일까요? 사람들은 한결같은 사람이 정상이라고 말하면서, 한결같지 않은 사람을 향해서는 비난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한결같은 사람이 정상일까요? 어느 드라마에 이런 대사가 나왔다고 합니다.
“사람이 그렇게 한 겹이야? 삼겹살도 세 겹인데….”
여러분의 마음은 몇 겹이 되는 것 같습니까? 사람의 마음은 한 겹이 될 수 없습니다. 무수한 마음과 감정이 있는 인간인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로부터 “너는 이중적이야!!”라는 말을 들으면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겨우 두 겹밖에 안 된다는 것으로, 너무 단순하게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침, 저녁, 저녁에 생각하는 것이 모두 다를 수밖에 없고, 이렇게 다른 것이 지극히 정상적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똑같은 모습만을 가지고 있어야 정상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미사에 참석할 때 매번 기쁘십니까? 당연히 주님의 잔치에 함께하는 것이니 기뻐해야 하지만 때로는 슬픔의 감정도 갖게 됩니다. 활기차게 오늘 하루 살겠다고 다짐하지만 1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피로감을 느끼고 주저앉기도 합니다. 어때요? 이렇게 몇 겹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비정상적일까요?
아닙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그런 인간인 ‘나’인데, 이런 인간인 ‘남’을 왜 인정하지 못할까요? 자기는 지극히 정상적인 다중적인데, 다른 사람의 이중적인 모습에 분노한다는 것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인 모습인가요? 따라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도 여기서 시작했습니다.
눈먼 사람 둘이 예수님을 따라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외칩니다. 소문을 들어 알겠지만, 그들이 직접 예수님의 능력을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눈먼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소문은 놀라운 기적을 행한다는 것도 있었지만,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서 기적을 행한다는 부정적인 내용도 있었습니다. 또 유다인들이 존경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직접 보지 않아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라고 하셨고,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습니다. 무성한 소문에 충분히 흔들릴 수 있는 상황이었어도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믿는 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주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많은 말이 많습니다. 그런 말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는 주님이라는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있는 그대로의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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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살림>
마태오 9,27-31 (눈먼 두 사람을 고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눈먼 사람 둘이 따라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집 안으로 들어가시자 그 눈먼 이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예, 주님!” 하고 대답하였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이르셨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이 일을 알지 못하게 조심하여라.” 하고 단단히 이르셨다. 그러나 그들은 나가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그 지방에 두루 퍼뜨렸다.
<살림>
제대로
걸을 수 없는 이도
따를 수 있도록
느릿느릿
걷다
온갖 서러움 깃든
스치는 목소리마저
놓치지 않도록
정성스레
듣다
있는 듯 없는 듯
한줌의 희망조차
새로이 피어나도록
따뜻하게
말하다
가까이 더 가까이
죽은 껍질 벗겨내고
새 살 돋도록
부드럽게
손대다
그 믿는 대로
그 바라는 대로
그리 살아나도록
오롯이
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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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그들의 눈이 열렸다>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만 꼭 이루고 싶은 소망이 있습니다.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만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생각지도 않게 소망이 이루어질 수도 있지만, 정성과 사랑을 쏟았을 때 더 큰 기쁨을 누리게 되고 보람을 차지하게 됩니다. 최선을 다했으면 그것으로 만족한 것입니다. 그것이 행복입니다. 그런데 자꾸만 다른 것과 비교하니까 있던 행복도 사라지고 맙니다.
어떤 눈먼 사람 둘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소망이 무엇이겠습니까? 눈을 뜨는 것입니다. 눈을 뜨려면 눈을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그들은 마침 길을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태 9,27) 하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자비를 입어 눈이 열렸습니다. 그들에게는 눈을 뜨고자 하는 소망이 있었고, 그것을 이루어 주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믿음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희망하였고, 하느님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믿음으로 하느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매일의 묵상을 통하여 예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의 성장을 이루고 마침내 주님의 능력에 감사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그림은 밀라노의 어떤 백작의 요청에 따라 3년 동안에 걸쳐 완성했다고 합니다. 그 그림은 예수님께서 중앙에 앉아 계시고 제자들이 양옆에 앉아서 함께 마지막 식사를 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처음 그림은 예수님께서 오른손에 잔을 들고 계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볼 수 있는 그림은 그렇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한 사연이 있는데 다빈치는 작품이 완성될 무렵에 친구에게 그림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가 대뜸 “다빈치, 여기 예수님께서 든 잔은 꼭 진짜 같은데!”라고 말했습니다. 이 소리를 듣고 다빈치는 그림을 수정하였답니다. 진짜같이 보이는 잔을 지워 버리고 예수님의 팔이 가만히 탁자 위에 올라가 있는 지금의 모습대로 말입니다. 그것은 그의 믿음이 그렇게 했습니다. 결코, 예수님보다 더 중요하게 드러나는 부분이 있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나이가 43살이었답니다. 저는 그동안 무엇을 했나 모르겠습니다.
