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naver.me/FdsQu0Ce
[김시아의 문화톡톡] 느림의 미학과 그림책
『달팽이, 세상을 더듬다』와 『알바트로스의 꿈』
느림의 미학
"내 이야기가 궁금하더라도 참고 기다려야 해요. 서두르다간 내 모습을 지나치고 말 테니."
주잉춘이 그리고 저우쭝웨이가 쓴 『달팽이, 세상을 더듬다』(펜타그램, 2012)를 펼치면 본문의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에 화자는 독자에게 천천히 페이지를 넘기라고 조언한다. 양면 페이지로 구성된 여백이 많은 그림에 모래 둔덕의 그림이 네 번이나 반복적으로 펼쳐져 있다. 거의 같은 그림에서 미세한 차이는 서서히 등장하는 달팽이의 모습이다. 그림 왼쪽 페이지의 가장 왼쪽 가장자리에서 독자는 성냥개비 같은 달팽이의 촉수 하나를 발견하고 오른쪽 페이지에 위의 문장을 발견한다. 네 페이지에 걸쳐 달팽이는 느리게 느리게 왼쪽 페이지에서 오른쪽 페이지로 진행하며 왼쪽 촉수를 드러낸 후 오른쪽 촉수를 드러내고, 살짝 몸을 드러낸 후 드디어 완전히 몸 전체를 드러낸다. 그러니 매일 “빨리빨리”를 외치고 속도전에서 이겨야 한다는 성공 신화를 듣고 사는 사람들은 이런 느린 리듬이 의외일 것이다. 달팽이처럼 작은 존재들이 가득한 이 그림책은 글자 또한 작아서 곤충들이 이야기하는 작은 소리를 듣는 듯하다. 작가는 많은 여백의 풍경 속에서 작은 곤충들의 세계에 귀 기울이도록 글자를 아주 작게 배치하고 편집했다. 세밀한 디테일과 작은 문장들을 보기 위해서 독자는 돋보기로 보듯 상체를 기울이고 그림책을 더욱 가까이에서 보게 된다.
주인공 달팽이의 여행을 쫓아 천천히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느림과 빠름) 너무 느려 행인의 발에 밟혀 죽은 동료 달팽이를 보고 빨라야겠구나 생각하고 말벌을 찾아갔으나 말벌의 현란한 비행술이 오히려 거미줄에 걸리게 하여 말벌을 죽음으로 이끈다.빠름도 답이 아닌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조력자였던 잠자리의 죽음과 더불어 수없이 죽어가는 작은 존재들을 만난다. 그 죽어가는 작은 존재들은 우리 인간의 모습과 다를바 없다. 어느 노동자의 죽음을 애도할 겨를도 없이 또 다른 노동자가 죽었다는 소식이 뉴스에서 들리고, 투병 중이던 시인의 죽음을 듣고 코로나 19로 매일 죽음이 카운팅 된다.
죽음의 연속: 달팽이의 죽음을 보는 달팽이
빠름과 느림의 대조
"내가 나 자신을 망쳐 놓은 꼴이라니 우린 툭하면 스스로를 적으로 만들곤 한다."(27쪽)
"사랑만이 힘을 불어넣어 준다는 걸 몸으로 느꼈다. 가슴속에 자리하던 죽음의 공포가 조금씩 사그라졌다."그러나 곧 위험
잠자리(조언자) "그가 물어뜯는 건 네 그림자야"(56- 57쪽)
잠자리가 달팽이에게: "사람들은 다들 계획 세우기를 좋아해 그러나 계획은 결코 변화를 따라갈 수 없다는 걸 몰라. 세상일은 원래 무상한거야 저 무상함과 맞서서 이길 순 없으니 이 순간을 소중히 간직하자고
"발걸음을 늦추자 내곁의 사물들에 깃든 아름다움이 새삼 하나하나 눈에 들어왔고, 자연스레 이런저런 생활의 즐거움이 뒤따라왔다
<결말>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지만,/ 참된 ‘사랑’만큼은 알게 되었다.
