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왕계 저자-유학의 종장’이 불교 詩를?… “설총은 ‘유-불-도’ 三敎 융합사유한 학자”
안대회교수 ‘설총의 불교詩’ 재조명
“당대 주류적 문체 ‘변려문’을 화왕계-불상제조기록에 사용
삼국사기서 ‘유학자’로 축소해석”
유학의 종장으로 받들어져 온 설총의 초상화.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는 설총이 유학자라는 통념과 달리 불교, 도교까지 융합하는 사유를 했다고 강조했다. 동아일보DB
“진성(眞性) 밖까지 두루 통하였고/법신(法身) 속에서 공으로 비어 있네/사물에 접촉해도 본디 집착함이 없으니/소리 들려도 귀를 막으려 하지 않네.”
조선 후기 실학자 유득공(1748∼1807)의 ‘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에 수록된 ‘동시연기(東詩緣起)’에는 설총(655∼?)이 지었다는 5언시가 나온다. 1022년 문묘에 배향된 설총은 아버지 원효대사와 달리 유가적 사유를 펼친 유학의 종장으로 받들어져 왔다. 하지만 이 시는 연꽃처럼 소란한 환경, 온갖 욕망에도 마음의 고요함을 유지하는 경지를 강조하며 불교적 사유를 드러낸다.
설총이 통념과 달리 유학과 불교, 도교까지 융합하는 사유를 했던 학자라는 연구가 나왔다.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는 최근 학술지 ‘한문학보’ 제47집에 게재한 논문 ‘홍유후(弘儒侯) 설총 사상과 문학의 새로운 이해’에서 그간 학계에서 주목하지 않았던 설총의 한시와 불교적 시를 검토한 뒤 “설총을 유학자로만 이해하는 것은 폭넓은 학자였던 그의 정체성을 왜곡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논문에 따르면 학계에서 719년 설총이 지은 글로 보고 있는 경주 감산사 아미타상 조상기(造像記·불상을 만든 사연이나 유래에 대한 기록)에는 발원자의 삶을 요약한 부분에서 “무착(無着·승려의 이름)의 참된 선종을 우러러 사모하여 때때로 유가론(瑜伽論)을 읽었고, 장주(莊周)의 현묘한 도를 함께 사랑하여 날마다 소요유(逍遙遊)를 읽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안 교수는 “설총은 불교에 깊은 식견을 지닌 지식인이었으며, 이 문장에서는 유가와 불교와 도교까지, 삼교(三敎)를 모두 융합하고자 한 지향을 엿볼 수 있다”고 밝혔다.
안 교수는 논문에서 설총이 변려문(騈儷文·4언구와 6언구를 기본으로 대구만으로 문장을 구성하는 한문 문체) 문장가였다고 강조했다. 변려문은 당대 주류적 문체로 격식을 갖춰 써야 하는 정식 문장에 사용됐다.
감산사 아미타상 조상기는 ‘불교의 발생은 서역에서 시작되어/포교의 등불이 동방에 전해져 이르렀다’처럼 문장의 구조가 대구를 이룬다. 대구적 표현은 설총의 또 다른 문장이 남아 있는 ‘석조미륵보살입상’에도 드러나 있다. 설총이 신문왕(재위 681∼692)과 독대해 대화한 내용을 기록한 작품인 ‘화왕계(花王戒)’에도 변려문 문체가 사용됐다고 안 교수는 분석했다. 안 교수는 “설총은 당시 주류 문체인 변려문으로 불교의 행사나 승려의 삶을 다룬 글을 썼으리라 예상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설총을 유학자로만 인식하게 된 건 김부식(1075∼1151)이 유교적 통치이념을 굳건히 하려는 목적으로 편찬한 삼국사기에서 군주를 권계한 신하의 대표적 사례로 설총을 제시했기 때문이라는 게 안 교수의 설명이다. 안 교수는 “김부식은 유가의 의식에 부합한 인물로 설총을 부각했고, 그 핵심 작품으로 군주를 권계한 화왕계를 인용한 것”이라고 했다. 이로 인해 설총이 순수한 유학자로 부각되면서 학자로서 펼친 사유의 다양성이 축소 해석됐다는 것이다.
최훈진 기자