신앙인이라고 하면서 우리의 삶은 예수님보다 더 중요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돈도 벌어야 하고요, 취미생활도 해야 하며, 분위기 좋은 곳에 가서 친구도 만나야 합니다. 때맞춰 여행도 해야 하고, 입에 맞는 음료도 마셔야 하며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먹고, 마시고 즐겨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기도는 물론 미사도 소홀히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보다도 세상 것을 즐기고 찾고 있다면 눈뜬장님입니다. 무늬만 신앙인입니다.
신앙인은 잠시 스쳐 지나가는 것에 매달리지 않고, 영원히 남는 것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육적인 눈뿐 아니라 영적인 눈, 믿음의 눈을 떠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9,39) 보고 있다고 착각하는 눈을 어루만져 참으로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영적인 시력을 회복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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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요한 신부님]
간혹 ‘나는 아무도 안 믿어’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보게 됩니다. 하느님은 존재하신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으니 못 믿겠고, 사람은 툭하면 배신하고 뒤통수를 치니 못 믿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에서 다른 이와 서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존재, 즉 인간(人間)이기에 아예 믿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법입니다. 아무도 믿지 않으면 그 누구의 도움이나 협력도 받을 수 없고, 아무것도 믿지 않으면 신용을 바탕으로 굴러가는 이 세상에서 그 어떤 편의나 서비스도 누릴 수 없으니 살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러니 아예 아무것도 안 믿겠다는 극단적인 모습으로 살기보다, 믿어야 할 것과 믿지 말아야 할 것을, 올바른 믿음과 그렇지 않은 믿음을 제대로 식별할 줄 아는 지혜를 지녀야합니다. 자기 자신이나 사람을 함부로 믿기보다는 하느님을, 그분의 사랑과 섭리를 믿어야 할 것이고, 돈이면 뭐든지 다 할 수 있다고 믿기보다는, 나는 하느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믿어야 할 것이며, 하느님의 심판과 처벌을 믿기보다는 그분의 한없는 용서와 자비를 믿어야 하는 겁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두 소경이 바로 믿어야 할 분을 제대로 믿은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눈으로 볼 수는 없었어도, 그분에 관한 소문을 들을 수는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전해들은 것만 가지고, 예수님을 보지 않고도 그분께서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주님’이심을 믿었으니 진정 복된 이들이었습니다. 즉 그들의 눈은 이미 영적으로 열려 있었던 것입니다. 육신의 눈은 멀었지만 믿음의 눈이 활짝 열려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복음의 치유 이야기는 눈 먼 이가 다시 보게 된 이야기가 아니라, 믿는 이가 제대로 보게 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두 눈을 멀쩡히 뜨고 다니는 우리가 주님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불신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만 주님을 믿는 게 아니라, 주님께서도 우리를 믿고 기다려 주십니다. 우리가 당신을 믿고 당신께 온전히 의탁하기를, 당신의 능력을 눈으로 확인하려 들기보다 당신의 사랑과 자비를 온전히 신뢰하기를, 그 참된 믿음으로 당신 사랑의 섭리와 놀라운 신비를 알아보기를 기다려 주시는 겁니다. 우리의 믿음이 그 정도 수준에 이르면, 우리의 믿음과 주님의 믿음이 서로 만나면, 우리가 믿는 그대로 주님께서 바라시는 그대로 이루어지게 되지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 복음에 나오는 두 소경은 누구를 믿어야 할지는 알았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믿어야 할지는 제대로 몰랐던 듯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들의 시력을 회복시켜 주실 수 있다는 것을, 즉 그분의 능력을 믿었을 뿐, 왜 자기들에게 그런 큰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지 그분의 뜻과 의도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겁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치유 받은 사실을 여기저기 떠들고 다녀서 당신이 그저 놀라운 능력을 지닌 ‘치유자’로 알려지는 걸 원치 않으셨습니다. 단지 그들이 자기들이 받은 은총의 의미를 충분히 곱씹어보고 그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 하루를 하느님 뜻에 충실하게 삶으로써, 그들의 삶이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이자 다른 이들을 하느님께 대한 참된 믿음으로 이끄는 ‘선교’가 되기를 바라셨을 뿐이지요. 그러나 두 소경은 무엇을 믿어야 할지 몰랐기에 그런 예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했고, 자기들의 눈이 치유되었다는 결과에만 머무르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지니고 계신 치유의 능력을 믿을 게 아니라, 그런 능력을 지니신 분을 ‘주님’으로 믿으며 그분의 뜻에 순명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그 믿는 바대로 ‘구원’이라는 더 큰 은총을 입었겠지요. 우리는 그런 우를 범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다면 그분께 모든 걸 다 맡겨드리고 따라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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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개안의 여정>
“눈먼 무지의 병에 대한 근원적 처방은 주님과의 만남뿐이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시편 27,1)
교황님의 카리타스 대표단에 주신 말씀이 참 신선했습니다.