그건, 결딜 수 없이 외로울 때에도/ 여전히 세상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
아무것도 가진 게 없을 때라도/ 세상 만물을 한결같이 선한 마음으로 대하는 것." (118면)
평안함, 그게 바로 행복이지. 나는 계속 느릿느릿 길을 걸었다 마음 가는 대로,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저우쭝웨이,118-121면
삶을 향한 달팽이의 결론은 사랑이었다. 늘 집을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달팽이는 삶과 죽음, ‘영원회귀’를 동시에 상징하듯 작가는 보름달 앞에 비친 달팽이의 모습을 시적으로 보여준다. 북디자이너 주잉춘은 이 책을 완성하기 전에 달팽이를 기르며 관찰하는데 일 년, 수작업으로 채색 세밀화를 그리는데 일 년, 편집과 디자인 작업을 하는 데 일 년이 걸렸다고 한다. 발터 벤야민이 『일방 통행로』에서 말한 것처럼 느린 리듬의 음악적 단계, 건축적 단계, “잘 짜 맞추는 직물적 단계”를 거친 듯 책 한 권을 완성하는 데 삼 년이나 걸렸다. 자신의 작업을 사랑하지 않으면 못할 일이다. 주잉춘의 책만 그런 것이 아니다. 많은 그림책 작가들이 그림책을 만드는데 최소 1년에서 평균 2~3년은 걸린다. ‘모두를 위한 그림책’ 자체가 예술 작품이기에 그만큼 정성을 들이기 때문이다.
그림책을 향한 도전과 꿈
최근 그림책 『알바트로스의 꿈』(달그림, 2021)을 출간한 신유미 작가는 이 작품의 씨앗이 시작된 해가 2014년이라고 말했다. 책이 출간되기까지 8년이나 걸린 셈이다. 그의 인스타를 보니 “제발 마무리까지 하고 싶다. 끝내고 싶다”(@yoomi_shin, 2019. 8. 24)고 말한 소망은 꿈을 이루고자 했던 절규였던 것이다. 물론 그사이 그는 <너는 소리>(2018)도 출간했지만, 안견(1400?-?)의 「몽유도원도」(1447) 모티프와 캐릭터 ‘알바트로스’가 만나기까지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고 한다. 수없이 헤맨 끝에 작가는 조언자였던 편집자의 말에 귀 기울였다고 한다. 덕분에 캐릭터가 ‘새’로 바뀌는 순간, 신유미 작가의 그림책 출간을 향한 꿈은 가속도가 붙는다.
“권태는 경험의 알을 부화하는 꿈의 새이다.”(발터 벤야민) (「이야기꾼」, 1936)
삶의 지루함을 참아야 할 때 필자가 늘 마음에 넣고 사는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의 문장이다. 꿈을 향한 새, 알바트로스를 몽유도원에서 날수 있도록 한 신유미 작가는 『알바트로스의 꿈』에서 “어쩌면 새에게는 .... 시간이 필요했던 걸까요?”라는 문장을 그림책의 절정인 중간에 배치한다. 이 문장은 현실 세계와 무릉도원을 다리처럼 이어준다.
작가에게 고마운 마음이 드는 것은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재해석한 점이다. 현재 일본 델리 대학교 소장으로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힘든 작품을 『알바트로스의 꿈』 마지막 장면에서 네 면에 걸쳐 펼쳐 놓았다. 알바트로스가 날기 위해 날개를 펴듯 독자는 작가의 복사꽃 핀 ‘몽유도원’을 보기 위해 페이지를 오른쪽으로 활짝 펼쳐야 한다. 디스토피아 같은 세상에서 필자가 만나는 현실 속의 작은 유토피아는 이렇게 시적인 그림책을 만나는 것이다. 오래전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 1821-1867)의 시 「알바트로스」(L’Albatros)를 만났을 때 감흥은 적었다. 시를 읽고 확인한 것은 거대한 바다새를 괴롭히는 선원들의 잔인함이었다. 시인의 고통이었다. 하지만 신유미 작가의 『알바트로스의 꿈』은 친구를 만나 외롭지 않은 알바트로스를 보여준다. 매일 뉴스를 통해 확인되는 인간의 잔인한 운명과 비인간성에 상처 받는 독자들은 좋은 그림책을 펼쳤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