“Be teachers of wisdom(지혜의 교사가 되어라)”
어지러운 세상에서 참으로 필요한 어른은 지혜의 교사일 것입니다. 지식이나 재능이 아닌 지혜의 덕입니다. 옛 현자의 지혜로운 말씀입니다.
“덕이 모자라서 패가망신한 수많은 사례들이 있지만, 아직도 우리는 사람을 볼 때, 그 재능만 바라보고 추앙한다.”<다산>
“나라를 어지럽힌 신하와 집안을 망하게 했던 자식은 재주는 넘치지만 덕이 부족하다. 이로써 거꾸러진 자가 많다.”<자치통감>
완벽한 재능보다는 뭔가 부족하고 모자라 보이는 겸손한 이들의 적당한 빈틈은 결점이 아니라 오히려 덕이자 지혜요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오솔길 아늑한 사진과 더불어 수도형제와 주고 나눈 덕담이 있어 나눕니다.
“시가 나올 것 같은 그림이지요.”
“그림 자체가 시네요.”
이어 짧은 시를 전했습니다.
“오솔길
넘어
임 계신 곳
주님의 빛속에
걸어들 가자
오늘도
내일도
우리 함께”
즉시 받은 답글입니다.
“저는 저 길 넘어 모레 엄마 보러 갑니다.ㅎㅎ”
엄마가 있어 고향집 휴가입니다. 우리의 본향은 임계신 곳 천상의 아버지의 집이고 지상에서 천상을 향한 순례여정중의 삶입니다. 믿는 이들 누구나 이런 ‘본향집에 대한 향수(homesick at home)’를 지니고 있는 법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눈먼 두 사람이 우리의 근원적 갈망을 대변합니다.
어찌보면 대다수가 무지의 눈먼 사람들 같습니다. 요 몇 년간 동방영성에서 주요 소재가 되는 순전히 지혜의 결핍인 무지에 대해서 얼마나 강조했는지 모릅니다. 무지의 죄. 무죄의 악, 무지의 병, 무지의 해악은 인간 재앙과 불행의 근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번 비상계엄의 내란 행위도 그대로 무지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오죽하면 “미쳤다, 바보다”라는 말이 나오겠습니까? 사람을 미치게 하는, 바보로 만드는 무지의 죄악입니다.
무지에 눈멀면 답이 없습니다. 무지의 벽이라면 지혜의 문입니다. 대하다 보면 답답하고 불편한 벽같은 불통의 사람은 완고한 무지의 사람이고 가슴이 탁 트이고 편안하게 하는 소통의 사람은 온유한 지혜의 문같은 사람입니다. 눈먼 무지에 대한 답은 지혜의 원천인 주님과의 만남뿐입니다. 복음의 눈먼 사람은 믿음의 눈은 활짝 열렸기에 주님만이 구원임을 깨달아 부르짖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빛이신 주님을 보고자 하는 갈망이 믿음의 눈을 활짝 열어주었고 이어지는 주님의 응답입니다. 이런 심정으로 자비송을 바치며 미사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느냐?”
“예, 주님!”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눈이 열린 이들은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그 지방에 두루 퍼뜨립니다. 주님을 만남으로 무지의 눈이 활짝 열려 어둠에서 벗어난 두 맹인입니다. 그대로 대림시기는 이사야 예언이 실현되는, 날로 믿음의 눈이 열려가는 개안의 여정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날에는 귀먹은 이들도 책에 적힌 말을 듣고.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 겸손한 이들은 주님 안에서 기쁨에 기쁨을 더하고, 가난한 이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안에서 즐거워하리라.”
주님만이 참된 기쁨에 행복이요 참된 지혜요 부요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복음의 겸손하고 가난했던 두 맹인은 이런 주님을 만났고 이제 온전히 날로 주님을 찾아 지혜로워지는 개안의 여정을 살게 되었습니다. 주님과의 만남중에 날로 눈은 열려 밝아지고 벽은 차차 변하여 문이 됩니다. 참으로 추구할바 개안이요 지혜입니다. 날로 작아지는 무지의 벽과 더불어 날로 넓어지는 지혜의 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벽이 없이 온통 사면팔방으로 활짝 열린 지혜의 문, 생명의 문, 사랑의 문, 진리의 문이셨던 분입니다. 무지에 대한 근원적 처방이자 답은 지혜자체이신 주님과의 끊임없는 만남뿐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무지의 병을 치유하시어 날로 지혜로워지는 개안의 여정을 살아가게 하십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시편 27,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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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뵙고 싶은 욕망>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그날에는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
대림절이 시작되어 계속 그리고 많이 등장하는 인물이
다리 저는 이 말 못하는 이 눈먼 이입니다.
오늘 얘기도 눈먼 이들이 보게 되는 얘기인데
엉뚱하게 이들 가운데 누구의 고통이 더 클까 생각했습니다.
이들 가운데 보지 못하는 이의 고통이 더 크지 않을까 생각되었던 것인데 즉시 모든 고통은 자기의 고통이 제일 큰 법이니 그런 생각은 쓸데없는 생각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대신 생각의 방향을 돌려 일생 보지 못한 이들의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생 그렇게 살았으면 이제 적응이 됐을 텐데
계속 그대로 살지 굳이 주님께 찾아와 보게 해달라고 할까 생각도 했습니다.
사실 이들이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보고 싶은 열망도 없었을 것이고 그래서 계속 그렇게 살았을 것이며, 주님께서 이 세상에 내려오지도 자기 마을에 찾아오지도 않으셨다면 보게 해달라는 요청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이토록 보고 싶은 열망과 갈망을 불러일으키시는 분이시고, 볼 수 있다는 희망과 볼 수 있게 해주실 거라는 믿음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랬기에 일생 가지지 못했던 희망과 갈망과 열망을 갖게 되었고, 그것들이 자기 마을까지 찾아오신 주님을 찾아가게 했습니다.
이들에게서 우리는 오늘 주님을 뵙고 싶은 열망과 갈망을 배웁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또한 성무일도 독서의 기도 독서에서 ‘하느님을 뵙고자 하는 욕망’을 노래하는 안셀모 성인을 본받습니다.
“주여, 당신을 찾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어 찾는 이에게 당신을 보여주소서. 당신이 가르쳐 주지 않으신다면 당신을 찾을 수 없고 당신이 당신 자신을 보여주지
않으신다면 내가 당신을 찾아낼 수 없습니다. 내 당신을 갈망할 때 찾고, 찾을 때 갈망하며, 사랑할 때 찾아내고, 찾아낼 때 사랑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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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마태9,29ㄴ)
<내 눈을 뜨게 하소서!>
오늘 복음(마태9,27-31)은 '예수님께서 눈먼 두 사람을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눈먼 사람 둘이 따라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태9,27) 하고 외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예, 주님!" 하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이르십니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립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구상(세례자 요한) 시인의 '은총을 눈을 뜨니' 라는 제목의 시(詩)가 다시금 떠올랐습니다.
[이제사 비로소
두 이레 강아지 만큼
은총에 눈이 뜬다.
이제까지 시들하던 만물 만상이
저마다 신령한 빛을 뿜고
그렇게 안타까움과 슬픔이던
나고 죽고 그 덧없음이
모두가 영원의 한 모습일 뿐이다.
이제야 하늘이 새와 꽃만을
먹이고 입히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공으로 기르시고 살리심을
눈물로써 감사하노라.
아침이면 해가 동쪽에서 뜨고
저녁이면 해가 서쪽으로 지고
때를 넘기면 배가 고프기는
매한가지지만
출구가 없던 나의 의식(意識) 안에
무한한 시공이 열리며
모든 것이 새롭고
모든 것이 소중스럽고
모든 것이 아름답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예수님을 참되게 믿고, 그분 사랑 안에 머물면 일어나는 기적의 모습입니다. 돈으로도 이룰 수 없고, 세상의 그 어떠한 가치로 이룰 수 없는 기적을 노래하는 시(詩)입니다.
'내 눈을 뜨게 하소서!'
'내 영혼이 맑게 하소서!'
우리(나)보다 먼저 십자가의 길, 곧 부활의 길을 걸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 주님께 감사드리고, 어렵고 힘들 때마다, 수난과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떠올려 볼 수 있는 믿음이 되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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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마태 9, 28)
믿음으로
초대받는
대림의
특별한
시간입니다.
중요한
삶의 길목마다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믿음은
아픈 우리를
가장 좋은
소중함으로
초대합니다.
우리가 이미
지나왔던 길도
믿음의
길이었습니다.
앞으로
지나가야할 길도
믿음의 길입니다.
우리의
삶을 만들어
가는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시간입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 또한
하느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믿음이
믿음답게
빛나게
하는 것은
우리자신의
믿음입니다.
우리자신의
힘만으로는
다 이룰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일을
다 하실 수
있으십니다.
하느님과의
접촉은
믿음이며
믿음은
이 모든 것을
통해
당신의 현존을
영광스러운
변화의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자비를
믿고 믿음이신
하느님께
우리가
응답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삶은
끝까지
믿는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생명의 오늘을
살아가는
대림의
새로운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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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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